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일본 - 일본 귀족문화의 원류
모로 미야 지음, 노만수 옮김 / 일빛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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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일본적이다!

일본 사람이 쓴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와는 기본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 사람이 쓴 책들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지만 일본 사람들이 쓴 책들을 읽으면서 뭔가 우리와는 다른 일본 사람들의 독특한 시각이라고 느꼈던 것들 가운데 하나가 ‘실용성’이다.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헤이안 시대의 일본을 다룬 이 책은 다섯 장밖에 되지 않지만, 헤이안 시대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부딪힌 것은 이름!

일본식 이름에 생소한 나로서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이름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행동들이 묘사되는데(더구나 1장은 정치와 인물을 다루고 있어서 기본적인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누구인지 생각해 내지를 못해서 계속 앞장을 들춰 보아야 했다.

이래서야 이 책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겠다는 불안감 같은 것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씩 읽어가면서 그 불안감은 다시 막연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무슨 (장르의) 책을 읽고 있는지가 아득하게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도 굳이 꼭 하나 집어서 말한다면 소설의 ‘설정집’을 읽는 듯한 기분!

시대적 배경, 인물적 배경, 소설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자질구레한 상황들까지도 작가의 손에 의해서 설정되어 있고 지배당하고 있다는 느낌!

이러한 배경을 충분히 숙지한다면 헤이안 시대의 일본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한결 쉬워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으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보았던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 영화나 소설들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배경집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

그래서 이 시대와 관련된 무언가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기초적인 지식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와 인물, 음식남녀, 신도와 불교, 문자와 문학, 다시 쓰는 겐지 모노가타리 등 다섯 장에 불과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마치 잡학 사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폭넓고 다양하게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말.

생각보다는 좀 더 지루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의 재미는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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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다른만화 시리즈 1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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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국,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다른 책에서 ‘하워드 진’이라는 이름을 자주 보게 되었지만, 정작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마친 기회가 되어서 관심 있게 보았다.

 

이 책은 9.11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후에 정치지도자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했고 그들을 보자 나는 또 다시 두려워졌으며 그들의 말에 넌더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앙갚음, 복수, 응징을 떠들어 댔다. 또 지금은 전쟁 중이라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지난 20세기의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수백 년에 걸친 앙갚음과 복수와 전쟁, 수백 년에 걸친 테러리즘과 그에 맞선 반 테러리즘,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했던 어리석은 역사로부터 정말 하나도 배운 것이 없었다. … 그래서 지금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고 있고 불가피하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왜냐하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폭격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12, 13)

“미국 정부는 사고방식을 새롭게 바꾸는 대신 9/11을 제국이 또 한 번 발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사실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침공은 미국이 계속 저지르는 행위 패턴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 미국은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민주주의라는 축복을’ 다른 나라와 ‘낙후된 사람’들에게 전해 줄 권리를 신에게서 받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16)

그렇다. 김준형은 그의 [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에서 이 부분을 지적했었다. 그것이 분명 ‘침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그냥 ‘전쟁’으로 부르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미국의 스타일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계속되는 전쟁 지상주의자 테디 루스벨트(38), 앵글로 색슨족 옹호자 윈스턴 처칠(49), 음모의 실행자 아서 맥아더(77) 등의 이야기들은 나에게 연속타를 먹였다. 그나마 위대한(?) 지도자들로 알고 있었던 이들이 내가 알고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아니, 사실 나는 그들의 이름과 외부로 드러난 아주 일반적인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했었을까?

저자는 “결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논한다(9, 14). 하지만 그것은 몽상가의 이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진다. 책 전체에서 나열되고 있는 거짓들의 행렬(!)은 나를 절망에 밀어 넣는다. 이 책에는 미국의 정부와 언론의 계속되는 거짓말들이 계속해서 나열된다. 대충 적어보았는데도 (34, 52, 53, 59, 66, 69, 77, 80, 84, 96, 97, 120, 135, 151, 180, 248, 267, 278) ⇐ 이 정도나 많다!

 

아! 하워드 진, 그는 천상 선동가다! 안 그래도 견딜 수 없는 내용들을 주욱 나열하면서도, 거기에 설상가상 멀리서 지켜보던 백인 장교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스페인 국기를 탈취한 흑인 병사에게서 그것을 가로챈 사건(58),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여 체포된 늙은 덕호보리교도를 고문해 죽게 하고 시신에 군복을 입힌 사건(107)을 읽을 때에는 분통이 터지고 속에서 울컥 하고 올라오는 그 생소한 감정을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가진 건 두 주먹 밖에 없는데 어디론가 뛰어 나가 강렬하게 항의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고민 중이다. 중학생인 딸에게 이 책을 읽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내 딸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망설여진다. 하워드 진이, 그가 소개하는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이, 미국이… 나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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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좌파 선언의 전략
사민+복지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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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대했던 것만큼 생각이 확연하게 ‘정립’되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의 글을 모아 놓은 것이라 더 그런 것 같다. 이전에 읽었던 후마니타스의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같은 경우, 여러 사람과의 인터뷰와 글들을 모아 놓았어도 이런 정도의 ‘위화감’은 없었다. 나름대로 주제의 흐름이 있었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주제 자체가 생소하고 어려워서 그런지, 쉽게 읽히지도 않았고 모종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실려진 글들이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파악한 것 몇 가지가 있다.

-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와 다르다는 것: 나만의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생각이 있다. 책을 펼치며 처음 대하게 되는 조원희의 글에 계속해서 나오는 ‘인민’이라는 표현도 눈에 거슬린다. 이 표현은 이후에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좌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 민주주의를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민주제도 안에서 활동하고자 한다는 것: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반면, 사회주의는 아니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사회주의+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둘의 양립은 장점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약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사실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기대를 했는데, 이 책은 이 부분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 사회민주주의는 특별히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것: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반발하지 않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반발하는 듯 보인다. 그것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본주의가 갖는 한계 내지는 폐해에 대한 강한 반발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완벽한 제도나 체계가 아닌 한 분명 한계와 폐해를 가질 수밖에 없고, 사회민주주의는 바로 이 점을 타깃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 사회민주주의는 복지 국가와 시민 사회, 그리고 환경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 NL과 PD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오지만 어쩌면 이것은 ‘정권’ 창출을 위한(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수단으로서 ‘복지’와 같은 주제가 강조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전혀 관심 밖의 일을 ‘수단’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복지나 환경의 문제는 사회민주주의에서 기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이기는 하다. 하지만 최근 ‘본래의’ 관심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관심사에 전심전력하는 것은 결국 ‘정권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복지나 환경, 시민 사회에 대한 강조는 분명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시민 사회에 대한 마지막 글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웠지만…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상류층에 밀착된 정권이 형성된 경우에는 더더욱! 서민과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이 존재해야하는 필요성은 인정된다. 그리고 그것이 폭력적인 방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양하는 idea(이상향)을 이루고자 정직하게 전진해 나가는 모습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 부분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주장을 ‘대화’로 풀어나가고자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하고 지지한다. 비록 NL과 PD의 분열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이 적절한 정당을 형성하고 적합한 방식으로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은 여운형과 특히 조봉암에 대한 소개였다. 새로운, 흥미로운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현안인 산업 공동화와 출산율 저하, 대량 실업과 빈부 양극화 등의 문제를 이미 1930-40년대에 겪었다. 생활 정치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들은 대안 없는 혁명주의나 철학적 개인주의로 도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고자 싸우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혁명적인 추상적 인민’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현실의 인민을 발견했다.(29-30) -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올린 두 가지. ① 아들 블룸하르트, ②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의 개념.

 

2. 마르크스는 철학의 근본 문제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는데…(30) -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철학! 내가 보기엔, 너무 이론에 치우치는 것도 별로 좋지 않고, 너무 실천에만 치우치는 것도 별로 좋지 않다.

 

3. 사회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일찍이 마르크스가 인류사의 궁극적 목표로 제시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화해와 조화를 이루는 사회, 즉 공동체주의(communism)의 이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는 교조적인 공산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길을 달리하는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다. … 실질적 자유와 평등, 그리고 연대는 사회민주주의의 3대 기본 가치다.(33, 36) - 사회민주주의를 잘 설명해주는 명제로 보인다.

 

4. 자본주의적 경쟁 원칙만이 지배하게 된다면 사회와 개인은 피폐해지고 ‘자유’와 ‘평등’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36) - 자본주의의 한계와 폐해를 잘 지적해 주었다. 문제는 사회민주주의가 과연 이러한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5. 이렇듯 모든 시민이 복지국가 혜택을 누릴 수 있기에 북유럽의 보편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은 다른 모델보다 비교적 높은 세율에도 불구하고 조세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납세 의무가 잘 이행되고 있다.(42) - [부동산 계급사회]를 읽으면서 심각하게 생각했던 조세의 문제와 관련해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부자들에 대한 반발 심리에서 그들의 것을 무조건 빼앗듯이 조세하는 것은 지혜롭지는 못하다.

 

6.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지상주의적 민주주의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시 한다. 또한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으로 실현되려면 제한 없는 사유재산권, 계약의 자유, 이윤 추구 동기 이외엔 별다른 규제가 없는 시장경제 시스템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적 민주국가에서는 전체 사회의 지속 가능성보다는 시장과 경제 성장을 강조한다. 따라서 일상생활과 사회/경제/정치/문화 영역에서의 기본권 보장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영국을 제외한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로 대표되는 사회민주주의는 ‘조정된 자본주의 시장경계’와 복지 제도를 통해 독립적 개인인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권을 사회 연대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48-49) - 여기서 말하는 것과는 무관해 보일 수도 있는데… 어떤 모임에서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에서 본 내용과 관련하여, “개인이 종교적인 이유나 신념 때문에 집총 거부를 한다면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이상한 사람이 된 적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군대를 가지 않겠다는 것은(그것의 실제적인 이유와 상황을 ‘불문’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어찌 되었든 결론은 ‘군대를 가야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를 제외한 다수의 생각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우익 나는 좌익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내 쪽이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시 하는 우익이요, 그들이 나와는 반대에서 국가라는 ‘집단’을 강조하는 좌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좌익이냐 우익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실상은 좌익인 우익, 또는 우익인 좌익도 많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7. “부유한 자산 계층의 소득 중 일부를 세금으로 징수, 제3자(예컨대 빈민)에게 재분배하는 현대 국가의 보편적 기능은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는 사유재산권 침해에 해당된다. … 이에 따라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정치 영역에서만 인정되는 개념으로 전락한다. …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타도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산주의(혁명적 사회주의)와 다르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사회민주주의가 고민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권리 실현이라는 과제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다.”(51, 52) - 앞에서 나왔던 조세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지적된다. 여기에서 ‘정치로서의 민주주의’와는 별개의 체계인 ‘경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이 제시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 생각된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촌논들의 제국주의]와 [부동산 계급사회]가 절로 떠올랐다.

 

8. 그런데 “대타협은 말이 되는데, 한국에서는 조건이 안 돼서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분들은 어떤 대안도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안이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이 있게 마련인데, 그 조건이 이미 충족되어 있는 경우는 없거든요, 정치 부문이나 운동 세력이 그런 사회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창출해내야 하는 겁니다.(146) - 장하준 교수의 말인데, ‘조건을 적극적으로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은 무척 공감되는 말이다.

 

9. 진보적인 정당과 시민단체, 학자들이 아무리 “멋진 복지국가를 만들어 드릴테니, 세금을 더 냅시다!”하고 외쳐도 대다수 국민은 외면하고 믿지 않는다. … 그동안 극빈층과 저소득 계층 시민들(예컨대 중간 소득 계층)은 별다른 복지 혜택을 제공받지 못하면서 세금만 뜯겨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180) - 복지와 조세와 연관된 딜레마를 소개한다. 이런 점을 본다면 이들이 제시하는 ‘선 복지 확대, 후 조세 확대’는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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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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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지 않은 책이다!

워낙 경제 쪽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터라, 아주 기초적이고 원론적인 내용 외에는 접한 적이 거의 없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를 읽으면서 경제 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석훈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경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흥미 있게 보았고, 내친김에 이 책까지 보게 되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또 읽어가면서 점점 마음이 힘들어졌다.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점점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애국심이 투철해서는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이기에 경제적인 이유나 전쟁이 날 것이라는 이유로 나라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40중반에 다다른 나이를 먹어가면서 처음으로 ‘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저자는 “서울 밤하늘을 지배하는 고층 아파트 옥상의 조명을 보면서 필자는, 21세기 대한민국 사회가 아파트라는 새로운 신을 모시기 시작한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19p)고 밝혔다. 저자가 “‘아파트신’과 ‘빌딩신’과 ‘토지신’을 믿는…” 하는 이야기를 읽을 때만 해도 그냥 ‘원론적인 동의’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웬걸! 갈수록 태산이다. 원래가 통계 같은 것을 싫어하는 내 앞에 이런 저런 통계 수치와 도표들(저자는 그것도 한참 줄인 숫자라고 했지만)을 쏟아 내놓기 시작하는데, 나에게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내용들뿐이다.

서민들의 주택 마련을 위해 많은 집을 지어서, 이제는 국민 모두가 집을 한 채씩 소유해도 100만 채나 집이 남은 이 상황 속에서, 아직도 국민의 절반이 셋방살이를 떠돌아야 하는 현실. 한 사람이 최고 1,083채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 ‘투기 불로소득’을 얻으려 집을 여러 채씩 소유한 이들에게 법과 제도로 세금 특혜까지 주고 있는 국가. 주거 상황이 개선되었다는 기분 좋은 통계는 한마디로 ‘무의미한 평균치’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돈, 내 땅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떵떵거리는 외침 앞에 주눅들 수밖에 없는 나, 우리, 현실… 하지만 그것이 꼭 ‘상대적’인 박탈감에 불과한 것일까?

저자는 외면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도록 나를 몰아세운 후에, 끝에 가서야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책을 덮지 않고 끝까지 읽기를 잘한 걸까?) 나름대로 몇 개의 계급으로 나눈 후 부동산 정책은 제1계급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외칠 때에, 전/월세 사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10년은 이사 가지 않아도 되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줘야 하며, 전/월세 인상률이 5% 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속이 후련함을 느꼈다. 좋은 제안들이다!

하지만 다시금 엄습해 오는 불안함!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역대의 정권들이 모두 수박 겉핥기식의 부동산 정책을 해왔는데, 새로이 정권을 잡은 이들은 이전의 어느 정권보다도 더 1계급에 가까운 이들인데 이들에 의해서 이러한 정책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개혁 의지를 가졌다 할지라도 특권 계층의 반대를 뿌리치고 이러한 정책을 실현해 낼만한 지도자가 누구인가? 정치는 백성들 ‘모두’가 배부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저자가 군데군데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땅은 물이나 공기처럼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헨리 조지의 토지 공개념이나 토지 단일세와 같은 것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던 것은 아쉽다.) 문제의 분석과 대안의 제시는 좋았지만 그것의 실천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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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0-1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리뷰 당선작이었군요. 늦게나마 축하합니다^^

자유혼 2008-10-22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합니다! ^^ 모르고 있었네요...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 라면 교양 2
하승우 지음 / 뜨인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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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전쟁과 관련하여 우리가 무시하고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려 하는 내용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면서… 저자가 계속해서 지적하듯이, 우리는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과 반공 교육에 이미 세뇌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상론(理想論)에 치우쳐 현실을 무시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전쟁과 평화, 군대와 군 입대 거부라는 문제를 논하면서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풀어가기 어려운 난제(難題)이다. 저작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점을 궁금해 하면서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가면서 책의 제목과 내용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 이 책이 ‘군대와 평화의 관계’에 대한 내용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 책의 내용은 주로 병역 거부와 병역 기피에 대한 내용, 그리고 대체복무에 대한 내용들을 채워져 있다. (가끔씩 전적인 평화주의에 입각하여 대체복무를 미흡하게 여기는 발언도 나온다. 138p) 소제로 ‘병역 거부자 이야기’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책 제목이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기보다는 관심을 끌기 위한 의도로 붙여진 느낌이다. ‘군대가 없으면’보다 ‘군대에 가지 않으면’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듯…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것에 비해 책의 편성이 다양해서 읽어가기가 쉬웠다. 각 장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Peace & People 난도 좋았다. 특히, 헬렌 캘러의 이야기와 토머스 홉스의 이야기는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기대하고 생각했던 만큼 흡족한 결론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에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쯤은 읽으면서 생각해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 된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착한 사람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을 무조건 쫓아내고 벌하는 것은 좋은 방법일까? 나와 생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공동체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올바를까? 친구나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쓰는 것이 진정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 혹시 그들을 더 심한 고통으로 밀어 넣는 건 아닐까?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항상 좋은 방법일까? 더구나 신념 때문에 무기를 들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체를 위해서 무기를 들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르는 행위가 아닐까?(14) - 바른 지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 논지가 사형반대론자들의 주장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2. 일본의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사라진 뒤에 분쟁이 줄어들기는커녕 예전이라면 ‘침략’이라고 불렸을 군사 작전이 ‘인도적 개입’으로 불리고 있다며 개탄했다.(16) - 이 책의 논지는 많은 부분에서 얼마 전에 읽었던 우석훈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나, 같은 라면 교양 시리즈 1권인 김준형의 [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과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3. 국제분쟁 전문가 김재명은 “전쟁의 첫 희생자는 언제나 ‘진실’”이라고 얘기한다. 전쟁은 평화나 민주주의, 자유 등 여러 가지 대의명분을 갖고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약자와 소수자를 짓밟고 강자의 배만 불린다. 그런 점에서 고대 로마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키케로는 “가장 정당한 전쟁보다 부당한 평화가 훨씬 낫다”고 했다(17)

4. 의무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군대는 성인 남자들, 그것도 신체 건강한 남자들에게만 궁방의 의무를 지운다. 만일 모든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면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들도 다른 형태로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모든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규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공동체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 사회의 지도층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데도 국방의 의무가 모든 이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사기가 아닐까?(23) - ‘모든’ 국민의 의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참 말 잘한다!’ ‘올바른 지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평등한 의무라는 것…

5. 군대에 가지 않는다고 나라나 공동체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제 국방의 의무는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유독 궁방의 의무에만 신성함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개개인이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51) - 병역 거부와 관련된 저자의 일차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합리적으로 보인다.

6. 군대가 없다고 해서 다른 나라들이 함부로 침략하거나 식민지로 만들지는 못한다.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 오히려 그 나라를 침략할 마땅한 명분을 찾기 어렵다.(95) - ‘평화’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은 아닐까? 중립을 지킨다는 것만으로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군대가 없어도 평화가 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군대를 없애고 중립을 지킨다고 해서 평화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한 쪽의 논리를 지나치게 밀고 나가면 다른 쪽을 놓치기 쉽다.

7.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 평화롭지 않다면 그것은 평화일 수 없다.(98) - 이 면에서 저자는 책의 뒷부분에서 소개하는 톨스토이의 사상(159pp)을 잇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무폭력주의. 물론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현실성을 가질 수 있을까?

8. 역설적이지만 이렇게 상비군이 생기고 군대의 규모가 커지자 전쟁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잦아졌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조달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됐기 때문이다.(108) - 저자의 지적처럼 이것은 ‘악순환’이다. 문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겠냐는 점이다. 저자의 주장처럼,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먼저 총을 내리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까? 저자가 책의 뒷부분에서 소개한 함석한 선생의 말처럼, 이것은 물리적인 총의 문제가 아니라 ‘혼’의 문제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포괄적’이어서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실질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에게는 저자가 좀 미흡하게 여기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복무(대만의 경우가 매혹적이다!)가 보다 더 실질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9. 아마 소로(Thoreau)는 국가가 개인의 삶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개인이 왜 국가에 복종해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집단이 더 중요하다면 국가보다 더 큰 단위인 인류를 위해 국가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112) -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다!

10. 한 사회의 의견은 다수와 소수로 나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할 때에만 발전할 수 있었다.…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양심과 신념을 짓밟으면 안 되고, 전체의 이익을 우해서라도 소수의 주장은 존중되어야 한다.(118)

11.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134)

13. "살아있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면대에 난 구멍만큼밖에 생명력이 없다.“(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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