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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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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시대를 마주한다는 점에서, 소설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리고 소설가는 동시대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때로는 그 시대를 대변한다. 다시 말해: 어떤 작가는 시대가 요구하는 공감대와 감수성을 관통해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한 시대를 대표하기도 한다. 그 점에서 2024년은 예소연의 시대였다. 여러 독자들이 예소연을 찾아 읽었고, 곧이어 다음 해에 데뷔작 『사랑과 결함』(문학동네, 2024년 7월)에 실린 단편 「그 개와 혁명」으로 최연소 이상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면서 대세 소설가로 이름 굳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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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도 그 데뷔작을 읽어봤다. 그때는 이렇게 대성할 작가일 줄 몰랐고, 단지 북클럽문학동네의 이달책 도서로 선정되어 읽게 됐는데…… 내 기억에 선명히 남은 단편(들)은 「그 개와 혁명」보다도 일명 '성장기 삼부작'으로 불리는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였다. 이어지는 세 편의 이야기들이 눅눅하면서 꿉꿉한데…… 어떤 음모랄지 꿍꿍이가 도사리고 있는 세계를 잘 그려냈다고 (나는) 느꼈다. 신기하게도 표면적으로는 암울한 이야기인데 그 안에 생명력 같은, 그렇지만 생명력이라 부르기 뭣한 무엇이 꿈틀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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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번 두 번째 소설집 『너의 나쁜 무리』를 읽으며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동시에 그 인상의 정체가 뭔지 얼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표제작 「너의 나쁜 무리」부터 보자. 유선은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그렇게 된 사연이 있다. 유선의 부모가 캐나다로 떠나면서 그대로 연락을 뚝 끊어버린 탓에 반강제적으로 유선은 할머니를, 할머니는 유선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도도하고 거침없는, 동년배들과 비교해도 분명 남다른 성격의 소유자 할머니는 유선에게 말한다. 자신을 절대 할머니라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할머니의 호칭은 '여사'로 굳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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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사의 남다른 성격은 몇 가지 에피소드로 예를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연애 편력: 여사는 수차례 남자를 바꿔가며 사귀었고, 어린 유선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남자(들)과 어울렸다. 한 남자와 사귀면서도 그 관계가 신통치 않다고 느껴지면 곧바로 다른 남자의 등에 ― 취한 채로 ― 업혀 들어오기 일쑤요, 집에 데려온 남자친구가 손주(그러니까, 유선)을 귀여워하는 기색을 보이면 질투심에 심술부리기까지 하는데…… 세상에, 어떤 할머니가 자기 손주에게 질투심을 느낀단 말인가. 그렇지만 여사는 그랬다. 유선에게 함부로 가랑이를 벌리지 말라 경고하면서 본인은 쉽게 남자에게 마음 주고 몸도 주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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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래도 여사 밑에서 자란 게 유선에게 썩 나쁘기만 한 게 아닌데, 이런저런 남녀 문제나 애착 관계에 또래보다 지식도 많고 초연했달까. 유선에게도 그 무렵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다. 이해신이라는, 함께 토론 대회를 준비하는 제법 똑똑한 친구인데, 왜 그 애에게 마음이 끌렸을까 생각해 본 유선은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줄 수 있는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 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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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래서 어떻게 되냐고? 유선은 토론 대회 준비를 명목으로 이해신을 집까지 데려온다. 여사는 잠들었고…… 그쯤 되면 토론 얘기는 뒷전이다. 아, 그런데 말이다, 이 타이밍에 문자가 한 통 온다 ― 현구 아저씨로부터, 영문 모를 주소 한 줄과 함께. 현구 아저씨는 여사와 한창 사귀었다가 돈을 빌려 간 뒤로 잠적한 아저씨다. 그런데 왜 이런 문자를 보낸 걸까. 대충 사태를 파악한 똘똘한 이해신은 이렇게 말한다. 어쨌거나 이 주소로 가면 현구 아저씨를 만날 수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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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렇게 돈 들고 튄 현구 아저씨를 잡으러 세 사람, 여사와 유선과 이해신이 문자 속 주소로 차를 몬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이다음부터 나올 텐데, 거기까지는 이 글에서 밝히지 않겠다 ― 도입부만큼이나 흥미로운 후반부를 만나실 수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꼭 직접 읽고 확인해 보실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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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 감상문에서 내가 나누고픈 얘기는 이 소설의 분위기다. 표면적으로는 암울한 이야기인데 그 안에 생명력 같은, 그렇지만 생명력이라 부르기 뭣한 무엇이 꿈틀대는 듯한…… 앞에서 말한 그 인상이 내 요약본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껴졌을까? 유선과 여사의 관계는 일반적인 ―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 손주와 할머니 사이와 다른 '무언가'가 있고, 그 다름은 뭐랄까, 그리 좋은 (혹은 권장할 만한) 방향처럼 보이진 않다. 그 무언가엔 눅눅하고 꿉꿉한…… 솔직히 말해 불순한 기운마저 돈다. 그럼에도 이 무언가가 두 관계를 끈질기게 엉겨 붙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마치 끊을 수 없는 담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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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를 예소연 씨는 몇 줄의 문장만으로 진단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더럽고 내밀한 이야기들에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어 점점 그런 이야기 없이는 살 수가 없어지고 결국 그 이야기의 생산자가 되며 다른 사람들까지 그런 이야기의 세계로 끊임없이 포섭하게 된다는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 속에 실린 이 문장은 어쩌면 예소연 씨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걸지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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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비슷한 예로 첫 단편 「추운 뺨에 더운 손」도 있다. 오랫동안 못 보고 지낸 동네 친구 기문에게서 선이는 전화를 받는다. 이후 성사된 만남 덕으로 선이는 반가운 마음이 일었지만…… 얼마 못 가 선이의 어머니와 기문의 어머니 사이 얽힌 모종의 문제를 알고 나자 찝찝한 기분이 든다. 사실 선이의 어머니는 주변 지인들로부터 여러 차례 사기를 친 전적이 있었다. 기문의 어머니도 그 피해자 중 한 명이었고. 혹시 기문은 자기 어머니가 못 받은 빚을 선이에게서 받으려는 속셈일까? 그렇다면 그 빛은 도대체 얼마일까? 반가운 재회는 그렇게 의심스러운 교섭 자리가 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소설은 그 예상을 보란 듯이 깨며, 뜻밖의 장면을 결말에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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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내가 보기에 위에서 살핀 두 단편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두 이야기를 추동하는 힘은 의심과 음모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건너편 사람의 의중을 살피고 조심하는 일이야 오늘날 흔하지 않나? 그런데 그게 애매모호하게 가까운 사이, 가령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든지 새로 사귄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면…… 조금 더 어렵고 까다로워진다. 이런 관계의 경우 의심과 애정을, 다시 말해 애증을 동반하기 때문에. 데뷔작 『사랑과 결함』부터 '사랑'에 '결함'을 더한 시선 또한…… 예소연 씨의 작품 세계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힌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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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고 생각보다 타인들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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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의심도 많고 불안한 사람들. 그렇다고 그들이 모든 문제를 계산적으로 다루는 건 아니며, 불편하더라도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기꺼이 휩쓸릴 줄 안다. 닥쳐온 불운 앞에서 세상 무너진 것마냥 굴지도 않고, 섣불리 타인을 판단하거나 매사에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타인을 덜컥 믿을 만큼 순수하지도 않지만, 그 타인 없이 살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과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들이 예소연 씨의 소설에 열광하고 공감하는 게 아닐까. 이것이…… 내가 느낀 암울함 속의 생명력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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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덧붙이는 말. 수록작 중 「아무 사이」는 손보미 씨의 「임시 교사」가 연상됐다. 두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그 결말도 상당히 비슷한데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꼈다. 굳이 말하자면 「아무 사이」가 「임시 교사」보다 조금 더 따뜻한 결말 같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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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또 덧붙이는 말. 소설가 정이현 씨는 추천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소연은 엉뚱한 야심가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작가가 웃기는 데 진심임을 느낄 수 있다. 잘 웃기기 위해 궁리하고 있다는 것을. 냉소도 실소도 아닌, 그야말로 진짜 웃음을 위하여." 이 말에 나도 공감했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예소연 씨의 소설은 눅눅하고 꿉꿉할지언정…… 은근한 유머도 있다. 아주 좋은 예시가 「소란한 속삭임」 같은 단편. 그래, 타인들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지. 서로 조심하고 경계하는 이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자그마한 틈새를 만드는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는 조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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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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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금 지난 유행어지만…… 유튜브 채널 민음사 TV에서 활동 중인 해외문학팀 편집자 김민경 씨는 홍상수 영화를 두고 "대충 알고 좋아하고 다 알고 싫어하자"는 말을 했다. 이 말이 아무래도 뭇사람들로부터 큰 공감을 샀는지 이런저런 곳에서 자주 인용된 걸 봤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으니, 호감이 생기기까지(정확히 말하자면 호감이 생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확신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나로서는 무턱대고 좋아한다는 소리를 할 수 없다. 가뜩이나 싫어한다는 말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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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소 좋아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 좋아한다고 사정없이 고백할 수 없는 작가들이 몇 있다. 소설가 김중혁 씨도 그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그의 책을 내가 많이 읽어 본 편이 못되기에…… 그리고 그는 2000년에 데뷔한 작가인 만큼 발표한 작품이 무척 많다. 최근에 발표한 장편 소설 『꿈이다 아니다』(안온북스, 2026년 7월)까지 포함해서 장편 소설만 총 9편 남짓. 소설집은 5편에 에세이는…… 공저까지 포함하면 세기 바쁘다. 이뿐이랴. 그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한때 B tv에서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와 함께 진행한 프로그램 <영화당>. 거기서 평론가 못지않은 자기만의 시선과 박식함을 보여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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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무튼 김중혁 씨. 내가 읽은 그의 책을 나열하자면 단편으로는 『펭귄 뉴스』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장편으로는 『나는 농담이다』 『미스터 모노레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좀비들』 정도 같다(읽은 순서대로, 기억에 의존해서 나열해 봤다). 산문집도 물론 읽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들이 많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읽었겠거니 싶긴 하지만 그의 책은 이보다 훨씬 많고…… 이는 물론 희소식이다. 이번 단편집을 고른 이유도 그의 소설을 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스마일』이 나온 지 4년이 지났는데, 출간 소식 듣자마자 읽고 싶었는데, 여태 읽지 못했구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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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첫 단편 「스마일」. 이를 예전에 2017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렸을 때 만난 적 있다. 그때도 흥미로웠고 이번에도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휴스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데이브'는 좌석에 앉아 조용히 쉬고 싶었지만 어째 뜻대로 될 것 같지 않다. 바로 옆좌석에 앉은 남자 '잭'이 그에게 수시로 말을 걸기 때문이다. 몇 차례 얘기가 오가던 중, 잭은 스스로를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니 다른 승객들의 직업과 상태를 추측하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의사일 텐데 저 옷차림이 이러이러하기 때문이고 저 손 모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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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승객 중 한 남자가 급작스럽게 쓰러진 것도 그 즈음이다. 다급해하는 승무원과 혼란스러운 기내 상황. 결국 남자는 죽었고 승무원들은 주검을 끌어다가 승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안쪽 칸으로 옮긴다. 역시나 예리한 관찰자인 잭은 데이브에게 말한다. 저 남자가 왜 죽었는지 자기는 알 것 같다고. 저 남자는 스왈로워일 거라면서. 스왈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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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왈로워에 관한 잭의 설명을 한번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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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돔에 싼 헤로인을 운반하는 밀수꾼들입니다. 항문으로 넣는 부류를 스터퍼라고 부르고, 입으로 삼키는 부류를 스왈로워라고 부르죠. 장단점이 있어요. 약을 똥꾸멍으로 넣는 새끼들은, 내 생각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부류들이야. 물건도 옮기고 오르가슴도 느끼려는 거지. 입으로 삼키는 부류들이 진짜야. 걔들은 사심 없이 물건을 옮기는 데만 집중하거든. 전에 스왈로워들이 준비 작업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살벌하더라고요. 콘돔에다 코카인이나 헤로인을 가득 채운 다음에 기다린 실로 끝을 묶습니다. 그리고 그걸 삼켜요. 정말 꿀꺽 소리가 얼마나 크게 나는지 몰라요. 콘돔을 삼키고 나면 기다란 실을 어금니에다 꽉 묶어둡니다. 크크크, 나중에 끄집어 올려야 하거든요. 바다에 나가본 적 있습니까? 배들이 항구에 도착하면 닻을 내리고 밧줄로 묶어두죠? 그 이치와 똑같습니다. 콘돔이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금니에다 꽉 묶어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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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렇구나.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즈음 독자는 뜻밖의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데이브가 잭의 얘기를 듣더니 급작스럽게 복통을 호소하며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이런 장면을 회상하는 게 아닌가. 불과 얼마 전, 라텍스 장갑의 손가락 마디를 잘라 정체불명의 가루를 부어 넣은 다음 치실로 묶어 입에 넣었던 '피에르'라는 남자를…… 그리고 자신도 그 짓을 똑같이 했음을…… 피에르는 데이브에게 말했다. "보물 이동 사업이라고 해두자. 어때, 괜찮은 작업 같지?" 괜찮을 리가. 죽은 저 남자도 데이브처럼 보물 이동을 하다가 죽고 만 걸까? 왠지 잭은 데이브 또한 스왈로워라는 걸 아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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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 기묘한 스왈로워 이야기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 죽음에 관한 문제로 비틀린다. 노련한 소설가 김중혁 씨는 독자도 작가도 모르는 걸 모른 채 놔둔다. 그 미스터리를 보존하면서 이야기를 '있을 법하게' 잘 매듭짓는다. 그렇다.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은 독자를 속이거나 깜짝 놀래는 게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를 짓는 것 ― 그리고 흥미로운 지점에서 멈추는 것. 혹자는 심심하다고 여길 테지만 나는 이 정도가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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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중혁 씨는 소설을 쓰는 데 있어 가장 중시하는 게 대사라고 밝혔다. 서로 다른 등장인물이 탁구의 랠리(rally)를 주고받듯이. 실제 두 사람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게. 이번 소설 또한 인물 간의 '대화의 희열'이 느껴지는데, 가령 네 번째에 수록된 「차오」는 주인공과 그의 자동차에 탑재된 자율 주행 인공지능 '차오'와의 대화가 소설 전체를 이끈다. 이 소설도 흥미로우니 추천 ― 닮진 않았지만, 묘하게 그의 데뷔 소설집 속 「멍청한 유비쿼터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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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번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 모두 저마다 엉뚱하고 별나다. 버스에서 일 년 내내 사는 사람이 등장하는가 하면, 왼손만 쓰는 부족을 관찰하기도 하고, 플라스틱 섬에 조난당한 여자의 생존기도 나온다. 근사한 반전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 자체가 어쨌든 흥미로운 이야기 아닌가? 그의 소설은 독자를 (나쁜 의미에서) 곤란하거나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김중혁 씨의 소설을 좋아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록작이 다섯 작품 밖에 안 된다는 것? 그 얇음 역시 누군가에게 미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의 다음 책도, 내가 아직 못 읽은 수많은 책들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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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
구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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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작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일은 곧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과정과 같아서. 자고로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그저 이야기만 따라가지 않는다. 그 작가가 이야기를 하는 방식, 관점, 태도…… 종합하자면 창작자의 '톤 앤 매너'를 함께 만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볼 수 없던 새로운 톤 앤 매너를 마주하는 일 ― 그게 내가 신예 작가를 만날 때마다 하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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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요즘 출판계와 작가들은 무엇에 관심 있는지. 어떤 작품에 호응하고 찬사를 보내는지. 무엇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감수성인지. 아무래도 당대 문학 작품에 '트렌디함'을 요구하거나 의식하기로는 쓰는 입장도 읽는 입장도 마찬가지일 테다. 기대에 부응하듯 구소현 씨의 소설은 젊다. 여기서 말하는 '젊다'란, 다루고 있는 소재의 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책 뒤표지에서 나오는 문구 "되살아나고 싶지 않은 유령, 세상을 파괴하려는 신, 믿음을 버리고픈 교주" 등을 봐도 짐작 가능한데, 이 말고도 게임 제작자 · 장기 최면 · 사이비 종교 · 신흥 종교까지…… 구소현 씨가 다루는 소재는 거침없이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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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실 표지만 보고 밝은 내용일 줄 알았다. 푸른 하늘에 터지는 폭죽, 혹은 탄산수 속 탄산이 터지는 모양 같기도, 아니면 잔잔한 호수 위에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 같기도 한…… 아무튼 시원한 감각이 담긴 표지니까. 게다가 제목은 또 어떻고. 내 딴에는 청량하고 상쾌한 이야기가 펼쳐지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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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이트 데이」를 보자. 소설의 도입부부터 펼쳐지는 울창한 참나무 숲…… 이 장면이 짧게 비친 다음 등장하는 두 사람은 승현과 연주다. 연주는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재원과 마주쳤는데, 재원이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 같다고 말한다. 재원은 포교 활동 중이었다. 두 사람은 만난 김에 연락처를 공유했고 그 과정에서 승현의 연락처도 전달됐다 ― "언니 번호 물어보길래 고민하다 알려줬는데, 혹시 연락 와도 그냥 받지 마." 그렇지만…… 승현은 재원의 소식이 궁금했다. 재원도 그곳 출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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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곳? 그곳이 어디길래. 그 정체는 얼마 못가 밝혀진다. 어렸을 때 승현과 재원은 함께 숲에서 뛰놀았던 친구였고, 함께 기도를 올리며 어른들께서 주신 천조유(天鳥乳)를 마셨더랬다. 여기서 '천조유'란 하늘 새의 모유. 오염된 피를 정화하고 날개를 얻기 위해 마셔야 할 양식이다 ― 무언가 수상함을 직감하셨는지. 이들이 지내는 숲 혹은 산골, 그러니까 소설 첫 장면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그곳'의 정체는 사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사이비 종교 단체 약속천인사원(約束天翼寺院)의 근거지였다. 이들 단체는 선택받은 자만이 새처럼 등에 날개가 돋아날 거라는 믿음을 이용해 신도들을 세뇌했다. 승현과 동생 연주, 재원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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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교주의 신도 착취, 살인 교사, 불법 의료 행위 등이 폭로되자 교주는 '선택받은 신도'들과 함께 절벽에서 투신했다. 그 신도 중에는, 안타깝게도, 승현과 재원의 부모도 있었다. 약속천인사원이 해체되면서 아이들은 대리 보호자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승현과 연주는 고모네 집에 살게 됐고…… 재원은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 뒤로 세 사람은 연락이 끊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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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상 가능하듯 재원은 보육원에서도 종교 활동을 끊지 못했다. 아니, 끊을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하나. 나고 자라서 보고 배운 게 전부 약속천인사원의 교리였으니까, 오히려 재원의 입장에서 볼 때 바깥세상은 더 이상하고 낯선 곳이었다. 사회와 직장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던 재원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블로그가 알음알음 유명해지면서…… 지금의 포교 활동까지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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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승현은? 승현도 실은 마찬가지다. 그녀도 종교 단체에서 못 배운 학교 교육을 따라잡으려 남들보다 부지런히 공부했고 대학에 들어가서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하지만 우울증, 강박, 불안장애 등을 달고 살았고 회사 생활도 실패적이었다(소설에서는 그녀가 '폐급'이었다는 표현까지 쓴다). 직장 내 괴롭힘이 갈수록 심해질수록 눈치만 보며 전전긍긍하는 생활. 사실 승현이 재원을 만난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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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 날 망치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어. 멀쩡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제는 지쳐서. 내가 나를 망치는 것보다 남이 나를 망쳐주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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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원도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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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빠져 있는 종교는 잘못됐으니까 거기서 나오라고, 나를 설득해주길 바랐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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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두 사람은 결국 운명 공동체처럼 같은 지점을 공유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서로를 마주하며 잠시나마 숨통이 트인 듯한 기분을 만끽하는데…… 여타의 소설들과 달리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뒤에 일어날 일들은 이번 글에서 함구하겠다. 내 감상을 조금 보태자면,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다니. 이렇게 끝낼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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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하게 된 지점이 몇 가지 있었다. 내 취향 문제와 직결되는데, 일단 나는 범죄나 불법적인 일을 다루는 이야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이 쉽게 죽어버리는 이야기도. 노파심에 말하지만, 내가 범죄나 죽음 같은 소재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썩 좋아하지 않는다'와 '싫어한다', 두 단어에는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다룰 거라면 그만큼 쓰는 이에게 책임감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에 가깝달까. 나를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일.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죽거나 죽임당했다면…… 나는 그 사건을 중대하게 바라보며 소설에서도 중대하게 다뤄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구소현 씨의 소설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거나 죽인다. 수록된 여덟 작품 거의 대부분에. 그리고 모든 작품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내 딴에는 죽음이 쉽게 다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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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것은 작가가 중요히 다루는 면과 나라는 독자가 중요히 보는 면이 다르기에 생긴 간극 ― 말하자면 입장 차이일 뿐이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하다 보면 견해가 엇갈릴 때가 있듯이 독자와 소설가 또한 마찬가지. 지난번에 최은미 씨의 『다른 사랑』 감상평에서도 말했듯, 나는 인물들의 동기에 관심이 많고 특히 자살이나 타살 같은 사건에서는 더 민감히 반응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마땅한 이유가 없더라도 그 사건이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묘사되기를 바라는 게 나라는 독자의 성정(性情)이다 ― 그런 점에서 나는 「시트론 호러」와 「요술 궁전」을 좋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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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고 등장인물. 이들은 대체로 고아거나 사회부적응자 들이다. 보육원 동기 말고는 친구가 없고, 직장에서 소외되며, 자기 바운더리(boundary) 안에서 최대한 조용히 살아가고 기타 등등. 그런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가 다 있겠지만, 연달아 여덟 작품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앞서 읽은 이야기들과 연관 짓게 되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앞의 단편들과 어떠한 연결 고리도 없을지라도.

​

13.

주목하고 싶은 점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소현 씨의 추진력이다. 암에 걸린 언니 도르마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려 하는 조의 의지가 무서울 정도로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완치」, 아무리 모멸에 찬 세상일지라도 사랑을 지켜야 한다는 「험악한 세상」 같은 이야기가 딱 그렇다. 두 이야기 모두 첫 장을 펼쳤을 때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인상이 확 바뀐다. 그만큼 이야기가 크게 도약하고, 폭발적으로 뻗어나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표제작 「환호성」은 확실히 이 소설집의 하이라이트다. 내일 당장 종말 할지 모르는 세상에서도 지키고픈 것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톡톡 튀는 메세지를 놓치지 않는…… 이게 오늘날 신예 작가가 보여주는 이 시대의 톤 앤 매너구나.

​

​

14.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도 재미있게 읽었음을 밝혀 둔다. 책 제목에 걸맞은 작가의 말이었다. '그래도 되는 바다'에서 나 역시 즐겁게 놀다 갔음을 슬쩍 고백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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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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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을 읽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아름다운 문장과 사유를 만나고 싶어서, 혹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싶어서…… 좋다. 그 밖의 동기들도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런데 내가 던진 질문은 그게 아니다. 동기를 넘어서 그 소설을 읽게 하는…… 읽고 싶게 만드는…… 쉼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 그 힘이 무엇인지 나는 묻고 있다. 그리고 이미 답을 하나 정해뒀다.

​

​

2.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마음 수양에 도움 돼서, 멋진 표현을 배우고 싶어서…… 그중에서도 으뜸은 재미다. 소설은 재미있어야 읽힌다. 재미있어야, 소설은 읽힌다.

​

​

3.

이장욱 씨의 글은 취향을 탈지언정 일단 기호에 맞으면 도저히 읽기를 관둘 수 없게 만든다. 이야기도 흥미롭고, 이야기하는 방식도 흥미롭고, 이야기를 짓는 문장마저도 흥미롭다. 내 딴에는 그렇다. 여기 실린 단편들의 첫 문장만 떼어 보아도 얼추 감이 잡힌다.

​

경험이란 무엇일까? 입는 것일까? 먹는 것일까? 바삭바삭한가? 물렁물렁한가? 경험이 모여 추억이라는 게 되는 것일까?

(「행자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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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복화술사입니다. 여러 가지 목소리를 가졌어요. 진짜 내 목소리가 뭔지 헷갈릴 때도 나는 여러 개로 흩어진 나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의심스러우신가요? 의심스럽다고요? 야 이 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복화술사」)

​

우리는 누구나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 공무원이 드러머가 되고 싶고, 은행원이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고 싶고, 모범생이 일진처럼 존나 욕을 해대고 싶은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

​

그러니까 취향을 탈지언정 누군가는 이런 문장 다음에 이어질 다음 문장을 기다리며 읽는다는 소리다. 당신이 느끼기에 어떠한가? 나와 같다면, 당신도 이장욱을 좋아할 확률이 절반 이상은 되었다고 본다, 나는.

​

​

4.

잠깐 위에서도 나왔지만, 실린 소설들의 제목들을 봐도 예사롭지 않다.

​

행자가 사라졌다!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복화술사

크리스마스 캐럴

낙천성 연습

최저임금의 결정

양구에는 돼지코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

눈먼 윌리 맥텔

​

알 듯 말 듯 한 제목들. 개중에는 익숙한 단어들(예컨대 크리스마스 캐럴, 최저임금 등)도 보이고 익숙하지만 낯설게 배치된 단어들(예컨대 양구와 돼지코, 낙천성과 연습 등)도 보인다. 여담이지만 이 중에 네 번째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은 나중에 장편 『캐럴』(문학과지성사, 2021년 6월)로 확장된다. 두 소설이 같은 지점을 공유한다는 소리다.

​

​

5.

물론 제목이 내용을 다 말하지 않으므로…… 이야기를 들여다볼 차례다. 「행자가 사라졌다!」를 보자. 사라진 행자의 정체는 뭘까? 바로 집에서 기르는 볼파이톤, 그러니까 뱀이다. 이 행자는 아마 "경험"이랄 게 없을 텐데, 왜냐하면 이 집에 들어온 이래로 리빙 박스 바깥에 나올 일이 ― 내가 잠깐 그 박스에서 꺼내 핸들링할 때를 빼면 ― 전무하니까. 그러나 할머니께서 얘기하신 바: "경험 많은 인간들이 외려 세상을 오해하는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이들은 대개 경험이 만든 틀에 갇혀 살아가니까. 육이오를 경험한 사람은 육이오에, 유신을 경험한 사람은 유신에, 가난을 경험한 사람은 가난에 갇혀 살아가는 법이다. 평생 돈 귀한 줄 모르고 살았다면? 다들 지들처럼 사는 줄 알겠지."

​

​

​

6.

경험 없는 지혜랄 게 있다. 그 증거가 실종된 행자다. 행자는 냉혈동물답게 조용하고 고독이니 우울이니 하는 것을 느끼지 않으며 우아한 자세로 세상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그 고요한 눈으로…… 이 집안의 분위기를 정확히 감지한다 ― 행자가 사라진 것도 그래서 아닐까? 행자의 실종 사건은 내가 대학교 기숙사에서 추리 소설을 뒤적거릴 때 일어났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할머니가 문득 행자가 사라진 걸 눈치채신 것이다.

​

​

​

7.

추리 소설 애독가인 나는 곧장 추리에 나선다. 가장 행자에게 적대적이었던 아빠부터, 내가 없을 동안 행자의 먹이를 책임진 엄마,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남동생, 마지막으로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시…… 최후의 용의자 할머니까지. 겉보이게 추리 장르를 차용한 듯 보이는 이 소설은 가족 구성원들을 주인공 눈으로 해체하는 과정에서 색다른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행자는 과연 사라진 것일까? 행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

​

8.

표제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도 흥미롭다. 무명 시인이 우연히 자기 시를 인용한 블로거를 알게 되면서 화면 건너편 블로거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그런데 그 블로거가 나의 시를 제멋대로 인용하기 시작하는데…… 그 시는 과연 내가 쓴 시가 맞을까? 왜 바뀐 시가 내 눈에 더 매력적이게 보이는가? 왜 그녀는 내 시를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치는 걸까?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

​

9.

문제는 기반이다. 사람들이 평소 의심하지 않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그 자체로 단단한 기반을 만든다. 마치 우리가 딛고 선 땅바닥, 무너지지 않을 거라 믿는 콘크리트 건물, 주기적으로 돌아올 이 시간과 계절의 흐름처럼. 그런데 약간의 의문만 가지고 바라봐도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를 곱씹을 수 있다. 조금 망상처럼 들려도 괜찮다. 나는 나인가? 내가 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나에 관해서 잘 아는가? 내가 아는 게 맞나? 실은 의심한 적 없는 게 아닌가? 그동안 생각해 본 적 없던 게 아닌가? 왜 나는…… 나인가?

​

​

10.

기반을 뒤흔드는 물음표가 가장 예리하게 날선 소설로 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꼽고 싶다. 시니컬한 신흥 투자전문업체 캐피털 컨설팅 오너가 아내의 전남친이라 주장하는 젊은 치 만난다. 그것도 허름한 대학가 술집에서. 얼핏 보면 계급 담론 문제로 빠지기 쉬운 이 주제를 이장욱 씨는 보기 좋게 빗겨나간다. 예상치 못한 대화, 주점의 알바생과 노인의 개입으로 미묘해지는 상황…… 오너가 생각하는 세계상(像)는 그렇게 균열을 내며 무너진다. 무엇 하나 논리적이지 않으면서, 도래한 미래의 풍경은 섬뜩한데 또렷하다.

​

​

11.

이런 이상함이야말로 이장욱을 읽는, 읽게 하는,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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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령 이런 구절. 시인으로서 이장욱 씨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문장이기도 하다.

​

얼마 전 밥을 먹다가 이가 하나 빠졌던 것을 김은 기억해냈다. 북어라든가 인절미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김치를 씹었을 뿐인데…… 원래부터 부실하긴 했지만…… 고춧가루가 묻은 치아 하나가 무슨 고생대의 유물처럼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뿌리 쪽으로 피가 묻어 있고 전체적으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그것이 김의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렸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때는 그저 의미 없는 몇 개의 문장을 웅얼거렸을 따름이다. 이건 피가 묻어 있구나. 치아는 동물에 속해 있나 광물에 속해 있나. 아니, 식물일 수도 있겠지. 어디다 버려두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뿌리가 벋어서 무성해질 수도 있겠지. 그 나무가 자라서 희고 단단한 이빨들이 주렁주렁 맺히고……

(「눈먼 윌리 맥텔」, pp.29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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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양구에는 돼지코」. 작가의 말에서 이장욱 씨는 이런 이야기를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나도 이해했다. 무척 잘 읽었지만, 작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을 거다.

​

​

14.

나는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를 읽고서 인디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를 알게 됐다. 소설 내용은 이상했고 그들 노래도 특이했다만, 결국 나는 ― 소설 속 인물들처럼 ―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팬이 됐다. 나는 2집 [우정모텔]의 <아침에 빛>을 좋아한다. 물론 수록곡 대부분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다. 소설 속 구남과 나의 얘기는 어쩐지 장편 소설 『캐럴』과도 이어진다. 이장욱의 세계가 그렇게 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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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빼놓으면 섭섭해서. 「낙천성 연습」과 「최저임금의 결정」도 잘 읽었다. 실은 나 또한 내색은 안 할 뿐 「낙천성 연습」 속 아버지처럼 별의별 걱정을 시뮬레이션 돌리는 부류다. 이런 생각을 되도록 긍정적인 쪽으로 돌리기야 하지만. 「최저임금의 결정」을 읽을 무렵 나는 군대를 전역하고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일하는 중에 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새벽 4시는 그런 시간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라도 그 시간에 일어나기는 쉽지 않고, 늦게 잠드는 사람이라도 그 시간까지 깨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인기척이 희박한 시간. 인간의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간. 고양이라든가 벌레라든가 나뭇잎의 시간." 그때 내 손에 글록 26은 없었고 이 책이 쥐어져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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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이장욱의 소설에는 유머가 있다. 깔깔대는 유머라기보다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유머다. 거울 건너편에 비친 내가 내 모습이 아니게 되고 그자는 천연덕스럽게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는 식의 뻔뻔한 유머. 이렇듯 뜻밖의 상황을 연출하는 그의 소설은 피가 낭자하지 않을 뿐 기괴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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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러고 보면 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기묘함이기도 하다. 기묘한 이야기들은 재미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서, 그 경계를 비틀고 마구 흔들어대는 이야기. 아,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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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이장욱 씨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소설집은 『기린이 아닌 모든 것』. 기호는 물론 얼마든지 바뀌며,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책은 그의 신간이다. 얼마 전 출간된 『호러는 아니지만 어쩐지』(마음산책, 2026년 9월) ― 나는 이미 제목만 보고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아닌가. 작가 이름만 보고,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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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마지막으로, 마주친 문장들.

​

그래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라고 한들 그게 잘못이겠습니까? 그 목소리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을 알려준다면 그게 바로 신의 목소리 아닙니까?

(「복화술사」, p.83)

​

어차피 세상은 모순투성이고 모순조차 없으면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는 게 인생 아닌가.

(「낙천성 연습」, p.195)

​

어리숙한 것을 솔직함이나 진실함으로 착각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보게, 지고지순한 과거 같은 건 자네가 가지게. 나는 현재와 미래만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해주면 이 친구, 말귀를 알아먹을까?

(「크리스마스 캐럴」, pp.130-131)

​

죽음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환기하거든. 그렇지 않은가?

(「최저임금의 결정」. p.224)

​

나는 당신의 글을 읽고 당신도 언젠가 나의 글을 읽을 거예요.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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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랑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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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은미 씨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새삼스레 작가의 내력을 소개하는 까닭은, 그만큼 『다른 사랑』이 작가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소설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

​

2.

솔직히 말하자. 사실 첫인상이 썩 좋지 못했다. 아스팔트 도로에 자빠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라바콘. 그걸 찍은 사진은 묘하게 기울어져 있다. 어딘가 반듯하지 못한, 위태로운 인상을 주는 표지 위로 선명하게 찍힌 글자 다른 사랑. 라바콘과 동일한 색상의 서체는 마치 위아래로 길게 잡아당긴 것처럼 늘어졌다. 제목과 표지만 봐서는 알 수 없으니 책장을 넘겨 보자. 곧바로 차례가 나온다.

​

상리

무장하는 날

정선

김춘영

그곳

이 모든

고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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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들이 수록된 단편들의 제목이라는 소리인데…… 어떠신가. 흥미로운가? 솔직히 말해 이 중에 내 구미를 당기는 제목은 단 하나도 없었다. '김춘영'이나 '정선' 같은 고유 명사 제목은 그렇다고 쳐도, 다른 제목들은 그 짧은 단어 몇 개만 놓고 보면 도저히 소설 제목이라 생각할 수 없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며 뚜렷한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 단어 군집이었다. 무명작가가 이런 식으로 제목을 짓고 투고했어도 읽혔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 읽었더라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을지는 미지수다. 그것도 한두 편이 아니라 태반이 그렇다니…… 만일 작가 이름을 지우고서 차례만 봤다면 나는 이 책을 고이 책꽂이에 도로 꽂아둘 것이다.

​

​

3.

물론 우리는 블라인드 면접관이 아니다. 이미 소설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가 세 번의 젊은작가상(2014년, 2015년, 2017년)과 네 번의 김승옥문학상(2019년, 2020년, 2023년, 2025년), 그리고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 또한 여럿 수상했으며 2021년에 '소설가 50인이 뽑은 2021년의 최고의 소설'로 뽑힌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의 저자임을 떠올린다. 차라리 이 같은 무색무취의 제목을 최은미 씨가 의도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정도다. 물론 나는 작가의 수상 내역을 훑고 점수를 매기는 면접관이 아니다. 나는 한낱 방구석 독자 1이기에…… 내 감상과 직관을 솔직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

​

4.

놀라운 점은 소설이 담고 있는 스케일의 크기였다. 첫 번째 단편 「상리」는 시골 마을 상리에서 벌어지는 법률 분쟁을 맡게 된 변호사가, 두 번째 단편 「무장하는 날」은 과거 군부대 터였던 곳의 지표 조사를 하는 문화재 연구원이 등장한다. 요즘 소설들이 낯선 타자보다 나 자신 ―혹은 나에 준하는 비슷한 인물상 ― 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 반해 최은미 씨가 제시한 인물상은 그와 정반대다. 다양한 직업군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뜻은, 그만큼 작가가 그 분야를 깊이 들여다보고 연구했다는 소리다. 동시에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서사와 문장의 스펙트럼도 넓다는 것을 암시한다. 띠지에서도 볼 수 있는 문구, "강렬한 독서 체험의 설계자, 최은미"라는 말은 한껏 멋부린 차린 찬사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한 편 한 편이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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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장하는 날」을 보자. 오래전 '류'는 신입 연구원 자격으로 D시의 문화재 연구 발굴 현장에 있었다. 그곳은 DMZ와 가까워서 군인들의 감독 하에 작업이 이뤄져야 했다. 류는 그 당시 군인들 중, 아마 소대장쯤 되는 직책을 맡은 걸로 보이는 '박수현'과 친하게 지냈다. 그게 12년 전 일이다.

​

​

6.

그 뒤로 다시 D시로 오게 된 류. 이번에는 부대 통폐합에 따라 해체된 부대 터를 지표 조사하게 됐는데…… 며칠째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탓에 조사가 잠정 중단된다. 그때 류를 알아 본 식당 주인(류는 식당 주인을 기억하지 못했다)이 식당 뒤편의 컨테이너 하우스를 빌려주면서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자 몸이 아프기 시작한 류. 그 식당에서 박수현과 다시 마주친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고…… 이혼도 했다. 비가 그칠 무렵, 조사 중인 부지에서 무언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

​

7.

그 무언가의 정체는 문화재가 아니었다. 사람의 뼈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부지의 흙을 묵묘에서 실어다가 메웠다고들 했다. 류는 직접 묵묘 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데……

​

​

8.

내가 이 자리를 빌려 「무장하는 날」을 소개한 이유는 수록된 단편 중 가장 스케일이 크기 때문이다. 가상의 공간 D, DMZ와 군인들, 문화재 발굴 현장…… 그리고 12년의 폭을 오가는 시간까지. 류와 그 주변을 둘러싼 세상을 접속하려면 독자들은 시간과 공간의 덧게비를 하나씩 풀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최은미 씨가 설계한 "강렬한 독서 체험"에 차근차근 몸을 맡기는 것이다.

​

​

9.

그런데 「무장하는 날」이 잘 읽혔나? 나는 이해가 잘되지 않아 두 번 읽었다. 그래서 이해했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 못 하겠다. 소설의 방대한 스케일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방대한 스케일이 이 소설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일으킨 감도 없잖아 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내가 위에서 옮긴 줄거리를 봐도 이해되지 않는 구석들이 있을 테다. 류가 박수현과 무슨 관계였는지, 식당 주인이 류를 왜 기꺼이 도왔는지, 뼈의 정체는 그렇다 쳐도 왜 류는 스스로 묵묘 터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물론 소설이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다(오히려 모든 걸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독자들이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왜 류가 묵묘 터로 떠났는지, 거기서 또 그런 결말로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

​

10.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결말부의 미감이다. 해설을 쓴 평론가 박혜진 씨가 밝혔듯, "최은미는 인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투시하면서도 예술이 멈춰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아는 작가다."* 류의 동기는 모르겠지만 「무장하는 날」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다. 이 결말이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려서, 그래서 나는 이 단편을 두 번 읽었다. 그럼에도 나는 류의 동기를 모르겠다.

​

​

​

11.

동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라는 독자)는 소설에서 동기를 중요히 보는 입장이다. 동기가 흐릿하면 작품 속 인물들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저 사람을 왜 사랑하지? 왜 쫓아가지? 왜 도와주지? 왜 죽이고 싶지? 세세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저 귀띔이나 암시만 해줘도 되니까 일말의 근거가 있어줬으면 한다. 이를테면 「무장하는 날」 속 류와 박수현의 관계 묘사 정도면 충분하다는 소리다(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겠지, 하고 예상되니까). 내가 이번 소설집을 읽으며 가장 난감했던,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점이 바로 인물들의 '동기'였다. 왜 「정선」 속 주인공은 옛 집터를 찾아가지? 찾아가고 싶었다면 왜 굳이 '정선이를 찾습니다' 행사를 이용했지? 어릴 적 집터에서 발견한 숟가락이 귀하다는 걸 알겠다. 그렇다고 그걸 성년이 된 지금까지도 품에 쥐고 다닌다고? 왜 동창생에게 사기를 쳤지? 돈이 궁했나? 돈이 궁해서…… '정선이를 찾습니다' 행사로 고향 땅에 왔나?

​

​

12.

사실 다른 소설의 경우도 비슷비슷하다. 「그곳」의 주인공 '나'는 예전에 야영을 하다가 폭우로 인해 불어난 계곡물과 마주하고 죽을 뻔했다. 그것이 소설 첫 장면으로 제시되고, 이후로 내가 고지대의 체육관 센터를 오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계곡 사고로 인해 체육관 센터를 오가게 됐다는 유추가 가능한데, 어디에도 정확한 이유가 나오질 않는다. 내가 놓친 걸까? 유추만 해볼 뿐 주인공이 왜 체육관에 오가는지, 그리고 아주 체육관에 눌어붙기로 작정한 건지 선명하게 짚이질 않는다. 동기를 얼추 알겠는데, 그게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으니 내 딴에는 답답하게 읽혔다. 내가 맞게 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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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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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래서 인물의 동기가 명확한 「김춘영」을 제일 흥미롭게 읽었다. 화운령 중턱에 위치한 '김춘영'의 집을 방문하는 구술면담자 주인공의 동기와 야심이 뚜렷했고, 탄광촌 여성 노동자라는 흔치 않는 직업군을 조명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포인트다 ― 어찌 보면 작가 최은미 씨의 야심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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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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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런 생각을 해본다. 소설가들은 영화로 치면 각본가이자 연출가이다. 훌륭한 이야기를 쓰는 게 각본가의 역할이요, 그걸 예술적이게 담아내는 게 연출가의 역할이다. 나는 이번에 『다른 사랑』을 읽으며 최은미 씨의 연출가로서 능력에 일말의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본가로서 능력은 모르겠다. 그냥 나와 잘 안 맞는 것인지, 내가 놓친 부분이 많았던 것인지…… 혹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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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렇지만 나는 각본가로서 소설가보다 연출가로서 소설가를 더 좋아하고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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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이 책을 덮고 최은미 씨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게 있나 찾아봤다. 예전에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근린」을 읽어봤구나. 제목만 듣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했지만 첫 문장을 본 순간 기억이 났다. 맞아.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 나 역시 「근린」을 흥미롭게 읽은 사람 중 하나다. 아무래도 최은미 씨의 다른 소설집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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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작가의 말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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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인 '다른 사랑'은 이 소설들 중 한 편을 쓸 때 가제로 삼았던 것이다. 원고 폴더명과 쓰는 동안 듣던 음악의 플레이리스트 폴더명이 내내 '다른 사랑'이었는데 송고 직전 소설의 제목을 바꾸었다. 품고 있었지만 쓰지는 못했던 그 제목을 종종 생각했다. 왜였을까. 내가 써온 세계와 충돌하는 말 같아서였을까.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제목 같아서였을까. 소설집 준비를 위해 일곱 편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그 말 앞에서 주저했던 시간까지 여기에 함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이라는 말도 '사랑'이라는 말도 감당해볼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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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해 본다. 송고 직전에 제목이 바뀐 그 작품이 무엇일지를. 아마 「그곳」이 가장 유력하지 않나 싶다. '그곳'이라는 제목이 전체 내용을 아우르기에 너무 폭넓어서도 그렇지만 이야기 속 여러 사랑의 생김생김이 잘 살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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