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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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모르던 작가의 저작을 읽는다는 건 일상에서의 우연한 만남처럼 드라마틱한 경우가 종종 있다. 내게는 김언수 작가가 그런 경우였다. 자주 찾는 도서관의 서가에서 책을 둘러보던 중 김연수 작가의 코너에서 시선이 멎었고, 서가에 꽂힌 책들 중 못 보던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책의 제목인 즉 <설계자들>. 나는 그 책의 저자가 김연수 작가가 아닌 김언수 작가였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빌려온 책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김연수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잘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워하면서... 그러나 리뷰를 쓰려고 보니 김연수 작가의 저서에는 <설계자들>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책의 제목으로 검색한 후에야 비로소 저자가 김연수가 아닌 김언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연수 작가와는 완전히 다른 장르를 추구하는 김언수 작가의 저서를 어떻게 김연수 작가로 오해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통해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었다.

 

김연수, 아니 김언수 작가의 소설집 <잽>은 작가의 상상력과 이력을 잘 드러내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소설가로서의 김언수 작가가 그동안 자신이 쓴 단편소설을 엮어 한 권의 소설집으로 출간했다기보다 소설가로서 자신의 이력을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써내려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 책의 중반부에 실린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통해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리뷰를 갈음하여.

 

삼십대 초반의 이혼남이자 중소기업의 총무과 대리인 송정오, 그는 어느 날 퇴근길에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된다. 후진을 하더 차와 약간의 충돌이 있었고, 사고를 낸 운전자가 갑자기 그가 소지했던 전기충격기를 꺼내더니 느닷없이 가격하는 바람에 그대로 기절을 한 것이다.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끌려간 곳에서 눈을 떠보니 치과 수술용 의자 같은 곳에 묶여 있었다. 송정오를 납치한 사람들은 그 자신도 몰랐던 가계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송정오가 태어나기도 전에 월북한 할아버지는 조선 노동당 당검열위원회 부국장까지 올랐고, 아버지 송만길은 1957년에 월남하여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다 베트남으로 피신한 후 마카오에서 행적이 끊겼다는 것. 그리고 송정오 본인은 워커힐 호텔 복도 앞에서 김석산을 권총으로 암살했다는 죄명이었다. 송정오가 이를 부인하자 전기고문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이번 암살 사건이 정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하는 사실적인 내용이네. 복도에 어떤 표식을 했고, 엘리베이터는 몇 층에서 내렸으며, 너는 무슨 옷을 입고 잇었고, 아침식사는 어디서 무슨 메뉴로 했는가 하는 자네만 알고 있는 그런 사실적인 내용이란 말이지." (p.129)

 

끔찍한 고문이 멈춘 후 그들은 종정오에게 종이와 펜, 기타 자료들-이를테면 경찰 측의 보고서, 국과수 검시관들의 보고서, 갖가지 의혹을 담은 신문 기사들- 을 던져주고 자리를 뜬다. 모든 의혹들을 말끔하게 풀어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진술서를 쓰라고 요구하면서. 송정오에게 주어진 시간은 열두 시간이었다. 그들은 송정오가 쓴 진술서를 검토한 후,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였고, 강요와 협박 속에서 진술서 쓰기는 계속되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사실성과 개연성을 충족할 때까지. 결국 송정오는 아무런 의혹도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 논리적이고 명확한 진술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자료만 준다면 어떤 진술서도 열두 시간 안에 완벽하게 써낼 수 있는. 진술서 쓰기의 달인으로 다시 태어난 송정오는 그가 처음 납치되었던 지하주차장으로 내던져지지만 수사관에 의해 체포가 된다. 김석산의 살해범으로. 송정오는 수사관 앞에서 조사를 받고 진술서를 쓰게 되는데...

 

송정오의 글쓰기 솜씨가 달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반복적인 연습과 고문에 대한 공포, 그리고 고문을 받지 않기 위한 간절함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김언수 작가는 이 작품에서 소설 속 주인공 송정오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에 그닥 재능이 없던 자신이 어느 날 특별한 이유도 없이 글쓰기 세계에 납치되었고, 규칙적인 시간 내에 지루한 글쓰기 연습을 반복하였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세간의 혹평이나 지적을 받아들인 후 다시 글쓰기에 매진하여 마침내 작가로 등단하는 그런 과정들. 진술서의 '진'자도 몰랐던 송정오가 진술서의 달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평범했던 자신이 작가로 등단할 수 잇었던 과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작가는 그렇게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너스레를 떨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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