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라디오]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모든 이야기에는 생명이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어. 아주 오래 전의 일이야. 나는 그때 진학할 대학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지만 아직 고등학교 졸업식은 하지 않았던 어정쩡한 신분이었지.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어쩌면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풋내기 성인이었던 게야. 쭈볏거리는 신분으로 나는 방학 동안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란 걸 해봤고 적은 금액의 돈을 손에 쥐게 되었지.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돈은 그때 처음 가져본 것 같아. 4년제 장학생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되었던 나는 등록금 부담은 없던 셈이었어.

 

나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한참 고민했어. 그때까지 용돈이란 걸 받아본 적 없었던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어렵게 내린 결정이 기차여행이었어. 사실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어. 나는 그렇게 목적지도 없는 여행을 시작한 거야.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를 했던 나로서는 기차여행이 그나마 익숙한 것 중 하나였어. 방학이면 늘 형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집에 다녀오곤 했었으니까. 

 

나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지명의 차표를 끊어 무작정 기차에 오르곤 했지. 손에는 볼펜과 수첩을 들고 말이야. 나는 열차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었어.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 건네는 인사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서너 정거장쯤 지난 뒤에야 내게 묻곤 했어. 자신을 아느냐고. 나는 모른다고 했지. 그냥 옆에 앉게 돼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한 거라고. 그제야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편하게 대했어. 방학 내내 목적지도 없이 떠도는 사이에 지겹도록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고, 그들로부터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수첩에 기록했어.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헤어지면서 내 손을 잡아주던 따뜻했던 손길을 나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해.

 

정혜윤 작가의 <마술 라디오>를 읽으며 문득 그때 생각이 났어. 20년 동안 시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정혜윤 PD가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지. 내가 기차여행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뭔지 알아? "내가 살아온 얘기를 책으로 쓰면 한 트럭은 될 거야" 하는 말. 작가도 그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다 옮길 수는 없었을 거야. 책에는 단지 14편의 이야기만 실려 있을 뿐이지. 나머지 이야기들은 아마도 작가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남을 거리고 생각해.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를, 말을 다르게 쓸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을 숱하게 봐왔어(그 반대도 물론 숱하게 봤지. 남을 위협하고 세를 과시하는 데만 말의 힘을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도 같은 칼날에 상처를 입지). 지금 내가 바로 그것을 해보려고 해. 나는 언제부터인가 힘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꾸만 이야기를 들려줘. 나는 '의견'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나는 이야기로 노를 저어서 힘없는 사람들을 다른 편 기슭에 옮겨놓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p.54)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해. 나는 기차여행을 하면서 그걸 절실히 느꼈어. 다만 들어줄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 어쩌면 부끄러워서 꽁꽁 숨기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러나 한 번 입이 열리면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걸 나는 숱하게 봤어.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자신의 얘기를 쏟아내며 그들은 마치 그 시절을 다시 살고 있는 듯했어. 누구의 아내, 누구의 지아비, 누구의 엄마, 아빠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말이야. 지난 이야기는 언제나 자유로웠지.

 

"사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의무가 있어. 하나는 사회의 룰을 따를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지킬 의무, 즉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지 않을 의무야. 그렇지만 우리는 두 번째 의무가 있기나 한 건지 잊곤 하지. 지금 어부는 두 번째 의무, 즉 자신을 지키는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었어. 그것이 자유라고. 나는 그렇게 자유를 설명하는 사람을 현실 세계에서는 보지 못했고 책에선 조르바를 만난 적이 있어." (p.64)

 

한동안 나는 모든 이야기에는 생명이 있다고 믿으며 살았었어. 세월의 격랑을 헤쳐갔던 모든 생명들에게는 좋든 싫든 저마다의 이야기와 내력이 있지 않겠어? 나는 그 이야기들이 마냥 좋았어. 그러나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그냥저냥 졸업하고 직업을 갖고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로 살게 되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어. 오직 나만의 이야기가 중요했던 거지. 그 빠듯한 시간을 살아내느라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게 시간낭비인 것처럼 느껴졌어. 내 삶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소중한 인연들을 나는 헌신짝처럼 버렸던 거야. 그 소중한 사람들을 말이야.

 

"우리는 우리가 아주 작은 사람인 줄 알아요. 중요한 사람이란 것도 소중한 사람이란 것도 몰라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한 말이 지금 생각나요. 아무도 감히 모든 힘을 다해 제 운명을 살지 못한다고. 우리는 어중간한 데서 멈춘다고. 일평생 내내 사랑과 이데아를 속여 손바닥 위에 놓인 저울의 이익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친다고. 우리는 너무나 몸을 사리기 때문에 시시한 사랑으로 상처받고 평범한 욕망으로 괴로워하고 우리 자신의 모험을 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일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죠." (p.304)

 

나는 지금도 가끔 모든 이야기에는 생명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을 생각해.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나는 이미 모든 생명에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게 된 것 같아. 모든 이야기에는 생명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과 모든 생명에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고 있는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간 것 같아. 흘러간 세월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가끔 생각해.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 정혜윤 피디의 <마술 라디오>를 읽고 문득 그 시절 생각이 났던 거야. 한번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