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문득 그리울 때가 더러 있다. 한때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기도 했었건만 이제는 고인이 된 까닭에 더는 신작을 기다릴 수는 없지만 전에 미처 읽지 못했었거나 책의 내용도 가물가물한 책을 접할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죽었던 작가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예컨대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나 박경리 작가의 작품, 혹은 법정스님의 작품 등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읽고 싶은 작품도 달라지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분들의 신작은 기대할 수 없다는 어찌할 수 없는 체념이 그리움의 크기를 무한정 부풀려놓기도 한다.

 

낮에 도서관에 들러 박경리 작가의 책들이 꽂힌 서가를 한동안 서성였었다. 정작 다시 읽고 싶은 책은 <토지>였지만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그 기나긴 시간이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서가에 꽂힌 책들만 뽑았다 다시 꽂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애꿎은 시간만 흘려보내다 결국 나는 생각에도 없던 <파시(波市)>를 꺼내어 들고는 도서관을 나왔다. 조만섭, 서영래, 수옥... 표지가 낡은 오래된 책의 안쪽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산다는 건 자신의 생명력을 한 줌 기억으로 치환하는 행위임을 나는 아프게 이해한다.

 

"둥글게 뭉글어진 구름이 장엄한 노을 속에 제왕이 타고 가는 황금마차와 같이 피어오르고 흰 손수건 같은 돛단배가 움직이지도 않는 것처럼 가고 있었다. 바다 냄새와 사람의 냄새, 기름냄새와 시궁창냄새, 갖가지 냄새가 찌든 부둣가에는 차츰 사람의 무리가 불어나기 시작한다. 다 자기 나름의 벅찬 삶을 안고 시간의 흐름의 한 토막을 위해 그들은 모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지게꾼, 부두노동자, 떡장수, 국수장수, 선원들, 가지각색의 용모와 직업과 신분을 지닌 여행자들, 소음과 진구렁창...... 바다와 물을 이은 산판은 순간도 변함 없이 슬픈 설레임처럼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평선 위에 황금빛 구름마차가 잿빛으로, 다시 검은빛, 그것이 어쩌면 죽음에 이르는 행렬 같기도 한 불길한 모양으로 달라져 갔을 때 윤선은 부산 항구에 고동을 울리며 떠났다."

 

<김약국의 딸들>을 다시 읽을까 생각을 아니했던 것은 아니지만 <파시(波市)>에 비하면 기억이 비교적 선명했던 게 사실, 최종 선택은 결국 <파시(波市)>로 정해졌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비극적인 삶을 냉철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가의 무심함에서 삶의 경외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코로나19의 확산 추세는 여전히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교회를 중심으로 그 기세는 오히려 거세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날씨는 무덥고 코로나19의 기세는 무섭고, 마스크는 점점 답답해져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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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6-2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약국의 딸들>을 오디오북 구매로 고민 중입니다. 13시간이더군요.
하루에 한 시간씩 들으면 되겠다 계산했지요. 6~7시간짜리를 선호하는지라 고민이 되네요.

꼼쥐 2020-07-04 18:42   좋아요 0 | URL
저는 <김약국의 딸들>을 종이책으로 읽었었는데 역시 박경리라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토지>는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지만 워낙 방대한 분량인지라 읽기도 전에 숨이 막히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