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 삶이 흔들릴 때마다 꼭 한 번 듣고 싶었던 말
박애희 지음 / 수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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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팍팍하고 신산스럽게 느껴질 때면 어렸을 적 어느 봄날의 풍경이 떠오르곤 한다. 그날 하늘은 더없이 맑았고, 뽀얗게 비질이 된 마당의 가장자리를 따라 어미닭이 솜털이 보송한 어린 병아리들을 이끌고 모이를 찾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흰 도화지에 데칼코마니를 찍듯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지나갈 때마다 마당에 길게 이어지던 대칭형의 발자국들. 그러나 시리도록 푸른 하늘 위에선 그들을 노리는 매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선회하고 있었다. 삶을 매개로 한 두 장면이 내게 던졌던 질문들, 그리고 그 순간의 정적과 불안. 어쩌면 삶이란 저마다의 운명에 따라 길게 유예된 찰나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운명 앞에 선 백척간두의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봄날의 닭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선회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지금 이 순간의 평화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박애희의 에세이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를 생명이 움트는 이 계절에 굳이 읽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삶과 죽음은 가장 친한 친구처럼 어깨를 맞대고 늘 곁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죽음을 사색하기에 가장 절절한 계절이 되는 것이다. 제목에서처럼 우리 인생은 각자가 계획했던 것에서 조금씩 어긋난 채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불안하게 마련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래서 매 순간이 깜짝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늘 퍼주기만 하는 우리의 부모님들도, 살아남기 위해 버티느라 오늘도 신발끈을 조여 매는 당신도, 나도, 때로 혼자 행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혼자 생의 우수를 보듬을 시간이 있었으면 한다. 잠시 나를 바라보는 존재를 잊고 나 자신만을 사랑한 그 시간이 다시 또 일상을 버티게 해줄 테니까. 그것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그토록 바라는, 내가 행복해지는 길일 테니까." (p.54)

 

삶에 대한 인식은 가까운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하기 전과 후로 크게 나뉜다고 믿는 나로서는 작가가 자신의 엄마를 보낸 절절한 상실감을 글로 이야기했던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을 감명 깊게 읽은 후 비로소 작가에 대한 작은 응원과 지지를 보내게 되었지만,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작가의 전작을 뒤적이며 위안을 얻곤 했다. 그러다 나는 작가의 신작 에세이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를 반갑게 읽었다. 상실의 아픔을 완전히 거두기에는 견뎌야 할 시간들이 여전히 부족했던지 채 아물지 않은 짭조름한 슬픔의 흔적들이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에서도 문득문득 묻어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이 삶에 적응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다정하고 사려 깊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자신의 경험들을 한 자 한 자 책에 눌러쓰면서 희망을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다짐을 하듯 말이다.

 

"모성을 닮은 따뜻한 누군가의 선의로 오늘도 나는 기운을 낸다. 부디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선의를 베풀 수 있기를, 그래서 '엄마라고 불리는 그들'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기를 기도한다." (p.186)

 

1'이 생을 이탈하지 않기 위하여', 1'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아지나요?', 4'흐르는 시간이 건네는 말', 5'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순간' 등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소제목만 보더라도 작가가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지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눈여겨보았던 영화감독으로부터, 어느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로부터, 국내와 외국의 유명 작가로부터, 어느 배우의 인터뷰로부터, 자신이 읽었던 작품의 짧은 문장 등으로부터 자신이 깨달음을 얻고 용기를 갖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 소소한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몸의 일기를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하나의 삶을 마치면 한 편의 이야기가 남는다는 것. 그렇게 인간은 부재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더 잘 살고 싶어졌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또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p.327)

 

내게 허락된 찰나의 순간들이 앞으로 몇 번 더 반복될지 나는 모른다. 부질없고 의미도 없는 듯한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삶이 팍팍하고 신산스럽게 느껴질 때면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아무리 실수투성이의 인생을 살아왔을지라도 볼품없는 인생을 믿고 응원하는 누군가가 곁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주어진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버티고 이겨내다 보면 자신도 알 수 없었던 삶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벚꽃이 지는 계절. 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인해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요즘, 꽃구경도 못한 채 한 계절을 다 보내고 말았지만 삶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되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지금의 이 위기를 버텨낼 수 있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 남과 견주어 그 삶이 화려하고 빛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기쁘게 살아내는 것.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건강한 자는 다만 유희할 뿐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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