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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힘, 듣기의 힘
다치바나 다카시.가와이 하야오.다니카와 순타로 지음, 이언숙 옮김 / 열대림 / 2007년 7월
평점 :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다양한 생각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치바나 다카시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심리학자인 가와이 하야오, 시인인 다니카와 순타로)의 강연과 토론을 보는 것은 다양한 측면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는 있었다. 먼저 ‘들어가는 말’을 세 사람이 각각 짧은 글로 써주었고, 두 번의 ‘강연’(가와이 하야오와 다치바나 다카시)과 하나의 ‘앤솔러지’(다니카와 순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심포지엄’이 소개된다.
한편, 다치바나 다카시의 경우, 처음에는 그의 ‘대단함’에 압도되는 느낌도 받았지만, 조금씩 더 접하게 되면서 그가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현대 과학’ 쪽에 치우친 모습... 앞서 읽은 그의 책인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도 ‘고전’에 대한 그의 독특한 견해를 보았지만, 첨단 과학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듯 보인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스모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밀면 밀어라, 당기면 밀어라.’ 미는 것이 스모의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카운슬러의 기본은 ‘말하면 들어라, 말하지 않아도 들어라.’라고 생각합니다.”(29) - 가와이 하야오의 말이다. 로저스의 ‘비지시적 상담’의 전형을 보는 듯... 하지만 가와이 하야오의 글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가 듣는 일에 있어서 상당한 베테랑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 늘 ‘들어주는’ 일로만 일관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느 선까지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배울 것이 있다.
2. “내가 보기에 일본의 카운슬러 중에는 승부사가 많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 모두 듣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때가 있다는 점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 이런 방법으로 이야기를 듣는 태도는 책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으면서 여러 정보를 듣는 셈입니다. 무언가를 읽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저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며 ‘행간 읽어내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행간 읽기’ 속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몰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미숙한 사람일수록 상대방만을 생각하고 자신이라는 존재는 전혀 여기에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저렇게 하면 되잖아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몰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몰입하면 그리 간단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몰입해 읽는다고 할까요. 단지 책 자체만 읽고서 ‘이 책은 별로야’라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몰입해 읽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책을 읽습니다.”(35-37) - 가와이 하야오가 이렇게 상담의 방식을 독서의 방식으로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독특해 보인다. 하지만 상당히 다탕성이 있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적이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 몰입해서 읽는다는 것, 비판하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우선 철저하게 저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 물론 그러면서도 분명하고 확실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필요하겠지...
3.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신과 물질]이라는 책이 탄생했는데, 이 경우에는 IO비가 100대 1 수준이 아니라 듣기와 읽기 양쪽을 합쳐 족히 1,000대 1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정도의 정보 확보라면 상당히 좋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투입할 경우 과유불급의 우려가 있으므로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만.”(52) - 다치바나 다카시는 입력(Input)대 출력(Output) 비율을 저작을 위한 자료 수집과 저작에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그의 독특한 방식(과학적인!)을 보는 느낌이다. 어쨌든, 많은 자료를 입력할수록 그것을 정리해서 나오게 되는 출력의 질(質)이 훨씬 좋아진다는 이야기다. 저작만이 아니라, 학문하는 자는 마땅히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을 무작위로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시인인 다니카와 순타로) 시(詩)를 쓰는 경우 다치바나 다카시의 경우처럼 단순히 IO비를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4. “단순히 귀로 듣는 것과 머리로 듣는다는 것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뇌에 전달된 신호가 어디로 들어가는가 하면 바로 뇌의 측두엽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 역시 최종적으로는 단순히 우리 뇌의 시각야(視覺野)에 활자의 영상이 맺혔다고 해서 그것을 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이해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듣기’의 첫 단계는 단순히 외부의 물리적 신호를 전기신호로 바꾸는 것입니다만, 여러 가지 정보를 하나로 모아 동시에 처리함으로써 비로소 ‘이해하기’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56, 57) - 과연 ‘뇌’에 대한 책을 쓴 다치바나다운 설명이다. 하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도 수긍 가는 이야기이다. 단순히 읽고 보는 것만으로 ‘이해’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
5. “내가 있고 싶은 곳은 깎아지른 절벽 위 / 그곳에 책 한 권만 가져가 / 소리내어 읽는다 / 바다와 하늘에게 인간이 쓴 책이라는 녀석을 / 읽어준다.”(74) - ‘앤솔로지’ 부분에는 시인인 다니카와 순타로의 시와 글들을 모아 놓았다. 마음에 콱 꽂히는 표현! ‘바다와 하늘에게 인간이 쓴 책이라는 녀석을 읽어준다’고!!!
6. “이 세상은 읽어야 하는 것투성이야 / 사람의 마음 읽기에 비해 / 책읽기는 누워서 떡먹기군”(85) - 순타로의 또다른 시의 한 부분! ^^;
7. “다치바나: 하지만 그처럼 아주 좋은 구절이 탄생하는 순간이란 아마 통찰의 한 순간이 있어서, 다니카와 씨의 머릿속에서 다듬고 다듬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 것이지요. 다니카와: 그렇습니다. 저 역시 잘 모릅니다.”(137) - 다치바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상당히 유사하다. 나는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붓이 가는 대로 글을 쓰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 편인데,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보면서 ‘퇴고’의 필요성을 느끼고 좀 더 ‘다듬는’ 일을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이 부분을 읽으니 내 원래의 생각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마음이 다시 움직인다. 이런 경우도 저런 경우도 다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순간적인 통찰력도 부인할 수 없고, 한편으론 끊임없이 고민하며 퇴고(推敲)하는 수고도 무시할 수 없고...
8. “가와이: 언어가 생기고 이어서 문자가 탄생합니다만, 문자가 없던 사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켈트족은 문자가 없었습니다. 켈트 연구가인 츠루오카 마유미 씨와 츠지이 다카시 씨가 대담을 나눈 책을 읽어보니, 켍 문명은 매우 수준 높은 문명이었는데 문자가 없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문자를 갖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가 있으면 편리할지언정 마음의 움직임을 한정짓는 단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산이라는 문자가 생기면 마치 산을 다 알았다는 듯이 생각합니다. 이 산이나 저 산이나 모두 같은 산이라는 개념을 낳습니다. 진보를 이루는 만큼 감성은 퇴화하는 것입니다. 산 하나하나를 보면서 느끼는 감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켈트는 바로 이런 감성을 발전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이유에서 문자를 갖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해 보는 이 견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미국의 선주민도 문자를 갖지 않았습니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세련된 감각입니다. 한 번 보고도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고 무엇이 약초인지도 쉽게 가려냅니다. 역시 우리와 전혀 다른 감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성은 문자를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문자문화가 우수한 면을 갖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수한 문자문화 속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164) - ‘하지만 문자가 있어야 이렇게 책도 쓸 수 있고, 그것을 읽는 것도 가능하지!’ 이 글을 읽으면서 바로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가와이의 말처럼 문자는 사상을 제한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자가 아니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상의 전달도 불가능해진다. 문자를 통해 그것 속에 녹아들어 있는 사상의 실마리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읽어 들이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행간을 읽어야 하고 몰입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냥 읽어서 10만큼 얻었다면 더 깊이 읽어서 50만큼, 100만큼 얻어야 한다. 문자를 사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도 더 많이 노력해서 그 문자로 하여금 자기 사상을 최대한 많이 실어 나를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문자를 갖지 않은 세련된 문화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가 가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