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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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뒷표지의 “전쟁은 필연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는 책 소개가 마음에 걸렸다. 이 책이 ‘전쟁’을 ‘경고’하는 ‘무서운’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책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그 ‘무서움’은 처음 가졌던 생각만큼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워낙 정치/경제 쪽에 대해 무관심해서일까? 여러 전망들과 수치들이 생각보다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이 책의 주 독자층으로 십대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서 어렴풋한 위화감(?)과 함께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전쟁을 이야기하고 제국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주 독자층을 십대로 생각하고 있다니… 이런 주제들은 나로서도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인데… 하지만 저자의 이런 기본적인 태도는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전쟁’이나 제국주의’라는 거창한(?) 표현들에 비추어 본다면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지적으로 끝맺는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아, 그런 거구나!’ ‘이런 것도 있었네?’ ‘이건 정말 그럴 듯 한데!’하는 생각들이 들었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내가 처음 느꼈던 ‘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사실은 막연한 것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책 뒷 표지의 “전쟁은 필연이라는 무서운 경고”라는 문구 앞에는 “이를 도모할 평화경제 세력을 지금부터 공동으로 가꾸어가지 않으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전쟁’을 경고하고 있지만,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보다는 앞으로(저자는 그 기한을 30년으로 본다)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에서 평화를 도모해야 할 주역이 될 지금의 십대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일말의 ‘전망’을 제시하고 ‘평화’에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책이었다.

저자의 지적처럼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기 원하지만 그것을 위한 ‘대가’를 지불하기는 꺼려한다. 그렇기에 지금의 청소년들이 지금과 같은 ‘교육 파시즘’을 탈피하여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리고 ‘평화’를 소중하게 여기며 그것을 위해 대가를 치르고자 하는 민주 시민으로 자라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모른 채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향하고 있는 어른 세대가 해야만 하는 몫이다.

 

* 몇 가지 사족.

- 178페이지 이하에서 전쟁과 평화의 개념을 게임으로 설명한 것은 신선하기도 하고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 저자가 말하는 ‘평화’의 개념은 ‘전쟁이 없는 상태’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평화의 ‘소극적’ 개념에 불과하다. 성경의 ‘샬롬’은 더 ‘적극적’인 평화를 이야기하는데, 청소년들의 ‘평화’ 교육은 소극적인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데로 이끌어져야 하지 않을까.

-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무척 매혹적으로 보인다. 우리에게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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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 이랜드 노동자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6
권성현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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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거 아니었나요? 아직도 하고 있어요?”(6P)로 시작되는 여는 말처럼 나 역시도 이미 끝나버린 줄로 알고 있었다. 워낙 경제 쪽에는 관심이 적었던 터라 ‘비정규직’이라든가 ‘홈에버, 뉴코아’ 같은 이야기들을 스쳐 지나가듯 들어보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사실은 그런 내용들보다는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이 더 나의 관심을 끌었다. E랜드 계열 회사가 이런 것들이라며 나열해 놓은 회사 로고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어도 50개는 훌쩍 넘는 것으로 보였다. ‘E랜드 계열사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하는 놀라움, 그리고 그것과 함께 수년 전에 읽었던 [이랜드 사람들]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남동희 기자가 썼고 E랜드 초기에 쓰인 책인데,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곤 흥미롭게 읽었었다. E랜드가 어떻게 성공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지를 외부인의 눈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적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E랜드 쪽에서의 요청으로 출간이 금지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그 책을 읽으면서 E랜드에 대한 호감을 느꼈었다. 투명하게 경영하려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기존의 관심이 기억 어딘가 묻혀 있다가,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서 ‘어? E랜드에 대한 책이네?’ 하는 반가움(이전의 호의적인 인상에서 나온…), 그러면서도 이전에 알던 것과는 달리 숫자를 세기도 쉽지 않을 정도의 많은 계열사 로고를 보며 느낀 당혹감, 그리고 비정규직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타깃이 되었다는 씁쓸함…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페이지를 읽어가면서,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비인격적인 대우가 마음 아팠다. 또 내가 호의를 가지고 보고 있던 기업이 어느 사이 이런 ‘시중’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악덕 기업’과 아무런 다를 바 없는 기업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기에 기독교 기업인 E랜드가 이런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 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어가면서도 그러한 아픔과 안타까움만이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이건 한 편의 이야기만을 기록한 거니까, 상대편의 이야기도 들어보아야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 ‘E랜드만 그런 것은 아닐 텐데…'(실제로 이 책의 몇몇 곳들에서는 이것이 E랜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다. 7, 98, 172, 177, 252pp) 하는 두둔하고픈 생각들도 들었다.

하지만, 책에 나온 내용들을 보면서 ‘두둔’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러한 사실들이 분명히 있었다면, E랜드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기업이 기업 자신만을 살찌우고자 한다면 지탄받아 마땅하며, 기업이 직원들을 기업을 살찌우기 위한 ‘비인격적인 도구’로 취급한다면 그 또한 질타 받아야만 하는 부분이다. 기독교 기업이기에 더더욱 E랜드의 모토처럼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우했어야 마땅하다. ‘법대로’ 했다고 하는 변명은 쓸데없고 무의미한 저항일 뿐이다. 이 부분에서 [죽음의 밥상]에 등장했던 화이트 독(247p 이하)과 홀 푸드 마켓(257p 이하)이 떠올랐다. 이들 기업은 얼마나 양심적으로, 그리고 참으로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우하고 있는가!

비정규직에 대한 ‘투쟁’은 E랜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책 제목처럼 우리는 이들의(사실 그것은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소박한 꿈’을 응원해 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워낙 어쩌다 한 번 가는 마트이지만, 그곳 직원들은 이전처럼 보이질 않는다. 그들을 보는 마음이 아프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책의 구성은 잘 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기본적으로 인터뷰 중심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현장감은 있지만 전체적인 이해를 갖도록 돕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4부)의 몇 꼭지 글들이 전체적인 이해를 도와주고 있어서 책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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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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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분량이 꽤 되는데도(551p) 그리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다. 분량 때문에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는 것이 어려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체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책들을 읽듯이 시간간격을 두고 읽었더니 비슷해 보이는 이름에, 비슷해 보이는 주장들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관심과 시간이 모두 있는 사람이라면 작심하고 한 번에 독파한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듯…

 

초반부(10-11p)에서 밝히는 이 책의 목적 두 가지는 무척 마음에 든다. (하나는 근원에 대한 고찰이요, 다른 하나는 인문 과학과 자연 과학의 전체성에 대한 고찰이다.) 평소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였기 때문에 저자와 책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며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은 소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 10명의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다. 각 철학자들 다루는 기본 틀은 비슷하지만, 각각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다루고 있다.

 

저자가 아낙시만드로스를 탈레스와 비교하면서 한 말(108p “탈레스가 날카로운 관찰을 통해 신화로부터 벗어나 있는 우주의 싹을 틔웠다면, 아낙시만드로스는 탁월한 정신성과 천재적인 직관력, 그리고 대담한 비판적 사고력을 발휘하여 서양 사상 최초로 일관적이며 포괄적인 세계관을 산출해 냈다.”)은 나로 하여금,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을 떠올리게 했다. 허두영 씨가 지은 [신화에서 첨단까지]라는 두 권짜리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 신화들 가운데서 첨단 과학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면서 신화와 첨단 과학을 연결시켜 주는 꽤 흥미로운 책이다. 결국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과제는 신화의 세계에서 과학의 세계로(그리고 부수적으로 철학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열 명의 철학자들 가운데 특별히 내 마음을 끌었던 두 사람이 있다. 피타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가 그들이다.

- 피타고라스의 경우, 그(또는 피타고라스 학파)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주장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의 주장은 불교(133), 묵가(140), 공자와 맹자(141), 어거스틴(142), 신비주의(143) 등을 떠올리게 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피타고라스 안에서 ‘통합적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144).

- 엠페도클레스의 경우, 그의 이론들과 현대 과학의 발견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이 놀라움을 자아낸다. 저자는 데모크리토스를 다루면서는 - 엠페도클레스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길게 - 현대 과학적 발견과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의 한계 -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동정적인 입장이기는 하지만 - 를 함께 지적하는데 반하여, 엠페도클레스의 경우에는 유사성만을 나열하고는 한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흔히들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를 ‘황금시대’로 부르지만, 그들보다 조금 더 이전 또는 그들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역자의 언급에서야 알았다. 504p) 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전체성’ 혹은 ‘통합적 사고’(저자가 후기에서 소개한 에드워드 윌슨의 책 제목 ‘통섭’이라는 용어가 가장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야말로 내게는 더 ‘황금시대’로 보인다. 로버트 브로우가 그의 책 [종교의 기원과 사상]에서 주장한 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점점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해 온 것은 아닐까? 오늘날에는 이들과 같은 놀라운 사상가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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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 - 미국을 제대로 보기 위한 가치 있는 가정들 라면 교양 1
김준형 지음 / 뜨인돌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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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부터 도발적(?)이다! 게임의 규칙을 누가 정하느냐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이런 ‘뒤집어 보기’는 내가 참 좋아하는 방식이다.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미국… 책을 읽어가면서 미국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었다.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사실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단순하게 ‘우리나라를 많이 도와준 나라’ 정도로… 그런데 어느 사이에 미국을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환경 문제를 다룬 책을 읽으면서였던 것 같다. 오존층 파괴를 줄이기 위한 세게 환경 회의에서 보인 미국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프레온 가스를 많이 사용해서 자신들이 사용한 프레온 가스 때문에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게 해놓고서는, 그런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프레온 가스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냈다. 그리곤 개도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게 환경을 이유로 프레온 가스 사용을 규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프레온 가스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이전해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했다. 지극히, 지독히 이기적인 미국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게는 미국이 곱게 보이질 않았다.

 

이 책의 곳곳에서 ‘미운 짓’을 하는 미국의 모습이 발견된다. 사실 ‘정치’ 쪽에는 상당한 ‘무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많았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읽어보아야 할 책으로 추천한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왜 바람은 하필 해가 제안한 내기에 그대로 응했을까? 외투 벗기기 내기는 바람에게 처음부터 불리했는데… 반대로 외투를 손에 들고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외투 입히기 내기를 했더라면? … “누가 게임의 규칙을 결정하는가?”(8-9)

 

2. 파이 하나를 둘이 나눠 먹을 때 가장 공평한 방법은, 한 사람이 파이를 자르고 나머지 사람이 어떤 파이를 먹을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는 파이를 자르는 사람이 선택까지도 먼저 하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12) - 저자는 친근한 말투(옆에서 이야기하듯)로 어려울 수 있는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좋은 방식! 딱딱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3. 유럽인드른 몽골의 또 다른 이름인 ‘타타르’가 지옥을 뜻하는 ‘타르타르’와 비슷했기 때문에 몽골의 침략을 사탄의 저주, 혹은 유럽의 타락에 대한 신의 경고로 여겼다.(21) - 흠!…

 

4. 역사가들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두고 ‘아메리카혁명’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 역사적 사건이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18세기 시민사회를 불러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25)

 

5. 국제연합의 효율성을 더 높이기 위해서 미국은 강대국들에게 엘리트의 지위, 즉 거부권을 부여했습니다. 국제연합의 거부권이란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유엔이 아무런 결의도 못 하게 되는 제도인데, 이는 다른 국가가 거부권을 사용할 권리를 준 것이라기보다, 미국이 반대하는 일은 아무리 정당성 있는 국제기구라도 할 수 없도록 하려는 의도가 더 컸습니다. 이는 미국이 국제연합에게 보조적인 역할만을 기대했다는 의미기도 하고요.(46) -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너무 순진하게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6. 그런데 홉스는 왜 하필 국가를 리바이어던이라는 성경에 나오는 괴수에 비유했을까요? 바로 국가 자체가 다른 어떤 적보다 더 위험한 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57) - 계속해서 새롭게 배운다. 여기에도 이런 뜻이!

 

7. 사실 미국만 딱히 위선적인 나라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역사 속 모든 패권들이 세계를 이끌 자격이 있음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이념을 개발하고 또 사용해 왔으니까요.(63) -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주로 하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 면에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선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하기 때문이 아닐까? 또 과거의 패권들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까?

 

8.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식민지 문제를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서구 열강의 반대에 부딪히자 민족자결주의의 적용 범위를 패전국의 식민지로 국한했다. 즉 승전국은 식민지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고, 힘을 잃은 패전국만 식민지를 독립시키도록 한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은, 미국이 고귀한 이상을 가지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기보다는 식민지 상태의 민족들이 나라를 되찾도록 한 다음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라고 본다.(75) - 이기적인 국가! 미국만이 아니다. 모든 국가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나라 좋은 나라’는 객관적이기 힘들다. ‘우리 편이 좋은 편’이라는 것이 더 솔직할 것이다. 대학시절 읽었던 책(박영선 목사의 책)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고 싸우지만 사실 결국에는 우리는 쌀밥 먹고 너희는 보리밥 먹으라는 말이다”라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라인홀드 니버의 책 제목도 떠오른다. 개인은 도덕적일지라도 사회/집단이 되면 너끈히 비도덕적일 수 있다고… 그럼 ‘집단’은 다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9. 미국은 과거 식민지 시절 고난과 핍박을 가장 많이 받았던 민중이 아닌, 제국주의에 협력하며 호의호식했던 사람들을 요직에 앉혔습니다. 이들 배신자들은 자신들에게 큰 약점이 있으므로 새 주인인 미국에 충성을 다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지요. 미국도 이런 역학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을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친미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국, 필리핀, 대만, 베트남, 그리고 중남미의 많은 국가에서 그런 식으로 미국의 지원 아래 구질서의 엘리트들이 옛 영광을 재현했습니다. 민족 배신자들의 부활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운 셈이지요.(83) - 슬픈 과거… 마음이 아프다…

 

10. 배우자에 대해 분노를 밖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화를 참고 사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101) -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미국과 구소련의 냉전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든 예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게 가정과 부부의 문제에 대한 좋은 지적이기도 하고…

 

11.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로마가 군사력으로 폐허를 만들어 놓고 멋대로 평화라고 불렀다며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도 로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135) - 타키투스가 그런 말도 했구나! Pax-Romana…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샬롬’과는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12. 2002년 영국의 한 TV가 인기리에 방영했던 프로그램은 로마제국을 분석함으로써 로마와 미국의 놀랄만한 유사점을 보여주었습니다.(135) - 이어지는 설명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정말 미국은 로마를 많이 닮았다. 그리고 절대 권력의 절대 부패라는 이야기가 미국에도 적용되리라는 생각…

 

13. 역사 속 제국 가운데 미국과 로마를 가장 비슷한 패권으로 비교하는 것은 분명 흥미롭지만,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과연 로마의 힘이 오늘날 미국의 지배력에 견줄 수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듭니다. 규모에 있어서도 미국이 훨씬 더 세계적인 패권인 것은 물론이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로마의 지배 양식은 미국처럼 치밀하지 못했습니다.(137) - 글쎄… 현대의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렇겠지. 하지만 로마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둘을 비교하는 것인 충분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14. 부시 행정부는 2001년 취임하면서부터, 21세기에도 확실하게 미국의 시대로 만들겠다며 ‘거침없이 하이 킥’을 날렸습니다. 정권 출범 7개월 만에 일어난 9.11 테러는 이런 부시의 계획에 확실한 추진력을 제공해 주었지요. 강경 일변도의 공격적 패권주의를 내세우며 부시는 세계 전체를 직접 관리하고자 했습니다. 미국은 이제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국제협력의 움직임은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유엔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교토협약과 지뢰금지조약, 생물학 및 독극물 무기 금지조약 같은 국제협정들을 미국은 모두 거부했습니다.(143) - 오만한 미국!

 

15. 더 큰 문제는 미국의 군사주의가 화려한 규모나 겉모습만큼 실제로 그리 가공할 만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3억 인구의 나라가 1-2만에 불과한 이라크 반란군과 싸우기 위해 약 13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고도 5년 넘게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의 명성이 허상일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게 합니다.(144)

 

16. 미국은 군사 및 경제적 패권을 기반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금융의 규칙을 만들 수 있기에 웬만한 위험은 최소화하고, 이익은 극대화할 수 있기는 합니다. 위험이 발생하면 이자율을 조정한다든지 채권을 발행하여 손해를 다른 국가에게 전가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달러가 세계 통화이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돈을 찍어낼 수 있는 발권력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꿈쩍도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147)

 

17. 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에서 문명 간 충돌로 인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 세계가 문명의 공통점을 찾고,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우 통찰력 있는 견해이지만 몇 가지 한계를 갖는다. 그는 대립과 갈등을 주로 종교적 가치에 의한 것으로 봤으나 현재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들은 명확한 경제적 이익, 국가 간의 힘의 경쟁에 관련되어 있다. 이는 문제의 핵을 외면하고 지나치게 초월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지, 그의 이론은 상당히 문화우월론적인 입장에서 서구 세계에 이슬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편파성이 있다.(150)

 

18. 오늘날의 전쟁은 과거와 달리 민간인 사상자 비율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에서 군인 대비 민간이 사상자가 반반을 기록한 뒤 계속 높아져서 지금은 민간인 사상자 비율이 전체 사상자의 90퍼센트를 넘는다고 합니다. 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전쟁만은 피해야 하는지, 여기에서 그 이유가 분명해집니다.(152)

 

19. 베트남전이나 한국전처럼 당사자끼리의 다툼은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의 경우에는 명백한 미국의 침공이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부를까?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식 해석일 뿐이며, 미국이 주장하는 ‘정당한 전쟁’을 침공이라 부르기 싫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용어를 쓰게 된 것이다. 대체 우리의 사고는 얼마나 많이 ‘아메리카’ 스타일로 물들어 있는가?(156)

 

20. 전쟁의 책임을 물어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아시아에서도 한국이 아니라 일본을 분단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일본을 기필코 자기 세력으로 만들겠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170) - 나름대로 역사에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점들을 보면서 나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허탕’이요, 내가 그렇게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던 역사에 대한 ‘기억상실증’을 나 자신이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1. 오죽하면 당시 [뉴욕 타임스]지가 사설에서 “우리가 쓰레기 같은 침략자 일본은 우방처럼, 그들에게 수십 년간 피해를 입었던 한국인들은 적처럼 대하고 있다”라고 비난했을까요?(172) -ㅠㅠ;; 가슴 아픈 현실, 약소 국가의 슬픔…

 

22. 찰스 틸리는 1985년에 매우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논문의 주요 논지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조직범죄, 즉 조폭들의 행태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다소 도발적인 틸리의 주장은 특히 한반도에서 잘 들어맞습니다.(180)

 

23. 세상은 변했습니다. 이제 맹목적으로 미국의 정책을 편들고 부화뇌동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할 때입니다. 워낙 오랜 기간 미국에 의지해 온 관성이 있어 홀로서기가 어색하고 불안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일이지요. 9.11 테러 이후 반복되는 미국의 무리수가 오히려 한국에게는 전환의 계기를 제공한 셈입니다. 물론 미국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요. 하지만 냉전적 군사동맹의 덫으로부터 하루빨리 빠져나와야 할 것입니다.(204) - 저자의 결론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보았던 ‘한반도’ 영화의 한 장면, 마지막에 총리가 사퇴하면서 ‘친일’의 필요성을 강한 확신을 가지고 피력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일본이 그렇고 미국이 그렇고… 우리는 이미 중독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끊기에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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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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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이다. 방대하고 폭이 넓기도 하지만 저자들이 공정한 태도를 취하려는 모습이 돋보이기도 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책이다. 모두에게 필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기본적인 구성은 간단하다. 먼저 세 가족을 소개한다. ‘전형적인 현대식 식단’의 힐러드-니어스티머 가족, ‘양심적인 잡식주의자’인 메서렉-모타벨리 가족, 그리고 ‘완전 채식주의자들’인 조앤과 조 파브 가족이다. 각 가족과의 만남과 식사, 먹거리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대한 대화, 그리고 장보기 등을 소개한다. 그리고는 그들이 선택한 음식과 상표, 회사 그리고 그와 관련된 폭 넓은 내용들을 소개한다. 책만 뒤적거려서 만든 내용이 아니라 실제 발로 뛰면서 알아낸 사실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대부분이 그러리라는 생각을 하는데, ‘전형적인 현대식 식단’ 쪽에 속하는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배우고(베건이나 프리건 같은 개념은 이 책에서 처음 보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깊이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자가 후기에서 밝히듯이 나 역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적 부담에도, 아직 육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2. 새로운 생각과 시각이다! 이전에 틱 낫한의 [화]에서 공포(?) 가운데 도살된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이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내용을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서 더 나가 음식에 대한 ‘윤리’를 논한다. 먹을거리의 윤리라는 주제에 이르러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떠오른다.

첫째는, 어렸을 때 명절이면 TV에서 방송해주던 ‘진기명기’ 프로그램이다. 기네스 북 같은 세계 신기록에 이름을 올리려고 별 희한한 기록을 세우려는 사람들의 시도들을 방영해 주었던 프로그램. 어렸을 때는 마냥 신기하다는 생각만으로 보았지만 조금 나이가 먹으면서는 그들을 향해 ‘배가 부르구나’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먹고 살기에 바빠서 생각조차 하지 못할 ‘쓸데없는 짓’들을 저렇게 열심히 하다니…”라는 거리감과 거부감이 느껴졌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처음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에게 ‘닭장에서 기른 닭의 달걀’인지 ‘풀어 놓고 기른 닭의 달걀’인지를 따지는 것은 그저 ‘배부른 소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고 절대 빈곤 상태에서 아무 것이나 주워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들이 자주 지적하듯이 미국보다는 영국이나 유럽이 이 문제에 대해 더 빠르게 대처했고 더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다. 사회가 발전해감에 따라 사람의 인권(인종 차별, 성 차별 등)에서 동물의 권리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짐승들, 심지어는 물고기까지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 근거하여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는 마음이 끌렸다. 사실 ‘공장식 농업’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거기 나오는 소 돼지 닭들이 왠지 짐승처럼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나만의 감상적인 반응인 걸까?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생태계와 동물들을 위해서(?)도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 덜 가혹하게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나은 삶의 수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3. 이 책의 기본적인 전제와 주제는 ‘먹을거리의 윤리’(116p)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책 전반부에 걸쳐서 ‘공장식 농업/어업’과 그 부산물들에 대해 비판한다. 그것들을 먹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겉보기로는 사소한 문제”가 논의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환경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동물의 고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지금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거의 모든 환경 피해, 즉 삼림 소멸, 표토 소실, 청정수 부족,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감소, 사회적 부정의, 공동체 파괴와 새로운 전염병 창궐 등의 저변에 있음이 뚜렷해졌다”(338p). 저자들이 지적하는 것(340p)을 고려한다면, 공장식 농업은 더 이상 가축을 기르는 ‘농장’이 아니라 단지 고기를 생산해내는 ‘공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부딪히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짐 모타벨리가 “사람들은 윤리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 합니다. 환경에 이로운 쪽으로 선택하고 싶어 하죠. 그러나 그 대신 뭔가를 희생할 의사는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싼 물건을 사고 싶어 하는 거죠.”(130p)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사실은 나 자신부터도!) 이 일을 위하여 희생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여러 나라에서 수백 차례의 실험을 실시한 결과 사람들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결과를 거부함으로써 얼마간의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공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239p)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저 실험의 결과일 뿐 실제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실제 상황 속에서 이 문제와 부딪혀 가는 화이트독의 주디 윅스 이야기(247p 이하)와 홀푸드마켓의 존 매키 이야기(257p 이하)가 훨씬 고무적이고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고, 저자들은 ‘베건’(완전 채식주의자)으로 결론을 이끌어가기는 하지만, 내 경우는 매튜 스컬리가 제시한 “비록 신이 우리에게 동물에 대한 ‘지배권’을 내리셨으나 우리는 그 지배권을 ‘자비롭게’ 행사해야 한다”(341p)는 견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책의 끝 부분에서 제시되는 5가지 윤리적 지침(379p)은 그러한 ‘자비’의 원리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한 포괄적인 지침으로 여겨져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국 저자들도 ‘베건’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먹을거리는 윤리 문제이다. 하지만 광신은 필요 없다”(394p))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저자들의 결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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