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 - 진화에 맞선 동물들의 유쾌한 반란
외르크 치틀라우 지음, 박규호 옮김, 루시아 오비 그림 / 뜨인돌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흥미로운 책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화=진보’의 도식이 틀렸음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오히려 진화가 ‘진보’가 아닌 ‘다양성’을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저자는 소제목으로 붙여 놓은 것처럼 ‘진화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진보라는 진화의 방향’에 맞서서 그것을 수정하려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창조론자의 입장에서는 ‘진화의 방향’보다는, 처음부터 부여된 ‘종(種)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책이 내용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고, 그와 관련하여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자연에 오류란 없다. 오직 너희에게 있을 뿐.(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만능천재가 보기에 자연의 삼라만상은 지극히 완벽해서 어디가 잘못됐다고 의심할 만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의심은 그 원인이 객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있어야 했다. 바꿔 말해 자연에서 어떤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자연 탓이 아니라 우리의 엉성한 인식기관 탓인 것이었다.”(9) - 그럴듯한 주장... 늘 ‘자연’에 문제가 있고, ‘우리(인간)’은 정확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反)하는 ‘발상의 전환’!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 된 것(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신선하다!

2. “환경에 적응한 돌연변이 개체들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자신의 변화를 물려준다. 이런 변화는 세대를 거쳐 계속되며,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끝까지 살아남은 강력한 돌연변이는 결국 새로운 종으로 바뀐다. ‘적자생존’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원칙은 그러나 온갖 오해의 산실이 되고 만다.”(10) - 과연 ‘돌연변이’가 유전되는가? 이것은 그저 하나의 ‘가설’일 뿐, 증명된 바는 없다. 오히려 돌연변이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가설’은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 “특히 심각한 오해는 진화하면서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다. 소위 진화의 법칙은 권력욕과 폭력을 강자의 권리로서 포장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어차피 곧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패배자들이 이별가쯤으로 축소, 왜곡시키는 방편으로 되풀이해 인간사회에 적용한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은 진화와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많은 면에서 그 반대다. 만약 인류가 오로지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면 도덕, 철학, 미술, 음악, 종교처럼 비자연적이고 바이오네거티브적인 현상은 물론이고 의료보험 같은 사회제도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11) - 이것이 저자의 기본 전제이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조금 삐딱해 보이기는 하지만, 진화에 대한 ‘맹신’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4. “다윈의 이론을 진보 개념으로 보는 시각 역시 대표적인 오해에 속한다. 그에 따르면 생명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점차적으로 단세포에서 다세포를 거쳐 식물로, 동물로 그리고 인간으로 꾸준히 상승, 발전했다고 한다. 인간은 진화의 절정, 즉 지구상에 출현한 모든 것들 중 최고의 위치에 선다. 신의 창조행위 자체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을 ‘창조의 절정’으로 보는 특권적 가설이 슬그머니 들어앉은 형국이다. 이 구도에는 허영심이 작용한 게 분명하며 사실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열등한 존재다. 약하고 느리고 다치기 쉬우며, 다른 동물에 비해 잘 듣지도 모지도 못하고 냄새도 잘 못 맡는다. 인간이 유일하게 나은 점은 두뇌의 성능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진화에 유리할까/ ‘두뇌 실험’이 지금까지는 제대로 작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본격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수천 년에 불과하다. 이것은 진화의 나머지 기간과 비교해볼 때 일생에서 단 몇 초 정도에 불과한 시간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이 변화를 보면 인간과 인간의 뇌는 스스로는 물론 지구 전체까지 파멸로 끌고 갈 수도 있는 괴이한 파괴 충동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절대로 진보가 아니며 오히려 면도날 위에서 스스로의 파멸을 희롱하며 춤추는, 진화의 위태로운 유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12) - 진화의 기본 방향으로서의 ‘진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인간을 독특한 존재로 규정 지워주는 ‘두뇌’ 역시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며 오히려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것이 진화가 인간에게 저지를 ‘고급 오류’라고 말하며(14p), 그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에게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사실상 이 책은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고급 오류’의 목록이다.

5. “따라서 우리는 진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진화가 ‘무자비한 생존투쟁의 장’이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그보다는 여러 면에서 진화를 누군가가 지구상에 마련해놓은 현란한 게임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지화생물학자들은 이제 선택이론보다 게임이론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는다’라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의 생물학 교수 볼프강 비저는 설명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가장 잘 적응한 개체, 즉 적자만이 살아남는 게 아니며, 전혀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그저 게이머로서 진화에 ‘참가’하고 있는 생물들도 많다는 걸 알고 있다.”(14) - ‘게임 이론’은 처음 듣는 내용이다. 이런 것도 있구나! ‘선택 이론’과 ‘게임 이론’... 그런데 ‘게임 이론’이 더 우세해지고 있다고? 게임이라...

6. “말레이시아의 우림에는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라는 종의 개미가 있다. 다른 종의 개미들은 홍수가 나면 뗏목을 만들거나 배수로를 트거나 모래주머니 비슷한 것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는 식으로 대처한다. 아니면 아예 보따리를 싸서 집을 옮긴다. 하지만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 개미의 홍수 대책은 이와 사뭇 다르다.

물이 들어차기 시작하자 개미들은 먼저 자신들의 널찍하고 평평한 머리를 사용해 입구를 막아보려 애썼다. 잠시 후 몇몇 개미들은 전략을 바꿔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기를 15분쯤 지나자 몇 마리의 ‘폭음증’ 개미들이 대나무집 밖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대나무집 입구에서 몇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다 오줌을 쌌다. 이렇게 배설한 물의 양은 마리당 평균 0.66마이크로리터 정도였다. 지름이 0.8밀리리터도 체 안 되는 아주 적은 양으로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카타울라쿠스 종은 한 집단에 2천 마리 정도의 개미가 함께 살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셋째 날에 그들은 집에 들어찬 물을 다 빼냈다.’

하지만 이것이 효과적인 전략인지는 의문이다. 배수로를 트거나 제방을 쌓거나 뗏목을 만드는 등의 조치가 훨씬 더 효율적임은 물론이다. 그러니 익사하는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 개미들이 다른 종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도 이 개미들은 멸종위기를 맞지 않는다. 엄청난 번식률 덕이다. 즉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 개미가 이제껏 살아남은 것은 그들의 번식능력 덕택이지 잘 퍼마셔서 그런 게 아니다.”(19~) - 베르베르의 [개미], 혹은 그의 [~백과사전]의 한 대목을 보는 기분이다. 미련하게 구는데도 멸종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미련함 때문이 아니라, 왕성한 번식률 때문이다. 이 개미들은 적자가 아니다.

7. “가터얼룩뱀이 즐겨먹는 동물 중에 도룡뇽의 일종인 캘리포니아영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녀석에게는 테트로도톡신이라는 신경독이 있다. 테트로도톡신은 복어에 있는 독인데 함부로 먹었다가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영원은 복어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테트로도톡신을 체내에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맹독성 동물로 분류된다. 가터얼룩뱀은 하필이면 이런 위험한 녀석을 즐겨먹는 것이다. 물론 식사 중에 비명횡사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진화과정에서 먹잇감의 독에 대한 저항력을 어느 정도 기르기는 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어느 정도’라는 표현이다. 캘리포니아영원의 독으로 죽지는 않지만 식사 후 가터얼룩뱀의 행동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난다. 뱀은 동작이 엄청나게 느려져서 마치 TV의 느린 화면으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우스운 광경일 수도 있겠지만 새들의 손쉬운 공격대상이 된다는 점에서는 심각하다 할 수 있겠다.

가터얼룩뱀은 왜 독이 든 캘리포니아영원을 식단에 굳이 포함시켰을까? 어쩌면 이 역시 앞에서 언급한 진화의 ‘유쾌한 궤도이탈’이 아닐는지. 얕은 바다에서 편하게 청어 떼를 잡아먹으며 살아도 충분한데 굳이 심해로 들어가 대왕오징어와 사투를 벌이는 향유고래와 마찬가지로, 가터얼룩뱀도 쉽게 포획할 수 있고 위험하지 않은 먹잇감들이 주위에 널렸는데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영원과의 한판을 피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무의미한데다가 위험천만이지만 바로 그 점이 이 녀석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위험한 모험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 인간이 제일 잘 알 터!”(26~) - 뱀의 모험 정신...

8. “뒤영벌은 날개에 비해 몸집이 너무 커서 날아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인 곤충이다. 나는 동물은 이동을 위한 에너지 소비의 방식과 관련해서 다른 생물들보다 시간 계산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뒤영벌은 이런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단물이 풍부한 곳에 도착하면 이 곤충은 한 화초에서 대개 열 개 정도의 꽃봉오리를 돌아다니며 꿀을 모으며, 다른 화초로 이동할 때도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별로 영양가가 없는 지역에 갔을 때는 두 개 정도의 꽃봉오리를 뒤지고 난 다음에 곧바로 좀 더 풍요로운 곳을 찾아 멀리까지 이동한다.

때때로 뒤영벌은 치명적인 계산 실수를 저지른다. 몇 년 전에 독일 생물학자들은 뒤영벌들이 보리수나무 밑에서 자주 떼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팀의 눈에 띄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죽은 벌의 몸속에 비축돼 있어야 할 에너지원이 대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평소 뒤영벌의 체내에는 17마이크로몰의 당분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보리수나무 밑에서 수집한 표본들의 수치는 7마이크로몰 정도에 불과했다. 이것은 목숨을 지탱하기에도 힘든 양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 곤충들은 굶어죽은 것이다.

보리수 꽃은 원래 한 송이당 0/7밀리그램의 비교적 많은 단물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보리수는 늦게 개화하는 나무여서 7월이 돼야 꽃이 만발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 나무의 새 고향인 도심공원에는 이 시기에 곤충들에게 이만큼 풍성한 단물을 제공해주는 꽃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변의 온갖 곤충들이 다 이 나무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꿀벌 등 에너지소비가 적은 다른 곤충들은 여기서도 충분한 양분을 얻을 수 있었지만 뚱뚱한 뒤영벌은 그렇지가 못해서 보리수나무 밑에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34~) - 지혜로운 곤충의 어리석음...

9. “코알라의 특징은 오로지 유칼리나무 잎사귀만 먹는다는 독특한 식습관이다. 그것도 아무 유칼리나무나 좋아하는 게 아니다. 약 700종에 이르는 유칼리나무 종류 중에서 이 동물의 식단에 오르는 것은 몇 안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겨우 두세 종의 나무만 선택 받는데 그것도 일정 정도 이상으로 자란 것만을 먹는다. 그야말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입맛이다.

유칼리나무 잎의 질긴 섬유질은 코알라의 맹장을 굉장히 비대하게 발달시켰다. 다 자란 코알라의 몸의 크기가 고작 80센티미터 정도이지만 맹장은 그보다 세 배나 s더 길다. 코알라의 맹장 내부에는 수십억 마리의 미생물들이 서식하는데, 이들의 유일한 활동은 소화기에서 넘어온 유칼리나무 잎의 섬유질을 최대한 잘게 분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코알라는 영양가가 별로 높지 않는 유칼리나무 잎에서 최대한 많은 열량을 확보한다. 양분의 일부는 길게는 한 달이 넘도록 맹장 안에 머물면서 장내의 미생물들에게 충분한 일거리를 제공한다.

코알라는 이 미세한 소화 도우미들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먹는 ‘별식’ 덕택에 얻게 되는데, 그 별식이란 다른 아닌 어미의 특수한 배설물이다. 새끼가 주둥이나 앞발로 어미의 항문을 자극하면 나온다. 그냥 똥과 달리 이것에는 미생물과 수분이 매우 풍부하다. 그러니까 아기코알라를 위한 유산균 요구르트인 셈이다. 이렇게 특수 요구르트를 먹어서 미생물들을 장내에 확보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코알라는 유칼리나무 잎을 유일한 양식으로 삼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코알라는 지나친 편식과 운동부족 탓에(코알라는 모든 종류의 운동과 심지어는 섹스까지도 귀찮아한다) 질병에 몹시 취약하다. 성병, 전염병, 방광염, 호흡기질환, 충치, 설사, 변비, 위장병, 암, 건조증, 근육위축증 등등 코알라의 몸은 질병백과사전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허약한 동물이 여태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37~) - 생긴 것만이 아니라 여러 모로 신기한 동물...

10. “스트레스가 우리 인간에게 특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신속하게 해소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상사와의 갈등이나 파트너와의 다툼으로 생긴 화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동물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개들이 불과 몇 분 전에 제 동료로부터 심한 타박을 받은 참인데도 으르렁 소리까지 내가며 맛있게 밥그릇을 비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마음을 풀고 평정심을 되찾는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달콤한 낮잠도 빼먹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이라면 수면제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가능할 만큼 깊은 잠에 떨어진다.”(51) - 그래서 사람일까?...

11. “하지만 동물들이 다 그렇다고 섣부르게 단정 짓지는 말자. 특히 사회생활이 잘 발달된 동물들은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개중에는 스트레스에 대단히 예민한 놈들도 있다. 튜파이가 바로 그렇다. 튜파이는 크기가 다람쥐만하다.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의 생물학자 프랑크 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튜파이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 동물은 모든 종류의 정신적 자극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좀처럼 쉽게 회복되지 못한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한다. 이것은 스트레스 연구의 대상으로 매우 이상적이다.

게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울은 논문에서 튜파이가 몇 번이고 혈액을 채취해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다른 자극에는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피를 뽑을 때만은 예외적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보통 동물들은 무언가에 찔릴 때 굉장한 위협을 느낀다. 그런데 튜파이는 다른 모든 자극에는 예민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바늘로 찌를 때는 그렇지 않았다. 경험 많은 실험쥐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하니 진화과정에서 튜파이j에게 어떤 특별한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밖에도 스트레스 반응을 금방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스트레스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이다. 튜파이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꼬리털이 곤두서는데, 스트레스의 강도가 심할수록 더욱 빳빳해진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실제로 튜파이의 ‘꼬리털이 곤두선 정도’를 측정해 스트레스의 강도를 판단하는 데이터로 활용한다.

그러면 튜파이의 꼬리를 곤두서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도 이 동물은 매우 특이한 면모를 보인다. 가령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마리의 수컷이 싸워 강자가 약자를 이겼을 경우 패한 녀석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패자가 그 후로 승자의 존재를 더는 견뎌내지 못한다는 면에서 유별나다. 패자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바닥을 기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진다. 유일한 구원은 승자를 그 녀석의 곁에서 떨어뜨려 놓는 것뿐이다.

짝짓기에서도 튜파이는 매우 특이한 행동방식을 보인다. 튜파이는 일부일처를 고수하는 몇 안 되는 동물들 중 하나다. 배우자 선택에는 냄새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두 동물 사이에 관계가 발생하려면 좋은 냄새를 풍겨야 한다. 처음 마주쳤을 때 대부분은 해피엔드로 끝나며, 둘은 화목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튜파이의 냄새 취향을 무시하고 작위적으로 두 마리를 결합시키면 이들의 관계는 자주 파경으로 치닫는다. 이렇게 불행한 튜파이 부부는 강력한 스트레스 징후를 보인다. 즉 잘 먹지도 않거니와 먹을 때도 함께 자리하는 법이 없이 한 쪽이 잠들었을 때만 다른 쪽이 입에 음식을 댄다. 행복한 튜파이 부부를 따로 떼어 놓으면 그들은 곧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꼬리털이 곤두서고, 모습을 감추고 잘 먹으려 들지도 않으며,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게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있는 듯이 보인다.

‘냄새를 통한 배우자 선택’이라는 것이 가장 우수한 상대를 고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강력한 후손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말이다. 이야기가 너무 딱딱하고 계산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진화 자체가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걸 어쩌겠는가. 아니면, 혹시 진화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작용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진화는 슬픔이나 지조, 패배로 인한 죽음 같은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사치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튜파이 같은 동물에게 너무 성급하게 로맨스를 부여해서도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이 녀석들은 전혀 다른 행동도 하기 때문이다. 화목하게 생활하는 튜파이 부부도 주변에 자식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정한 수가 넘으면 그들은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다. 수컷이 그럴 때도 있고 암컷이 그럴 때도 있는데, 이들 튜파이 부모에게서는 자식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슬픔도 찾아볼 수 없다.”(52~) - 사람과 너무 닮은...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섬뜩하다. 한 편의 괴기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

12. “알바트로스는 두말할 나위 없이 비행의 달인이자 창공의 지배자다. 그러나 이 새가 이륙하는 장면이나 착지할 때의 모습은 완벽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알바트로스의 무거운 몸(12kg)이 땅에서 떠오르려면 최소한 시속 12Km 이상의 맞바람이 필요하다.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알바트로스는 육지를 떠날 수가 없는데, 이는 규칙적으로 먹이를 공급받아야 하는 새끼 알바트로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알바트로스는 바람이 언제 필요한 속도에 도달하는지 미리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새는 헛된 이륙시도를 계속해서 되풀이해야 하는데, 이때 시간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낭비된다.

바람 속도가 적정 수준에 도달했다고 해서 알바트로스의 이륙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거대하고 무거운 날개를 움직여야 하는 이 새는 멀리뛰기 선수처럼 잘 닦인 몇 미터 이상의 도움닫기 구간을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야 한다. 숏다리에다 발에 물갈퀴까지 달린 알바트로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순간적인 에너지 소모도 엄청나다. 평상시 알바트로스의 심장은 인간의 그것과 비슷한 속도로 고동치지만, 이륙 때는 분단 230번까지 박동수가 치솟는다. 만약 우리가 운동스트레스 테스트에서 이 정도의 심박동수를 보인다면, 의사는 곧바로 테스트를 멈추고 우리를 침대에 뉘일 것이다. 그 정도의 심장 부담은 알바트로스에게도 심각하다. 이륙한 뒤 알바트로스s의 심장이 다시 안정되기까지는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하늘로 막 날아오른 알바트로스의 비행 모습이 여유롭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심장이 터져버리기 직전의 심장병 환자나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반대로 착륙할 때의 알바트로스에게는 정형외과 의사가 필요하다. 이 새의 날개가 대단히 크기는 하나 착륙할 때 브레이크 기능을 하기에는 적합한 구조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공기저항을 높이기 위해 물갈퀴가 달린 발을 곧추세워 앞으로 뻗어보지만, 거대한 몸집을 착륙에 알맞게 멈춰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조하다. 그래서 알바트로스의 착륙은 의도하지 않은 텀블링으로 끝맺기 일쑤다. 아니면 추락사고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날개가 꺾이거나 심지어 목이 부러지는 일도 발생한다. 알바트로스가 우아한 비행을 선보이기 위해 얼마나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64~) - 슬픈 알바트로스...

13. “아리스토엘레스는 하이에나에게 혹평을 퍼부었다. 썩은 고기나 먹으며 음흉하게 미소 짓는 음험하고 비겁한 동물이라고 비난했고 성도 제멋대로 바꾼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미지는 그 후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하이에나를 ‘시체를 도둑질하는 헤르마프로디테(암수한몸의 괴물)’이라고 불렀다.

하이에나는 암컷의 몸집이 수컷보다 훨씬 더 크다. 하이에나 무리는 모든 것을 암컷들이 통제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리 전체가 여성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리의 우두머리 암컷이 보이는 생리적 특징은 여성적인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 동물의 혈액 속에는 다량의 안드로스텐디온이 있는데, 이 호르몬은 자궁 안에서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으로 바뀐다. 그래서 하이에나 암컷이 임신을 하면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수컷의 수준으로 높아지게 된다. 하이에나 암컷은 안드로스텐디온을 더욱 여성스럽게 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수컷처럼 강하고 공격적으로 변하기 위해서 테스토스테론을 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포유류의 경우 암컷의 안드로스텐디온이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으로 바뀌는 것을 감안해보면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하이에나 암컷은 행동만 수컷처럼 바뀌는 게 아니라 일차 성기관에도 큰 변화를 겪는다. 암컷의 음순은 음낭처럼 부풀어 오르고, 클리토리스는 페니스처럼 형태가 변한다. “길이가 15cm나 되는 이 기관으로 하이에나 암컷은 오줌을 누고,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는다”고 하이에나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미국인 연구자 스티븐 글릭먼은 설명한다. 진화가 무슨 생각에서 그런 ‘복합기’를 발달시켰는지는 수수께끼다. 아무튼 그 때문에 암컷들은 호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출산은, 특히 초산인 경우, 대단히 고통스러운 과정이 된다”고 글릭먼은 말한다. 페니스 모양으로 바뀐 탓에 하이에나 암컷의 산도는 다른 포유동물보다 훨씬 비좁아지고 길이도 두 배나 더 길어진다. 그래서 새끼를 낳는 데 최고 열두 시간까지 걸리고, 그렇게 힘들게 난 새끼들은 절반 이상이 죽은 채로 세상에 나온다. 게다가 출산 중인 어미는 그 긴 시간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하이에나 암컷의 사망원인 1위가 출산 중에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성공적인 번식전략이라고 말하기 힘들다.”(88~) - 기이한 동물... 뒤이어 나오는 새끼 물개를 잡아서 뇌만 파먹고 버린다는 ‘해변의 늑대’ 이야기는 하이에나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강하게 심어준다. --; 한편,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만 먹는다거나, 남이 먹고 남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하이에나가 잡은 먹이를 사자가 빼앗는 경우가 다수이다.

14. “개체수가 여섯에서 열두 마리 정도 되는 꼬리치레의 무리 근처에 뱀이 출현하면, 적을 제일 먼저 본 새는 괴성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공포에 질린 것도 아닌 특이한 울음소리를 낸다. 그러면서 어색한 날갯짓을 하며 뱀 주변을 상당히 가까이 맴돈다. 자칫하면 붙잡힐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인데 말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동물학자들은 이 무모한 행동의 의미를 새가 뱀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켜 무리를 도망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행동연구가 로니 오스트라이어는 그와 같은 상상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꼬리치레가 혼자 있을 때도 뱀 주위에서 위태로운 춤을 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로써 꼬리치레는 영웅의 월계관을 벗어야 했다. 하지만 이 새가 왜 빨리 도망치지 않고 적의 주변을 맴도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꼬리치레는 사회관계에서도 매우 특이한 행동을 보인다. 이스라엘의 부부 과학자인 자하비 부부는 꼬리치레들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뽑는 독득한 방식에 주목했다. 이 새들은 가장 목소리 크고 힘세고 용감하고 짝짓기 욕구가 왕성한 구성원을 우두머리로 선택하는 대신, 가장 친절하고 자기희생적인 동료를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사해 연안에서 자하비 부부는 심지어 다리를 다친 늙은 새가 무리를 이끄는 새떼도 발견했다. 중증장애 우두머리인 셈이다. 다른 수컷들이 이 늙은 우두머리를 사막으로 내쫓아버리고 그의 어여쁜 아내를 제 손에 넣기란 식은 죽 먹이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집단에서 불구자는 버림을 받는다. 게다가 누구를 먹이고 누구를 버릴 것인가를 세 번 이상 고민해야 하는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꼬리치레는 늙고 병약한 새를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리의 우두머리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꼬리치레들은 불구자 우두머리의 지도하에 다른 새떼들과 전쟁도 했다. 물론 우두머리에게서 대단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새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걸까? 단순히 자연의 즉흥적인 결정인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사회적 실험? 아니면 새들은 늙은이의 지혜와 경험을 원하는 걸까? 만약 그러다면 그 새들의 지적 능력은 노인들을 일찌감치 일선에서 은퇴시켜 양로원으로 보내는 우리 인간보다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새들이 그럴 리가? 아닌가?”(96~) - 그럴 리가?... ^^;;

15. “심해 물고기들은 근육, 아가미, 심장이 약하고 골밀도가 낮다. 비늘과 부레가 없는 경우도 있고 눈도 매우 작다. 이들의 성장은 마치 느린 TV 화면처럼 더디게 진행된다. 생식능력을 갖추는 데 심지어 20년이나 걸리는 어종도 있다. 대신 이들의 수명은 종종 100년을 넘기도 한다. 물론 광활한 어둠 속에서 적당한 짝짓기 파트너를 찾으려면 이 정도 시간은 필요하다.

90년대 중반, 원격으로 조종되는 심해잠수정 앨빈은 귀중한 영상 자료를 싣고 태평양 탐사여행에도 돌아왔다. 앨빈이 바닷속 2천5백 미터 깊이에서 촬영한 영상은 문어들이 출연하는 외설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약 16분 가량의 이 필름은 사랑을 나누는 두 마리의 문어를 보여주고 있는데, 서로 휘감고 있는 문어들 중에서 작은 놈이 큰 놈의 몸속에 교접완(짝짓기용 다리)을 삽입하는 장면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영상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에서 두 놈 다 수컷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자연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더구나 심해의 사정이 스페인 마요르카 휴양지의 디스코 클럽과는 완전히 딴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형편에 맞춰 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까. 설령 동성간이라도 말이다. 게다가 과학자들의 계속된 관찰결과 또 다른 사실이 밝혀졌다. 사랑을 나누는 두 문어는 같은 종이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고릴라가 오랑우탄에게 수작을 거는 셈이라고나 할까? 동물이 명백히 부적절한 행동을 하기까지는 오랜 기간 견뎌야 했을 처절한 고독이 그 배후에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둠의 제국에서 벌어진 일이니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외도하다 들킨 남편도 이런 말을 했다지 않는가. ‘여보, 너무 어두워서 당신인 줄 알았어!’”(139) - 심해처럼 어두운...

16.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한 연구팀은 장장 25년간 초파리를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초파리에게 여러 자질을 부여했다. 이 연구팀은 예를 들어 고령에 가임능력이 상승하거나 먹이부족에 잘 견디는 유전형질을 갖고 있는 초파리를 말들어내기도 했다. 이 형질은 특수하게 마련된 ‘사육 오아시스’ 안에서 초파리의 유전자에 확실히 뿌리내리도록 약 100세대를 거친 다음, 차후 50세대 동안 사육환경이 아닌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도록 방출됐다. 그러자 자연환경에서는 사육된 형질이 대부분 사라졌다. 개중에는 20세대 만에 사라진 형질도 있었다. 물론 자연 상태의 생존조건에서는 이런 형질이 필요 없기 때문에 사라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령의 가임능력이나 먹이부족을 견대는 생존능력 등은 자연 상태에서도 바람직한 자질이다.

초파리 유전형질의 불안정성은 그러나 전혀 다른 면을 시사한다. 이 실험을 통해서 우리는 진화가 ‘진보가 아닌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러 형질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그때마다 그 이유를 합당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자연은 무의미한 일들(분홍색 눈동자 등)을 발생시키고 또 유지시키는 반면, 의미 있는 일들(고령의 가임능력)은 사라지게 한다. 결국 진화과정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것은 품질이 아니라 다양성이다.”(142)

17. “현재 독일에서는 네 명당 한 사람 꼴로 제왕절개를 한다. 또 세 명 중 한 명은 경막외마취를 통해 무통분만을 한다. 이것은 진화의 난관을 뚫으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산통을 피하려는 시도임이 분명하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전문잡지 [헤밤메(산파라는 뜻)]의 공동발행인 울리케 하르더는 편안한 무통분만이 여성을 ‘분만을 당하는 수동적 역할로 몰아가고 산모아 아기에게 대단히 중요한 경험을 놓치게 한다’고 비판한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탄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기 입장에서도 절개를 통해 세상에 나올 경우 결정적인 체험을 할 수 없게 된다. 아기는 자신의 출생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어머니 배 속에서 어느 순간 무척 거친 방식으로 끄집어내진다. 심리분석가들은 이러한 충격적인 경험이 당사자의 영혼에 깊이 각인된다고 확신한다.

의학적 견지에서도 출산과정을 제왕절개를 통해 단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제왕절개가 혈전증, 폐전색증, 창상감염, 염증 등의 위험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이미 입증됐으며, 산모의 사망률도 자연분만보다 세 배까지 높다. 또한 과거에 제왕절개 경험이 있는 산모는 나중에 임신을 해도 자궁파열등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자연분만도 불가능하다. 신생아의 경우 자연분만 때 흔히 나타나는 산소부족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겠지만 대신 폐에 양수가 차서 분만 후에 호흡곤란을 겪을 수 있다.

진통도 단순한 통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산모의 몸에 중요한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한다. 산통은 산모를 억지로 움직이도록 유도해 산모의 자세나 태아의 누워 있는 위치가 잘못됐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로부터 산모와 태아를 보호해준다. 게다가 산모의 몸이 통증을 느끼면 엔도르핀이 많이 분비된다. 엔도르핀 분비는 임신 10주부터 늘어나다가 진통이 시작되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호르몬은 두려움과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또 분만 후 산모의 기분을 좋은 상태로 유지되도록 도와준다. 반면 진통제는 엔도르핀 분비를 억제하고 산모의 기분도 바닥으로 끌어내려, 출산 후 산모의 상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착륙’하는 결과를 초개하기도 한다. 호주 뉴캐슬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진통제를 먹은 산모는 분만 후에 평균 이상의 강한 우울증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자연분만 때 핵심적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호르몬이 옥시토신이다.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낄 때 분비되는 이 호르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타인과의 친밀감을 형성해주는 것이다. 자연분만 직후에 이 호르몬이 대량 분비돼 산모는 아기에게 즉각적으로 강한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 반면 제왕절개로 분만을 마친 산모는 이 효과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기에 대해 친밀감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

옥시토신의 또 다른 효과는 부분적 기억상실이다. 이 호르몬은 산모가 출산 중에 겪었던 힘든 고통을 어느 정도 잊도록 해준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출산 후 몇 주만 지나면 다시 아기를 갖는 것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수유를 하는 경우, 이 망각 효과는 약간의 문제를 낳기도 한다. 수유를 하는 산모들은 출산 후 건망증이 심해졌다는 호소를 곧잘 한다. 물론 잠이 부족해서일 때가 많지만, 수유 중 분비되는 옥시토신의 영향도 있다. 그래서 조산사들은 ‘수유기 치매’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163~)

18. “남성의 경우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 공격성, 식욕감퇴의 세 가지로 반응하는데 반해, 여성의 신체에서는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중 하나가 식욕증진이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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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오세용 지음 / 드림북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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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보다는 못했다.

전체가 4부로 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럴 듯 하다! ‘리더십 이론은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 리더가 된다는 것은 과연 성경적인 생각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2부로 넘어가면, 온통 한홍 목사의 책에 나온 실수와 오류들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런 오류들에 비추어 볼 때 리더십에 대한 내용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3부는 맥스웰과 다른 몇몇 사람들의 책들을 비판한다. 일반적인 리더십에 대한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2부에 비하면 좀 나아졌다 싶지만 역시 마음에 차지는 않는다.

마지막 4부는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기대했던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이었는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마음에 차지는 않는다. 빈약하다. 그리고 중간 중간 나오는 저자 특유의 ‘비꼬기’! (저자의 이런 식의 비꼬기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비꼬기에서 시작해서 비꼬기로 끝난다는 느낌!) 솔직히 추천인의 말처럼 ‘고품격 비판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보고자 했던 것은 지엽적인 문제도, 비꼬기도 아니다. 정말 ‘영적 리더십’이 성경적인 개념이 맞느냐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원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의외로 너무 간략하게 끝나버린다. 허무하다는 느낌.

2부와 3부는 그리 권하고 싶지는 않고, 1부와 4부 정도는 ‘과연 그러한가...’ 하여 읽어봄 직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의 결론: 인간 리더를 전혀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영적 리더십 이론은 지나치게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은 선생 되지 말라고(정확히는 야고보의 말이다), 지도자라 불리우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영적 리더십이란 과목을 들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내용은 분명 성경적인 리더십이어야 하는데, 성경적이라는 말은 겉껍질뿐이고 그 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세상에서 배웠던 리더십이었다. 행정학과 경영학에서 배웠던 복잡한 리더십 이론들이 신학 책에서는 마치 교회를 새롭게 만드는 이론인양 포장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인간의 조직을 관리하기 위하여 쓰이던 이론들이 어느새 교회에서 영적인 면을 관장하는 도구로 둔갑되어 나타난 것이다.”(21) -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옥성호 집사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서문을 다시 보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신학만 공부한 이들이나 일반 성도들에게는 리더십이나, 심리학, 엔터테인먼트 등이 교회 안에서 ‘영적’이라는 단서가 붙여져 가르쳐질 때에 그것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경영학이나 행정 등을 배운 사람들이 이러한 부분을 더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일반적인 행정학과 경영학, 또는 일반적인 리더십을 꼭 나쁘다고, 또는 비성경적이라고 몰아붙이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세속적인, 그리고 비성경적인 행정학 경영학 리더십 이론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일반 학문이라고 해서 꼭 그것이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기에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어디에 기초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발견되는 비성경적이거나 반성경적인 것들을 걸러내거나 고치면 되는 것이 아닐까?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도 잘못이지만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잘못된 태도이다.

2. “그래서 이런 진단이 가능해진다. ‘영적 리더십을 설명하면서 일반적인 리더십의 모형을 먼저 제시하고, 그에 대하여 단순하게 성경적 해석을 덧붙이고 영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영적 리더십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듭니다(김광건).’ 분명한 것은 그러한 세속적인 리더십은 예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리더십을 빌려오게 된다면 영적 리더십이 세속화될 뿐만 아니라 결국 예수님의 ‘종이 되어 오셔서 섬김’을 ‘리더십’이란 미명하에 훼손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성경적인 리더십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사람을 리드하여 조직을 융성하게 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하며, 섬기는 리더십이다. 그 리더십은 사람을 리드하지 않는다. 다만 섬길 뿐이다. 진정한 ‘섬김’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아니라 서번트십(servant-ship)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22) - 일반 리더십을 꼭 ‘세속적’이라고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과학적 진리는 세속적 진리이고 과학 기술은 세속적 기술일까? 교회 건축을 한다고 할 때에 꼭 성경적인 건축학 이론이 따로 있어야 하는 걸까? 강연장의 음향 시설과 예배당의 음향 시설은 전적으로 다른 체계와 기술들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저자에게서는 다분히 ‘일반 리더십=세속적 리더십’이라는 기본 전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경적 리더십’, ‘영적 리더십’을 구성하는 부분에 있어서 반드시 ‘성경 구절’에만 근거해야 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편협하다. 일반 리더십을 아무런 평가나 분별없이 무조건 도입하고, 거기에 성경 구절로 옷을 입혀서 ‘영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절대 사절이다. 하지만 성경주의(Biblicism)처럼 모든 것을 성경에서만 뽑아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쉽사리 수긍할 수 없다. 성경적인 기준을 분명히 잡고서 바르게 분별하고 바르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3. “영적 리더십이 ‘영적’이지 않은 이유는 영적 리더십 이론이 빌려 쓰고 있는 리더십 이론의 한계로 인해 태생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일반 리더십 이론은 사람을 보는 눈이 성경과 다르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문제의 해답을 사람에게서 찾는 이론이다.”(24)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영적 리더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리더십을 그대로 가져와 ‘영적’이라는 ‘레떼르’만 붙인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사양하고 싶다. 게다가 일반 리더십 이론이(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성경의 시각과는 다르거나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저자가 그 중요한 차이점으로 해답을 사람에게서 찾느냐 하나님에게서 찾느냐는 것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 리더십과 영적 리더십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4. “요셉은 주도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될 수 있다’고 결의하며 열심히 일햇다. 그 결과 그는 얼마 안 가서 보디발의 가사를 돌보는 관리자가 되었다...”(27) - 저자는 요셉에 대한 스티븐 코비의 해석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비판한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근거를 온전히 요셉 자신의 주도적인 노력과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태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요셉이 ‘긍정적, 적극적, 주도적’이 아니라 ‘부정적, 소극적, 추종적’일 뿐이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정말 저자의 지적처럼 ‘하나님’이 빠져 있다!

5. “일반 리더십에서는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특성(혹은 성격)들을 추출하여, 지도자가 가져야 할 자질로 확대하여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일반 리더십 이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리더의 조건을 추출해 내는 방법과 절차이다. 그래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변에 영향을 끼쳐야만 하는데, 그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는 주도적이어야 하며,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하며,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사람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공식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그 어디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개입할 수 있겠는가?”(28) - 그렇다! 영적 리더십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인간 편의 특성/성격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영적 리더십’에 대한 이론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영적 리더십 이론이 이와 같은 일발 리더십 이론의 틀과 도구를 그대로 따라간다면 그것은 결코 ‘영적’ 리더십 이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6. “오스왈드 샌더스와 피터 와그너가 각각 주장하는 ‘영적 리더십’은 그 본질이 다르다. 피터 와그너의 영적 리더십은 영적 리더십을 교회 성장의 도구로 본 반면에 오스왈드 샌더스는 교회 성장과 리더십을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오스왈드 샌더스가 먼저 영적 리더십에 대한 책을 냈으니, 그의 영적 리더십을 효시로 본다면 피터 와그너의 영적 리더십은 원래의 리더십 방향에서 한 번 방향을 바꾼 굴절된 영적 리더십인 것이다. … 영적 리더십 이론에 ‘성공’을 이식한 존 맥스웰의 책 [열매 맺는 지도자]와 [리더십이 법칙]은 성공지상주의 리더십을 제시한다. …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각각 ‘교회 성장’과 ‘성공’을 위주로 하는 두 갈래의 리더십 이론 간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측정 방법에서 외형적인 면과 결과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조직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이 곧 성공하는 리더라는 성공지상주의 리더십은 그래서 따르는 사람이 많아야 성공하는 리더라고, 세속적인 안목으로 리더십을 측정하고 있다. … 영적 리더십의 참 모습을 보려면, 현재 우리들이 보고 있는 영적 리더십 이론에서 ‘성공’이란 얼룩을 제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 ‘교회 성장’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잘못도 과감히 시정해야 한다.”(33-36) - 저자는 30페이지부터 ‘영적 리더십’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교회 안에, 그리고 한국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러면서 영적 리더십이 한국 교회 안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그것을 ‘교회 성장의 도구’로 본 미국 교회의 영향력 덕분이며, 그 후에는 맥스웰의 영향으로 ‘성공의 도구’로도 인식되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의 ‘영적 리더십’ 이론이 ‘교회 성장과 성공을 위한 도구’로서 도입되었다는 점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리더십을 평가하는 기준이 ‘성공 지상주의’라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한다. 물론 성공하지 못하고 늘 실패만 한다고 해도 리더가 되는 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리더십 이론에 결과주의와 성공 지상주의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좋지 않은 현상이며, 이러한 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7. “예수님은 이 말씀(막 9:35) 속에서 섬김을 말씀하셨지만, 그 섬김은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으로 언급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42) - 으뜸과 섬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과연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은 과연 우리에게 으뜸이 되라고, 지도자가 되라고, 리더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섬김을 통해서 지도자의 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는가? ‘섬기는 지도자’가 되라고 하시는가? 아니면 그냥 ‘섬기라’고 말씀하고 게시는 건가? 본문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8. “리더십 주창자들은 ‘크고자 하는 마음이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든지 크고 으뜸이 되라는 것이다’라고 말한 데 이어 ‘얼마든지 크고 으뜸이 되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 좋아야 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방법은 세상과 정반대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방법만 세상 것과 정반대로 하면 되는 것일까? 목적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면 아무리 방법을 세상 것과 반대로 한다 할지라도 이미 전제가 틀렸다. 목적 자체가 틀렸으니 아무리 방법이 다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정말 하나님 나라가 ‘거꾸로 왕국’(the upside down kingdom)이라고 한다면, 방법만이 아니라 목적도, 목표도 세상 것과는 달라야 한다.”(45) - 그렇다! 기본 정신이 바라야 한다!!!

9. “설교자는 한 (성경 속의 인물) 개인의 경건한 신앙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와 인도하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브라이언 채플).”(53) - 이것은 구속사적 설교나 기독론적 설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사실 설교자로서 늘 배후의 하나님만을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모범적인 설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몰아붙이기보다는 절충해야 할 문제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성경 인물을 들어 영적 리더십을 주장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의 영역을 빼버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부분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이다.

10. “홍사중은 [리더와 보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성공하니까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 리더십이 있어서 성공한 게 아니라 서공하니까 리더십이 있는가 보다 라고 판단하게 된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리더십은 성공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 그런지 리더십을 주창하는 분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다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이다. … 리더십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 실체가 없다. 리더십은 실체가 없는 허상뿐이다. 그들(맥스웰)이 입으로 리더십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느니, 많은 사람이 리더십을 원하지만 실제로 얻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70) - 뒤집어 보기! 일반적으로는 정말 ‘리더십이 있으면 성공한다’라고 주장되지만... 리더십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이미 성공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성공했으니 리더십이 있는 것이 분명하고,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리더십이니 정말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리더십이란 만능이어야 하고, 그 리더십의 이론대로 한다면 모두가 성공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리더십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한 것인가?

11. “리더십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가는 중에 나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예수님은 ‘리더십’에 대하여 언급한 적은 거의 없지만, ‘따르는 일’에 대하여는 무수히 많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 내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실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나의 영향력을 받는 것이다. … 리더십이란 결국 하나님이 이미 주신 축복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다. … 교회는 세상 기업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한홍)”(83-86) - 저자가 한홍 목사의 책들 가운데서 ‘동의’하는 부분을 소개한 부분이다. 또 리더십과 관련된 일반적인 가르침이기도 하고... 이 정도만 이야기한다면 굳이 영적 리더십에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12. “하도 리더십 이야기를 하길래 시끄러워서 쳐다보니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가 많은지라,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다 어느새 여기까지 와버렸다. 영적 리더십을 주창하는 사람들의 말이 그릇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게 된 것이다. 그저 모르는 척 넘어가도 되는데 공연한 일을 시작해서 이 모양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113) - 사실 2부로 넘어오면서 짜증이 났다! 리더십 이야기는 없고 온통 ‘흠잡기’뿐이다! 이 부분에서 자신이 글을 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이야기를 한 이후에도 계속 흠잡기로 일관하고 있다. 2부에 ‘사실인가 아닌가?’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으니 아예 작정하고 이런 내용들을 다루는가보다 하고 넘어가야 할 듯 하다. 하지만 개운치가 않다.

13. “왜 그렇게 존 맥스웰을 비롯한 리더십 주창자들은 꿈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면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꿈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 그 이유는 바로 리더는 관리자가 아니기 때문에 ‘리더’인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 그들은 리더와 관리자를 구분한다. … 그들에 의하면 리더는 관리자가 아니므로 관리자가 하는 일인 ‘어떻게’, 즉 방법론에 대하여 신경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 그래서 ‘리더’는 방향을 지시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갈 것인가는 리더의 소관사항이 아닌 것이다.”(196, 197) - 3부로 넘어오면 맥스웰을 중심으로 하여 리더십 책들에 나오는 내용들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책에는 여러 예들이 나오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들이 제시하는 해답은 이런 식이다. ‘어떻게 달리기에서 1등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빨리 달려라!’고 답하는 것이다. ‘어떻게 빨리 달릴 수 있나?’고 다시 물으면 ‘다리를 빨리 움직여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꿈 같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것은 리더는 방향만 제시해줄 뿐 실제적인 방법론과는 무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비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리더십에 관한 책들 가운데서 (전부는 아니고) 이런 식의 논리를 발견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14.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죄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잠재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존 맥스웰). 잠재력을 개발하는 것을 그는 성공이라고 정의한다. 게다가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 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고까지 말한다. 이게 사실이란 말인가?”(222) - 어디서 본 듯한 논리... 어디서 봤더라?... 아! 소재찬 목사의 [설교, 누구나 잘할 수 있다]에서 본 대목이다. “하나님 앞에 설교자가 설교의 무능력을 통회하고 자복하면”이라고 말했었다. 설교를 잘 못하는 것을 회개해야 할 죄로 이야기 했었는데, 여기에서는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죄악이랜다! 정작 죄라고 해야 할 것은 ‘질병’으로 치부하고, 죄라 하기 어려운 것은 ‘죄’라고 정죄하는...

15. “여기 ‘주도권’이란 말에 언더라인 해야 한다. 심지어 30분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들 사이에서도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감동, 충격을 주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게 바로 그들이 말하는 영향력이란 용어의 속 뜻이다. 그래서 ‘영향력’은 그들에게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 교회 내에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그들은 ‘리더십이 타격 받는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리더십이 타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남이 나의 말을 받아’들여야만 리더십이 온전히 ‘영향력’으로 행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254) - 그렇다! ‘속 뜻’이 중요하다. ‘영향력’은 영적 리더십에서 핵심적인 부분인데, 그 ‘영향력’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저자는 ‘영향력=주도권’이라고 말한다. 아니, 영적 리더십을 주창하는 사람들(위의 글은 맥스웰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의 주장이 결국 그것이라고 말한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주장일까?... 한편으로는 그런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좀 찜찜하다. 영향력... 주도권... 한홍 목사는 “내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실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나의 영향력을 받는 것이다.”라고 했었는데...

16. “‘또 어떤 이들은 주님을 위해 큰 꿈을 꾸고 위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설교하지만, 사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자신의 야망 성취수단일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주의하여야 할 부분입니다. 과연 우리의 거창한 목표, 원대한 꿈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요?’ 인간의 거창한 목표와 원대한 꿈은 언제나 ‘비전’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 ‘마치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렙 45:5)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고, 내면의 동기와 의도를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스펄전) 그렇듯 사람의 비전이 곧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257, 258) - 비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전, 사람의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비전... 무엇을 위해서, 어떤 동기와 의도로 그것을 원하는가?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스펄전처럼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내면의 동기와 의도를 깊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라서 자동적으로 ‘통과’시켜도 되는 부분이 아니다!

17. “그들이 말하는 리더십은 인간관계를 말하며, 인간관계는 곧 처세술이다. 그래서 리더십은 다름 아닌 처세술인 것이다.”(260) - 너무 지나친 결론, 극단적인 비약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가르쳐지는 영적 리더십이란 결국 이런 것에 가깝다는 것은 사실이다.

18. “그가 보내는 시간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그가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대기업의 총수와 질적으로 양적으로 같은 모습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빌 하이벨스. 그는 분명 목사이다. 그런데 목사로서 신도들과 대화하는 모습이라든가, 신도들의 고민을 위하여 같이 기도했다거나, 심지어 리더십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영향력을 신도들에게 끼치기 위하여 개별적인 접촉을 가지는 어떠한 일을 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 … 그는 분명 복사인데도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나는 사업가의 가정에서 자랐고 사업문제로 중역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목회에 뛰어든 사람이다. 따라서 자기가 사업을 운영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게 단순한 번역상의 실수일까? 아니면 자기가 목사가 아니라 CEO라고 착작하는 것일까? 그래서 자기는 CEO이고 장로들과 부교역자들이 중역으로 보이는 것일까?”(268, 269) - 현대의 영적 리더십이 지향하는 리더의 모습의 표본이랄 수 있는 빌 하이벨스의 일정을 소개한 후에 하는 말이다. 과연 그는 ‘목자’이기보다는 ‘CEO’에 가깝다!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19. “목회자는 모름지기 예수님의 본을 받아 ‘직접’ 양을 치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천안대의 장동민 교수는 그의 글 [목회의 목적을 다시 점검한다]에서 목회의 중심이 사람 중심인가, 교회 중심인가에 관한 판단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272-) - (장동민 교수가 제시하는 내용은 책을 참고) ‘사람 중심’과 ‘교회 중심’. 저자는 목회가 사람 중심이어야 한다. 사실 그동안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교회 중심’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20. “리더십을 지위와 분리하여, 다만 ‘영향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조직의 생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의 소리에 불과하다. 리더십이 건전하게 행사되려면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 그 중의 하나로 조직 내에 권한이나 책임 체계가 명확하고 건전한 조직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리더의 말이 영향력을 가지고 행사될 수 있도록 조직이 그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일반 리더십 이론에서는 리더십 이론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와 사이좋게 서로서로 역할을 분담해 가면서 조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협력해 나간다.

영적 리더십 이론은 일반 리더십 이론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가져왔는데, 미처 생각지 못하고 가져오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리더십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의 방법론이다. 그것은 바로 지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지위로 하여금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영적 리더십 주창자들은 그러한 인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위에 대해 부정하려는 모습조차 보인다. … 그렇게 리더십 행사의 기본이 되는 ‘지위’를 부정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주장하는 리더십이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위를 부정해야만, 그들이 주장하는 리더의 품성에 무게를 둘 수 있으며, 그 방향으로 이론을 전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조직’과 ‘조직원’이 전제되지 않는데 어떻게 지위가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하나 영적 리더십 주창자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는데, 그것은 일반 리더십 이론은 리더십 이론 자체가 독립되어 운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리더십 이론은 조직론 중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리더십 이론이 홀로 서는 게 아니라 조직을 위한 이론으로서 운영되며, 또한 그것은 조직론의 다른 이론에 의해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래서 리더십 이론은 다른 조직론의 이론들과 연결되어 운영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적 리더십 이론은 리더십 이론만을 떼어 오는 바람에, ‘핏줄’은 버려두고 ‘살’만 떼어 온 격이다. 일반 리더십에서는 그것이 몸인 다른 ‘조직론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어 피를 통해 영양분이 공급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리더가 많아지면 리더들 간에 갈등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데 그런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바로 ‘지위’이다. 지위를 많이 만들어서 리더들 간에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자리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위에서 나오는 리더십은 열등한 것이라고 영적 리더십에서는 생각하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리더가 지위에 근거하여 리더십을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된 리더의 품성, 인격에서 나오는 리더십으로 착각하게 된다.

리더십이란 주제 하에 써진 글들을 살펴보면 거의 리더십의 입구에서 뱅뱅 돌면서 ‘리더가 되라’고 외치기만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바로 거기까지다. 영적 리더십에서는 리더십을 행사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저 리더가 되라는 구호를 외치고 말 수밖에 없다. 당신도 리더가 될 수 있다.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품성을 개발해라. 리더가 되려면 이러이러한 일을 해라. 비전을 가져라, 등등. 공허한 구호만을 지금까지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리더가 되라는 것에 치중하다 보면 자연 리더십의 영역을 아주 축소되고 단순화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영적 리더십에서는 리더십과 관련 없는 것들을 리더십의 영역 속으로 끌고 들어오게 되었다. 첫 번째, 그들은 리더를 양성하는 것을 리더십의 영역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리더를 양성한다는 것은 리더십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리더 양성은 단지 조직의 목표달성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거쳐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둘째로, 더 나아가서 후계를 기르는 것까지 영적 리더십의 영역 속에 집어넣고 있다.

더 나아가, 요즘 나오는 영적 리더십의 주장을 보면 목회의 거의 모든 분야를 리더십의 영역으로 넣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팀목회의 도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교도 교육도 리더십이다. 어떤 분은 심지어 건강도 리더십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과연 리더십이 끝은 어디까지일까 궁금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대화의 기술, 시간관리, 유모어도 이제 영적 리더십의 영역 안으로 집어넣었다.”(280-292) - 말이 필요 없다.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21. “문제는 아직까지도 그들이 한치 앞조차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직원 모두에게 리더가 되라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경영이론에서 ‘경’자만 공부해오 알만한 것 아닌가? … ‘배우기 위해 따르던 성도가 어느 정도 배우게 되면 자신의 의견을 내게 된다. 그때부터 배움을 주던 리더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 리더 적체 현상이 발생된 것이다.’(이상수)

잠깐, 여기에서 최고 리더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리더에도 ‘최고’가 있고 ‘최고가 아닌 리더’가 있는가? 리더가 하도 많으니 이제는 리더에도 종류가 있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모든 사람이 리더가 되었으니 자연 리더들 가운데에서도 구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모드 s성도들을 리더가 되라고 부추긴 리더십 주창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또 하나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들은 리더라는 말에 계층을 나타내는 말을 붙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한다. 리더라는 말 앞에 다시 무언가를 붙여 ‘그냥 리더’와는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 리더’, ‘톱 리더’, ‘핵심 리더’ 등등.”(304, 306, 307) - 실제적인 문제를 예로 들어 영적 지도자론을 반박한다.

22. “사람에게는 영적 리더십이 없다는 것이다. 영적 리더십은 사람이 아닌 오직 성령님만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321) - 그리고는 영적 지도자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동의를 얻어낸다. 영적 지도자론 주창자들 가운데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글들을 죽 소개한다. 그 중에서 하나.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을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는 명제가 타당한 것으로 증명된 것은 한 번도 없다.(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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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힘, 듣기의 힘
다치바나 다카시.가와이 하야오.다니카와 순타로 지음, 이언숙 옮김 / 열대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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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다양한 생각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치바나 다카시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심리학자인 가와이 하야오, 시인인 다니카와 순타로)의 강연과 토론을 보는 것은 다양한 측면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는 있었다. 먼저 ‘들어가는 말’을 세 사람이 각각 짧은 글로 써주었고, 두 번의 ‘강연’(가와이 하야오와 다치바나 다카시)과 하나의 ‘앤솔러지’(다니카와 순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심포지엄’이 소개된다.

한편, 다치바나 다카시의 경우, 처음에는 그의 ‘대단함’에 압도되는 느낌도 받았지만, 조금씩 더 접하게 되면서 그가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현대 과학’ 쪽에 치우친 모습... 앞서 읽은 그의 책인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도 ‘고전’에 대한 그의 독특한 견해를 보았지만, 첨단 과학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듯 보인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스모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밀면 밀어라, 당기면 밀어라.’ 미는 것이 스모의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카운슬러의 기본은 ‘말하면 들어라, 말하지 않아도 들어라.’라고 생각합니다.”(29) - 가와이 하야오의 말이다. 로저스의 ‘비지시적 상담’의 전형을 보는 듯... 하지만 가와이 하야오의 글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가 듣는 일에 있어서 상당한 베테랑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 늘 ‘들어주는’ 일로만 일관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느 선까지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배울 것이 있다.

2. “내가 보기에 일본의 카운슬러 중에는 승부사가 많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 모두 듣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때가 있다는 점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 이런 방법으로 이야기를 듣는 태도는 책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으면서 여러 정보를 듣는 셈입니다. 무언가를 읽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저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며 ‘행간 읽어내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행간 읽기’ 속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몰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미숙한 사람일수록 상대방만을 생각하고 자신이라는 존재는 전혀 여기에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저렇게 하면 되잖아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몰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몰입하면 그리 간단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몰입해 읽는다고 할까요. 단지 책 자체만 읽고서 ‘이 책은 별로야’라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몰입해 읽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책을 읽습니다.”(35-37) - 가와이 하야오가 이렇게 상담의 방식을 독서의 방식으로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독특해 보인다. 하지만 상당히 다탕성이 있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적이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 몰입해서 읽는다는 것, 비판하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우선 철저하게 저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 물론 그러면서도 분명하고 확실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필요하겠지...

3.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신과 물질]이라는 책이 탄생했는데, 이 경우에는 IO비가 100대 1 수준이 아니라 듣기와 읽기 양쪽을 합쳐 족히 1,000대 1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정도의 정보 확보라면 상당히 좋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투입할 경우 과유불급의 우려가 있으므로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만.”(52) - 다치바나 다카시는 입력(Input)대 출력(Output) 비율을 저작을 위한 자료 수집과 저작에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그의 독특한 방식(과학적인!)을 보는 느낌이다. 어쨌든, 많은 자료를 입력할수록 그것을 정리해서 나오게 되는 출력의 질(質)이 훨씬 좋아진다는 이야기다. 저작만이 아니라, 학문하는 자는 마땅히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을 무작위로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시인인 다니카와 순타로) 시(詩)를 쓰는 경우 다치바나 다카시의 경우처럼 단순히 IO비를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4. “단순히 귀로 듣는 것과 머리로 듣는다는 것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뇌에 전달된 신호가 어디로 들어가는가 하면 바로 뇌의 측두엽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 역시 최종적으로는 단순히 우리 뇌의 시각야(視覺野)에 활자의 영상이 맺혔다고 해서 그것을 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이해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듣기’의 첫 단계는 단순히 외부의 물리적 신호를 전기신호로 바꾸는 것입니다만, 여러 가지 정보를 하나로 모아 동시에 처리함으로써 비로소 ‘이해하기’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56, 57) - 과연 ‘뇌’에 대한 책을 쓴 다치바나다운 설명이다. 하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도 수긍 가는 이야기이다. 단순히 읽고 보는 것만으로 ‘이해’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

5. “내가 있고 싶은 곳은 깎아지른 절벽 위 / 그곳에 책 한 권만 가져가 / 소리내어 읽는다 / 바다와 하늘에게 인간이 쓴 책이라는 녀석을 / 읽어준다.”(74) - ‘앤솔로지’ 부분에는 시인인 다니카와 순타로의 시와 글들을 모아 놓았다. 마음에 콱 꽂히는 표현! ‘바다와 하늘에게 인간이 쓴 책이라는 녀석을 읽어준다’고!!!

6. “이 세상은 읽어야 하는 것투성이야 / 사람의 마음 읽기에 비해 / 책읽기는 누워서 떡먹기군”(85) - 순타로의 또다른 시의 한 부분! ^^;

7. 다치바나: 하지만 그처럼 아주 좋은 구절이 탄생하는 순간이란 아마 통찰의 한 순간이 있어서, 다니카와 씨의 머릿속에서 다듬고 다듬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 것이지요. 다니카와: 그렇습니다. 저 역시 잘 모릅니다.”(137) - 다치바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상당히 유사하다. 나는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붓이 가는 대로 글을 쓰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 편인데,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보면서 ‘퇴고’의 필요성을 느끼고 좀 더 ‘다듬는’ 일을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이 부분을 읽으니 내 원래의 생각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마음이 다시 움직인다. 이런 경우도 저런 경우도 다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순간적인 통찰력도 부인할 수 없고, 한편으론 끊임없이 고민하며 퇴고(推敲)하는 수고도 무시할 수 없고...

8. “가와이: 언어가 생기고 이어서 문자가 탄생합니다만, 문자가 없던 사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켈트족은 문자가 없었습니다. 켈트 연구가인 츠루오카 마유미 씨와 츠지이 다카시 씨가 대담을 나눈 책을 읽어보니, 켍 문명은 매우 수준 높은 문명이었는데 문자가 없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문자를 갖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가 있으면 편리할지언정 마음의 움직임을 한정짓는 단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산이라는 문자가 생기면 마치 산을 다 알았다는 듯이 생각합니다. 이 산이나 저 산이나 모두 같은 산이라는 개념을 낳습니다. 진보를 이루는 만큼 감성은 퇴화하는 것입니다. 산 하나하나를 보면서 느끼는 감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켈트는 바로 이런 감성을 발전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이유에서 문자를 갖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해 보는 이 견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미국의 선주민도 문자를 갖지 않았습니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세련된 감각입니다. 한 번 보고도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고 무엇이 약초인지도 쉽게 가려냅니다. 역시 우리와 전혀 다른 감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성은 문자를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문자문화가 우수한 면을 갖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수한 문자문화 속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164) - ‘하지만 문자가 있어야 이렇게 책도 쓸 수 있고, 그것을 읽는 것도 가능하지!’ 이 글을 읽으면서 바로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가와이의 말처럼 문자는 사상을 제한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자가 아니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상의 전달도 불가능해진다. 문자를 통해 그것 속에 녹아들어 있는 사상의 실마리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읽어 들이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행간을 읽어야 하고 몰입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냥 읽어서 10만큼 얻었다면 더 깊이 읽어서 50만큼, 100만큼 얻어야 한다. 문자를 사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도 더 많이 노력해서 그 문자로 하여금 자기 사상을 최대한 많이 실어 나를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문자를 갖지 않은 세련된 문화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가 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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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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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에서 많은 것을 새로이 배울 수 있었다. 한편, 그의 모습 속에서 언뜻 내비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지식의 입력 vs 출력 “하지만 이렇게 해서 알게 된 대부분의 것들은 아마도 저와 함께 무덤에 묻히게 되겠지요. 물론 제가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제가 알게 된 것들의 일부분은 책으로 남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책을 쓰는 경우에도, ‘자신이 알게 된 것’과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 ‘공부한 것’과 ‘책을 집필하는 것’이라는 입력과 출력의 비율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는,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납니다. … 입력과 출력의 비율은 낮게 잡아도 100대 1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한 것이 다 출력되어 버리지 않고 대부분은 제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셈입니다.”(19-20) - 확실히 출력은 입력을 따라잡지 못한다. 글을 쓰는 속도는 ‘생각하는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한다. 혼자서 ‘생각만 해도 입력되는 장치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

2. 지식의 총량 vs 개인의 지식 “지식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인류 문명사회가 지금까지 유지 발전되어 왔다고는 하지만, 지식의 총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누어 갖게 될 지식의 폭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지식의 총량과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의 양의 비율을 측정해 보면,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 무지의 정도가 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앞으로 문명사회가 나아가게 될 방향을 고려할 때 중대한 사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31) - 물론 저자가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무지이다.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현대인들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지식의 총량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에 비해 개인이 가진 지식의 양, 그 퍼센테이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오토마톤 “정보 처리의 세계에 ‘오토마톤automat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내용이 입력되었을 때 자동적으로 특정한 출력이 이루어지는 구조인데, 단계가 낮은 수준의 ‘오토마톤’의 예로 자동판매기의 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 그리고 행도이라는 것은, 대략적으로 이 오토마톤 부분과 자동화 되지 않은 의식화된 행동 부분의 두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은 대부분이 자동화된 행동인 것입니다.”(34)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이란 대부분 이처럼 자동화된 부분에 의해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모니터하여 결과를 남기는 것은 아주 미미한 부분입니다. 최근 뇌 과학의 발전으로 점차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동화된 부분은 주로 소뇌 안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소뇌라는 기관은 아주 작지만, 소뇌를 제외한 뇌 세포의 수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무척 정밀한 조직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것을 완전히 습득하여, 의식하지 않더라도 행동이 가능해지는 단계의 수준에 이르면, 그 때까지의 절차가 모두 소뇌에 저장되는 것입니다.”(35) - 저자가 전뇌(電腦)에 대한 글을 쓴 흔적을 발견하는 듯... 한편으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와 비슷한 분위기도...

4. 독자 경향 “서적 가운데 문고판, 신서판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이른다는 것은 잡지와 마찬가지로 한 번 읽고 버려지거나 일정한 기간에만 읽혀지다가 역할을 끝내고 사라지는, 소위 일과성 출판물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과거의 지의 총체를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준 후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의 지를 축적하는 역할과 기능을 하는 데 출판 본래의 존재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지를 축적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출판의 비중이 너무 낮아져 일과성의 문화를 표현하는 장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48-49) 이상은 잡지의 대담에 참석한 미도리가와의 말의 인용이다. 사실 나로서는 이 주장에 동감이 된다. 하지만 저자는 ‘고전’의 정의와 ‘출판’의 성격 등을 전혀 다르게 주장하면서, 위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 대담을 읽고 왠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출판은 본래부터 일과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현대에 와서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출판은 항상 일과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일과성이라는 시간의 설정 방법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49-50)

그리고는 ‘고전’의 문제로 넘어간다. “과거의 지의 총체라는 것이 반드시 고전에 의해 계승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과거 지식의 총체는 반드시 계승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50) 저자는 상당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고전만이 아니라 과거의 지식의 계승 가치에도 회의적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문학은 기껏해야 100여 년 전의 출판물에 불과할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500년이나 1,000년 정도의 시간 속에서 검증을 받고 후세에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51) 그는 일단 고전을 500-1,000년 이상의 검증을 받은 것에 국한시킨다. 상당히 좁은 범위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1천년은 좀 길고, 500년 정도라면...

하지만 저자의 고전 이해는 ‘시간’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다시 고전의 내용도 문제삼는다. “그런데 그런 진짜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에 실려 있는 내용에 특별히 뛰어나 점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내용을 보면 어쩐지 시시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경우인데, 잘 읽어보면 시시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저서를 읽으면 도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책을 골라 읽는 과정을 서로 공유하여 그 내용을 서로 이야기해 보는 것 자체에서 의미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55) 물론 고전은 오래 된 책인만큼 오늘날에 와서 밝혀진 내용들에 대한 ‘무지’가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시시한 것으로 치부할 순 없지 않을까? 저자가 고전의 가치(?)를 ‘어떤 책을 골라 읽는 과정의 공유’와 ‘그 내용을 서로 이야기해 보는 것’에만 국한시킨 것은 지나치다. 그 정도라면 고전이 아닌 어떤 책이라도 가능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고전에서 제외하기를 주장하는 19세기의 책들도 얼마든지 골라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으며, 그 내용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본래 고전에는 인류의 지가 가장 원시적인 단계에 있을 때 탄생한 작품만이 포함됩니다.”(56) “이런 지적 신진대사가 반드시 고전 등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이런 맥락에서 과거의 지의 총체는 최신 보고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57) 철학사는 사실상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철학을 공부한 저자도 그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가 고전을 ‘원시적인 단계에서 탄생한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멀리 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진화론적 시각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은 좋고, ‘오래된’ 것일수록 원시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자연과학적인 이론과 기술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최첨단 일에 관한 흥미 - ‘알고 싶다’는 욕구에 자극을 받아”(58-)라는 부분을 보면서 그는 성경에 나오는 아테네(아덴) 사람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약의 사도행전 17장 21절은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소개한다. 저자 역시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에 모든 시간을 쏟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글에서 자신이 ‘호기심 과잉’이라고 말하는데(63) 과연 그런 것 같다.

5. 스페셜리스트 vs 제너럴리스트 “그러나 이런 스페셜리스트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제너럴리스트의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63) - 이 부분은 나의 평소 생각과 상당히 유사하다. 꼭 스페셜과 제너럴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전부터도 “점점 분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진 자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부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에콜로지적 사고’와 연결되어 뒤에 몇 번 다시 나온다.

“과학이 점차 세분화되고 각 영역 안에 일인용 참호를 파서 안주하려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을 때, 그와 반대로 에콜로지는 과학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연관성을 생각해 보자는 발상이었으므로, ‘바로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분석보다는 통합, 일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시각이 에콜로지와 일치하였던 셈입니다.”(139)

“에콜로지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콜로지적 사고’를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콜로지적 사고’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전체성을 전체성으로서, 복잡성을 복잡성 그대로 받아들여 다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과학은 전체를 부분으로 해체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의 집적으로 환원하여 분석하는 ‘요소 환원을 방법적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근대 사회의 발전은 이런 근대 과학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요소 환원 원리가 적용되는 곳마다 한계에 부딪치면서 파탄을 초개하고 있습니다.”(164)

6. 어학 공부의 비결 “어학을 배우려면 집중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1년 동안 하는 것보다 매일 매일 한 달 동안 하는 편이 낫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체로 어학은 어학 이외의 다른 것을 모두 잊고, 오직 어학에만 정신을 집중하여 매달리는 방법을 택한다면 한 달 동안만 공부해도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다.”(66) - 정말 그럴 것 같다. 과거에 헬라어를 공부했을 때에도 그런 효과를 보았던 것 같은데, 지금 히브리어를 다시 공부하고 있는데, 잠시 다른 모든 것들을 끊고 히브리어 공부에만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7. 70페이지부터는 ‘책을 선택하는 방법’이 소개된다. 입문서(교과서적/일반인을 위한)를 선택하는 법(머리말, 맺음말, 역자 서문, 판권장 등을 확인), 고전적 입문서, 각도를 달리한 책들, 사상사, 그리고 각론을 다룬 책들에 이르기까지 도움이 될 만한 실제적인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8. 책꽂이와 책상 위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날 산 책들을 책꽂이 꽂지 말고 책상 위에 쌓아 놓는다. 책꽂이에 꽂아 버리면 그냥 그대로 다시는 펼쳐 볼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지만, 책상 위에 놓아두면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77) - 꽤 실제적인, 그리고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충고다! ^^;

9. 입문서 읽는 방법 “입문서 한 권을 정독하기보다는 입문서 다섯 권을 가볍게 읽어치우는 편이 낫다. 메모를 하지 않아도 중요한 부분은 대부분 다른 책에서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메모를 하는 대신 밑줄을 치거나 표시를 해두는 방법이 더 좋다.”(78) - 동의한다. 나 역시도 책들을 읽으면서 발견하고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는 방업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가볍게 읽기보다는... 빠르게 읽으려고 하면서도, 정독에 가깝게 읽어간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저자의 입장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있을 듯...

10. 독학의 위험성 “독학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점은 질의응답 과정이 없기 때문에 독선적인 해석을 통해 잘못된 정보를 습득하게 될 위험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다독을 하거나 조금은 당돌하게 전문가를 직접 찾아가 질문을 하는 수밖에 없다.”(79) - 좋은 지적과 좋은 해결책.

11. 14가지 독서법 중... 5, 9, 10번이 마음에 와 닿는다. “5. 읽다가 중단하기로 결심한 책이라도 일단 마지막 쪽까지 한 장 한 장 넘겨보라.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9. 주석을 빠뜨리지 말고 읽어라. 주석에는 때때로 본문 이상의 정보가 실려 있기도 하다. 10. 책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의심하라. 활자로 된 것은 모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이라도 거짓이나 엉터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81)

12. ‘책상을 찾아서’(93-)에서는 크고 견고한 책상을 찾다가 상당히 비싼 초대형 식탁을 구입하고, 또 작업대를 구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견(一見) 지나쳐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 백금산의 [큰 인물 독서법]에서 본 김정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최고의 지필묵을 고집했는데, 이와 유사한 ‘프로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3. ‘서고를 신축하다’(98-)를 읽으면서는 상당 부분 동감과 관심이 갔다. 저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 보통 사람들보다는 많은 책을 가진 편이기에(7천 권이 넘는) 이사 할 때마다 골머리를 앓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책은 더욱 많아질 터인데, 저자처럼 (물론 그보다 규모는 적겠지만) 서고 겸 사무실을 따로 마련해야 할 듯...

14. 머리는 좋은데... “종종 머리는 좋은데 특정 영역에 대한 소양이 완전히 결여된 사람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110) -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정상이 아닐까? 다치바나 자신이 “일반적으로 독서가들은 대개 인문 계열의 교양서적은 많이 읽지만 과학 서적, 기술 서적 등은 거의 읽지 않습니다. 한편, 과학 기술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반교양서적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C. P. 스노우가 말한 두 문화의 괴리는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의 소양을 가진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158)라고 말하듯이, 일반적으로 머리가 좋다고 하여도 양쪽 영역 모두에 소양을 가진 경우는 드물다. 그러므로 특정 영역에 대한 소양이 완전히(라고 하면 좀 심하기는 하지만) 결여된 경우도 특이하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모든 영역에 균일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지...

15. 소비자 vs 생산자, 그리고 독서와 작가 “글을 읽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우선 제대로 된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생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을 통해 정신 세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사물을 보는 눈이 사려 깊지 못합니다. 사물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132) - 확실히 많이 읽는 것은 잘 쓰는 것을 위한 좋은 기초를 제공한다. 물론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16. 전문가의 오류 “전문가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을 제기하는 전문과와는 논쟁이 될 리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전문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들의 논리를 축적시켜 내린 결론이라도, 밖에서 보기에는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전문적인 지식으로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좀처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이 사뭇 재미있습니다.”(160) - 마치 글을 쓴 사람이 자기 글에서는 오타를 잡아내기 어려운 것처럼...

17. 좋은 문장! “어떤 부분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떠오늘 때까지가 정말 힘듭니다. 저의 책을 막힘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궁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입니다. 원고를 집필하는 에너지의 3분의 1은 이처럼 좋은 표현을 찾은 데 소비하고 있습니다. 단 1, 2분을 위해 몇 시간을 소비하는 셈입니다.”(162) - 이태준의 [문장강화]에 나온 내용이 생각난다. 그는 플로베르와 모파상의 말을 인용했었다.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플로베르).”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한 말밖에 없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선 한 동사밖에 없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선 한 형용사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한 말, 그 한 동사, 그 한 형용사를 찾아내야 한다. 그 찾는 곤란을 피하고 아무런 말이나 갖다 대용(代用)함으로 만족하거나 비슷한 말로 맞추어 버린다든지, 그런 말의 요술을 부려서는 안 된다(모빠상).” 다치바나는 이 부분에서도 좋은 태도를 보인다.

18.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223~)에서는 ‘책의 구조 파악, 장 단위의 흐름 파악, 절 단위로 세세한 흐름 파악’을 이야기하면서, ‘키워드의 조합과 논리의 흐름’을 중시하라고 말한다. 전체를 적당한 빠르기로 한번 훑어보면 뇌의 무의식이 작용하여 중요한 것을 나름대로 분별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새롭다.

“좀 더 그 책을 자세히 읽어 보고 싶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단락을 단위로 좀 더 세밀하게 읽어보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눈이 머무는 곳만을 읽고 지나간다. 여기에서는 ‘자연스럽게 눈이 머문’ 곳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의 뇌는 의식 세계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여러 가지 일을 무척 많이 하고 있다. 머릿속에 왠지 계속 맴도는 키워드가 있을 경우, 주변시야 속에 그 키워드가 나타나면 눈은 자연히 그곳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키워드를 찾아서 의식적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정보를 찾는 일은 뇌가 자동적으로 해준다. 의식적으로 글을 읽지 않아도 책 위로 눈이 움직이는 것만으로(한 쪽을 읽는 데 1초가 채 걸리지 않아도 된다), 눈은 정확히 중요한 곳에 머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뇌의 무의식이 행하는 작용을 믿는 것이다.”(226-227)

19. 책은 물건인가? 다치바나가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책을 ‘물건’에 불과하다고 보는 그의 시각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진다. “책은 거칠게 다루는 것이 좋다. 나중에 헌 책방에 팔기 위해서라도 깨끗하게 보겠다는 식의 구두쇠 발상은 버리는 것이 좋다.”(78) 이 정도 선에서는 ‘거칠게 다룬다’는 점 정도는 ‘험하게 다루다’는 정도로 이해하고서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종이책의 좋은 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무엇보다도 자유자재로 종이 여기저기에 메모를 하고 이곳 저곳 밑줄을 긋거나 자신만이 알 수 있도록 기호나 부호를 붙일 수 있으며, 접어서 표시를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여 놓을 수도 있다.”(275)는 말 뒤에 나오는 내용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 그는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책에서 참고가 될 만한 쪽을 찢어 와 붙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읽고 있는 쪽을 찢어 달리 이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단물을 다 빨아먹듯 그 책을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잘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나는 물건인 책을 그다지 소중하게 다루지 않고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언제나 이런 행동을 한다.”(275) 어쩌면 너무 많은 책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 제본이 좀 허술하게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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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몽 2008-01-2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좋네요~

감사하게 잘 읽고 갑니다! ^^

jayuhon@hanmail.net 2008-01-27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 혼자서 읽고 끄적거린 글이라서 내놓기는 좀 부끄럽지만 그냥 염치불구하고 올리고 있습니다. ^^
 
책 읽는 소리 - 옛 글 속에 떠오르는 옛 사람의 내면 풍경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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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 저자의 책이다. 그의 책, 그의 글은 부담스럽지 않다. 편하다. 그러면서도 감동이 있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우리 이야기여서 그런 걸까?(물론 중국 이야기도 많고, 이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 일본 이야기도 나오지만, 동일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라서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일까?) 더 쉽게, 더 많이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

책을 읽어가며 점점 더 옛 어른들의 ‘선비’ 정신이 그리워진다. 무릇 ‘공부’란 사람이 되어가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이 못내 마음 아프다.

아, 그리고... 한문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도!!!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글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고전의 바다 속에는 우리가 건져낼 수 있는 구슬이 너무나 많다.”(9) 아, 아름다운 표현! 그리고 동감되는 ‘사실’!

2.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를 읽어보니 중세 유럽에서도 책은 반드시 소리를 내서 읽었다고 한다. 암브로시우스가 묵독하는 것을 본 아우구스티누스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눈으로만 읽은 묵독(黙讀)은 그 비밀스러움 때문에 요사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18) 암브로시우스의 묵독 이야기는 어디선가 보았는데... 찾아보니 C. S. 루이스가 쓴 [개인 기도]에 나오는 대목(71p)이다.

3. 옛 선비들의 독서와 독서의 목적 “옛 선비들에게 있어서 독서란 곧 세상을 읽고 나 자신을 옳게 아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서책에서 얻는 정보는 물질의 이익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삶의 내적 충실을 높이는 데 쓰였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나 삶의 극적인 전환,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 앞에서 독서는 언제나 큰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자기 합리화의 그럴듯한 변명을 제공하는 대신, 대의의 길을 당당히 걷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독서의 목적은 지혜를 얻는 데 있었지, 지식의 획득에 있지 않았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이 모두 독서에서 나왔다. 책 속의 구절 하나하나는 그대로 내 삶 속에 체화(體化)되어 나를 간섭하고 통어하고 영향력을 발휘했다.”(25, 44) 오늘날 대중의 독서와 그 목적은 어떤가? ...

4. “‘우리 같은 무리는 단지 물 마시고 밥 먹고 잠만 퍼잘 뿐’이라고 부끄러워했다. 그의 부끄러움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37) - 부끄러운가... 부끄러워하는가?... 부끄러움 없는 시대... 부끄러움 없는 사람들...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이만부의 [부끄러움을 닦는 법]이라는 글은 원문이 모두 98자인데 이 가운데 부끄러울 치(恥)자가 무려 35회나 나오는 재미있는 글이다. 장난끼가 잔뜩 담겨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전체를 다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어 그 중 첫 머리만 잠깐... “부끄러움이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없어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있다. 때문에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하략)”(145)

5. “일제 시대에 나온 김태준의 [조선한문학사]는 지금도 대학 교수들이 주석을 달아 수업교재로 쓴다. 그런데 이 책은 그가 20대에 학부 졸업논문으로 쓴 것이다.”(45) - 놀람! 오늘날의 교육과 당시의 교육... 재질의 차이도 있을까?...

6.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에는 인간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책만 있고, 인간에 관한 책은 없다’고 통탄했다.”(46) - 마치 J. I. 패커가 [Knowing God]에서 하나닝에 대해 아는 것(Know about God)과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은 다르다고 말한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우리는 늘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집착한다.

7. 재주, 부지런함, 그리고 깨달음! “어떤 사람은 간신히 백여 권의 책을 읽고도 종이를 펼쳐 붓을 내달리면 쟁그랑 소리를 울리며 환히 빛나, 만권의 책을 외우는 자가 뒤에서 눈이 휘둥그래지기도 한다. 간혹 똑같이 한 권의 책을 읽었는데, 한 사람은 한 글자도 남김없이 외웠어도 식견이 늘지 않고 저작에 볼 만한 것이 없으며, 한 사람은 반 너머 잊어버렸지만 그 핵심 되는 알맹이는 모두 섭취하여 폐와 간에 깃들여 이를 펼쳐 글로 지으면 이따금 방불하게 되곤 한다. 어째서 그럴까? 재주는 부지런한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못하다.”(47) - 정말 그러리라고 생각되는 이치! 적게 읽는 것보다 많이 읽는 것이 더 낫기야 하겠지만, 깨달음이 없다고 한다면야...

“오직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손 가는 대로 펼쳐 봐도 핵심이 되는 것에 저절로 눈이 가서 멎는다. 한 권의 책 속에서 단지 십 수 장만 따져보고 그만둘 뿐인데도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전부 읽은 사람의 배나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두세 권의 책을 읽고 있을 때에 나는 이미 백 권을 읽고, 효과를 보는 것 또한 나보다 배가 되는 것이다.”(48) - (앞의 문장과 여기 나오는 문장은 홍길주의 글이다.) 그런 사람! 다치바나 다카시가 자신의 독서 방법, 혹은 연구 방법을 소개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한번 죽 훑으며 단락의 첫 문장들 위주로 본 후에, 다시 읽으면 중요한 부분에 저절로 눈이 가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성(悟性)이 열려야 한다. 깨달음 없이 그저 독서 목록만 추가한다면 그야말로 한갓 읽기만 하는 ‘도능독(徒能讀)’의 독서일 뿐이다. 오성은 재주만으로는 안 되고 노력이 없이는 더더욱 안 된다. 깨달은 사람의 독서는 다르다. 그냥 훌훌 넘겨도 책 한 권의 양분을 온전히 섭취한다. 멍청한 사람의 독서는 다르다. 밑줄을 쳐 메모를 해가며 읽어도 읽고 나면 머릿속이 휑하니 남는 게 없다.”(49) - 이는 저자의 설명이다. 이 설명으로 본다면 다카시의 경우를 홍길주가 제시하는 경우와 일치시키는 것은 좀 어려울 듯 하기도... 단지 외적인 흡사함 뿐일까?

“세상에서 말하는 도술(道術)이나 문장이라는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지난날 하나를 듣고 하나도 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다. … 옛날에 천권 만권의 책 속에서 찾아 헤매던 것이 한두 권만 보면 너끈하게 된다. 하지만 깨달음의 방법은 방향도 없고 실체도 없다. 잡을 수도 없고, 묶어둘 수도 없다. … 옛날에 성련이라는 사람이 바다의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보다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그랬다. … 대개 성련의 깨달음은 열 해 동안 깊이 생각한 힘으로 된 것이지, 하루아침 사이에 어쩌다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깨달으라고 권하기보다는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것이 낫다. … 도술과 문장을 사모하는 것은 우러러 한번 생각해보는 것만 못하다.”(50, 51) - 김택영의 글이다. 깨달음의 효용과 그 예, 그리고 그것의 적용에 대한 내용이다. 특별히 깨달음과 생각을 연결시킨 것은 생각을 통해 깨달음에 들어간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생각은 깨달음을 위한 기초적인 요건이 된다는 지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8. 산 독서 vs 죽은 독서 “그(김창흡)은 독서에는 산 독서와 죽은 독서가 있는데, ‘책을 덮은 뒤에 그 내용이 또렷이 눈앞에 보이면 이것이 산 독서이고, 책을 펴놓았을 때에는 알았다가 책을 덮은 뒤에 망연하면 죽은 독서’라고 말했다.”(53) - ‘깨달음’을 말한 것이라 보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고 그것의 ‘암기’도 함께 의미하고 있는 듯... 그만큼 당시의 독서법과 우리의 독서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읽는 방법에서도(당시에는 모든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 내용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부분에 있어서도(우리의 ‘이해’라는 것과 당시 사람들의 ‘암기’와 동일한 ‘이해’)...

9. 기록에 대한 애착 “기록에 대한 선인들의 집착은 때로 병적으로 보일 정도다. 편지를 써도 꼭 한 벌을 따로 베껴두었다. … 요즘 어느 누가 편지를 보내면서 그 편지를 복사해둘까?”(65) - 예전에 편지를 즐겨 쓸 적에는 복사해 둔 적도 있었다. 또 요즘 메일의 경우는 보내면서 보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기록에 대한 ‘집착’ 또는 ‘애착’은 배울 필요가 있는 듯...

10. 자기 작품을 아낌에 대하여 “훌륭한 작가만이 자기 작품을 아낀다. 자기가 아끼지 않는데 어떤 독자가 그 작품을 아끼겠는가?”(68)

11.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라는 글(79-)은 특별한 내용은 아니지만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시집가는 딸이 베껴서 가져가고 싶어 했던 소설책,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채 못 베낀 것을 아버지와 사촌 동생, 친 동생과 조카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동원되어 필사하여 보낸다. 그리고 거기 덧붙인 편지 끝의 한 마디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저자는 잘 묘사해 놓았다.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뒤늦게 친정에서 보내온 이 책을 받아든 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때 소설은 그저 단순한 이야기책일 수가 없다. 그리운 아버지, 보고 싶은 동생과 친정 식구들 생각이 날 때마다 그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필사기가 적힌 마지막 장에는 그녀의 눈물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부모의 이런 마음이 딸에게는 그 힘든 시집살이를 견뎌낼 수 있도록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다. 붓으로 베껴 쓴 옛 소설책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 참 많다.”(82)

백광훈이 자녀들을 훈계하며 쓴 편지는 따끔하지만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듣자니 너희가 자못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고, 또 남의 허물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더구나. 사람이 배우는 것은 다만 이러한 병통을 없애려 함인데, 이제 너희가 만약 정말로 이와 같다면 비록 만 권의 글을 배워 곧장 과거에 급제한다 해도 그 사람을 어디에다 쓰겠느냐? 놀라고 절통하여 죽고만 싶구나. 이후로도 너희들이 이 같은 버릇을 딱 끊지 못하고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맹세컨대 다시는 너희들을 보지 않겠다.”(86)

12. 저자의 글 가운데 ‘박지원’에 대한 글이 띄엄띄엄 나온다. 그의 식견, 그의 탁월함, 그의 인물 됨... 예전에 관심이 없었던 인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솟아오른다!

“늘 빽빽한 한자의 숲 속에 산다. 옛 글 하면 고리타분한 생각부터 든다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그 속에서 노는 나는 사람 냄새 물씬하고, 때로 죽비로 뒤통수를 내려치는 듯한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에 빠져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읽을 때마다 사람을 긴장시키고 놀라게 하는 글이 있다. 연암 박지원의 글이 그렇다.”(95) 그리곤 ‘빛깔과 때깔’에 대한 박지원의 글과 그에 대한 디자인과 교수의 지적을 소개한다. 그것은 ‘명도와 채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선비들의 가난한 삶, 집안의 물건들과 심지어는 책까지 팔아서 끼니를 이어야 했던 모습을 그리면서도 박지원을 언급한다. “며칠을 굶다가 이대로는 굶어죽겠다 싶어 못쓰게 된 각기소리라도 팔아먹을 생각으로 집어들다가, 우레소리에 놀라 그나마 망가뜨리고 말았다. 그 높은 뜻에 안쓰런 궁핍이 읽는 이를 민망하게 한다. 박지원이나 이덕무나, 아니 김용준까지도 책을 팔아 밥을 먹던 가난은 운명처럼 따라다녔다. 그 절대 궁핍 속에서 그들은 찬연한 문학의 꽃밭을 일구고, 학문의 열매를 맺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나는 무언가? 아! 부끄럽구나.”(117) - 그렇다! 부끄럽다. 나 역시도...

저자는 책의 말미(‘글뒤에’)에서 다시 한 번 박지원과 에코를 비교하여 말한다.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 가서 코끼리를 처음 대면하고 받은 충격에 대해 쓴 [상기(象記)]를 읽었다. 코끼리라는 기호를 통해 우주 만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한 글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보니 낙타를 두고 비슷한 내용으로 쓴 글이 있다. 250년 전 연암의 논리가 현대 서구의 기호학자의 입에서 앵무새처럼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에코에게 연암의 이 글을 읽게 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글을 읽는 내내 이러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252) - 우리는 우리 것 보다 남의 것에 훨씬 더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저자는 무조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주장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잘 지적해주고 있다. 무조건 좋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좋은지 나쁜지에 앞서 무엇이, 어떤 것이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13. 신의! 사람 vs 짐승. “사람이 귀한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함께 지내며 즐거워하다가 헤어진 뒤에는 서로를 잊는다면 그것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123)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가 풀려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한 말이다. 저자는 다산의 제자들이 어떻게 매년 그를 찾아뵈었는지를 소개한다. 참 부러운 모습이다. 함께 있을 때는 즐겁게 지내지만 헤어진 후에는 연락조차 없고,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조차 없는 우리의 현실이 슬프다. 사람과 짐승...

14. “일단 소음에 길들면 가끔씩 찾아드는 정밀(靜謐)의 시간이 오히려 감내하기 어렵게 되는 모양이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도리어 불안하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다. 침묵이 가져다주는 미덕을 잊은 지 오래다. 내가 나를 만나본 지가 언제였던가?(169, 170) - 기독교의 수도자들이 외로움과 고독을 분별하여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난다. 외로움은 곁에 사람이 없어서 느끼는 허전함이지만, 고독은 스스로 찾는 홀로 있음이다. 후자는 때때로 가져야 하는 것이요, 우리를 성장하게 해주는 좋은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정밀의 시간’이다.

“명나라 진계유는 [안득장자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뒤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170) - 조금 거리가 있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미쉘 꽈스트 신부의 [삶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 나오는 ‘전화’라는 글이 떠오른다. 전화를 끊은 후에야 상대방이 왜 전화했을까를 떠올렸다며, 자기 말만 주절거린 것을 회개하는 기도문 형태로 쓰여진 글... ‘지난 후’에 알게 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겠지...

15. “뭇사람 속에서 그 사람을 천번 백번 찾았네(衆裏尋他千百度)”(172) - 저자는 이 말이 ‘고인의 시구’라고 소개하면서, 연구실에 이 글씨의 전각을 표구해서 붙여놓았다고 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만남을 기다리면서... 짧은 글이지만 무척 마음에 와 닿는다. 아니, 내 심장에 날아와 콱! 꽂힌다! 내게도 그런 만남이 있기를...

그러면서 저자는 이용휴를 찾아간 이단전, 그리고 황헌지가 찾아갔던 양흔이라는 소년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리곤... “법은 이렇게 전해져 왔다. 스승과 제자의 그 아름다운 만남을 이제 어디서 찾을까? 겨울비 내리는 연구실에 앉아 뭇사람 속에 숨어 있을 그 한 사람을 기약없이 나는 기다린다.”(174) - 아!

16. 아내가 달인 약은 양이 일정치 않아 화를 내고, 첩이 달인 약이 양이 일정하자 사랑했는데, 첩은 양이 많으면 땅에 쏟고 적으면 물을 탔다는 이야기. 역시 박지원의 [마장전]에 나오는 이야기다(197). 연암이 가르치는 아첨의 3단계. 상첨(上諂)은 겉으로 무관심한 척하면서 상대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 중첨(中諂)은 비위에 맞는 말을 하며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 하첨(下諂)은 하는 말마다 옳고 하는 일마다 훌륭하다고 하는 것(197-198). 재미있는 분류다.

17.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학문의 즐거움]에서 프랑스의 수학자 푸앵카레라는 사람의 “창조란 버섯과 같다”는 말을 인용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송이버섯은 생장에 좋은 조건이 계속되면 결코 포자를 만들지 않고 뿌리로만 살아가다가 노화해서 죽어버린다. 그런데 급격한 온도의 변화 등 갑작스레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제서야 포자를 만들어 계속 발전해나가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송이버섯 중에는 5백년이나 뿌리 상태로만 있다가 말라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201) - 저자는 이제 슬슬 일본 사람들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 사람치고 일본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편견’을 버리려고 노력한다.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도 양심적인 이들이 있으니까.

저자는 ‘일본 고전 산문의 매력’에서 요시다 겐코, 나카노 고지, 마츠오 바쇼, 사이교 법사 등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한동안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 또한 선조들의 이런 해맑은 정신을 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이웃에게서 섬뜩한 전제주의의 광기만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왠지 좀 슬프다.”(214).

18. ‘달랠 길 없는 마음’이라는 내용은 저자의 표현처럼 ‘뭔가 말하기 어려운 마음의 무늬’를 느끼게 된다. 슬프면서도, 정말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리고 묘한... “일본의 와카나 하이쿠에는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이 있다. 한국의 한의 정서와 비슷하기도 하고, 꼭 같지도 않은 무언가 뭐라 말하기 힘든 마음의 무늬가 있다. 며칠 앓느라 마음이 맑게 비어서였을까? 오늘 따라 더 애잔하게 읽힌다.”(215) - 꽤 오래 전에 이현주 목사가 번역한, 하네다 노부오의 [겨울부채]와 아이다 슈이치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를 읽고는 하이쿠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류시화가 편역한 [한 줄도 너무 길다]라는 하이쿠 모음집도 사놓았었는데 읽지는 못하고 있었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하이쿠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느낀다. 특히 [바쇼의 하이쿠 기행]이라는 책에 관심이 많이 갔다. 한 번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19. 꿈과 현실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말했다. ‘꿈은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라고.”(231) - 함께 꿈꾸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여라!!

20. ‘글쓰기와 병법’(232~)은 이 책의 마지막 꼭지다. 그는 여기에서 현대의 ‘논술’ 교육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독서’에 대한 책을 ‘글쓰기’에 대한 짧지 않은 이야기로 끝맺는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읽기는 결국 쓰기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둘은 순서가 반대일 뿐이요, 그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 역시 그의 책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심심치 않게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고 있다.

21. 몇 가지 일화들...

1) 김득신 “머리가 나쁘기로 유명했던 김득신은 [사기]의 ‘백이열전’을 1억1천1백번이나 외워, 그 호를 억만재라고 했다. 옛날에 1억은 10만을 나타내는 숫자다. 그는 말을 타고 가면서도 글을 외웠다. 그렇게 많이 외운 ‘백이열전’을 중간에 깜빡 잊어버렸다. 그러자 곁에서 고삐를 잡고 있던 하인이 막힌 부분을 잊어버렸다. 하도 많이 들어 뜻도 모르고 외운 것이다. 머쓱해진 김득신은 네가 나보다 똑똑하니 내 대신 말을 타고 가라며 종을 태우고 자신이 고삐를 잡고 갔다.”(16) - 해학!

2) 화담 “화담 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는가?’ 대답하기를,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나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는지라 기뻐 돌아가려 하니, 골목길은 갈림도 많고 대문은 서로 같아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하기를 , ‘내가 네게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이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걸음을 믿고 도달할 수 있었더랍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깔과 형상이 전도되고, 슬픔과 기쁨의 작용이 되어 망상이 된 것이지요. 지팡이를 두드리면 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보증이 됩니다.”(138-139) 이는 박지원이 ‘창애에게 답하는 글]이라 한다. 그리고는 다시 설명을 단다. “도로 눈을 감으라는 말은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뜻이다. 그저 장님 주제로나 살라는 말이 아니다. 마음의 눈이 닫히면, 육체의 눈은 있으나 마다 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해가 된다. 눈을 뜨자 정말로 장님이 되어버린 장님과, 장님이 되고서야 마음의 눈을 뜬 장님 중 누가 더 나은가? 나는 혹시 길에서 울고 있는 눈 뜬 장님이 아닐까?”(139) - 깨달음!

3) 관아재와 겸재의 이야기 “관아재 조영석과 겸재 정선은 모두 유명한 화가가. 한번은 관아재가 겸재에게 지나가는 말로 말했다. ‘저 문설주 위 빈 곳에 언제 그림 하나 그려주시지요.’ ‘그럼세.’ 그러고는 그려달란 사람이나 그려주겠단 사람이나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꽤 시간이 흘렀다. 달빛 훤한 어느 겨울 밤, 겸재가 막내아들을 앞세우고 불쑥 관아재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쓰다 달다 말없이 하는 말. ‘벼루에 먹을 갈게. 내 오늘 전날의 약속을 지키러 왔네.’ 그러더니 문설주 위에 몰아치듯 붓을 휘둘러 절강의 가을 순식간에 그리는 것이었다. 그 필세가 어찌나 기이하고 장하던지, 붓끝에서 우르르 쾅쾅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그림을 마치고 붓을 던지자, 이번엔 관아재가 그 붓을 들어 그 곁에 썼다.”(140~) 그러곤 저자는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 더 실감나게 상황 설명을 다시금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그 설명 중에 뜬금없이 “이튿날 이 소문을 들은 이병연이 그림을 구경하겠다고 찾아와서 시 한 수를 더 남겼다.”(142)고 써놨다. 그리고 그 글을 읽는 순간 화선지에 먹물 번져나가듯 번지는 ‘부러움!’ 그립다. 이런 사람들!

4) 김종서와 황희 “황희가 정승이 되었을 때, 공조판서로 있던 김종서는 천성이 뻣뻣하여 그 태도가 자못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의자에 앉을 때도 삐딱하게 비스듬히 앉아 거드름을 피우곤 했다. 하루는 황희가 하급 관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김종서 대감이 앉은 의자의 한 쪽 다리가 짧은 모양이니 가져가서 고쳐 오너라.’ 그 한마디에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사죄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뒷날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육진(六鎭)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는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운 줄을 몰랐는데, 그때 황희 대감의 그 말씀을 듣고는 나도 몰래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네.’ 정식을 한 꾸지람보다 돌려서 말한 그 한마디가 이 강골의 장수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게 했다.”(165) - 황희의 그 기지!

5) 매천 황현 “1910년 8월, 한일합방의 소식에 음식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전남 구례 월곡리의 집에서 ‘나라가 선비 기르기 5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자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라!’하는 유서와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아편덩이를 삼켜 자결하였다.”(176) - 아! 가슴 깊이 / 굵은... 길따란 / 살이 날아와 / 푸~ㄱ / 박히는 듯! / 무어라...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겨우 ‘기개!’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곤 뒤에 나온 루쉰의 글(179)을 보며 마음이 더 아팠다. “사실상 나라가 망할 때마다 순국하는 충신이 몇 명씩 늘어나지만, 그 뒤에는 아무도 옛것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오직 그 몇 명의 충신들을 찬미할 뿐이다.”(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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