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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평점 :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에서 많은 것을 새로이 배울 수 있었다. 한편, 그의 모습 속에서 언뜻 내비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지식의 입력 vs 출력 “하지만 이렇게 해서 알게 된 대부분의 것들은 아마도 저와 함께 무덤에 묻히게 되겠지요. 물론 제가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제가 알게 된 것들의 일부분은 책으로 남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책을 쓰는 경우에도, ‘자신이 알게 된 것’과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 ‘공부한 것’과 ‘책을 집필하는 것’이라는 입력과 출력의 비율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는,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납니다. … 입력과 출력의 비율은 낮게 잡아도 100대 1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한 것이 다 출력되어 버리지 않고 대부분은 제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셈입니다.”(19-20) - 확실히 출력은 입력을 따라잡지 못한다. 글을 쓰는 속도는 ‘생각하는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한다. 혼자서 ‘생각만 해도 입력되는 장치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
2. 지식의 총량 vs 개인의 지식 “지식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인류 문명사회가 지금까지 유지 발전되어 왔다고는 하지만, 지식의 총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누어 갖게 될 지식의 폭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지식의 총량과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의 양의 비율을 측정해 보면,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 무지의 정도가 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앞으로 문명사회가 나아가게 될 방향을 고려할 때 중대한 사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31) - 물론 저자가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무지이다.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현대인들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지식의 총량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에 비해 개인이 가진 지식의 양, 그 퍼센테이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오토마톤 “정보 처리의 세계에 ‘오토마톤automat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내용이 입력되었을 때 자동적으로 특정한 출력이 이루어지는 구조인데, 단계가 낮은 수준의 ‘오토마톤’의 예로 자동판매기의 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 그리고 행도이라는 것은, 대략적으로 이 오토마톤 부분과 자동화 되지 않은 의식화된 행동 부분의 두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은 대부분이 자동화된 행동인 것입니다.”(34)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이란 대부분 이처럼 자동화된 부분에 의해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모니터하여 결과를 남기는 것은 아주 미미한 부분입니다. 최근 뇌 과학의 발전으로 점차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동화된 부분은 주로 소뇌 안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소뇌라는 기관은 아주 작지만, 소뇌를 제외한 뇌 세포의 수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무척 정밀한 조직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것을 완전히 습득하여, 의식하지 않더라도 행동이 가능해지는 단계의 수준에 이르면, 그 때까지의 절차가 모두 소뇌에 저장되는 것입니다.”(35) - 저자가 전뇌(電腦)에 대한 글을 쓴 흔적을 발견하는 듯... 한편으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와 비슷한 분위기도...
4. 독자 경향 “서적 가운데 문고판, 신서판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이른다는 것은 잡지와 마찬가지로 한 번 읽고 버려지거나 일정한 기간에만 읽혀지다가 역할을 끝내고 사라지는, 소위 일과성 출판물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과거의 지의 총체를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준 후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의 지를 축적하는 역할과 기능을 하는 데 출판 본래의 존재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지를 축적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출판의 비중이 너무 낮아져 일과성의 문화를 표현하는 장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48-49) 이상은 잡지의 대담에 참석한 미도리가와의 말의 인용이다. 사실 나로서는 이 주장에 동감이 된다. 하지만 저자는 ‘고전’의 정의와 ‘출판’의 성격 등을 전혀 다르게 주장하면서, 위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 대담을 읽고 왠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출판은 본래부터 일과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현대에 와서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출판은 항상 일과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일과성이라는 시간의 설정 방법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49-50)
그리고는 ‘고전’의 문제로 넘어간다. “과거의 지의 총체라는 것이 반드시 고전에 의해 계승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과거 지식의 총체는 반드시 계승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50) 저자는 상당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고전만이 아니라 과거의 지식의 계승 가치에도 회의적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문학은 기껏해야 100여 년 전의 출판물에 불과할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500년이나 1,000년 정도의 시간 속에서 검증을 받고 후세에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51) 그는 일단 고전을 500-1,000년 이상의 검증을 받은 것에 국한시킨다. 상당히 좁은 범위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1천년은 좀 길고, 500년 정도라면...
하지만 저자의 고전 이해는 ‘시간’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다시 고전의 내용도 문제삼는다. “그런데 그런 진짜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에 실려 있는 내용에 특별히 뛰어나 점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내용을 보면 어쩐지 시시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경우인데, 잘 읽어보면 시시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저서를 읽으면 도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책을 골라 읽는 과정을 서로 공유하여 그 내용을 서로 이야기해 보는 것 자체에서 의미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55) 물론 고전은 오래 된 책인만큼 오늘날에 와서 밝혀진 내용들에 대한 ‘무지’가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시시한 것으로 치부할 순 없지 않을까? 저자가 고전의 가치(?)를 ‘어떤 책을 골라 읽는 과정의 공유’와 ‘그 내용을 서로 이야기해 보는 것’에만 국한시킨 것은 지나치다. 그 정도라면 고전이 아닌 어떤 책이라도 가능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고전에서 제외하기를 주장하는 19세기의 책들도 얼마든지 골라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으며, 그 내용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본래 고전에는 인류의 지가 가장 원시적인 단계에 있을 때 탄생한 작품만이 포함됩니다.”(56) “이런 지적 신진대사가 반드시 고전 등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이런 맥락에서 과거의 지의 총체는 최신 보고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57) 철학사는 사실상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철학을 공부한 저자도 그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가 고전을 ‘원시적인 단계에서 탄생한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멀리 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진화론적 시각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은 좋고, ‘오래된’ 것일수록 원시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자연과학적인 이론과 기술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최첨단 일에 관한 흥미 - ‘알고 싶다’는 욕구에 자극을 받아”(58-)라는 부분을 보면서 그는 성경에 나오는 아테네(아덴) 사람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약의 사도행전 17장 21절은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소개한다. 저자 역시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에 모든 시간을 쏟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글에서 자신이 ‘호기심 과잉’이라고 말하는데(63) 과연 그런 것 같다.
5. 스페셜리스트 vs 제너럴리스트 “그러나 이런 스페셜리스트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제너럴리스트의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63) - 이 부분은 나의 평소 생각과 상당히 유사하다. 꼭 스페셜과 제너럴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전부터도 “점점 분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진 자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부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에콜로지적 사고’와 연결되어 뒤에 몇 번 다시 나온다.
“과학이 점차 세분화되고 각 영역 안에 일인용 참호를 파서 안주하려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을 때, 그와 반대로 에콜로지는 과학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연관성을 생각해 보자는 발상이었으므로, ‘바로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분석보다는 통합, 일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시각이 에콜로지와 일치하였던 셈입니다.”(139)
“에콜로지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콜로지적 사고’를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콜로지적 사고’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전체성을 전체성으로서, 복잡성을 복잡성 그대로 받아들여 다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과학은 전체를 부분으로 해체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의 집적으로 환원하여 분석하는 ‘요소 환원을 방법적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근대 사회의 발전은 이런 근대 과학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요소 환원 원리가 적용되는 곳마다 한계에 부딪치면서 파탄을 초개하고 있습니다.”(164)
6. 어학 공부의 비결 “어학을 배우려면 집중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1년 동안 하는 것보다 매일 매일 한 달 동안 하는 편이 낫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체로 어학은 어학 이외의 다른 것을 모두 잊고, 오직 어학에만 정신을 집중하여 매달리는 방법을 택한다면 한 달 동안만 공부해도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다.”(66) - 정말 그럴 것 같다. 과거에 헬라어를 공부했을 때에도 그런 효과를 보았던 것 같은데, 지금 히브리어를 다시 공부하고 있는데, 잠시 다른 모든 것들을 끊고 히브리어 공부에만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7. 70페이지부터는 ‘책을 선택하는 방법’이 소개된다. 입문서(교과서적/일반인을 위한)를 선택하는 법(머리말, 맺음말, 역자 서문, 판권장 등을 확인), 고전적 입문서, 각도를 달리한 책들, 사상사, 그리고 각론을 다룬 책들에 이르기까지 도움이 될 만한 실제적인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8. 책꽂이와 책상 위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날 산 책들을 책꽂이 꽂지 말고 책상 위에 쌓아 놓는다. 책꽂이에 꽂아 버리면 그냥 그대로 다시는 펼쳐 볼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지만, 책상 위에 놓아두면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77) - 꽤 실제적인, 그리고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충고다! ^^;
9. 입문서 읽는 방법 “입문서 한 권을 정독하기보다는 입문서 다섯 권을 가볍게 읽어치우는 편이 낫다. 메모를 하지 않아도 중요한 부분은 대부분 다른 책에서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메모를 하는 대신 밑줄을 치거나 표시를 해두는 방법이 더 좋다.”(78) - 동의한다. 나 역시도 책들을 읽으면서 발견하고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는 방업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가볍게 읽기보다는... 빠르게 읽으려고 하면서도, 정독에 가깝게 읽어간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저자의 입장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있을 듯...
10. 독학의 위험성 “독학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점은 질의응답 과정이 없기 때문에 독선적인 해석을 통해 잘못된 정보를 습득하게 될 위험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다독을 하거나 조금은 당돌하게 전문가를 직접 찾아가 질문을 하는 수밖에 없다.”(79) - 좋은 지적과 좋은 해결책.
11. 14가지 독서법 중... 5, 9, 10번이 마음에 와 닿는다. “5. 읽다가 중단하기로 결심한 책이라도 일단 마지막 쪽까지 한 장 한 장 넘겨보라.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9. 주석을 빠뜨리지 말고 읽어라. 주석에는 때때로 본문 이상의 정보가 실려 있기도 하다. 10. 책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의심하라. 활자로 된 것은 모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이라도 거짓이나 엉터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81)
12. ‘책상을 찾아서’(93-)에서는 크고 견고한 책상을 찾다가 상당히 비싼 초대형 식탁을 구입하고, 또 작업대를 구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견(一見) 지나쳐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 백금산의 [큰 인물 독서법]에서 본 김정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최고의 지필묵을 고집했는데, 이와 유사한 ‘프로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3. ‘서고를 신축하다’(98-)를 읽으면서는 상당 부분 동감과 관심이 갔다. 저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 보통 사람들보다는 많은 책을 가진 편이기에(7천 권이 넘는) 이사 할 때마다 골머리를 앓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책은 더욱 많아질 터인데, 저자처럼 (물론 그보다 규모는 적겠지만) 서고 겸 사무실을 따로 마련해야 할 듯...
14. 머리는 좋은데... “종종 머리는 좋은데 특정 영역에 대한 소양이 완전히 결여된 사람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110) -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정상이 아닐까? 다치바나 자신이 “일반적으로 독서가들은 대개 인문 계열의 교양서적은 많이 읽지만 과학 서적, 기술 서적 등은 거의 읽지 않습니다. 한편, 과학 기술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반교양서적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C. P. 스노우가 말한 두 문화의 괴리는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의 소양을 가진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158)라고 말하듯이, 일반적으로 머리가 좋다고 하여도 양쪽 영역 모두에 소양을 가진 경우는 드물다. 그러므로 특정 영역에 대한 소양이 완전히(라고 하면 좀 심하기는 하지만) 결여된 경우도 특이하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모든 영역에 균일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지...
15. 소비자 vs 생산자, 그리고 독서와 작가 “글을 읽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우선 제대로 된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생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을 통해 정신 세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사물을 보는 눈이 사려 깊지 못합니다. 사물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132) - 확실히 많이 읽는 것은 잘 쓰는 것을 위한 좋은 기초를 제공한다. 물론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16. 전문가의 오류 “전문가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을 제기하는 전문과와는 논쟁이 될 리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전문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들의 논리를 축적시켜 내린 결론이라도, 밖에서 보기에는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전문적인 지식으로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좀처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이 사뭇 재미있습니다.”(160) - 마치 글을 쓴 사람이 자기 글에서는 오타를 잡아내기 어려운 것처럼...
17. 좋은 문장! “어떤 부분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떠오늘 때까지가 정말 힘듭니다. 저의 책을 막힘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궁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입니다. 원고를 집필하는 에너지의 3분의 1은 이처럼 좋은 표현을 찾은 데 소비하고 있습니다. 단 1, 2분을 위해 몇 시간을 소비하는 셈입니다.”(162) - 이태준의 [문장강화]에 나온 내용이 생각난다. 그는 플로베르와 모파상의 말을 인용했었다.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플로베르).”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한 말밖에 없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선 한 동사밖에 없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선 한 형용사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한 말, 그 한 동사, 그 한 형용사를 찾아내야 한다. 그 찾는 곤란을 피하고 아무런 말이나 갖다 대용(代用)함으로 만족하거나 비슷한 말로 맞추어 버린다든지, 그런 말의 요술을 부려서는 안 된다(모빠상).” 다치바나는 이 부분에서도 좋은 태도를 보인다.
18.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223~)에서는 ‘책의 구조 파악, 장 단위의 흐름 파악, 절 단위로 세세한 흐름 파악’을 이야기하면서, ‘키워드의 조합과 논리의 흐름’을 중시하라고 말한다. 전체를 적당한 빠르기로 한번 훑어보면 뇌의 무의식이 작용하여 중요한 것을 나름대로 분별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새롭다.
“좀 더 그 책을 자세히 읽어 보고 싶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단락을 단위로 좀 더 세밀하게 읽어보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눈이 머무는 곳만을 읽고 지나간다. 여기에서는 ‘자연스럽게 눈이 머문’ 곳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의 뇌는 의식 세계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여러 가지 일을 무척 많이 하고 있다. 머릿속에 왠지 계속 맴도는 키워드가 있을 경우, 주변시야 속에 그 키워드가 나타나면 눈은 자연히 그곳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키워드를 찾아서 의식적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정보를 찾는 일은 뇌가 자동적으로 해준다. 의식적으로 글을 읽지 않아도 책 위로 눈이 움직이는 것만으로(한 쪽을 읽는 데 1초가 채 걸리지 않아도 된다), 눈은 정확히 중요한 곳에 머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뇌의 무의식이 행하는 작용을 믿는 것이다.”(226-227)
19. 책은 물건인가? 다치바나가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책을 ‘물건’에 불과하다고 보는 그의 시각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진다. “책은 거칠게 다루는 것이 좋다. 나중에 헌 책방에 팔기 위해서라도 깨끗하게 보겠다는 식의 구두쇠 발상은 버리는 것이 좋다.”(78) 이 정도 선에서는 ‘거칠게 다룬다’는 점 정도는 ‘험하게 다루다’는 정도로 이해하고서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종이책의 좋은 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무엇보다도 자유자재로 종이 여기저기에 메모를 하고 이곳 저곳 밑줄을 긋거나 자신만이 알 수 있도록 기호나 부호를 붙일 수 있으며, 접어서 표시를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여 놓을 수도 있다.”(275)는 말 뒤에 나오는 내용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 그는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책에서 참고가 될 만한 쪽을 찢어 와 붙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읽고 있는 쪽을 찢어 달리 이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단물을 다 빨아먹듯 그 책을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잘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나는 물건인 책을 그다지 소중하게 다루지 않고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언제나 이런 행동을 한다.”(275) 어쩌면 너무 많은 책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 제본이 좀 허술하게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