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 - 진화에 맞선 동물들의 유쾌한 반란
외르크 치틀라우 지음, 박규호 옮김, 루시아 오비 그림 / 뜨인돌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흥미로운 책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화=진보’의 도식이 틀렸음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오히려 진화가 ‘진보’가 아닌 ‘다양성’을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저자는 소제목으로 붙여 놓은 것처럼 ‘진화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진보라는 진화의 방향’에 맞서서 그것을 수정하려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창조론자의 입장에서는 ‘진화의 방향’보다는, 처음부터 부여된 ‘종(種)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책이 내용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고, 그와 관련하여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자연에 오류란 없다. 오직 너희에게 있을 뿐.(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만능천재가 보기에 자연의 삼라만상은 지극히 완벽해서 어디가 잘못됐다고 의심할 만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의심은 그 원인이 객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있어야 했다. 바꿔 말해 자연에서 어떤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자연 탓이 아니라 우리의 엉성한 인식기관 탓인 것이었다.”(9) - 그럴듯한 주장... 늘 ‘자연’에 문제가 있고, ‘우리(인간)’은 정확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反)하는 ‘발상의 전환’!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 된 것(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신선하다!

2. “환경에 적응한 돌연변이 개체들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자신의 변화를 물려준다. 이런 변화는 세대를 거쳐 계속되며,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끝까지 살아남은 강력한 돌연변이는 결국 새로운 종으로 바뀐다. ‘적자생존’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원칙은 그러나 온갖 오해의 산실이 되고 만다.”(10) - 과연 ‘돌연변이’가 유전되는가? 이것은 그저 하나의 ‘가설’일 뿐, 증명된 바는 없다. 오히려 돌연변이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가설’은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 “특히 심각한 오해는 진화하면서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다. 소위 진화의 법칙은 권력욕과 폭력을 강자의 권리로서 포장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어차피 곧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패배자들이 이별가쯤으로 축소, 왜곡시키는 방편으로 되풀이해 인간사회에 적용한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은 진화와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많은 면에서 그 반대다. 만약 인류가 오로지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면 도덕, 철학, 미술, 음악, 종교처럼 비자연적이고 바이오네거티브적인 현상은 물론이고 의료보험 같은 사회제도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11) - 이것이 저자의 기본 전제이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조금 삐딱해 보이기는 하지만, 진화에 대한 ‘맹신’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4. “다윈의 이론을 진보 개념으로 보는 시각 역시 대표적인 오해에 속한다. 그에 따르면 생명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점차적으로 단세포에서 다세포를 거쳐 식물로, 동물로 그리고 인간으로 꾸준히 상승, 발전했다고 한다. 인간은 진화의 절정, 즉 지구상에 출현한 모든 것들 중 최고의 위치에 선다. 신의 창조행위 자체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을 ‘창조의 절정’으로 보는 특권적 가설이 슬그머니 들어앉은 형국이다. 이 구도에는 허영심이 작용한 게 분명하며 사실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열등한 존재다. 약하고 느리고 다치기 쉬우며, 다른 동물에 비해 잘 듣지도 모지도 못하고 냄새도 잘 못 맡는다. 인간이 유일하게 나은 점은 두뇌의 성능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진화에 유리할까/ ‘두뇌 실험’이 지금까지는 제대로 작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본격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수천 년에 불과하다. 이것은 진화의 나머지 기간과 비교해볼 때 일생에서 단 몇 초 정도에 불과한 시간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이 변화를 보면 인간과 인간의 뇌는 스스로는 물론 지구 전체까지 파멸로 끌고 갈 수도 있는 괴이한 파괴 충동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절대로 진보가 아니며 오히려 면도날 위에서 스스로의 파멸을 희롱하며 춤추는, 진화의 위태로운 유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12) - 진화의 기본 방향으로서의 ‘진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인간을 독특한 존재로 규정 지워주는 ‘두뇌’ 역시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며 오히려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것이 진화가 인간에게 저지를 ‘고급 오류’라고 말하며(14p), 그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에게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사실상 이 책은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고급 오류’의 목록이다.

5. “따라서 우리는 진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진화가 ‘무자비한 생존투쟁의 장’이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그보다는 여러 면에서 진화를 누군가가 지구상에 마련해놓은 현란한 게임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지화생물학자들은 이제 선택이론보다 게임이론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는다’라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의 생물학 교수 볼프강 비저는 설명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가장 잘 적응한 개체, 즉 적자만이 살아남는 게 아니며, 전혀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그저 게이머로서 진화에 ‘참가’하고 있는 생물들도 많다는 걸 알고 있다.”(14) - ‘게임 이론’은 처음 듣는 내용이다. 이런 것도 있구나! ‘선택 이론’과 ‘게임 이론’... 그런데 ‘게임 이론’이 더 우세해지고 있다고? 게임이라...

6. “말레이시아의 우림에는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라는 종의 개미가 있다. 다른 종의 개미들은 홍수가 나면 뗏목을 만들거나 배수로를 트거나 모래주머니 비슷한 것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는 식으로 대처한다. 아니면 아예 보따리를 싸서 집을 옮긴다. 하지만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 개미의 홍수 대책은 이와 사뭇 다르다.

물이 들어차기 시작하자 개미들은 먼저 자신들의 널찍하고 평평한 머리를 사용해 입구를 막아보려 애썼다. 잠시 후 몇몇 개미들은 전략을 바꿔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기를 15분쯤 지나자 몇 마리의 ‘폭음증’ 개미들이 대나무집 밖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대나무집 입구에서 몇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다 오줌을 쌌다. 이렇게 배설한 물의 양은 마리당 평균 0.66마이크로리터 정도였다. 지름이 0.8밀리리터도 체 안 되는 아주 적은 양으로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카타울라쿠스 종은 한 집단에 2천 마리 정도의 개미가 함께 살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셋째 날에 그들은 집에 들어찬 물을 다 빼냈다.’

하지만 이것이 효과적인 전략인지는 의문이다. 배수로를 트거나 제방을 쌓거나 뗏목을 만드는 등의 조치가 훨씬 더 효율적임은 물론이다. 그러니 익사하는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 개미들이 다른 종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도 이 개미들은 멸종위기를 맞지 않는다. 엄청난 번식률 덕이다. 즉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 개미가 이제껏 살아남은 것은 그들의 번식능력 덕택이지 잘 퍼마셔서 그런 게 아니다.”(19~) - 베르베르의 [개미], 혹은 그의 [~백과사전]의 한 대목을 보는 기분이다. 미련하게 구는데도 멸종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미련함 때문이 아니라, 왕성한 번식률 때문이다. 이 개미들은 적자가 아니다.

7. “가터얼룩뱀이 즐겨먹는 동물 중에 도룡뇽의 일종인 캘리포니아영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녀석에게는 테트로도톡신이라는 신경독이 있다. 테트로도톡신은 복어에 있는 독인데 함부로 먹었다가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영원은 복어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테트로도톡신을 체내에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맹독성 동물로 분류된다. 가터얼룩뱀은 하필이면 이런 위험한 녀석을 즐겨먹는 것이다. 물론 식사 중에 비명횡사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진화과정에서 먹잇감의 독에 대한 저항력을 어느 정도 기르기는 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어느 정도’라는 표현이다. 캘리포니아영원의 독으로 죽지는 않지만 식사 후 가터얼룩뱀의 행동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난다. 뱀은 동작이 엄청나게 느려져서 마치 TV의 느린 화면으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우스운 광경일 수도 있겠지만 새들의 손쉬운 공격대상이 된다는 점에서는 심각하다 할 수 있겠다.

가터얼룩뱀은 왜 독이 든 캘리포니아영원을 식단에 굳이 포함시켰을까? 어쩌면 이 역시 앞에서 언급한 진화의 ‘유쾌한 궤도이탈’이 아닐는지. 얕은 바다에서 편하게 청어 떼를 잡아먹으며 살아도 충분한데 굳이 심해로 들어가 대왕오징어와 사투를 벌이는 향유고래와 마찬가지로, 가터얼룩뱀도 쉽게 포획할 수 있고 위험하지 않은 먹잇감들이 주위에 널렸는데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영원과의 한판을 피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무의미한데다가 위험천만이지만 바로 그 점이 이 녀석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위험한 모험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 인간이 제일 잘 알 터!”(26~) - 뱀의 모험 정신...

8. “뒤영벌은 날개에 비해 몸집이 너무 커서 날아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인 곤충이다. 나는 동물은 이동을 위한 에너지 소비의 방식과 관련해서 다른 생물들보다 시간 계산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뒤영벌은 이런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단물이 풍부한 곳에 도착하면 이 곤충은 한 화초에서 대개 열 개 정도의 꽃봉오리를 돌아다니며 꿀을 모으며, 다른 화초로 이동할 때도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별로 영양가가 없는 지역에 갔을 때는 두 개 정도의 꽃봉오리를 뒤지고 난 다음에 곧바로 좀 더 풍요로운 곳을 찾아 멀리까지 이동한다.

때때로 뒤영벌은 치명적인 계산 실수를 저지른다. 몇 년 전에 독일 생물학자들은 뒤영벌들이 보리수나무 밑에서 자주 떼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팀의 눈에 띄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죽은 벌의 몸속에 비축돼 있어야 할 에너지원이 대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평소 뒤영벌의 체내에는 17마이크로몰의 당분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보리수나무 밑에서 수집한 표본들의 수치는 7마이크로몰 정도에 불과했다. 이것은 목숨을 지탱하기에도 힘든 양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 곤충들은 굶어죽은 것이다.

보리수 꽃은 원래 한 송이당 0/7밀리그램의 비교적 많은 단물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보리수는 늦게 개화하는 나무여서 7월이 돼야 꽃이 만발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 나무의 새 고향인 도심공원에는 이 시기에 곤충들에게 이만큼 풍성한 단물을 제공해주는 꽃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변의 온갖 곤충들이 다 이 나무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꿀벌 등 에너지소비가 적은 다른 곤충들은 여기서도 충분한 양분을 얻을 수 있었지만 뚱뚱한 뒤영벌은 그렇지가 못해서 보리수나무 밑에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34~) - 지혜로운 곤충의 어리석음...

9. “코알라의 특징은 오로지 유칼리나무 잎사귀만 먹는다는 독특한 식습관이다. 그것도 아무 유칼리나무나 좋아하는 게 아니다. 약 700종에 이르는 유칼리나무 종류 중에서 이 동물의 식단에 오르는 것은 몇 안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겨우 두세 종의 나무만 선택 받는데 그것도 일정 정도 이상으로 자란 것만을 먹는다. 그야말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입맛이다.

유칼리나무 잎의 질긴 섬유질은 코알라의 맹장을 굉장히 비대하게 발달시켰다. 다 자란 코알라의 몸의 크기가 고작 80센티미터 정도이지만 맹장은 그보다 세 배나 s더 길다. 코알라의 맹장 내부에는 수십억 마리의 미생물들이 서식하는데, 이들의 유일한 활동은 소화기에서 넘어온 유칼리나무 잎의 섬유질을 최대한 잘게 분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코알라는 영양가가 별로 높지 않는 유칼리나무 잎에서 최대한 많은 열량을 확보한다. 양분의 일부는 길게는 한 달이 넘도록 맹장 안에 머물면서 장내의 미생물들에게 충분한 일거리를 제공한다.

코알라는 이 미세한 소화 도우미들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먹는 ‘별식’ 덕택에 얻게 되는데, 그 별식이란 다른 아닌 어미의 특수한 배설물이다. 새끼가 주둥이나 앞발로 어미의 항문을 자극하면 나온다. 그냥 똥과 달리 이것에는 미생물과 수분이 매우 풍부하다. 그러니까 아기코알라를 위한 유산균 요구르트인 셈이다. 이렇게 특수 요구르트를 먹어서 미생물들을 장내에 확보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코알라는 유칼리나무 잎을 유일한 양식으로 삼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코알라는 지나친 편식과 운동부족 탓에(코알라는 모든 종류의 운동과 심지어는 섹스까지도 귀찮아한다) 질병에 몹시 취약하다. 성병, 전염병, 방광염, 호흡기질환, 충치, 설사, 변비, 위장병, 암, 건조증, 근육위축증 등등 코알라의 몸은 질병백과사전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허약한 동물이 여태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37~) - 생긴 것만이 아니라 여러 모로 신기한 동물...

10. “스트레스가 우리 인간에게 특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신속하게 해소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상사와의 갈등이나 파트너와의 다툼으로 생긴 화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동물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개들이 불과 몇 분 전에 제 동료로부터 심한 타박을 받은 참인데도 으르렁 소리까지 내가며 맛있게 밥그릇을 비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마음을 풀고 평정심을 되찾는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달콤한 낮잠도 빼먹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이라면 수면제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가능할 만큼 깊은 잠에 떨어진다.”(51) - 그래서 사람일까?...

11. “하지만 동물들이 다 그렇다고 섣부르게 단정 짓지는 말자. 특히 사회생활이 잘 발달된 동물들은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개중에는 스트레스에 대단히 예민한 놈들도 있다. 튜파이가 바로 그렇다. 튜파이는 크기가 다람쥐만하다.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의 생물학자 프랑크 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튜파이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 동물은 모든 종류의 정신적 자극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좀처럼 쉽게 회복되지 못한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한다. 이것은 스트레스 연구의 대상으로 매우 이상적이다.

게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울은 논문에서 튜파이가 몇 번이고 혈액을 채취해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다른 자극에는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피를 뽑을 때만은 예외적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보통 동물들은 무언가에 찔릴 때 굉장한 위협을 느낀다. 그런데 튜파이는 다른 모든 자극에는 예민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바늘로 찌를 때는 그렇지 않았다. 경험 많은 실험쥐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하니 진화과정에서 튜파이j에게 어떤 특별한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밖에도 스트레스 반응을 금방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스트레스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이다. 튜파이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꼬리털이 곤두서는데, 스트레스의 강도가 심할수록 더욱 빳빳해진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실제로 튜파이의 ‘꼬리털이 곤두선 정도’를 측정해 스트레스의 강도를 판단하는 데이터로 활용한다.

그러면 튜파이의 꼬리를 곤두서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도 이 동물은 매우 특이한 면모를 보인다. 가령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마리의 수컷이 싸워 강자가 약자를 이겼을 경우 패한 녀석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패자가 그 후로 승자의 존재를 더는 견뎌내지 못한다는 면에서 유별나다. 패자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바닥을 기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진다. 유일한 구원은 승자를 그 녀석의 곁에서 떨어뜨려 놓는 것뿐이다.

짝짓기에서도 튜파이는 매우 특이한 행동방식을 보인다. 튜파이는 일부일처를 고수하는 몇 안 되는 동물들 중 하나다. 배우자 선택에는 냄새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두 동물 사이에 관계가 발생하려면 좋은 냄새를 풍겨야 한다. 처음 마주쳤을 때 대부분은 해피엔드로 끝나며, 둘은 화목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튜파이의 냄새 취향을 무시하고 작위적으로 두 마리를 결합시키면 이들의 관계는 자주 파경으로 치닫는다. 이렇게 불행한 튜파이 부부는 강력한 스트레스 징후를 보인다. 즉 잘 먹지도 않거니와 먹을 때도 함께 자리하는 법이 없이 한 쪽이 잠들었을 때만 다른 쪽이 입에 음식을 댄다. 행복한 튜파이 부부를 따로 떼어 놓으면 그들은 곧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꼬리털이 곤두서고, 모습을 감추고 잘 먹으려 들지도 않으며,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게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있는 듯이 보인다.

‘냄새를 통한 배우자 선택’이라는 것이 가장 우수한 상대를 고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강력한 후손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말이다. 이야기가 너무 딱딱하고 계산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진화 자체가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걸 어쩌겠는가. 아니면, 혹시 진화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작용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진화는 슬픔이나 지조, 패배로 인한 죽음 같은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사치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튜파이 같은 동물에게 너무 성급하게 로맨스를 부여해서도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이 녀석들은 전혀 다른 행동도 하기 때문이다. 화목하게 생활하는 튜파이 부부도 주변에 자식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정한 수가 넘으면 그들은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다. 수컷이 그럴 때도 있고 암컷이 그럴 때도 있는데, 이들 튜파이 부모에게서는 자식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슬픔도 찾아볼 수 없다.”(52~) - 사람과 너무 닮은...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섬뜩하다. 한 편의 괴기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

12. “알바트로스는 두말할 나위 없이 비행의 달인이자 창공의 지배자다. 그러나 이 새가 이륙하는 장면이나 착지할 때의 모습은 완벽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알바트로스의 무거운 몸(12kg)이 땅에서 떠오르려면 최소한 시속 12Km 이상의 맞바람이 필요하다.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알바트로스는 육지를 떠날 수가 없는데, 이는 규칙적으로 먹이를 공급받아야 하는 새끼 알바트로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알바트로스는 바람이 언제 필요한 속도에 도달하는지 미리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새는 헛된 이륙시도를 계속해서 되풀이해야 하는데, 이때 시간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낭비된다.

바람 속도가 적정 수준에 도달했다고 해서 알바트로스의 이륙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거대하고 무거운 날개를 움직여야 하는 이 새는 멀리뛰기 선수처럼 잘 닦인 몇 미터 이상의 도움닫기 구간을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야 한다. 숏다리에다 발에 물갈퀴까지 달린 알바트로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순간적인 에너지 소모도 엄청나다. 평상시 알바트로스의 심장은 인간의 그것과 비슷한 속도로 고동치지만, 이륙 때는 분단 230번까지 박동수가 치솟는다. 만약 우리가 운동스트레스 테스트에서 이 정도의 심박동수를 보인다면, 의사는 곧바로 테스트를 멈추고 우리를 침대에 뉘일 것이다. 그 정도의 심장 부담은 알바트로스에게도 심각하다. 이륙한 뒤 알바트로스s의 심장이 다시 안정되기까지는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하늘로 막 날아오른 알바트로스의 비행 모습이 여유롭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심장이 터져버리기 직전의 심장병 환자나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반대로 착륙할 때의 알바트로스에게는 정형외과 의사가 필요하다. 이 새의 날개가 대단히 크기는 하나 착륙할 때 브레이크 기능을 하기에는 적합한 구조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공기저항을 높이기 위해 물갈퀴가 달린 발을 곧추세워 앞으로 뻗어보지만, 거대한 몸집을 착륙에 알맞게 멈춰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조하다. 그래서 알바트로스의 착륙은 의도하지 않은 텀블링으로 끝맺기 일쑤다. 아니면 추락사고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날개가 꺾이거나 심지어 목이 부러지는 일도 발생한다. 알바트로스가 우아한 비행을 선보이기 위해 얼마나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64~) - 슬픈 알바트로스...

13. “아리스토엘레스는 하이에나에게 혹평을 퍼부었다. 썩은 고기나 먹으며 음흉하게 미소 짓는 음험하고 비겁한 동물이라고 비난했고 성도 제멋대로 바꾼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미지는 그 후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하이에나를 ‘시체를 도둑질하는 헤르마프로디테(암수한몸의 괴물)’이라고 불렀다.

하이에나는 암컷의 몸집이 수컷보다 훨씬 더 크다. 하이에나 무리는 모든 것을 암컷들이 통제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리 전체가 여성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리의 우두머리 암컷이 보이는 생리적 특징은 여성적인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 동물의 혈액 속에는 다량의 안드로스텐디온이 있는데, 이 호르몬은 자궁 안에서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으로 바뀐다. 그래서 하이에나 암컷이 임신을 하면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수컷의 수준으로 높아지게 된다. 하이에나 암컷은 안드로스텐디온을 더욱 여성스럽게 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수컷처럼 강하고 공격적으로 변하기 위해서 테스토스테론을 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포유류의 경우 암컷의 안드로스텐디온이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으로 바뀌는 것을 감안해보면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하이에나 암컷은 행동만 수컷처럼 바뀌는 게 아니라 일차 성기관에도 큰 변화를 겪는다. 암컷의 음순은 음낭처럼 부풀어 오르고, 클리토리스는 페니스처럼 형태가 변한다. “길이가 15cm나 되는 이 기관으로 하이에나 암컷은 오줌을 누고,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는다”고 하이에나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미국인 연구자 스티븐 글릭먼은 설명한다. 진화가 무슨 생각에서 그런 ‘복합기’를 발달시켰는지는 수수께끼다. 아무튼 그 때문에 암컷들은 호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출산은, 특히 초산인 경우, 대단히 고통스러운 과정이 된다”고 글릭먼은 말한다. 페니스 모양으로 바뀐 탓에 하이에나 암컷의 산도는 다른 포유동물보다 훨씬 비좁아지고 길이도 두 배나 더 길어진다. 그래서 새끼를 낳는 데 최고 열두 시간까지 걸리고, 그렇게 힘들게 난 새끼들은 절반 이상이 죽은 채로 세상에 나온다. 게다가 출산 중인 어미는 그 긴 시간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하이에나 암컷의 사망원인 1위가 출산 중에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성공적인 번식전략이라고 말하기 힘들다.”(88~) - 기이한 동물... 뒤이어 나오는 새끼 물개를 잡아서 뇌만 파먹고 버린다는 ‘해변의 늑대’ 이야기는 하이에나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강하게 심어준다. --; 한편,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만 먹는다거나, 남이 먹고 남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하이에나가 잡은 먹이를 사자가 빼앗는 경우가 다수이다.

14. “개체수가 여섯에서 열두 마리 정도 되는 꼬리치레의 무리 근처에 뱀이 출현하면, 적을 제일 먼저 본 새는 괴성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공포에 질린 것도 아닌 특이한 울음소리를 낸다. 그러면서 어색한 날갯짓을 하며 뱀 주변을 상당히 가까이 맴돈다. 자칫하면 붙잡힐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인데 말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동물학자들은 이 무모한 행동의 의미를 새가 뱀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켜 무리를 도망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행동연구가 로니 오스트라이어는 그와 같은 상상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꼬리치레가 혼자 있을 때도 뱀 주위에서 위태로운 춤을 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로써 꼬리치레는 영웅의 월계관을 벗어야 했다. 하지만 이 새가 왜 빨리 도망치지 않고 적의 주변을 맴도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꼬리치레는 사회관계에서도 매우 특이한 행동을 보인다. 이스라엘의 부부 과학자인 자하비 부부는 꼬리치레들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뽑는 독득한 방식에 주목했다. 이 새들은 가장 목소리 크고 힘세고 용감하고 짝짓기 욕구가 왕성한 구성원을 우두머리로 선택하는 대신, 가장 친절하고 자기희생적인 동료를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사해 연안에서 자하비 부부는 심지어 다리를 다친 늙은 새가 무리를 이끄는 새떼도 발견했다. 중증장애 우두머리인 셈이다. 다른 수컷들이 이 늙은 우두머리를 사막으로 내쫓아버리고 그의 어여쁜 아내를 제 손에 넣기란 식은 죽 먹이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집단에서 불구자는 버림을 받는다. 게다가 누구를 먹이고 누구를 버릴 것인가를 세 번 이상 고민해야 하는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꼬리치레는 늙고 병약한 새를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리의 우두머리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꼬리치레들은 불구자 우두머리의 지도하에 다른 새떼들과 전쟁도 했다. 물론 우두머리에게서 대단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새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걸까? 단순히 자연의 즉흥적인 결정인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사회적 실험? 아니면 새들은 늙은이의 지혜와 경험을 원하는 걸까? 만약 그러다면 그 새들의 지적 능력은 노인들을 일찌감치 일선에서 은퇴시켜 양로원으로 보내는 우리 인간보다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새들이 그럴 리가? 아닌가?”(96~) - 그럴 리가?... ^^;;

15. “심해 물고기들은 근육, 아가미, 심장이 약하고 골밀도가 낮다. 비늘과 부레가 없는 경우도 있고 눈도 매우 작다. 이들의 성장은 마치 느린 TV 화면처럼 더디게 진행된다. 생식능력을 갖추는 데 심지어 20년이나 걸리는 어종도 있다. 대신 이들의 수명은 종종 100년을 넘기도 한다. 물론 광활한 어둠 속에서 적당한 짝짓기 파트너를 찾으려면 이 정도 시간은 필요하다.

90년대 중반, 원격으로 조종되는 심해잠수정 앨빈은 귀중한 영상 자료를 싣고 태평양 탐사여행에도 돌아왔다. 앨빈이 바닷속 2천5백 미터 깊이에서 촬영한 영상은 문어들이 출연하는 외설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약 16분 가량의 이 필름은 사랑을 나누는 두 마리의 문어를 보여주고 있는데, 서로 휘감고 있는 문어들 중에서 작은 놈이 큰 놈의 몸속에 교접완(짝짓기용 다리)을 삽입하는 장면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영상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에서 두 놈 다 수컷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자연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더구나 심해의 사정이 스페인 마요르카 휴양지의 디스코 클럽과는 완전히 딴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형편에 맞춰 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까. 설령 동성간이라도 말이다. 게다가 과학자들의 계속된 관찰결과 또 다른 사실이 밝혀졌다. 사랑을 나누는 두 문어는 같은 종이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고릴라가 오랑우탄에게 수작을 거는 셈이라고나 할까? 동물이 명백히 부적절한 행동을 하기까지는 오랜 기간 견뎌야 했을 처절한 고독이 그 배후에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둠의 제국에서 벌어진 일이니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외도하다 들킨 남편도 이런 말을 했다지 않는가. ‘여보, 너무 어두워서 당신인 줄 알았어!’”(139) - 심해처럼 어두운...

16.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한 연구팀은 장장 25년간 초파리를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초파리에게 여러 자질을 부여했다. 이 연구팀은 예를 들어 고령에 가임능력이 상승하거나 먹이부족에 잘 견디는 유전형질을 갖고 있는 초파리를 말들어내기도 했다. 이 형질은 특수하게 마련된 ‘사육 오아시스’ 안에서 초파리의 유전자에 확실히 뿌리내리도록 약 100세대를 거친 다음, 차후 50세대 동안 사육환경이 아닌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도록 방출됐다. 그러자 자연환경에서는 사육된 형질이 대부분 사라졌다. 개중에는 20세대 만에 사라진 형질도 있었다. 물론 자연 상태의 생존조건에서는 이런 형질이 필요 없기 때문에 사라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령의 가임능력이나 먹이부족을 견대는 생존능력 등은 자연 상태에서도 바람직한 자질이다.

초파리 유전형질의 불안정성은 그러나 전혀 다른 면을 시사한다. 이 실험을 통해서 우리는 진화가 ‘진보가 아닌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러 형질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그때마다 그 이유를 합당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자연은 무의미한 일들(분홍색 눈동자 등)을 발생시키고 또 유지시키는 반면, 의미 있는 일들(고령의 가임능력)은 사라지게 한다. 결국 진화과정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것은 품질이 아니라 다양성이다.”(142)

17. “현재 독일에서는 네 명당 한 사람 꼴로 제왕절개를 한다. 또 세 명 중 한 명은 경막외마취를 통해 무통분만을 한다. 이것은 진화의 난관을 뚫으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산통을 피하려는 시도임이 분명하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전문잡지 [헤밤메(산파라는 뜻)]의 공동발행인 울리케 하르더는 편안한 무통분만이 여성을 ‘분만을 당하는 수동적 역할로 몰아가고 산모아 아기에게 대단히 중요한 경험을 놓치게 한다’고 비판한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탄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기 입장에서도 절개를 통해 세상에 나올 경우 결정적인 체험을 할 수 없게 된다. 아기는 자신의 출생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어머니 배 속에서 어느 순간 무척 거친 방식으로 끄집어내진다. 심리분석가들은 이러한 충격적인 경험이 당사자의 영혼에 깊이 각인된다고 확신한다.

의학적 견지에서도 출산과정을 제왕절개를 통해 단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제왕절개가 혈전증, 폐전색증, 창상감염, 염증 등의 위험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이미 입증됐으며, 산모의 사망률도 자연분만보다 세 배까지 높다. 또한 과거에 제왕절개 경험이 있는 산모는 나중에 임신을 해도 자궁파열등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자연분만도 불가능하다. 신생아의 경우 자연분만 때 흔히 나타나는 산소부족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겠지만 대신 폐에 양수가 차서 분만 후에 호흡곤란을 겪을 수 있다.

진통도 단순한 통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산모의 몸에 중요한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한다. 산통은 산모를 억지로 움직이도록 유도해 산모의 자세나 태아의 누워 있는 위치가 잘못됐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로부터 산모와 태아를 보호해준다. 게다가 산모의 몸이 통증을 느끼면 엔도르핀이 많이 분비된다. 엔도르핀 분비는 임신 10주부터 늘어나다가 진통이 시작되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호르몬은 두려움과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또 분만 후 산모의 기분을 좋은 상태로 유지되도록 도와준다. 반면 진통제는 엔도르핀 분비를 억제하고 산모의 기분도 바닥으로 끌어내려, 출산 후 산모의 상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착륙’하는 결과를 초개하기도 한다. 호주 뉴캐슬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진통제를 먹은 산모는 분만 후에 평균 이상의 강한 우울증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자연분만 때 핵심적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호르몬이 옥시토신이다.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낄 때 분비되는 이 호르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타인과의 친밀감을 형성해주는 것이다. 자연분만 직후에 이 호르몬이 대량 분비돼 산모는 아기에게 즉각적으로 강한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 반면 제왕절개로 분만을 마친 산모는 이 효과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기에 대해 친밀감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

옥시토신의 또 다른 효과는 부분적 기억상실이다. 이 호르몬은 산모가 출산 중에 겪었던 힘든 고통을 어느 정도 잊도록 해준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출산 후 몇 주만 지나면 다시 아기를 갖는 것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수유를 하는 경우, 이 망각 효과는 약간의 문제를 낳기도 한다. 수유를 하는 산모들은 출산 후 건망증이 심해졌다는 호소를 곧잘 한다. 물론 잠이 부족해서일 때가 많지만, 수유 중 분비되는 옥시토신의 영향도 있다. 그래서 조산사들은 ‘수유기 치매’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163~)

18. “남성의 경우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 공격성, 식욕감퇴의 세 가지로 반응하는데 반해, 여성의 신체에서는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중 하나가 식욕증진이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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