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등감이 상당히 강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열등감이 강했던 것은 아니었고, 어렸을 때의 나는 열등감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만하다는 말이 자만한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거만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오만함, 말이다. 나는 뛰어나니까 당연히 더 많은 일을 해야 되고, 더 뛰어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그런 오만함. 노블리스 오블리제일까?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고, 힘든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된다면, 나는 스스로를 믿었다. 당연히 이정도는 해낼 수 있다고. 혹자는 그랬던 나에 대하여, 그것이 바로 거만하다는 것이다, 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만함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는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었다. 오만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며 가르침을 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일을 겪고 오만하리만큼 넘쳤던 자신감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면에서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누가 접시를 잘닦는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 '왜 난 설거지조차 제대로 못하지' 라는 열등감을 가질 정도였으니까. 오만하지 않고 열등감에 가득차있던 나는, 자꾸만 스스로가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들었다. 훨씬 더 어렸을 때 같으면 상상조차도 못할 일이었다. 그때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나는 다 할 수 있어, 라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 고개를 숙일 수 있었지만, 자신감을 잃어버린 내가 고개를 숙여버리면 그건 정말로 '나는 모자라고 열등하다' 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것이 될테니까. 마치 상실의 시대, 에서 미도리가 이야기하는 것 처럼 '부자학생들은 돈이 없다고 빌려달라고 이야기하여도 괜찮았지만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간 정말로 돈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처럼.
저럴 정도였으니 학업에 대하여 내가 품었을 열등감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사실은 당연히 서울대 의대를 갈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모의고사를 치면 항상 점수가 좋았고, 배치표나 추천대학을 보면 늘 고려대나 한양대 의대, 좀 잘나오면 연세대나 가톨릭대 의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이정도면 조금만 더 점수를 올리면 쉽게 서울대 의대는 갈거라고 생각했다. 내신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의대에 꼭 가야지, 의사가 꼭 되어야겠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배치표 정점이 서울대 의대가 아니라 서울대 물리학과, 였다면 주저없이 나는 물리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결국 무슨 과라도 좋았다. 딱히 무슨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강박적으로 나는 제일 높이 있는 저걸 해야지, 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수능을 두 번이나 쳐야했고, 서울대 의대는 커녕 서울에 있는 의대도 진학하지는 못했다.
학교에 들어와서는 늘 열등감에 시달렸었다. 원래는 여기 속하는 사람이 아닌데, 라는 생각도 많이 품었다. 자연스레 학교와 거리를 두게 되고,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였다. 공강시간에는 도서관에 틀어박혔거나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꽃 사진을 한참 찍다가 포기했다. 병원에 실습 나가게 되었을때는 실습이 끝나면 바로 집이든 어디든 학교와 멀어진 장소에 가서 책을 읽든지 멍하니 있었다. 사실은 의대에 들어와서 좋았던 적 따위 한 번도 없었다. 잠깐 누군가 사귀었을때는 행복했지만 그 이후에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내가 정말 의대에 잘들어왔네, 라고 느꼈던 때가 군대를 공중보건의로 가게되었을 때니깐 말다한거다. 그때 말고는 의대든 의사든, 항상 나는 밖에서 떠돌았었다. 항상 나는 의사라기 보다는 과학자를 자처했다.
한강을 거닐고 있던 때였다. 학교는 서울에 없지만 병원은 서울에 있었다. 매일 실습이 끝나면 아까 말한대로 나는 집에 가거나, 될수있는대로 병원과 학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거닐고 있었다. 한강도 내가 자주 가는 곳 중 하나였는데, 저녁 무렵에 한강을 걷고 있으면 정말 다양한 사람이 보인다. 조깅을 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 등. 나 또한 그런 사람들의 일부가 되어 배경으로 녹아들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멍하니 강변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매번 사람이 모인 곳들은 피하며 걸어다녔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마치 누군가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 처럼, 그곳으로 내 발걸음이 향했다.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옆에 자전가는 아무렇게나 넘어져있고 그 사람은 누워서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나마 얼핏 보자 - 그렇게나 의대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지만 - 왠지 나서야 될 것 같았다. 그래,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의대생이니까, 곧 의사가 될 사람이니까. 사람이 쓰러진 경우의 응급처치는 우리 모두 배운다. 여간한 공공기간이면 다 배울 것이다, 비단 의사들 뿐만 아니라. 하지만 우리들만큼 그게 강제되어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맨날 교수에게 핀잔듣고 환자에게 핀잔듣고 그렇게 실습을 다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익히게 된다. 왜? 우리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의사니까. 그런 느낌이 들자 갑자기 불덩이가 내 몸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배에 힘을 주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외치려고 했다. 여기 의대생있으니까,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실제로 내가 거기에 나섰다하더라도 인공호흡과 가슴을 압박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때에 비하여 조금더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지금도 그런 걸 보게 된다면 가슴을 압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조금 더 노련하게 진행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덜 노련하였던 그때에는 내가 나설 차례가 없었다. 이미 다른 외과 의사가 뛰어들어서 응급 처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지. 공교롭게도 '진짜' 의사가 - 나같은 의대생따위가 아닌 - 그 주변을 조깅하고 있었거든. 다만, 풋, 왜 굳이 인공호흡하면서 자신의 전공과목을 밝혔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지만, 풋. 전공을 밝히면 사람들이 더 자신의 지시에 잘 따를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의사의 말석에 자리한 뒤 두 번을 아팠다. 한 번은 감기를 정말 심하게 앓아서 일주일동안 앓아누워있었는데, 병원에 갈까 말까, 하다가 결국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가 병원에 가서 진료받는다는게 좀 웃기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엄청나게 인기좋아보였던 그 병원의 원장님은 내가 들어와도 얼굴 한 번 들지 않고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픈 곳을 이야기하여도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고 날 한 번도 보지 않았다. 3분 진료라던가, 나 자신이 그런 3분 진료를 받자 조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나는 그 진료를 비난할 수 없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친절하게 진료를 보다가 오늘 진료를 받고 싶은 사람이 내일로 미뤄지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 또한 불만이 될테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습게도 그 3분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는데 낫고 말았다. 그게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주사가 독해서 나았던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적 선후관계로서는 분명 병원에 갔었고 낫고 말았다. 나았으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에는 어깨가 너무 아팠다. 자고 일어나 땅을 짚으며 일어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뭔가 우득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뒤 왼팔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그렇게 호들갑 떨일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 팔의 신경이 눌려서 일시적으로 생긴 현상이었겠지만 - 그당시에는, 그러니까 자신의 일이 되면 겁이 덜컥 나는 것은 사실이리라. 3일이 지난 뒤에도 조금도 호전을 보이지 않아서 바로 병원에 갔다. 이 통증은 심상치 않은 통증인 것 같다고, 분명 뭔가 파열되거나 한 거 아닌가, 싶다고. 병원에서는 몇 가지 물리적 검사를 하더니 전방위가 다 아픈 이런 경우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MRI를 찍자고 말했다. 나는 MRI가격을 물었다. 가격은 40만원이었다.
우습게도, 만약에 내가 진료실에 그 원장님 자리에 앉아있었다면 나 또한 똑같이 MRI를 권하였을 것이다. 팔 자체가 안움직이는데 무슨 방법으로 진단을 내리겠는가? 현대의학은 근거중심의학이다. 근거가 있지않으면 약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임상적 결과에서 MRI의 연부조직손상에서의 진단적 가치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으니. 그런데 막상 나또한 MRI를 아마 찍어야 하지 않을까? 에서 MRI를 찍자, 를 들으니 기분이 확 달랐다. 40만원? 40만원이라고? 헐, 미친거 아냐? 돈이 어딨어, 40만원이. 내가 시원찮은 표정으로 앉아있으니 일단 주사와 물리치료와 약을 먹어보아라, 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물리치료실로 내려가면서 내내 나는 자본주의와 의료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사실은 우리나라의 의료비는 매우 저렴한 편이다. 외국에서는 지역 병원에서 MRI를 권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의료비가 매우 저렴하기 때문에 MRI를 이렇게 권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에서 MRI가 100만원을 넘는 고가의 진단법이라고 하여도 그건 외국의 이야기이다. 외국이야 어떻든, 우리나라에서는 40만원이라고 하면 비싼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나는 약과 물리치료만 받고 나았다.
의사 입장에서는 MRI를 찍는게 합리적이다. 의사들은 항상 불만에 차있다. 환자들은 의료비가 너무 비싼 것 같다, 의사들이 무슨 자기들이 특권계층인줄 안다, 3분 진료다, 쓸데없는 검사를 요청한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할 말이 많다. 과학적 근거와 연구를 통하여 연부조직의 손상시 MRI가 나은 것 같다고 나오니 하자고 요청을 하는것이다. 3분 진료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나라의 의료 환경은 3분 진료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는 환경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의료보험료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저렴한 나라다. 여러가지 사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의사의 진료 시간을 줄여버리게 되는 것이다. 의사들이 특권계층처럼 으시대는 것 처럼 보이는가? 쓸데없는 검사를 시행하려고 하는 것 같은가? 제약회사랑 담합해서 환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 같은가? 아니다,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현대 의학의 중심은 근거중심의학이다. 폐렴 증상이 있으면 폐렴 약을 쓰는게 맞다. 너무 간단해보이는 명제이지만 바꿔말하자면 증상이 없으면 우리는 약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하여도 환자 입장에서는 MRI는 너무 비싸다. 그래서 환자들도 항상 불만에 차있다.
저렇게 환자의 입장에 있다가 진료를 시작한지 시간이 좀 흘렀다. 최소한 환자에게 해는 끼치지 말자, 라는 다짐을 매번 아침에 눈뜨면 꼭한다. 최소한 해는 끼치지 말자, 최소한 해는 끼치지 말자.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고 위험한 증세로 변할 가능성이 있으면 큰 병원으로 꼭 보내자. 학생 때는 몰랐지만 직접 진료를 하면서부터, 내가 내 손에 쥐고 있는 권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환자의 증세가 꼭 교과서적으로 들어맞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러니까 의사는, 의사로서의 나는 최대한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서 큰 병원에 가보시라는 권유를 종종 하는 편인데, 환자분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실때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더 강하게 병원에 가셔서 정밀 검사를 받으시라고 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이정도 권하면 된걸까, 라고. 환자들로서는 이 병원가도 시원찮고 저 병원가도 시원찮고, 환자 뺑뺑이 돌리는 거 아니냐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다. 내가 무엇인가를 놓쳐서, 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결국 죄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처치라면 여기서 할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처치의 범위를 벗어나는데도 붙잡고 있다면, 그것은 죄이다. 선은 베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죄는 짓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냥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가운을 벗어둔 상태의 나는, 더러운 부분은 잘 만지지 않고 힘든 상황은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가운을 입었을 때의 나는, 그리고 설령 입지 않았더라도 의사로서의 내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의사이기에' 아무리 더러운 환부라도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 좀 힘들더라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모르겠다, 이런걸 무슨 사명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이것은 소방복을 입은 소방관이, 평소였다면 뛰쳐나왔을 불길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칭찬을 받아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당연한 거다. 내가 쓰러진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쓰러진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다. 이런 당연한 일에 대하여 무슨 답례나 칭찬은 사실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방관이나 경찰관들 또한 내심으로는 당연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 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칭찬을 들으면 좋을 때가 있다. 진료를 하는데 어느 분이 '좀 다르시네요.' 라는 말을 했었다. 난 순간 놀라서, 내가 뭔가를 잘못한건가, 하고 얼굴을 굳히고 쳐다보았는데 그 사람은 씩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참 꼼꼼하게 봐주시네요, 환자 많이 보시면 이것도 힘드실텐데' 그때 여전히 얼굴은 굳어있었지만, 그리고 뭐라고 답해야 할 지 몰라서 그냥 의사니깐요, 라고 말하고 얼버무렸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난 그동안 실습을 돌때 교수들이 환자들이 감사의 인사를 표할때 가장 행복하였다, 라고 말하면 위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냥 우리 앞이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라고. 하지만 막상 내가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솔직히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의사를, 의대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나인데도. 특별히 의사가 되고 싶어서 의대에 온 것도 아니고 그냥 방황하다가 들어왔으면서도. 난 여전히 내가 앞으로 계속 의사를 할지 조차도 잘 모르고, 왠지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끝없이 방황할 것 같지만,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 비록 예전보다는 열등감이 많이 줄었다 - 그리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과학자라고 스스로 지칭하지만, 이런 칭찬을 들으며 산다면, 의사로 사는 것도 조금은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칭찬할 필요도 없고, 좋아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너무 감정적으로 미워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감정적으로 미워하면서 '아, 쟤들 하는 거 다 제약회사의 음모야', '맨날 검사하라고 돈쓰게 만들지', '병 제대로 낫게도 못하잖아' 등으로 말하다가 병을 치료할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예방접종? 꼭 해야 된다. 몇 십년 동안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이전에 비하여 발병률이 유의하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니까. 암치료? 사실 가장 권장할만한 방법은 수술이다. 그러니까 수술을 할 수 있으면 수술을 하도록 권한다. 수술을 할 수 없을때 항암요법이나 방사선 요법을 사용한다. 또는 수술과 함께 항암요법을 시행하기도 한다. 이 또한 논문에 몇 년씩 개정되어온 근거들이다. CT, MRI의 방사선? CT는 방사선이 나오겠지만 MRI는 자기공명촬영이다. 방사선이 나오는 게 아니다. 돈독 오른 의사를 어떻게 믿냐고? 위의 책 제목이 '의사를 믿지 말아야 할 72가지 이유' 이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태클을 걸어야겠지만, 그런 것을 하더라도 의사를 믿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믿어달라. 우리는 당신이 낫기를 바란다. 이건 진심인 것 같다. 위선같지만, 진심인 것 같다.
덧. 사실 에반게리온에 대하여 아주 아주 아주 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자동저장이 잘못되었는지 날려먹었다. 엄밀히 말하면 반 정도 날려먹었는데, 도저히 다시 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지워버렸다. 정말 심혈을 기울여 내 에반게리온 팬질의 모든 능력과 지식과 분석을 담은 대작을 썼는데 이렇게 날려먹어서 참으로 아쉽다.
덧덧. 알라딘에서 책 배송시 샘플북을 넣는 경우가 있다. 가끔은 그 샘플북들을 보면서 오, 이 책은 괜찮아보이는데,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지만, 이번엔 잘못 넣은 것 같다. 딱 봐도 배송지가 의료기관인데 그 택배에다가 저런 도발적인 제목을 가진 '의사를 믿지 말아야 할 이유' 를 넣어주는 패기란, 풋. 아마 그 샘플북을 보지 않았다면 이런 글따위, 안썼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