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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평점 :

1.
예술사회학 연구자 겸 페미니스트인 이라영 씨가 쓴, 말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다. 내가 작가를 소개하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꺼냈는데 혹시 그 말이 당신을 불편하게 했는가? 그 말만 듣고도 이 책이 대략 어떤 논조를 취할지, 특정 성별을 지지하거나 헐뜯는 식으로 제 주장을 펼치겠거니 예측했는가?
분명 '말에 관한 담론'이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워딩에서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신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분이야말로 이 책의 독자로 환영받을 사람이다. 저자는 『말을 부수는 말』을 통해 평소 우리가 무심결에 쓰는 말에 파고든 오해와 편견 내지 그릇된 표현을 지적하고 분석한다. 비단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아니라 노동자, 장애인, 흑인처럼 오랜 시간 사회적으로 배척된 이들까지 포괄하면서 말이다.
예시 하나. 유모차에서 유아차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움직임에 관해 생각해 보자. 바뀐 표현이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그 말이 입에 익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자세히 뜯어보면 '유아차'가 실제에 부합하는 표현이다. 이런 언어 교정은 보다 정확한 표현을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성 갈등(sexual conflicts) 조장 활동 중 하나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나도 이들의 말이 아주 틀리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모차의 '모(母)'라는 말이 '엄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유모(nanny)'라는 직업에서 따왔기 때문에 성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내 생각은 이렇다. '유모'는 다른 아기에게 제 모유를 먹이고 키운 여성을 뜻하는 말로, 현대에는 사실상 그 의미가 거의 퇴색된 상태다(요새는 젖동냥을 다닐 필요 없이 아이에게 분유를 사 먹이면 된다). 그러므로 돌아가서, 유모라는 말을 굳이 살릴 필요 없이 유아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게 오늘날에 더 정확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유모차를 유아차라고 부른다고 해서 언어적 혼선을 야기하지 않는다. 어, 유아차가 뭐지? 하고 잘 쓰던 단어를 괜히 생뚱맞게 바꿔놨느냐는 비판이 나올 우려가 없을 만큼, '유아차'는 의미 파악에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단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있지 않았다. 이 말이 여성주의자들의 성 갈등 조장 및 언어 검열 활동인지, 그 여부가 더 크게 문제시됐다.
결론이 어째서 그렇게 된 걸까.
유모차에서 유아차라고 용어를 바꿨다. 아이들이 타는 차라서 유모를 유아라고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어째서 육아의 역할을 남성한테 전가하려 드는 여성주의자들의 암호로 와전된 것일까. '모'가 '아'에서 바뀐 과정에 어디에도 남성의 역할을 따지는 맥락은 없었는데. 여기에 내가 알아채지 못한 사회 · 정치적인 외압이 따라붙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여타의 사정들을 제하고 오직 단어 그대로만 보자면 '유아차'에 별다른 선동적인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두고 여성주의니 검열이니 운운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는가? 이게 내 생각이다.
이런 언어 차원의 오해와 편견이 '유아차'뿐일 리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가장 큰 감상은, 얼마나 우리 사회에 비틀리고 어그러진 언어가 만연한지를 봤다는 거다. 어떤 말은 살아남는 반면 어떤 말은 죽고 만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외압에 의해, 특정 표현이 부름을 받고 다른 표현이 묵살당한다면 어떠한가. 대체할 만한 좋은 표현이 있는데도 부정확한 낡은 표현이 고수된다면 어떠한가. 여기서 저자는 정직한 표현을 묵살하려는 움직임이 지배 계층, 오늘날 기득권 자리를 꿰차는 세력들의 소행에 있다고 봤다 - 저자의 정치적 견해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_혐오의 언어가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것에 비하면 저항의 언어는 늘 순탄하지 못하다. 내가 말하는 '저항의 언어'는 정확한 언어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정확하게 보려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것, 권력이 정해준 언어에 의구심을 품는다는 뜻이다. 권력이 저항의 언어를 항상 진압하는 이유다. 그 대신 권력의 기준으로 왜곡된 언어를 적극적으로 유포한다.
p.8-9
또한 그 같은 권력을 차지한 이들은 대체로 보수 정당, 가부장제의 혜택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게 될 남성들이라고 봤다. 이런 시선을 저자가 뒀기 때문에 나 같은 남성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수용할 여지와 반박할 여지를 나란히 둘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모든 말을 우리가 경전처럼, 정답처럼 따를 필요는 없다. 저자도 말했듯이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라, 화두를 던지기 위해 쓴다. 권력의 말을 부수는 저항의 말이 더 많이 울리길 원한다"니까, 나도 그녀의 말을 무작정 수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시선에 여러모로 동감했으며, 더불어 내 평소 언어 습관에 관해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에도 사회적 압력이 깔려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예시 둘.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 같은 말이 있다. 우리는 흔히 경험 없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이라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구박과 타박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을 늘여뜨리는 기성세대를 낮잡아 '꼰대'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향해 괜한 조언일랑 접어두고 그냥 '지갑'을 열라고 요청한다. 이 말이 우스갯소리인가? 이런 말은 상대적으로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노년층에게 제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오직 돈뿐임을 시사하는 사회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늙어서 지갑을 열 수 있는, 부를 축적한 사람만이 인정받는 현대 사회상을 반영하는 좋은(하지만 나쁜) 문장일지도 모르고.
_존중받는 늙음의 보조 도구는 오직 돈이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라'고 한다. 지갑으로 대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우아함'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지갑을 여는 사람이 입도 잘 열고, 그들의 말이 세상에 더 잘 들린다. 다시 말해 지갑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입도 열지 못한다.
p.80
치맛바람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요새 의미가 많이 퇴색되기야 했으나 이 말의 본뜻은 "여성의 드세거나 극성스러운 사회 활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사회용어"다. 쉽게 풀어 자식들의 성공과 출세 가도를 위해 손발 걷어붙인 어머니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데, 이게 비단 어머니들의 문제일 리 없다. 고도로 발달한 성공 지상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가 일으킨 사회 풍토랄 게 결국 어머니들을 악착같이 몬 것은 아닐까?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또 어떤가? 저출산 문제는 저출산 문제고 고령화 문제는 고령화 문제다. 둘은 쌍방으로 영향은 있을지언정 엄연히 다른 문제이고 해결 방안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세간에는 고령화 문제가 저출산에 달린 것처럼, 그래서 여성들이 출산만 하면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레 해소될 것처럼 바라보지 않는가?
이러한 사소한 언어부터 정책 결정까지, 언어는 우리 생활에 상당 부분 밀접해 있다. 언어로 사고하는 우리 입장에서 언어 주위에 어른거리는 허깨비를 벗겨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이 대신 "몇 학번이세요?"라고 물으며 은연중에 학력주의를 뽐내는 습관을,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일부러 그럴싸하게 과장되고 비논리적인 비유법을 즐겨 쓰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_수사 과잉은 점점 극단적인 언어를 낳는다.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황교안은 공수처 설립을 반대하며 기자회견을 통해 "공수처는 독일 나치의 정치 경찰인 게슈타포가 될 것"이라 했다. '좌파독재'라는 언어를 사용하던 그는 '나치'와 '게슈타포'의 의미도 바꿔나갔다. 쉽지만 잘못된 말, 의미가 텅 빈 화려한 수사야말로 경계의 대상이다. 게다가 망언이 항상 상스럽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꽤 그럴 듯하게 들린다.
p.129
그렇다면 이 같은 언어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정확한 언어 표현을 지향하면 될 일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도 곧 '정확한' 말이다 5).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과장된 비유를 걷어낸, 어쩌면 '정직한'이라는 형용사가 딱 어울릴 법한 말. 이 말은 평소 독서와 글짓기(이 같은 독후감을 포함해서)를 취미로 삼은 내게 큰 귀감이 됐다. 내가 무심결에 뱉은 말속에 알게 모르게 상대방을 두고 벽을 치는 단어가 섞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언어는 지나치게 명료해 보여서, 단순치 않은 일까지 단순하게 전시하는 게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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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편으로 저자 또한 언어의 틀에서 사고하고 있다. 따라서 온전하지 못하고 오해를 부르는 표현을 쓰는 데 자유롭지 못하다. 나 또한 내 말이 일으킬 오해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얘기해 본다.
페미니즘 도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남성 중심적 사고가 그토록 세상을 반쪽짜리로 만들었으니 여성주의적 사고가 등장해야 한다는 말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은 무엇일까? 오늘날 남성들은 어떻게 페미니즘에 동참할 수 있을까? 내가 접해본 페미니즘 도서들은 안타깝게도 이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었다. 마치 남성 독자는 미처 상정하지 못한 것처럼.
애초에 '페미니즘'이라는 말부터가 (저자가 본문에서 '가족'을 설명할 때 말했듯) 배제의 언어 성향을 띤다. 여성을 뜻하는 어간 'femi-'를 쓴 이상 페미니즘은 여성을 중점에 둔, 달리 말해 남성을 후순위에 둔 이론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성주의는 평등주의가 아니다. 남성주의가 이성과 정의의 동의어가 아니듯, 여성주의도 감성과 공정의 동의어가 아니다. 개중에는 페미니즘을 진정한 선(善)으로 생각해서 과도한 찬양을 보이거나("왜 페미니즘을 안 하세요?" "페미니즘을 모르면 공부하세요") 반대로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페미 묻으셨어요?" "페미니스트시면서 왜 힘든 일을 남자에게 떠넘기세요?"), 이 또한 언어의 허깨비가 일으킨 착시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공정한가? 정의로운가? 평화주의인가? 글쎄, 내 생각에 페미니즘은 그냥 페미니즘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성 혐오 용어들은 저자의 착실한 조사와 인용문들로 분석된다. 이들을 본문에서 설명할 때 쓰인 주석들로도 모자랐는지, 뒤에 딸린 미주는 무려 105개나 된다. 그런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 대목은 남성 혐오를 설명하는 저자의 말에 있었다.
_그렇다면 '남성혐오 용어'는 무엇인가. 오조오억, 허버허버, 웅앵웅 등이라고 한다. 이 언어들의 기원을 굳이 따져보면 처음에는 인터넷상의 신조어였으나 여성들이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할 때 사용한다면서 '남성혐오'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여성들의 언어를 모두 남성혐오로 규정하여 입을 틀어막으려는 전략이다. 여성들이 현상을 묘사하거나 반영하여 생각, 느낌, 개념을 전달하는 언어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것, 다시 말해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언어를 만들고 유통하는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문화적 입마개를 씌우는 행동이다.
p.199
이 말을 비롯해서 다른 말도 가져와 보자.
_우리 현실에서 보면 대체로 억울함을 대하는 방식은 이와는 반대로 움직인다. 사사로운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정작 다른 사람도 억울해질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오히려 방관한다. 예를 들어 백인이어서 잠재적 인종차별주의자로 여겨지거나, 남성이라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여겨진다면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닌데, 왜 나를 의심하느냐며 몹시 분노하고 억울해한다. 이런 억울함은 굳이 밝히려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감정은 자신의 위치가 만들어낸 권력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p.111
저자가 남성을 어떤 위치로 이해하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오랫동안 기득권을 사수한 남성들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욕과 멸시를 당하기에 남성들은 사회적으로 높고 견고한 위치를 선점했으며, 여성이 그들에게 행한 공격은 바위 같은 권력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라 "억울"할 일도 아니라고. 위의 남성 혐오 표현이나 모 편의점 포스터의 집게손가락 모양은 여성의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언어를 만들고 유포하는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그 말들은 "여성들이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할 때 사용한다면서 '남성혐오'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여성에게 입마개를 씌"운다고.
그런데 이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기득권자라고 해서 비기득권자들에게 모욕당할 수 없는가? 앞서 백인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를 치환해 보자. 흑인이 백인에게 행한 모욕은 모욕으로 성립되지 않는가? 백인은 흑인이 행한 혐오를 억울해하지 말고 잠자코 듣고 있어야 하는가?
보통 우리는 법적 보호를 받는 미성년자의 범법 행위도 -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을지 몰라도 - 범죄라고 생각한다. 누가 행하든, 혐오는 혐오다. 저 말이 진짜 혐오 표현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저 말들이 사실상 인터넷에서 혐오를 목적으로 쓰인 바 있지 않는가? 왜 저자는 그토록 많은 주석과 미주를 활용했음에도 남성 혐오 표현에 관해서는 별말이 없었을까. 어휘의 기원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파악하는 저자가 이에 한해서는 "기원을 굳이 따져보면" 운운하며 소홀히 대했을까, 굳이. 이런 나도 페미니스트들의 입에 입마개를 씌우는 사람인가?
마찬가지로 저자의 비유나 고찰도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로 여성상을 포착한 그림에 관한 서술이 그러하다. 내가 저자보다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저자는 예술사회학 연구자다) 미술사에 문외한이라 그럴지 몰라도, 일단 쓰인 글만 딱 봤을 때, 독자로서 왜 이런 결론이 도출되는지 의문스러워서 인용해 봤다.
_민족의 단결을 위해 일제시대 후반부터 모성을 강조하는 그림이 증가하여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사회가 힘들면 힘들수록 책임감 있고 희생적인 강한 어머니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쟁을 거치며 실제로 아버지가 부재하기도 했지만, 살아 있다고 해도 '가장'의 역할을 하기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때 모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주로 어린 아들을 안고 있거나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성에 대한 강조는 여성을 전통적인 성역할에 가두려는 의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하지 못한 채 '영원한 아들'의 정체성에 갇힌 가부장제 남아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숭배하는 듯 보이는 이 아들들은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상실한 남성권력을 복구하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여성을 멸시한다.
p.221
어머니의 위대함을 표현한 그림이 남성 권력을 복구하는 수단이었다는 시선은 그럴싸하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해석이다. 미술사조를 잘 모르는 나 같은 감상자가 어머니 그림을 보고 과연 그 같은 해석을 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애초에 위대한 어머니 상을 그린 게 여성 혐오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진담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해석이면 남자들은 여자를 그려서도 안 되고 소재 삼아서도 안 된다 - 이건 나의 언어가 일으킨 비약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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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무튼 언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수록 표현은 더 힘들어질 테지만, 분명 결과는 값질 테다. 저자가 이 책에서 시도한 '도전'만큼, 내 독후감도 상당히 '도전'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덧붙여 내가 후술한 아쉬운 면은 이 책의 사소한 일부에 불과하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분명 훌륭한 내용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말에 관한 논평이며, 보다 올바른 말을 향한 저자의 집념이자 "화두를 던지기 위한" 도화선과 같다. 두세 번 더 읽어볼 생각이다.
p.s: 굳이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싶긴 하나, 내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을 테고, 나 또한 이런 저런 책을 더 읽어가며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