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 - 낯선 경험으로 힘차게 향하는 지금 이 순간
조승리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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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과 이글거리는 태양이 두렵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나 이따금 생각해 본다. 싫었던 적은 자주 있었어도 두려웠던 적은 글쎄... 딱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작열하는 여름 날씨가 두려웠던 적은 많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요즘 날씨는 정말 두렵다. 열대야로 인해 잠을 설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한낮의 살인적인 더위는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무지막지한 자연의 힘이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음을 현실에서 체감하기 때문이다.


조승리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고 남은 인상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작가의 두 번째 에세이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을 서둘러 읽게 되었다. 때론 읽었던 책의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 어떤 특별한 목적도 없이 같은 작가의 책을 연거푸 읽을 때가 있다. 조류의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한 뒤 처음 본 대상을 자신의 어미로 인식하는 것처럼 작가의 이름만 보여도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 반사적인 이러한 반응은 정해진 기간이 없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작가가 쓴 한 작품에 크게 실망하거나 최근에 읽은 다른 어떤 작가의 작품이 내게 큰 인상을 남김으로써 나의 시선이 다른 작가에게 향하면서 끝이 나게 마련이다.


"나는 타고난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해진 운명대로 살지만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명리학을 공부하며 내가 얻은 것은 운명에 결코 순응하지 말고 맞서라는 가르침이었다. 나는 과거의 기록을 통해 피해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조언받는다. 그것이 진정한 명리학이라 생각한다."  (p.248)


조승리 작가의 두 번째 산문집인 이 책은 전작의 다소 심각한 분위기에 비해 글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밝아진 느낌이었다. 첫 작품 치고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덕분일지도 모른다. 처음 출간한 한 권의 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는 건 웬만한 필력으로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물론 시각 장애인이라는 작가의 남다른 이력이, 그리고 시각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직업 중에서 고객과의 신체 접촉이 잦은 마사지사를 직업으로 삼아 그 길을 꿋꿋이 걷고 있는 점도 독자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독자들이 조승리 작가를 선택하는 데는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인생관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의 굴레나 삶의 역경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어깨 위에 쌓인 가벼운 먼지쯤으로 여겨 몇 번의 손길로도 쉽게 떨쳐낼 수 있다고 믿는 자세는 장애가 없는 일반인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난관에 처한 인간에게 절망이나 좌절은 가깝고 용기나 희망은 아주 먼 곳에 위치하는 법이니까.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자 새로 입학한 내가 궁금했는지 아이들이 내 방으로 몰려왔다. 그 애들은 별스럽지 않게 자신이 실명된 이유를 말했고, 우스갯소리를 하듯 장애인 학교에 입학한 과정을 떠들어댔다. 애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기구했다. 부모가 모두 장애인인 아이도 있었고, 갓난아이 때 쓰레기통에 버려져 구조된 고아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낯선 공간에 누워 생각했다. '나도 저 애들처럼 불행이 익숙해지면 무뎌진 불행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겠지.' 엄마가 비상금으로 놓고 간 십만 원은 새로 사귄 친구들과 유흥비로 탕진했다. 그리고 나는 눈먼 일상에 적응했다."  (p.162)


명한 햇살 사이로 가볍고 건조한 바람이 불고 있다. 여름철에 흔하디 흔한 소나기도 요즘엔 찾아보기 힘들다. 아스팔트 도로는 강렬한 햇빛에 달구어져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거리에는 휴일 오후를 닮은 느긋한 차량들이 몇 대 오갈 뿐 인도를 걷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들은 한껏 기세가 오른 여름 햇빛으로부터 달아나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잔다. 일주일에 삼일 마사지사로 일하고, 평일 오전에는 3~4시간씩 집필을 하고, 건강을 위해 PT도 받고 있다는 조승리 작가. 작가처럼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면 서너 시간이면 충분했을 텐데 나는 이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꼬박 일주일을 소모했다.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노력하지 않는다. 무더위를 핑계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체는 한 시간가량 수난을 당하다가 거짓말처럼 안정되었다. 난기류 구간이 끝난 것이다. 기장의 무사 귀환 방송에 승객들이 환호하며 알라를 불러댔다. 나는 절망스러웠지만 안도했다. 종잡을 수 없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공포로 잠식되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살고 싶었다. 나는 건방지고 오만했다. 비겁하게 불행을 피하려고만 했다. 못난 마음을 자책했다. 멀뚱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승무원이 내게 다가와 손에 샌드위치를 쥐어주었다."  (p.112)


누군가 내게 숙제를 내준 건 아니지만 집에는 여전히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딴에는 읽겠다고 산 책이지만 나는 띠지도 풀지 않은 채 배달된 채 그대로의 상태로 고스란히 모셔만 두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날씨를 핑계로 뒹굴뒹굴 시간만 흘려보냈다. 휴일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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