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언제부터라고 정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일 년의 마지막 달에 지병처럼 앓았던 휑한 느낌이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유난 떨지 않고 담담하기. 내 청춘의 끝무렵에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내 마음이라고 어찌 내맘대로만 할 수 있던가? 나는 여전히 시린 가슴을 안고 연초의 계획을 하나 둘 끄집어 내어 자학과 같은 자책과 함께 효용을 다한 그것들을 폐기처분했다. 그리고 새 세상이라도 열리는 양 새해의 첫 날을 기다렸다. 나는 중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12월 내내 가슴 한켠에 커다란 돌덩이를 달고 살았다. 12월 마지막 날, 석방을 기다리는 수인처럼 나는 그 밀리는 고속도로를 뚫고 일출을 보러 떠났다. 일 년을 헛 산 죄인의 반성문이자 죄사함을 향한 골고다 언덕과 같은 그 길에서 나는 습관처럼 안도하곤 했다.
나의 게으름이 연례행사로 굳어진 일출여행에 일대 반기를 들면서 나는 더는 새해 계획도, 12월의 가슴앓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청춘의 시절이 빠르게 흘렀고, 평범한 일상처럼 담담한 눈길로 12월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12월에 꼭 읽어야지 하는 책도, 1월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도 내게는 없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책을 고른다.
1995년에 출간된 신경숙의 첫 산문집이 재출간되었다. 그녀의 글에서는 푸른색 잉크가 스펀지에 스미듯 짙푸른 슬픔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은 원형질의 설움이 묻어난다. 중독성 짙은 슬픔과 깊은 허무의 칼끝이 독자의 마음을 몇 번 헤집고 만신창이가 된 가슴을 진정시킬 즈음이면 글은 끝난다. 잔인하다. 그렇게 여기면서도 어김없이 그녀의 작품에 손이 가는 '이해불가'의 습성. 서른세 살의 나이에 작가는 어떤 아픔을 품었던 것일까?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과 마주할 때가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인생길에 그보다 더한 일인들 왜 없으랴마는 우리들 모두는 막막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칠 때면 슬쩍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리라. 그러나 오래된 장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듯 하나의 업을 천직으로 알고 꿋꿋이 견뎌온 삶이 그 향기가 더하지 않을까? 작가도 나와 생각이 비슷했나보다. 세월의 잔물결보다 더 위대한 화가가 어디 있으랴.
칭찬 일색인 작품은 잘 읽지 않는다. 오래된 나만의 독서 편향은 쉬이 바뀌지 않있다. 그 이면에는 독서 후의 실망스러움에 대한 공포가 첫째요, 출판사의 알량한 광고에 결코 속지 않겠다는 나의 오만과 자존심이 그 둘째라 하겠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잘 훈련된 나의 독서 고집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언제나 예외로 자리하고 있다. 문학을 전공하지도, 그렇다고 독서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허영이나 과장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아무튼 하루키의 작품은 언제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걸림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