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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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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전날 내리던 비의 여운이 아침까지 길게 이어져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 위에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선 길, 주말 휴일의 게으름에서 비롯된 창백한 고요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듯했다. 나는 처음 가보는 도로로 차를 몰았고, 산과 들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달마시안의 얼룩 무늬처럼 어지러웠으며, 이제 막 젊은 부모가 되기로 결심한 조카의 결심에 머리가 무거웠다.

 

"'젊은'이란 말과 '부모'라는 말을 붙여놓으면 왠지 애틋하다. 아이 때문에 서둘러 어른이 되어야 했을 사람들. 부모이기 이전에 자식이었던 사람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에 맞춰,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늙어갈 사람들. 그들은 목마가 한 바퀴 돌아 자기 아이를 만나게 될 때마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한 바퀴의 세상을 구경할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여 기다리는 모습에서 부모된 자들의 천형天刑을 감지할 수 있었다. 회전목마만큼 부모와 자식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p.64)

 

컨벤션홀이라고 명명된 예식홀에는 여느 집회 장소처럼 엄숙하거나 조용하지 않았다. 신랑이 될 사람과 신부가 될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자리라기보다는 그들의 예식을 빌미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의 생사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듯 사람들은 저마다 참석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훑고 있었다. 으레 그렇듯 예식은 눈 깜박할 사이에 끝나 버렸다. 함께 온 사람들을 챙기느라, 또는 반가운 사람들과의 뒤늦은 인사를 나누느라 식당으로 향하는 길은 왁자지껄 소란하고 붐볐다.

 

뷔페의 음식은 종류만 많았지 실상 눈길 한 번으로 손님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식욕을 돋구지는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식당 주인의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접시에 담아 온 음식에 몇 번 손이 갔는가 싶자 사람들은 다들 지친 표정으로 풀어졌다. 그렇게 풀어진 채로 조용히 늙어가고 있는 듯했다.

 

다음 순서의 예식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우리는 서둘러 내몰렸다. 서둘러 떠나기에는 뭔가 아쉬웠고, 마땅히 갈 곳도 없이 미적거리거나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은 식당 입구에 놓인 티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언제였던가, 새댁이었고 새신랑이었던 사람들은 한동안 시간이 흐른 어느 예식장에서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초보 엄마, 초보 아빠였다가, 다시 얼마만큼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는 훌쩍 자란 아들 딸을 앞세우고 저만치 뒤에서 느린 걸음을 걷는 제법 익숙한 모습의 부모였는데, 어제는 줄 끊어진 연처럼 어느 한 순간 툭 하고 끊어진 아이들을 어디엔가 버려둔 채 부모라는 이름표만 가슴에 매단 채였다.

 

"멀어지는 도시를 향해 나도 모르게 '안녕'이라고 말했다. 다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 없이 가슴이 뭉클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다를 잠깐 건너는 것뿐인데 무언가 중요한 것과 작별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살면서 많이 오지 않겠구나. 지금 내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름다운 순간은 붙잡아둘 수 없다. 안녕, 안녕, 누구에게랄 것 없이, 몇 번이나 인사했다." (p.89)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이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회 초년생인 그 시절의 아이들은 이제 오직 그들만의 이유로 바빴고 어느 예식장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늙었거나 늙어가는 부모들의 입에서 단지 이름으로만 호명되었다. 이름도 잊은 채 그저 아무개의 아빠나 엄마로 불리우는 우리는 ~했었거나,~했었야만 했거나,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과거형의 이야기들을 한동안 쏟아냈다. 나는 그들 속에서 조금씩 늙었거나 늙어갔거나 오래도록 늙은 채였다.

 

"그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때문이 아니라 깊은 무력감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눈앞에 있는데 그걸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그 충격을 이렇게 압축한다. "우리를 가득 채워야 할 것이 오히려 우리 안에 끝없는 공허함을 키운다." 아름다움은 한 개인에게 영속적 귀속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 한 번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덧없이 스러지는 것이며, 두번 되풀이할 수 없는 기적이다." (p.148)

 

우리는 예식장에서 서둘러 떠나는 몇몇과 작별을 했고, 여기 남아서 흐르는 시간을 마냥 붙들고 싶어했던 하릴없이 배회하던 몇몇 사람들과 함께 혼주였던 누나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들의 입에선 그 자리에 없는 아이들의 이름이 또 다시 차례로 불려졌고, 서울대나 경찰대 등 그들이 다니는 학교가 호명될 때마다 아직 중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인 부모의 입에서는 부러움의 말들이 코러스처럼 퍼졌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던 시간, 도로에는 암흑처럼 어둠이 내려앉았고 긴 전조등 불빛을 토해내는 차량들 사이로 나는 조금씩 세월을 토하거나 토해냈거나 잊었거나 잊으려 애썼을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도 밤이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고,나는 박연준(35)·장석주(60) 두 시인이 함께 낸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었다. 이 책은 스물 다섯 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10년 열애 끝에 결혼한 두 사람이 9월 초부터 한 달 동안 호주 시드니에서 살았던 기록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했다.

 

시드니 북서쪽 동네 글레노리의 한 동포 집을 빌려 일종의 신혼여행처럼 지냈던 날들을 들려주는 이 책은 한가운데 16쪽짜리 사진첩을 경계로 앞부분은 박연준 시인의 기록이고 뒷부분은 장석주 시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두 사람은 여느 신혼부부처럼, 사소한 일로 다투고 삐치거나 같이 산책을 한다. 그리고 영원처럼 사랑을 다짐한다. 나는 문득 조카 생각을 했고, 잘 살았으면 기도했다. 그대로 밤이 깊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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