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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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동안의 장맛비에 세상 쓸모없는 것 같은 미국자리공이 가슴께까지 자랐다. 키가 작은 여뀌와 달개비가 그저 자신의 푸르름만 더하는 동안 '때는 이때다' 싶은 미국자리공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쑥쑥 자라난 것이다. 장마도 막바지에 이른 지금, 나는 모처럼 보는 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산에 올랐다. 산 중턱에 있는 참나리꽃 군락지에는 꽃이 만개했고, 풀숲에 웃자란 미국자리공이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듯했다. 장맛비에 쑥쑥 자라나는 저 미국자리공처럼 나도 그렇게 쑥쑥 늙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다. 나는 장맛비에 쑥쑥 늙어가기 위해 이응준의 에세이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를 읽었다. 이응준의 수필은 타인의 공감에 무관심한, 지극히 사적인 사유들로 채워져 있는 까닭에 때로는 나 역시 이해하기 어려워 이해를 포기한 채 수시로 건너뛰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쑥쑥 늙어가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이 없다고 수시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헛된 믿음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아직도 누군가는 내 어린 시절의 시를 읽어 주고 있고 나는 여전히 오리무중의 모독 속에서 새로운 시를 쓰고 있는 중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일제히 묘한 슬픔을 안겨 준다. 다만 나는 속삭이고 싶다. 사실상 인생은 시나 소설이 아니라고. 인생은 순간순간 한 편의 수필(隨筆)이다. 우리 모두는 시인이나 소설가나 수필가도 아닌 '수필인간(隨筆人間)'이다. 인생과 인간은 시처럼 비장하고 아름답지도, 소설처럼 풍성하고 구조적이지도 않다."  (P.84)


1부 '명왕성에서 이별'에서 작가는 16년 동안 작가와 함께하며 곁을 지켜주었던 강아지 '토토'를 떠나보낸 소회와 다른 강아지 '토토'를 자신의 반려견으로 맞게 된 이야기를 쓰고 있다. 2부 '폭염서정(暴炎抒情)'에서는 표제작이기도 한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를 비롯하여 '죽음에 관한 소견', '수필인간(隨筆人間)' 등의 소제목으로 우리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룸과 동시에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독에 대해 쓰고 있다. 3부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에서 작가는 사라져 가는 것들과 상실에 대해 쓰고 있다.


"죽음이란 위대한 무기(武器)이자 부적(符籍)이다. 죽음을 각오하면 우리는 삶에서 못 해낼 일이 없다. 그 어떤 적도 멸망시킬 수 있으며 그 어떤 재앙도 씹어 삼켜 소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을 다 한 뒤에 당당히 죽을 수가 있다. 우리는 이런 기가 막힌 무기이자 부적을 공평하게 하나씩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죽음은 제대로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P.175)


이어지는 4부 '무장시론(武裝詩論)에서는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몰래 글을 쓰기 시작하여 스무 살에 시인으로 스물다섯 살에 소설가로 등단했던 작가가 자신의 문학관에 대하여 스스로가 읽었던 책과 자신이 쓴 글들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5부 '나와 바오밥나무와 하나님과'에서 작가는 식물을 좋아하는 자신에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를 키워보라는 출판사 대표의 권유에서 비롯된 다양한 사유와 과학 및 종교 등과 연관된 희망과 절망이라는 문학적 주제를 쓰고 있다. 마지막 6부 '성찰하는 괴물'에서 작가는 누구나 화두와 같은 질문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여정이다.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죽음이 내게 가까이 와 있던 시절에 쓴 것들이다. 만약 이 책에 뛰어난 점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인생과 죽음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이며, 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P..12 '서문' 중에서)


장마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뭇 싱겁게만 보이던 여름이 된맛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전보다 높아진 것도, 땅에 스며들었던 습기가 햇볕을 받아 일시에 날아오르는 것도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시작되는 여름의 무더위를 견디고 나면 이번 장맛비에 허리께까지 자란 미국자리공처럼 나 역시 쑥쑥 늙어갈 수 있을까. 늙어간다는 말에 '쑥쑥이라는 부사를 붙여 쓰지는 않지만 나는 종종 그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죽음을 향해 쑥쑥 늙어가고 싶은 것이다. 아주 장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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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숲은 나름의 방식으로 고요했습니다. 과한 습기 때문인지 바람 한 점 없는 길을 걷고 있노라니 내가 마치 거대한 한증막에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그 많던 새들도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피서를 떠났는지 새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곧 덮칠 더위를 경고하려는 듯 참매미가 이따금 '맴맴' 우닐 뿐이었습니다. 멀리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다른 새들이 더위를 피해 멀리 여행을 떠날지라도 계절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뻐꾸기는 차마 이곳을 떠날 수 없었던가 봅니다. 저편 하늘에는 까맣게 먹장구름이 밀려오는데 등산로 주변으로 눈부신 햇살이 반짝였습니다. 땀냄새를 맡은 모기가 앵앵거리며 달려들었습니다. 운동을 마친 나는 서둘러 산을 내려왔습니다. 숲의 고요가 아파트 현관까지 따라왔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새벽 숲의 고요를 떨쳐내고 출근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최지은 작가의 에세이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고 있습니다. 비교적 얇은 책이지만 책의 내용은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제목처럼 우리는 이 여름에 이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해묵은 기억들을 하나둘 끄집어내어 버릴 것은 버리고, 갈무리할 것은 갈무리하고, 덧칠하거나 아름답게 꾸밀 것은 한 번 더 다듬어서 이제껏 버텨온 내 삶을 위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 줄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 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물방울이 되어버린 할머니나 오이지라면 목구멍이 아리도록 가슴이 막혀오는 나나 그냥 우리는, 다 사랑이었어요. 할머니와 나의 사랑이 이렇게 뜨겁고 애달프다고. 그 지독한 사랑을 받은 아이가 나라는 사실, 더없이 귀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나라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 이야기에 온통 상처만 남아 잇지는 않다는 거예요. 요즘에도 저는 꿈을 꿉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밥을 해주는 꿈. 재료를 하나하나 고르고 장바구니에 가득 담은 찬거리를 무겁게 들고 와, 채소를 다듬고 물을 끓이고 도마를 씻고 또 칼을 닦아 정성껏 밥을 해 먹이는 꿈. 단 한 번이라도 할머니에게 밥을 해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자랑 같지만' 중에서)


장마철의 눅눅하고 퀴퀴한 하루하루가 불쾌지수를 높이는 요즘입니다. 최지은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흐르기도 하지만, 그렇게 흘린 눈물 한 방울로 어쩌면 보송보송한 하루를 선물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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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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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시대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천명관의 신작 소설 <아코디언>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한국전쟁 직후의 결핍된 시기를 어느 것 하나 거르거나 미화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지금과는 천양지차로 달랐던 그 시대를 우리 앞으로 소환한다. 20세기 대한민국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면 '에이, 설마...' 하면서 그것을 단지 허구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실제 모습이었고, 모든 게 부족했던 까닭에 생존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시기였고, 그럼에도 이웃이나 동료를 위해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주기도 했던 헌신의 시기이기도 했다.


"자신은 벽을 넘는 데 끝내 실패했지만 기어이 살아남아 벽 너머의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남들처럼 깡통만 한 꿈이라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점점 더 의식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동이의 머릿속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깜상과 연이, 자신의 아들로 삼았던 돈이, 아코디언을 물려준 홍이, 죽은 양 목사와 아미, 그리고 이젠 윤곽조차 희미해진 엄마의 얼굴......"  (p.294)


소설은 버스정류장에서 구걸을 하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된다. 피난민을 태우는 부두에서 잡았던 엄마의 손을 놓치는 바람에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된 소년 동이. 홀로 부산에 도착했던 동이는 엄마를 찾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고아들을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어른(양 목사)의 꼬임에 넘어간다. 양 목사와 아미를 주축으로 하는 앵벌이 조직의 숙소는 해방촌 산자락에 위치한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그곳에서 동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함께 거주하며 백화점 앞에서 구걸을 계속한다. 앞을 못 보는 연이, 걷지를 못하는 거북이, 늘 울음을 그치지 않는 찬이, 미군의 포탄에 맞아 팔이 하나밖에 없는 깜상 등. 양 목사는 어느 날부터 아이들에게 일명 구름탄이라고 불리는 마약을 먹였다. 마약을 통해 아이들을 손쉽게 지배하려는 속셈이었다.


"언제부턴가 양 목사와 아미는 더이상 아이들을 윽박지르거나 때리지 않았다. 대신 약을 굶겼다. 그것은 밥을 굶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칙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약을 얻어먹기 위해 더 악착같이 양 목사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목에 올가미가 채워진 가마우지처럼 약기운에 취한 채 온종일 길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p.42~p.43)


동이는 숙소에 버려졌던 낡은 아코디언을 발견한다. 죽은 연이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했다. 교회 성가대의 피아노 반주를 했던 동이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은 덕분인지 절대음감을 지녔던 동이는 독학으로 아코디언 연주를 시작한다. 아코디언 연주가 손에 익으면서 동이는 노래를 잘 부르는 연이와 한 팀이 되어 움직인다. 동이는 그렇게 앵벌이 조직의 주축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판자촌 입구 도랑 옆에서 미국인 시신 한구가 발견되고, 양 목사와 아미가 형사들에게 구속된다. 갑자기 감시자가 사라진 앵벌이 조직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밤중에 난 화재로 인해 아이들 셋이 죽고, 거북이를 업고 나오던 동이도 화상을 입는다. 죽은 아이들을 묻어주고 아이들은 다시 동이를 중심으로 앵벌이를 하고 조금씩 돈을 모은다. 그렇게 평온한 날들이 이어지나 싶던 어느 날 사라졌던 양 목사가 다시 나타나고...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굴바위로 옮겨온 지 세 달이 지났다. 죽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도만친 아이도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빼돌렸지만, 이전처럼 대놓고 삥땅을 치진 않아 탄약통엔 차곡차곡 돈이 쌓여갔다. 집을 사는 것까진 몰라도 한동안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움막은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무언가가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것처럼 늘 아슬아슬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래도 그들은 함께 밥을 해먹고 숨바꼭질을 하고 계곡에서 다 같이 목욕을 했다."  (p.154)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시 되는 상황에선 언제나 각자가 지닌 본능과 본능이 악다구니를 쓰듯 충돌하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내면의 선한 본능이 우리도  모르게 발현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서의 극적인 반전을 이끄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선한 본능. 물론 누군가는 그것조차 외면한 채 끝끝내 지독한 악인으로 남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에 저항하여 자신의 목숨마저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선한 본능을 구현하기도 한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다른 작품 <고래>가 워낙 탁월한 소설이었기에 그것을 능가할 만한 소설은 작가로부터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지금까지 일부러 그의 소설을 외면해 왔다. 그러다 우연찮게 읽게 된 소설 <아코디언>. 시대를 관통하는 극사실주의 소설을 씀으로써 그는 이제야 자신의 위치를 찾은 게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이제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디딘 듯한 모습이다. 현실에 살을 맞닿은 채로 그는 이전보다 조금 더 여유로워진 듯했다. 나는 앞으로 천명관 작가의 달라진 모습을 그가 쓸 앞으로의 소설에서 수시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섞인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오늘 그의 소설 <아코디언>을 읽은 보람이라면 보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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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 帛書 -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이상훈 지음 / 책마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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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세례를 받은 지 10여 년이 흘렀다.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라거나 모태신앙도 아닌, 천주교는 나에게 꽤나 낯선 종교였지만 어떤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야말로 뜬금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건 우연이거나 필연이었을 테다. 그것도 천주교를 믿는 다른 이의 권유나 전도도 없이 오직 나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이끌림이었다는 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 인과관계의 건너뜀이 큰 의문부호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귀결처럼 냉담자가 되었다.


이상훈의 역사소설 백서(帛書)를 읽는 내내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삶과 나의 삶을 번갈아가며 생각했다. 250여 년 전에 태어난 사람과 나를 비교한다는 게 가능하지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같은 종교를 믿으면서 온갖 박해 속에서도 종교를 버리지 않았던 황사영과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냉담자로 남은 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극단적인 대비가 아닐 수 없었다.


"백서를 쓰는 황사영의 심정을 가슴으로 느끼며 또 읽었다. 내가 황사영이 되고 황사영이 내가 되었다. 239년 전에 살았던 황사영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황사영은 천주교 순교자로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사지가 찢겨 죽는 순교의 길을 택했지만, 그는 천주교에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우리 역사에서도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선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미친 춤판을 끝내 달라고 교황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과연 역적으로 비난받을 행위일까? 당시 조선 백성의 삶과 정치 상황 그리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안다면, 누가 황사영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p.6 '작가의 말' 중에서)


1775년 조선 후기의 정조가 집권하던 시기,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난 황사영은 16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급제한 천재였다. 정조의 주선으로 정약용의 집안과 관계를 맺게 된 황사영은 결국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 정명련과 혼인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였던 이승훈이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함으로써 정약용의 집안 역시 천주교를 믿게 되었던 바,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황사영 역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지 싶다. 캄캄한 토굴 속에서 숨어 살면서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황사영이 가로 62cm, 세로 38cm의 작고 흰 비단 위에 일만 삼천 자가 넘는 한자를 붓으로 적어 내려갈 때의 절절한 심정을 작가 또한 백서 원문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느꼈었다고 한다. 2027년 8월 WYD World Youth Day(세계청년대회)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세계의 가톨릭 청년들에게 우리 순교의 역사를 알리고자 소설을 완성했다며 집필 목적을 적었다.


"황사영은 토굴에서 백서를 마쳤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난 후 사영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김귀동이 불러도 기척이 없자 항아리로 막았던 입구를 헤치고 토굴로 들어왔다. 황사영은 탈진해서 쓰러져 있었다. 그만큼 마지막 남은 기력을 백서에 쏟아 부은 것이다. 사영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김귀동은 의원을 부를 수도 없고 해서 급하게 열을 내리는 민간요법으로 응급조치를 하고 차가운 물로 적신 수건으로 사영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p.157)


순교자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신앙을 지키고자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수많은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범우의 7대손인 진복이 자신의 친구인 박현철 신부와 함께 순교지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당시 조선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와 그 역사의 한 귀퉁이를 가까스로 붙잡기 위해 애쓰는 진복의 모습이 교차하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황사영이 결국 능지처사의 죽음을 당하고 그의 아내인 명련이 관노가 되어 두 살 난 아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의 모습을 그린 장면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먹먹하게 읽었다.


"자신은 양반 신분의 유배 생활에서도 이렇게 냉대와 멸시를 받고 있는데 그렇게 곱고 우아하던 조카 명련이 노비가 되어 외딴 섬 제주도에서 노비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약용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약용은 조카 명련에 대해 글을 남길 수가 없었다. 황사영과 명련은 천주교 괴수로 지목되었기에 약용이 그들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남기면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노론 벽파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명련에 대한 안타까움은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p.194)


오락가락하던 장맛비는 제헌절 연휴에도 요란하게 이어졌다. 나는 이상훈작가의 역사소설 <백서(帛書)>를 곰곰 되새겨보며 인간에게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천주교 신자로 남아 있었다면 결코 들지 않았을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의 삶에서 아로새겨진 개인의 성향과 인성은 그의 삶이 그것에 반하여 펼쳐질 때마다 도돌이표처럼 원래의 삶으로 되돌려 놓는다. 삶의 원칙이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황사영 역시 그러했을 터, 우리는 각자의 삶이 지정하는 외진 길을 따라 조용히 나아갈 뿐이다. 냉담자로 살고 있는 나도 역시 언젠가 고해성사를 하고 주말 미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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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을 많이 보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의 정리가 필요할 때면 이런저런 채널의 영상을 띄워 놓은 채 나만의 생각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보지도 않을 양이면 귀한 전기를 써가면서 뭐 하러 동영상을 재생하느냐 따질 사람도 있겠으나 평일에는 주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까닭에 아마도 백색 소음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소음도 없는 적막한 공간은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에게 약간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언제나 유튜브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을 귀담아듣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흘려보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생각과 일치하거나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이 더러 있는 까닭에 어쩌다 그런 동영상을 만날 때면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게 됩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말입니다. 이응준 작가의 산문집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를 읽고 있습니다. 그의 산문집은 때로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나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그저 '아무려면 어때'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이해하자 마음을 가볍게 먹은 채 담담히 책을 읽어나가곤 합니다.


"슬픔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기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다. 그래야 자신이 어떤 시를 가지고 있는 시인인지를 안다.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다.' 다만 자신이 시인임을 스스로 무시하고 살아가다가 죽거나 시인이면서도 시인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을 뿐이며 심지어 나는 자신 안의 시인을 일부러 살해하는 사람들조차 자주 본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애써 괴물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날개를 하늘에서 사용하지 않고 발의 부스러기나 계단쯤으로 여기다가 차에 치여 길에 찌그러져 말라붙어 있는 저 비둘기들의 사체처럼."  (p.97~p.98)


오늘 최욱이 진행하는 '매불쇼'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을 테지만 오랜만에 보는 유시민 작가의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유시민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몇 달 전부터 시작된 진보 유튜버들의 일베식 조롱과 멸칭이 이상하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그것이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의 견해와 일치한다고는 판단한 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검찰개혁이 조금씩 물거품으로 변해가는 듯한 인상을 받기 시작하는 요즘, 김민석 전 총리를 민주당의 차기 당대표로 지지하는 듯한 대통령의 노골적인 태도와 의중을 비추어 볼 때, 대통령은 어쩌면 지리멸렬한 국민의힘과 당대 당 통합은 아닐지라도 그들 주변의 인사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 민주당으로 편입함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자(일명 강경파라고 할 수도 있는)들의 이탈을 과감히 용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보완수사권의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보수권 인사들을 포섭하려면 검찰개혁은 시늉만 하고 눈 감고 아웅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일 테지요. 현 상황을 그렇게 이해하면 대통령과 김민석 전 총리의 행보도 이해 못 할 게 없습니다. 박정희를 '스마트한 독재자'라고 칭한 김민석 전 총리의 발언을 조금 더 확장하면 이토 히로부미도 '스마트한 독재자'라고 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 인식을 지닌 사람을 대통령은 민주당의 차기 당대표로 밀고 있습니다.


수십 년 민주당을 지지해 왔던 나 역시 앞으로 다시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바 있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주변 사람들 역시 검찰개혁은 이제 물 건너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던 검찰이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살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유시민 작가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하였던 민주자유당이 떠올랐던 건 아마도 현 시국이 그와 비슷한 까닭일 테지요. 무척이나 덥고 지루한 날들이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침함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든 현 정치권과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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