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지만 애초에 머릿속에 떠올렸던 주제와 문장들이 막상 다 쓰고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글이 내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나는 경험. 자신이 쓴 글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글을 쓰기 전의 구상은 까맣게 잊힌 지 오래, 배가 산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자판을 두들기는 나조차 억제할 수 없는, 방향을 틀어 처음의 생각으로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자각, 그리고 글의 마무리.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닮은 구석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출처도 불분명한 글을 읽으며 '이 글은 과연 누구에 의해 쓰인 글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머리에서 손까지의 거리가 이렇게도 멀었단 말인가.

 

어렸을 적,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도화지를 펼쳤을 때 어떤 그림을 그릴까 미처 구상도 끝나기 전 옆에 있던 어린 동생이 도화지 가득 아무렇게나 쓱쓱 그림을 그림으로써 나의 생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차마 그림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그림이 탄생하는 걸 보며 헛웃음을 웃었던 기억.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도 나는 여전히 기억 속의 어린 동생을 머릿속에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로 시작되는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았던 게 아닐까.

 

"소설은 내게 나 자신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가냘프고 투명한 '막'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했다. 마치 목소리를 내는 방식처럼 그 막은 세계와 나의 움직임에 따라 진동하면서 글을 쓰게 하는데 대개 그것은 우는 소리를 닮았지만 실제로 눈물에 대한 감촉은 없다는 것. 그렇게 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고통에 대해서 쓰지만 그 고통의 완전한 주인은 될 수 없다는 것, 마음이나 기억처럼 실제로는 감각되지 않는 어떤 세계의 기척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중에서 p.109)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글로 옮길 수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작가가 되는 듯하다. 세월로부터, 흐르는 시간으로부터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 때 우리는 이따금 글을 쓰고, 자신이 쓴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게 현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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