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종의 실용주의자라서 종이책 자체를 소유하는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책의 정보와 내용만 온전하다면 굳이 종이로 만들어진 책, 이라는 형상을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이다. 그렇기에 내가 책을 고르게 될 때에는 아무래도 표지보다는 내용을 우선으로 보게 된다. 물론 아무런 정보도 없는 책을 고르게 될 때에는 표지를 보게 되고, 뛰어난 표지디자인에는 감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기준은 내 안에서는 순위에서 밀려나있다. 그러다보면 늘 내 손에 잡혀있는 책들은 두꺼운 책들 뿐이다. 이 말이 두꺼운 책이 내용면에서 얇은 책에 비하여 우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주장하고 싶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책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아무리 얇은 책이라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변명을 한다면, 일반적으로는 두꺼운 책을 쓰기 위해서는 얇은 책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정보의 탐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임에는 분명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무언가 조사한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다면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책을 쓰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때 일반적으로 얇은 책에 비하여 두꺼운 책은 정보를 많이 담고 있으며, 이는 내가 말한 내 기준, 내용을 더 우선시해서 보게 되는, 에 부합한다. 또한 두꺼운 책은 얇은 책에 비하여 항상 위험성을 내포한다. 논리적 연결이 어긋날 위험, 같은 말을 반복할 위험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두꺼운 책을 쓰면서도 논리적 연결이 온전하고 같은 말의 반복이 그리 많지 않다면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짧은 글 안에서도 번뜩이는 재치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빛이 과연 뛰어난 통찰에서 온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바꿔말하자면 우리로서는 그것이 깊은 사유의 산물인지, 우연의 산물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긴 글은 문학적 수식을 배제하고 살펴본다면 정말로 뛰어나게 쓰지 않는 한 자신의 결점이 그대로 폭로된다. 그 중에서도 10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래에 읽거나 읽은 책들 중 1000페이지에 달하는 책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엄밀하게 1000페이지를 기준으로 삼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만족할 만큼 소개하기 힘들기에 단행본 기준으로 주석을 포함해서 900페이지를 기준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전에 몇 번이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 책은 제외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

 

 

 

생각의 역사1, 1239쪽.

수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읽다보면 저자의 지식의 폭에 진정으로 놀라게 되는 도서이다. 생각해보면 머리로 떠올려보는 역사는 지금껏 어느 나라, 어느 곳의 역사였었다. 그 역사또한 초기의 혼합된 형태에서 갈수록 세분화되어가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한 지역에서 그들 나름의 역사를 발전시켰을때, 다른 지역 또한 자신들의 문화를 발전시켜왔었다. 어느 한 곳만 아는 것은 불완전하다. 이 책은 그런 불완전성을 최대한으로 완전성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의 결과물이고, 그동안 세분화되어 발전되어온 각종 과학과 기술을 과거의 흔적에 유감없이 쓰여지도록 하는 장을 열어준다. 1권의 경우 그 범위가 '불에서 프로이트까지' 로 설정되어있는데, 그렇다고해서 단순한 인명이나 물질적 지식의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저 범위는 말 그대로 전체적인 시야에서의 한 부분이며, 그 부분안에 있는 모든 사상과 역사를 다루고 있다.

 

 

 

생각의 역사2, 1328쪽.

왜 위의 책과 같은 책인데 이렇게 다르게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책은 위의 책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묻는다. 왜 기존의 예술이 '과학에 대항해야 된다' 고 주장하면서 발달해왔는가? 그리고는 답을 내리는데 그것은 과학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20세기 지성사, 에서는 과학의 비중이 서술에서 종종 드러나는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사나 인문의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세계 각지의 모든 부분에서 발전되어온 지식들의 변천사를 잘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전문적인 과학적 지식을 이야기하기에는 힘이 조금 모자라는 듯한 느낌이 든다. 특수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핵심은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으나, 대부분 이해를 위해서 비유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짜임새는 이 책은 1권 이상의 수작의 반열에 올려준다.

 

 

 

지식의 역사, 924쪽.

사실 이 책은 위의 책들과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위의 책들에 비하자면 많이 모자란 편이다. 위의 두 책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이 책을 구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나, 만약에 위의 두 책이 부담스럽다면 이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위의 두 책에 비하여 훨씬 접하기가 쉽고 읽기가 쉬운 편이다. 크게 두 가지의 단점이 눈에 보이는데, 누구나 훑어보면 알 수 있듯이 서양 중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뒤의 미래에 대하여 저자가 나름대로 예측한 부분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종종 보인다. 저자 스스로가 밝힌 것 처럼 예측이 '판타지에 기반' 한 것이라고 할 지라도 개정판을 내면서 조금씩 추가하고 수정해났다면 훨씬 좋은 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단점을 제외한다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판형이 조금 작은 편이다.) 지식의 나열과는 달리 저자의 생각과 통찰을 의문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 976쪽.

 히틀러에 비견될만한 독재자를 찾는다면 스탈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지않고 아무렇게나 확대재생산시켜왔던,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든 높이 올려서 남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은 자신의 기록을 철저히 숨겼다. 자신의 어린시절부터의 기록은 스스로의 신격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조금의 실마리만 남아있으면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 든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하지만 이미 불태워진 기록을 두고 이야기는 할 수 없는 법이라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많이 누락이 되어있다. 그리고 책의 중반, 레닌 밑에서 권력을 잡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지루하기까지하다. 또한 스탈린 중심으로 서술된 책이다보니 아무래도 2차세계대전의 기록은 간략화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탈린, 이상으로 그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책은 없을 것이다.

 

 

 

촘스키, 사상의 향연, 936쪽.

 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지식인 1위에 촘스키가 뽑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목록에는 움베르트 에코, 크리스토퍼 히친스, 리처드 도킨스 등 쟁쟁한 지식인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는데,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이나 쟁쟁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 촘스키가 가장 두드러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사상과 연구를 문답법과 그 자신이 직접 지은 글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육성을 직접 느끼는 듯한 효과를 가져오며 이를 통하여 그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폭넓게 한다. 좀 더 책을 읽는데 실용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은 글자 크기와 (미묘하게 큰 것 같지만) 여백이 커서 눈에 쉽게 들어오는 편이다. 시원시원스럽다고 해야 할까. 한편으로 말하자면 제책 방식에 따라서 페이지 수가 달라질 수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 2. 합쳐서 1774쪽.

책 소개에 보면, 1권이 960쪽이고, 2권이 1774쪽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책은 1, 2권 모두 합쳐서 페이지를 매기고 있기에 1권이 960쪽이면 2권은 814쪽이다. 단권으로 내기에 부담스러운 크기라서 적당히 반으로 자른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페이지 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은 정말 위대한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이 책은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유대인들을 파괴한 사람들에 대한 책이다. 이는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얼핏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책보다 훨씬 깊은 연구와 자료조사, 그리고 성찰을 배경으로 가지고 쓰여진 책이다. 여기서 저자는 각종 도표와 지도를 들어가면서 어떻게 파괴기계, 라는 것이 그 행동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를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저자의 무서울 정도로 불타오르는 집념일 것이다. 저자는 파괴 과정을 알고 싶다고 말했지만 유대인으로서의 저자의 출생까지 고려해본다면 어쩌면 진실로 그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리라. 왜? 왜 유대인들이 파괴되어야만 했는가? 잘 벼려진 그의 열정은 딱딱해보이는 문체 속에서도 숨겨지지 않고 순수한 빛을 발한다.

 

 

 

앞서 촘스키의 책을 소개하면서 이야기했듯이 사실 페이지 수는 제책 방식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여기에 소개한 책들 외에 1000페이지가 넘는 책들은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같은 책들은 2000페이지가 넘는 책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1000페이지라는 숫자는 상징적이다. 저런 1000페이지 책들을 곰곰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로 평전과 역사의 개괄 부분에서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들이 자주 보인다. 순수 사상과 연구만으로는 1000페이지를 넘기란 쉽지 않다. 바로 이런 점에서 1000페이지가 그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보여진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 말이 평전이나 역사에서 1000페이지가 넘는 책들이 사상을 다룬 책들에 비하면 모자란다, 라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울 수는 있겠지만.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두꺼운 책을 읽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400페이지 남짓의 얇은 책을 읽을 때에는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조금만 더 읽으면 끝, 이라는 감정과 조금만 더 남아있었으면 하는 생각 사이에서 말이다. 하지만 1000페이지 가량의 책을 읽을 때에는 읽어도 읽어도 끝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다 읽게 되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면 더욱 더 좋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두꺼운 책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덮는 것은 한 세계의 끝이다. 나는 이왕이면 내 눈으로는 세계의 끝을 최대한 늦게 보고 싶다. 그리고 이는 내가 쓰는 글들이 왜 길이가 그럭저럭 긴 편인가, 에 대한 답도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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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12 22:24   좋아요 0 | URL
저는 페이지수에 크게 부담갖진 않는 편이지만 올리신 책들은 부담되네요. 내용상으로 어려울것 같아서요. 전 저 책들중 하나만 읽어도 뭔가 대단한걸 이룬 기분이 들 것 같아요.

가연 2012-09-13 01:18   좋아요 0 | URL
이 중에 한 권만 택하라면 마지막의 홀로코스트, 에 관한 저서가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한 권이 아니네요, 아하하, 가장 쉬운 책은 지식의 역사, 가 아닐까, 싶네요.

비로그인 2012-09-23 15:14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를 읽고보니 책장 한구석에 있는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로 눈길이 ^^;;
책을 덮는 것은 한 세계의 끝. 어쩐지 복잡미묘한 서글픔이에요..

가연 2012-09-24 08:08   좋아요 0 | URL
그렇죠, 끝없는 이야기..ㅎㅎ 그런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미하일 엔데, 의 책은 예전에 읽어보기는 했는데ㅎㅎ 읽는 순간에는 행복했는데 읽고나니까 또 허망하더군요, 풋.

플라네타리움 2012-12-07 16:00   좋아요 0 | URL
책을 검색하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네요.. 정말 대단한 분 같아요 ... 저는 책을 좋아해서 매월 몇십만원씩 구입만 하고 그 중에 읽을 수 있는 양은 한정되 있으니 자꾸만 쌓여만 가는데도 자꾸 사게 되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거든요. 가연님 글을 읽게 되어 영광이고 앞으로 또 쌓여가는데 일조할듯 하지만 이곳을 발견하게 되어 정말 기쁘네요. 외람되지만 읽으신 책 중에 5권 내외로 뽑아서 분야에 상관없이 아끼는 사람에게 혹은 미래의 자녀에게 꼭 읽으라고 권해주고픈 책을 꼽아달라고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

가연 2012-12-29 01:45   좋아요 0 | URL
아하하.. 감사합니다. 음.. 권해드릴만한 책을 뽑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기억에 남는 책은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 번 써볼까, 합니다. 답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불꽃나무 2013-11-08 10:33   좋아요 0 | URL
쓰신 페이퍼가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가연 2013-11-11 19:40   좋아요 0 | URL
ㅠㅠㅠ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까 다행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