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조주은의 여성, 노동,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 민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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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여성’이라고? ‘아· 미혼여성에 대한 오자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가도 이 단어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비혼여성’이라는 단어는 결코 오자가 아니었다. 저자가 꼭 ‘미혼여성’이 아니라 ‘비혼여성’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서서히 알아차릴 수 있다.

 

미혼여성과 비혼여성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저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히 않은 단어를 쓰고 있을까? 미혼이란 의미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지만 아직 못한 경우를 말하고, 비혼이란 결혼에 대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선택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결혼을 반드시 해야만 사람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의 성차별이고, 또 독신이란 또 하나의 선택된 가족관계란 의미로 해석해야 하나? 이 책<페미니스트라는 낙인>(민연.2007)을 읽고는 내가 생각하는 가족이란 개념과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정의가 아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족은 남녀와 소수의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말하는 것이고, 저자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족은 사회가 만들어낸 정상가족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정상이란 말은 사회 통념상의 정상일 뿐이고, 우리가 흔히 비정상가족이라고 이야기하는 편부()가정이나 조손 가족 조차도 저자에게는 전혀 비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스트의 정의를 한 번 보자. “성차별적인 사회, 여성의 경험이 배제되거나 왜곡되어 편파적으로 구성되는 사회에서 저항하는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말하고 있으며, 이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어렵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 사회의 변혁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여성차별의 현장을 파헤치고 있으며, 여성들이 이에 반발하여 일어서기를 원하는 투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49년 시몬드 보부아르는 <2의 성>이란 책을 펴낸다. 보부아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된다. 즉 이 말은 여성이란 순전히 경제적 및 사회적 세력들의 만들어낸 남녀가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는 ‘제1의 성’이지만 사회 제도적인 측면 때문에 ‘제2의 성’이 되었다는 뜻이다. 또 인류의 역사에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바로 ‘페미니즘’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부여했다는 데에 있었다.

 

‘성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1940년대 말이라고 하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남성들을 대신해서 노동현장에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다. 여성들은 드디어 독자적인 경제 권력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행사해오던 자원에 대해 당당하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발단이었다.

 

‘혁명’이라는 의미는 한 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회의 가치나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데에서 시작이 된다. 이 새로운 혁명은 기존에 여성이 모든 면에서 남성 보다 열등하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공감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혁명에는 반드시 전투적인 개념이 들어 있기 마련인데, 전투적이라 함은 물리적인 무력의 사용과는 상관없이, 타도의 대상을 선정하고 그 대상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생활 속에서 없애버리길 원한다. 페미니즘에서 그 대상은 바로 남성들의 우월주의였다.

 

페미니스트인 저자 조주은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과 맺는 관계망에 ‘의존’해 살아가지만, 모든 남성들은 여성과 맺는 관계에 ‘기생’하며 살아간다”. ! 저자는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지만 남성은 그런 여성에게 기생하며 살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기생이라고 하면 자신은 홀로 생존 능력이 없기에 다른 존재에 삶을 의존해야함 하는 존재인데, 남성이 이런 기생 존재라고 보고 있다. 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말투인가!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성은 ‘밥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고 남성은 ‘밥을 처먹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무엇이 저자에게 사무치는 아픔을 주었기에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말을 하고 있나! 그녀는 남성들이 이에 대해 반성을 해보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극적으로 욕을 먹어야 할 남성의 위상은 이미 한국사회에서 조차도 오래전에 깨진 것으로 느껴진다. 한국에서도 남성은 더 이상 ‘제1의 성’은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무서워진다.

 

“권력의 핵심을 더 이상 남성에게 양보하며 맡겨두고만 있지 않겠다는,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정체되지 않고 나아가려는 욕구를 가진 여성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저자의 표현은 어떠한가! 혁명의 구호 그 자체로 보여 진다.

 

이 책에도 보면 인간의 생물학적인 의미는 애당초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반드시 피하려고 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페미니스트들은 생물학에서는 차별받고 있는 여성의 입장을 숙명론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페미니즘 이론의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지는 않고 있는지 그들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남녀 간의 성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임신, 출산, 수유는 반드시 여성들의 몫인 것이다. 혹시 미래에 남성의 몸에 자궁을 이식해 남성이 임신을 할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남과 여는 신체적으로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차이가 존재한다. 내가 말하는 차이란 우월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모든 남녀의 차이를 환경적인 요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부분을 되짚어봐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여성이 ‘제2의 성’이라고 생각하는 시기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사회에서도 여성은 더 이상 약자는 아니다. 오히려 경제권을 가진 여성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당해온 것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는 듯이 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여성이 약자로 취급되던 것은 전설이 되었다.

 

나는 페미니스트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여성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이미 ‘제1의 성’이 되었습니다. 여성들이여! 그대들은 이미 강자입니다. 남성들의 운명은 이제 당신들의 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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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 2007-05-0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주변에는 여성들이 제1의 성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은 곳곳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단지 남성 대 여성이라는 양자의 대립구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더 폭넓게 보자면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차이'와 '흔적'에 중심을 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장애인이나 다른 소수자들의 문제까지도 접근한다는 것이겠죠. 처음엔 여성주의로 시작한 운동이 페미니즘은 맞습니다만, 님의 말대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따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남성성'이라는 가치가 중심이 된 사회였다면 이젠 '여성성' - 의미, 과정, 차이 - 을 중시하자는 의미로 확대되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다른 좋은 책들도 많이 있으니 읽어보시면 좋을 듯 싶네요.

비로그인 2007-06-07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여성들은 아직도 곳곳에서 차별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안드레아 드워킨 이나 매키넌 으로 시작되는 90년대 이후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보는 반남성적 페미니즘입니다. 이런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반발까지 사고 있습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희생자 철학은 남성과 여성을 더욱 대립구도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지금 한국의 독재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정말 동등하게 대우받고 어떻게 서로를 끌어안을지 여성학과 남성학의 끝없는 숙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