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요즘 밤꽃이 가득합니다. 산 능선에 위치한 밤 농장에서 비롯된 밤꽃 냄새는 산의 정상으로 또는 산자락으로 퍼지다가 밤이면 급기야 골바람을 타고 내가 사는 아파트 베란다에까지 닿곤 합니다. 밤꽃 냄새가 온 마을을 점령하는 동안 나는 미뤄두었던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이따금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보면서 추억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나는 해마다 흉폭해지는 여름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궁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치를 피해 다락방으로 숨어들었던 안네 프랑크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계절에 저항한다는 건 참으로 무모한 짓이기에...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엊그제 처음으로 모의고사를 보았습니다. 예상으로는 전 과목 1등급을 받을 듯한데 아들의 국어 과목 점수를 보면서 조금 웃었습니다. 남들도 다 맞힐 듯한 2점짜리 문제 두 문항을 틀리는 바람에 96점을 받았던 것입니다. 실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실수. 생각을 너무 깊게 해서 틀렸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들에게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윽박지르거나 강권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행복한 게 우선이라고 시간이 날 때마다 말해줍니다. 학기초에 동아리를 선택할 때도 아들은 은근히 방송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공부와 관련된 동아리를 선택하지 왜 시간도 많이 뺏기는 방송부에 들어갈 생각을 하느냐 마뜩잖아했습니다. 그때도 나는 아들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들의 의견에 따르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바람도 없는 하늘엔 구름이 가득합니다. 높아진 습도와 탁한 대기 탓에 덩달아 기분도 꿀꿀해집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라도 다운로드하여야 할지 생각만 많아집니다. 오늘은 제64회 현충일, 베란다에 조기를 달고 무작정 생각만 많아지는 하루.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붕붕툐툐 2019-06-06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엄청 공부 잘하는 아드님을 두셨네요~ㅎㅎ

꼼쥐 2019-06-06 21:50   좋아요 0 | URL
공부만 잘한다는 게 맞을 듯합니다. 운동은 잘 못하거든요. 사람마다 타고난 특성이 다르니까 말이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