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랑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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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은미 씨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새삼스레 작가의 내력을 소개하는 까닭은, 그만큼 『다른 사랑』이 작가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소설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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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솔직히 말하자. 사실 첫인상이 썩 좋지 못했다. 아스팔트 도로에 자빠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라바콘. 그걸 찍은 사진은 묘하게 기울어져 있다. 어딘가 반듯하지 못한, 위태로운 인상을 주는 표지 위로 선명하게 찍힌 글자 다른 사랑. 라바콘과 동일한 색상의 서체는 마치 위아래로 길게 잡아당긴 것처럼 늘어졌다. 제목과 표지만 봐서는 알 수 없으니 책장을 넘겨 보자. 곧바로 차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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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

무장하는 날

정선

김춘영

그곳

이 모든

고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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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들이 수록된 단편들의 제목이라는 소리인데…… 어떠신가. 흥미로운가? 솔직히 말해 이 중에 내 구미를 당기는 제목은 단 하나도 없었다. '김춘영'이나 '정선' 같은 고유 명사 제목은 그렇다고 쳐도, 다른 제목들은 그 짧은 단어 몇 개만 놓고 보면 도저히 소설 제목이라 생각할 수 없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며 뚜렷한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 단어 군집이었다. 무명작가가 이런 식으로 제목을 짓고 투고했어도 읽혔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 읽었더라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을지는 미지수다. 그것도 한두 편이 아니라 태반이 그렇다니…… 만일 작가 이름을 지우고서 차례만 봤다면 나는 이 책을 고이 책꽂이에 도로 꽂아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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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물론 우리는 블라인드 면접관이 아니다. 이미 소설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가 세 번의 젊은작가상(2014년, 2015년, 2017년)과 네 번의 김승옥문학상(2019년, 2020년, 2023년, 2025년), 그리고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 또한 여럿 수상했으며 2021년에 '소설가 50인이 뽑은 2021년의 최고의 소설'로 뽑힌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의 저자임을 떠올린다. 차라리 이 같은 무색무취의 제목을 최은미 씨가 의도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정도다. 물론 나는 작가의 수상 내역을 훑고 점수를 매기는 면접관이 아니다. 나는 한낱 방구석 독자 1이기에…… 내 감상과 직관을 솔직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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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놀라운 점은 소설이 담고 있는 스케일의 크기였다. 첫 번째 단편 「상리」는 시골 마을 상리에서 벌어지는 법률 분쟁을 맡게 된 변호사가, 두 번째 단편 「무장하는 날」은 과거 군부대 터였던 곳의 지표 조사를 하는 문화재 연구원이 등장한다. 요즘 소설들이 낯선 타자보다 나 자신 ―혹은 나에 준하는 비슷한 인물상 ― 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 반해 최은미 씨가 제시한 인물상은 그와 정반대다. 다양한 직업군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뜻은, 그만큼 작가가 그 분야를 깊이 들여다보고 연구했다는 소리다. 동시에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서사와 문장의 스펙트럼도 넓다는 것을 암시한다. 띠지에서도 볼 수 있는 문구, "강렬한 독서 체험의 설계자, 최은미"라는 말은 한껏 멋부린 차린 찬사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한 편 한 편이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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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장하는 날」을 보자. 오래전 '류'는 신입 연구원 자격으로 D시의 문화재 연구 발굴 현장에 있었다. 그곳은 DMZ와 가까워서 군인들의 감독 하에 작업이 이뤄져야 했다. 류는 그 당시 군인들 중, 아마 소대장쯤 되는 직책을 맡은 걸로 보이는 '박수현'과 친하게 지냈다. 그게 12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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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뒤로 다시 D시로 오게 된 류. 이번에는 부대 통폐합에 따라 해체된 부대 터를 지표 조사하게 됐는데…… 며칠째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탓에 조사가 잠정 중단된다. 그때 류를 알아 본 식당 주인(류는 식당 주인을 기억하지 못했다)이 식당 뒤편의 컨테이너 하우스를 빌려주면서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자 몸이 아프기 시작한 류. 그 식당에서 박수현과 다시 마주친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고…… 이혼도 했다. 비가 그칠 무렵, 조사 중인 부지에서 무언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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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무언가의 정체는 문화재가 아니었다. 사람의 뼈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부지의 흙을 묵묘에서 실어다가 메웠다고들 했다. 류는 직접 묵묘 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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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가 이 자리를 빌려 「무장하는 날」을 소개한 이유는 수록된 단편 중 가장 스케일이 크기 때문이다. 가상의 공간 D, DMZ와 군인들, 문화재 발굴 현장…… 그리고 12년의 폭을 오가는 시간까지. 류와 그 주변을 둘러싼 세상을 접속하려면 독자들은 시간과 공간의 덧게비를 하나씩 풀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최은미 씨가 설계한 "강렬한 독서 체험"에 차근차근 몸을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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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런데 「무장하는 날」이 잘 읽혔나? 나는 이해가 잘되지 않아 두 번 읽었다. 그래서 이해했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 못 하겠다. 소설의 방대한 스케일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방대한 스케일이 이 소설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일으킨 감도 없잖아 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내가 위에서 옮긴 줄거리를 봐도 이해되지 않는 구석들이 있을 테다. 류가 박수현과 무슨 관계였는지, 식당 주인이 류를 왜 기꺼이 도왔는지, 뼈의 정체는 그렇다 쳐도 왜 류는 스스로 묵묘 터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물론 소설이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다(오히려 모든 걸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독자들이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왜 류가 묵묘 터로 떠났는지, 거기서 또 그런 결말로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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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결말부의 미감이다. 해설을 쓴 평론가 박혜진 씨가 밝혔듯, "최은미는 인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투시하면서도 예술이 멈춰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아는 작가다."* 류의 동기는 모르겠지만 「무장하는 날」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다. 이 결말이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려서, 그래서 나는 이 단편을 두 번 읽었다. 그럼에도 나는 류의 동기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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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라는 독자)는 소설에서 동기를 중요히 보는 입장이다. 동기가 흐릿하면 작품 속 인물들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저 사람을 왜 사랑하지? 왜 쫓아가지? 왜 도와주지? 왜 죽이고 싶지? 세세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저 귀띔이나 암시만 해줘도 되니까 일말의 근거가 있어줬으면 한다. 이를테면 「무장하는 날」 속 류와 박수현의 관계 묘사 정도면 충분하다는 소리다(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겠지, 하고 예상되니까). 내가 이번 소설집을 읽으며 가장 난감했던,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점이 바로 인물들의 '동기'였다. 왜 「정선」 속 주인공은 옛 집터를 찾아가지? 찾아가고 싶었다면 왜 굳이 '정선이를 찾습니다' 행사를 이용했지? 어릴 적 집터에서 발견한 숟가락이 귀하다는 걸 알겠다. 그렇다고 그걸 성년이 된 지금까지도 품에 쥐고 다닌다고? 왜 동창생에게 사기를 쳤지? 돈이 궁했나? 돈이 궁해서…… '정선이를 찾습니다' 행사로 고향 땅에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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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실 다른 소설의 경우도 비슷비슷하다. 「그곳」의 주인공 '나'는 예전에 야영을 하다가 폭우로 인해 불어난 계곡물과 마주하고 죽을 뻔했다. 그것이 소설 첫 장면으로 제시되고, 이후로 내가 고지대의 체육관 센터를 오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계곡 사고로 인해 체육관 센터를 오가게 됐다는 유추가 가능한데, 어디에도 정확한 이유가 나오질 않는다. 내가 놓친 걸까? 유추만 해볼 뿐 주인공이 왜 체육관에 오가는지, 그리고 아주 체육관에 눌어붙기로 작정한 건지 선명하게 짚이질 않는다. 동기를 얼추 알겠는데, 그게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으니 내 딴에는 답답하게 읽혔다. 내가 맞게 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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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래서 인물의 동기가 명확한 「김춘영」을 제일 흥미롭게 읽었다. 화운령 중턱에 위치한 '김춘영'의 집을 방문하는 구술면담자 주인공의 동기와 야심이 뚜렷했고, 탄광촌 여성 노동자라는 흔치 않는 직업군을 조명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포인트다 ― 어찌 보면 작가 최은미 씨의 야심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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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런 생각을 해본다. 소설가들은 영화로 치면 각본가이자 연출가이다. 훌륭한 이야기를 쓰는 게 각본가의 역할이요, 그걸 예술적이게 담아내는 게 연출가의 역할이다. 나는 이번에 『다른 사랑』을 읽으며 최은미 씨의 연출가로서 능력에 일말의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본가로서 능력은 모르겠다. 그냥 나와 잘 안 맞는 것인지, 내가 놓친 부분이 많았던 것인지…… 혹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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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렇지만 나는 각본가로서 소설가보다 연출가로서 소설가를 더 좋아하고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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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 책을 덮고 최은미 씨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게 있나 찾아봤다. 예전에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근린」을 읽어봤구나. 제목만 듣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했지만 첫 문장을 본 순간 기억이 났다. 맞아.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 나 역시 「근린」을 흥미롭게 읽은 사람 중 하나다. 아무래도 최은미 씨의 다른 소설집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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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작가의 말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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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인 '다른 사랑'은 이 소설들 중 한 편을 쓸 때 가제로 삼았던 것이다. 원고 폴더명과 쓰는 동안 듣던 음악의 플레이리스트 폴더명이 내내 '다른 사랑'이었는데 송고 직전 소설의 제목을 바꾸었다. 품고 있었지만 쓰지는 못했던 그 제목을 종종 생각했다. 왜였을까. 내가 써온 세계와 충돌하는 말 같아서였을까.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제목 같아서였을까. 소설집 준비를 위해 일곱 편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그 말 앞에서 주저했던 시간까지 여기에 함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이라는 말도 '사랑'이라는 말도 감당해볼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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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해 본다. 송고 직전에 제목이 바뀐 그 작품이 무엇일지를. 아마 「그곳」이 가장 유력하지 않나 싶다. '그곳'이라는 제목이 전체 내용을 아우르기에 너무 폭넓어서도 그렇지만 이야기 속 여러 사랑의 생김생김이 잘 살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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