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사랑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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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 <이덕일의 역사사랑>(랜덤하우스.2007)을 읽고는 역사란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는 대한민국이 처해있는 현재 상황에 교훈이 될만한 일들을 과거 우리의 역사에서 찾아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어 역사 시론(時論)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의 임명에 있어서 총리의 자질이나 총리의 정치적 지위 등을 이야기 하기 위해 조선 시대 영의정으로서 역할과 그들의 훌륭한 경륜을 말해주면서 현실의 아쉬운 점을 말해준다. 또 검찰에 문제가 있으면 조선 시대 사헌부 관리들의 엄격한 직무 집행을 예로 들어 꾸짖고 있다.

 

저자 이덕일은 강단 사학자가 아닌 만큼 자유로운 행보를 할 수 있는 모습이 여러 번 보인다. 그러니까 역사학의 통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석하고 있어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더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과 팔만대장경 제작이 호국의 희망에 있다고 하는 통설을 무신정권의 최이가 불교 세력을 회유하기 위한 사업이었다고 해석하는 부분을 보고는 내 눈이 커졌다.

 

텔레비전 드라마 <주몽>에서 한사군의 제철 기술이 우리보다 뛰어났다고 했지만 이덕일은 우리(고조선)의 청동 합금 기술이나 제철 기술이 훨씬 더 우월했다고 여러 가지 증거(다뉴세문경, 청동합금의 성질 등)를 들어 설득력 있게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을 반출하려고 시도한 일본의 행위는 역사 왜곡을 위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광토대왕비문의 주인공과 그 의미를 알아차린 것은 일본인 사코오였다는 데에 문()의 나라 조선 선비들의 반성을 촉구하며 이덕일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과거의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현실의 인식을 지배한다는 말에 나의 고개는 절로 끄덕여졌다. 이것이 역사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과거의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현실에서 자신의 위치나 정체성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조차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 중 사랑은 舍廊이다. 즉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방이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이덕일의 역사 사랑(Love)이 그 중심에 있다. 저자는 독자들과 사랑방에서 현실의 어려운 점을 우리의 선조들의 지혜를 통하여 풀어나가자 이야기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사랑함으로써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주 적절한 책제목이라고 보여진다.

 

이 책은 대중 역사서로서 일반인들에게 역사 속의 에피소드와 현실을 문제점을 연결해 해설해줌으로써 일반인들이 역사라는 것에서 느끼는 무거움에서 상당히 탈피하게 해주는 점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좋은 부분이다. 하지만 이덕일이 너무 다작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와 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은 하나의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시론이었으며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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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원정기 - 문명기행 2
스벤 헤딘 지음, 윤준.이현숙 옮김 / 학고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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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벤 헤딘!

실크로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아마도 이 유명한 탐험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렐 스타인, 폴 펠리오 등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탐험한 유명한 탐험가 스벤 헤딘이 티베트를 탐사한 과정을 본인이 직접 쓴 책이다.


이 책 <티베트 원정기>라는 제목에 나는 우선 끌렸다. 그리고 스벤 헤딘이라는 저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반드시 읽어볼 결심을 했다. 내가 스벤 헤딘을 알게 된 것은 <실크로드의 악마들>(사계절.2002년)이라는 책에서 이다. <실크로드의 악마들>에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지역을 탐험하면서 각종 유물을 약탈해간 사람들이 나온다. 그 중 한 명이 스벤 헤딘이었다.


스벤 헤딘은 스웨덴 사람이었지만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할 때에 리히트호펜교수를 만난다. 리히트호펜이라는 사람은 ‘실크로드’란 단어를 만들어낸 학자이다. 그 옛날 중국과 서양의 교역로 중의 하나인 오아시스 교역로를 실크로드란 이름으로 명명했고, 이 이름은 지금도 동서 교역로를 말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스벤 헤딘은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보는 것과 같이 히말라야 지역인 티베트까지도 탐험을 했다. 그 주된 이유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곳의 지역을 탐사하고 지도에서 공백으로 남겨진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지금으로부터 시계를 100년을 뒤로 돌리면 유럽인들에게 중앙아시아 지역과 남극, 북극은 미지의 땅이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 자신들이 모르는 땅에 대한 탐험에 관심이 많았고, 그 땅을 발견해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는 욕심도 가지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지역은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거주해왔으며 수준 높은 문명이 존재했음에도 자신들이 모르는 땅이기에 미지의 세계로 여겼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조차도 ‘새로운 세계’ 혹은 ‘신세계’라고 불렀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땅임에도 그들은 순전히 자신들의 입장에서 다른 세계를 본 것이리라. 그리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미개인이라고 생각했다.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인종차별적인 처사였고, 이것은 오리엔탈리즘과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스벤 헤딘의 오지 티베트의 목숨을 건 탐험기이다. 해발 고도가 5000미터 이상이나 되는 곳에 대규모 탐사대를 이끌고 난관을 헤쳐 나가는 스벤 헤딘의 모습을 보면 남자로서 정말 멋진 사람으로 그려진다.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이 죽고, 또 물건을 실어 나르는 당나귀나 낙타가 죽고, 또 같이 동행하는 안내자가 죽어버리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멋진 리더의 모습을 스벤 헤딘은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티베트 지역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으면서도 배짱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독자들은 아마도 스벤 헤딘에게 존경심이 절로 일어날 것이다.


남극을 탐험함 세클턴이나 스콧, 아문센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탐험가로서의 멋진 모습과 리더십, 또 그의 성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책의 곳곳에서 느껴지는 백인우월주의자의 모습은 우리 같은 동양인의 눈에는 거슬릴 수도 있다. 오리엔탈리즘을 빼고는 정말 멋진 책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동양인 중의 한명인 나의 한숨 섞인 패배주의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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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조주은의 여성, 노동,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 민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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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여성’이라고? ‘아· 미혼여성에 대한 오자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가도 이 단어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비혼여성’이라는 단어는 결코 오자가 아니었다. 저자가 꼭 ‘미혼여성’이 아니라 ‘비혼여성’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서서히 알아차릴 수 있다.

 

미혼여성과 비혼여성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저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히 않은 단어를 쓰고 있을까? 미혼이란 의미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지만 아직 못한 경우를 말하고, 비혼이란 결혼에 대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선택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결혼을 반드시 해야만 사람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의 성차별이고, 또 독신이란 또 하나의 선택된 가족관계란 의미로 해석해야 하나? 이 책<페미니스트라는 낙인>(민연.2007)을 읽고는 내가 생각하는 가족이란 개념과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정의가 아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족은 남녀와 소수의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말하는 것이고, 저자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족은 사회가 만들어낸 정상가족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정상이란 말은 사회 통념상의 정상일 뿐이고, 우리가 흔히 비정상가족이라고 이야기하는 편부()가정이나 조손 가족 조차도 저자에게는 전혀 비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스트의 정의를 한 번 보자. “성차별적인 사회, 여성의 경험이 배제되거나 왜곡되어 편파적으로 구성되는 사회에서 저항하는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말하고 있으며, 이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어렵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 사회의 변혁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여성차별의 현장을 파헤치고 있으며, 여성들이 이에 반발하여 일어서기를 원하는 투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49년 시몬드 보부아르는 <2의 성>이란 책을 펴낸다. 보부아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된다. 즉 이 말은 여성이란 순전히 경제적 및 사회적 세력들의 만들어낸 남녀가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는 ‘제1의 성’이지만 사회 제도적인 측면 때문에 ‘제2의 성’이 되었다는 뜻이다. 또 인류의 역사에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바로 ‘페미니즘’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부여했다는 데에 있었다.

 

‘성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1940년대 말이라고 하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남성들을 대신해서 노동현장에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다. 여성들은 드디어 독자적인 경제 권력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행사해오던 자원에 대해 당당하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발단이었다.

 

‘혁명’이라는 의미는 한 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회의 가치나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데에서 시작이 된다. 이 새로운 혁명은 기존에 여성이 모든 면에서 남성 보다 열등하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공감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혁명에는 반드시 전투적인 개념이 들어 있기 마련인데, 전투적이라 함은 물리적인 무력의 사용과는 상관없이, 타도의 대상을 선정하고 그 대상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생활 속에서 없애버리길 원한다. 페미니즘에서 그 대상은 바로 남성들의 우월주의였다.

 

페미니스트인 저자 조주은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과 맺는 관계망에 ‘의존’해 살아가지만, 모든 남성들은 여성과 맺는 관계에 ‘기생’하며 살아간다”. ! 저자는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지만 남성은 그런 여성에게 기생하며 살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기생이라고 하면 자신은 홀로 생존 능력이 없기에 다른 존재에 삶을 의존해야함 하는 존재인데, 남성이 이런 기생 존재라고 보고 있다. 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말투인가!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성은 ‘밥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고 남성은 ‘밥을 처먹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무엇이 저자에게 사무치는 아픔을 주었기에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말을 하고 있나! 그녀는 남성들이 이에 대해 반성을 해보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극적으로 욕을 먹어야 할 남성의 위상은 이미 한국사회에서 조차도 오래전에 깨진 것으로 느껴진다. 한국에서도 남성은 더 이상 ‘제1의 성’은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무서워진다.

 

“권력의 핵심을 더 이상 남성에게 양보하며 맡겨두고만 있지 않겠다는,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정체되지 않고 나아가려는 욕구를 가진 여성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저자의 표현은 어떠한가! 혁명의 구호 그 자체로 보여 진다.

 

이 책에도 보면 인간의 생물학적인 의미는 애당초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반드시 피하려고 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페미니스트들은 생물학에서는 차별받고 있는 여성의 입장을 숙명론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페미니즘 이론의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지는 않고 있는지 그들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남녀 간의 성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임신, 출산, 수유는 반드시 여성들의 몫인 것이다. 혹시 미래에 남성의 몸에 자궁을 이식해 남성이 임신을 할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남과 여는 신체적으로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차이가 존재한다. 내가 말하는 차이란 우월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모든 남녀의 차이를 환경적인 요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부분을 되짚어봐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여성이 ‘제2의 성’이라고 생각하는 시기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사회에서도 여성은 더 이상 약자는 아니다. 오히려 경제권을 가진 여성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당해온 것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는 듯이 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여성이 약자로 취급되던 것은 전설이 되었다.

 

나는 페미니스트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여성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이미 ‘제1의 성’이 되었습니다. 여성들이여! 그대들은 이미 강자입니다. 남성들의 운명은 이제 당신들의 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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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 2007-05-0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주변에는 여성들이 제1의 성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은 곳곳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단지 남성 대 여성이라는 양자의 대립구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더 폭넓게 보자면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차이'와 '흔적'에 중심을 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장애인이나 다른 소수자들의 문제까지도 접근한다는 것이겠죠. 처음엔 여성주의로 시작한 운동이 페미니즘은 맞습니다만, 님의 말대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따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남성성'이라는 가치가 중심이 된 사회였다면 이젠 '여성성' - 의미, 과정, 차이 - 을 중시하자는 의미로 확대되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다른 좋은 책들도 많이 있으니 읽어보시면 좋을 듯 싶네요.

비로그인 2007-06-07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여성들은 아직도 곳곳에서 차별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안드레아 드워킨 이나 매키넌 으로 시작되는 90년대 이후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보는 반남성적 페미니즘입니다. 이런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반발까지 사고 있습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희생자 철학은 남성과 여성을 더욱 대립구도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지금 한국의 독재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정말 동등하게 대우받고 어떻게 서로를 끌어안을지 여성학과 남성학의 끝없는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이앤 아버스 -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
퍼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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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다이앤 아버스>(세미콜론.2007)을 읽기 전 사진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다이앤 아버스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물론 내가 20세기의 모든 유명한 사진가를 다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책 표지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우수에 찬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나에게 이 책을 꼭 읽게 만들 정도로 흡인력이 있었고, 이 책을 읽는 것은 20세기 최고의 사진가와의 만남으로 이끌었다.

 

뉴욕에서 부유한 유대계 가정의 둘째로 태어난 다이앤 네메로브는 어려서부터 주변으로부터 총명하고 또 예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으며 자란다. 그녀는 남편 앨런 아버스와 14살에 만난다. 그녀의 부모도 반대하는 결혼을 했던 것처럼, 그녀도 불과 18살에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한다. 부모는 그녀가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그녀의 선택에 있어서 돈은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돈에 대한 그녀의 관념은 나중에 유명한 사진가가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돈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예술가가 된 이유를 보면, 예술이란 그것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고, 예술은 사람을 흥분시키거나 거기서 뭔가를 배우게 하기 때문이라는 그녀의 말은 그녀의 중요한 가치관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돈에 대한 개념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다이앤이라는 그녀의 이름은 영화 <7의 천국>의 원작인 브로드웨이 공연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다이앤의 어머니인 거트루드가 다이앤을 임신했을 때 이 공연을 봤는데, 너무나 상처받기 쉽고 동시에 강인한 처녀 다이앤’의 캐릭터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주인공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러한 이름 덕분에 그녀의 성격도 이와 비슷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사진가로서의 출발은 패션 사진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금지된 세계’, 특별한 사람들을 모델로 그들의 음습한 세계를 대상으로 한데에 있다. 쌍둥이, 기형인, 복장 도착자, 거인, 장애인, 나체주의자와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소수자들의 모습을 주로 찍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찬사와 함께 비판에도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모든 독창적인 예술은 처음에는 비위에 거슬리다가 나중에 대중에게 받아들여진다’ 고 작가 거투루드 스타인이 피카소에게 훈계했던 내용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이앤은 천재적인 사진가로 된 것은 그녀에게 많은 멘토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앨런을 비롯해 알렉스 엘리엇, 리젯 모델, 마빈 이스라엘 등, 알렉스 엘리엇이 괴테의 말을 인용해 그녀에게 이야기해준 제대로 보면 모든 형태가 아름답다는 말은 그녀의 사진에 들어있는 기괴한 모델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는 것 같다. “전에 본 것이 보이면 셔터를 누르지 마라라는 아트 케인의 격언은 그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녀는 이상한 것들의 마법사다(Diane Arbus is the wizard of ‘odds’”라고 불렸다. 다이앤 아버스의 유산 상속자인 큰 딸 둔 아버스는 어머니가 진정으로 사진으로 찍고 싶어한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금지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녀는 이전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세계를 인화지에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것이 그녀를 천재적인 사진가로 만든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천재적인 사진가로서 평가를 받는 것 중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진의 주인공이 편안한 마음으로 사진에 찍힐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다이앤의 능력에 있었다. 그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느낌이 바로 사진가와 촬영 대상자 사이에 강렬한 협력이 존재할 만큼 유대감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작품 세계를 만든 무서운 힘의 근원이었다는 것이다.

 

다이앤 아버스의 첫 사랑이자 남편과 헤어지고 그녀는 더 이상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게 되고, 이에 따라 그녀는 섹스에 탐닉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있어서 섹스는 일생 동안 경험한 수백 가지의 일 중 단순한 하나였던 것이다. 그녀가 섹스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는 감정적인 것이지 도덕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고, ‘한 사람의 벽을 허무는 가장 빠르고 순수한 방법은 바로 성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섹스를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섹스는 작품의 세계를 완성하는 하나의 이벤트였다.

 

천재적인 예술가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데 그런 성향이 그들을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고 또 그들을 죽게 하는지 의문이다. 그녀의 친정인 네메로브 집안의 분위기에는 우울증이 만연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녀의 유전자에는 예술적인 천재성과 아울러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우울증 유전자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 두 개의 유전자는 뇌의 같은 부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인 퍼트리샤 보스워스는 다이앤의 모델이었다. 모델을 거쳐 나중에 작가가 되어 영화 평론과 전기를 쓴 사람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인터뷰를 통해서 다이앤의 일생을 다시금 그려내서 그것을 우리들이 읽고 있는 것인데, 너무도 생생하게 표현하는 그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제 우리는 그녀의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없고, 다만 그녀가 찍은 사진 속에서 그녀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환생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이 책의  ‘띠지’에도 나와 있듯이 이지적인 여배우 니콜 키드만이 그녀의 역을 맡은 영화가 개봉된다고 하니 니콜 키드만을 통해서 우리는 다이앤의 아름다움, 예술성, 감수성과 어쩌면 잔인함(?)까지도 확인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매 페이지의 가장자리는 검게 칠해져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다이앤 아버스가 그녀의 사진을 인화하는 방식으로 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보이는데 이 책의 의미를 살려주는 멋진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녀가 찍은 유명한 사진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실망스러웠다. 아마 다이앤 아버스 사진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테지만, 독자들은 아마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그녀가 찍은 사진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많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버스가 찍은 유명한 사진들이 나와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며 다이앤 아버스라는 사람이 이상한 것들의 마법사라는 말을 듣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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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오리새끼의 출근
메트 노가드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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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오리새끼’, ‘벌거벗은 임금님’, ‘쇠똥구리’, ‘식료품점의 니세’, ‘전나무’, ‘나이팅게일’

안데르센의 이 동화를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을 것이다. 안데르센동화는 아이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그러니까 안데르센 동화는 아이들이 성장과정에서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인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기본적으로 상상력을 북돋워주며, 권선징악이라든지 아이들에게 모름지기 살면서 해야만 할 일들과 해서는 안 될 일들에 대한 설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화는 아이들만이 읽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저자의 서문에서 어른들이 동화를 읽는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른들은 동화를 이용해 일상사의 딜레마라든가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찾곤 했다. 동화에서 도움을 얻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를 이해하고, 갑작스레 닥친 인생의 고통을 달래곤 했다는 뜻이다”

이 책 <미운 오리새끼의 촐근>(생각의나무, 2005년)의 구성은 안데르센의 여섯 편의 동화 에 대한 요약본과 완역본, 그리고 해당 동화가 직장생활에서 실제 우리들이 겪는 어려운 상황에서의 교훈을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러니까 단순한 동화책은 아닌 것이다.

이를테면 ‘미운오리새끼’의 경우를 살펴보자.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다 읽어 보았을 테니 내용을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이 동화가 직장생활에서의 교훈을 주는 부분을 보면,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주변에서 자신의 가치 또한 낮게 보고 있다. 오리들이 볼 때에는 자신들과 닮지 않은 백조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리들은 자신들과 다른 외모나 성향을 가진 상대방을 멸시하고 있으며, 백조도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남들에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과정을 통해 마지막에 드디어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이 멋진 백조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저자는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있는데 그 중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 달 후, 아니 1년 이내에 하고자 하는 일은 있는가?‘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할 때인가?’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고, 대답해야할 의문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의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이 항상 스스로를 점검하고 나태해지지 않고 자신이 목표로 한 것에 다가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는 물음들이다. 이런 점들을 수시로 점검해서, 자신이 실천을 할 수 있게 관리를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책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보통 이런 책을 읽고는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위의 물음을 적어서 책상위에 올려놓거나 하는 방법을 통해 잊지 않고 실천하려 하지만, 이것이 습관화 되지 않으면 실제 생활에서 적용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항상 그렇듯이 연초에 한 계획을 제대로 밀고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실천하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하기에 이러한 책을 계속 읽어나가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과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 얼마나 실천할 수 있으려나?’ 하고 나 자신에게 계속 의문을 제기하였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실천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계획한다면 그동안에도 계속 그래왔듯이 하나도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라도 실천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부터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바로 제일 마지막 질문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가?’

이 의문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내가 무엇인가를 할 때마다 이를 점검하고 또 내가 나태해지려고 할 때마다 이 문장을 생각하며 행동하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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