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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거짓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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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이의 이름이 여러 사람에게 친숙히 들릴 것 같진 않다. 대신 그가 쓴 대표작 『책 읽어주는 남자』를 영화화한,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더 리더> 얘기를 꺼내면 '아하' 소리가 절로 나올지도. 영화에 문외한인 나도 <더 리더>는 본 적 있고, 이후 원작 소설까지 찾아 읽으며 저자의 탁월한 문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의 책에 내가 제대로 관심 갖기 시작한 계기는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2014년 제4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부터다.

  정작 잘 알려지지 못해 아쉬운 감도 드는데, 이 박경리문학상은 한국판 노벨문학상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빼어난 작가들을 소개한다. 국내 최초의 세계문학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희소하고 매력적인 해외 작가들을 폭넓게 조망하기 때문에 더 가치있다(이를 역대 수상작가 목록이 증명한다). 나도 훌륭한 외국 작가를 만날 목적으로 해당 목록을 참고하는 편이다. 베른하트트 슐링크는 네 번째로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로, 소설을 쓰기 전에 법대 교수를 재직한 특이한 약력의 소유자다.

  법대 교수 출신 소설가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답게, 그는 초창기 범죄 추리 소설을 몇 편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 이후 슐링크는 다양한 소재를 아우르며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로 발돋움했다. 이번에 내가 소개할 단편집 『여름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제목의 어감이 다소 낯설다.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명사를 나란히 배치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물음은 소설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될 텐데, 여기 실린 일곱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저자가 뜨거우면서도(여름) 서늘한(거짓말) 우리네 삶의 폐부를 들춰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람이 한 번쯤 겪기 마련인 사랑의 유혹, 질투심, 호기심...... 그 모든 걸 충족시키려 저지른 거짓말들.


  이렇게 보니 『여름 거짓말』은 심리 소설로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을 하는 행위 자체가 어떤 저의를 감추고 남을 속이는 거니까. 왜 그런 거짓을 고하게 됐는지를 (속인 사람이) 밝히거나 (속은 사람이) 밝혀내는 것도 이 소설집을 읽는 묘미겠다. 이중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단편 「바덴바덴에서 보낸 밤」은 바람 피우는 남자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대변한다 - 옹호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희곡작가로서 자신이 쓴 각본의 초연을 보러 바덴바덴으로 향했다. 테레제와 함께. 그녀는 훌륭한 동행자였고, 그를 즐겁게 해줬다. 하지만 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다음 약혼녀 안네를 마주하자 남자는 양심에 찔렸다. 그녀는 자세한 사정이야 몰랐으나 그가 여행 중에 혼자 있지 않았음을 의심하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외도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안네. 그녀에게 지난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고해야 할까?

  그는 말하지 않기를 택한다. 그녀를 배신하려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고, 다만 그러는 편이 그녀를 충분히 안심시킬 수 있고 둘 사이 관계에 있어도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 잠시 그는 안네에게 브렌너스 파크 호텔에서 보냈던 밤의 진실을 말해줄까 생각해보았다. 그래봤자 괜한 야단법석만 빚어낼 것이다! 그깟 진실이 한 시간 내내, 아니, 두 시간 동안이나 안네에게 둘러댔던 말들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뒤늦게 테레제와 보냈던 밤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괜히 그 일을 원래보다 더 부풀리는 것 아닌가? 앞으로 언젠가, 그래, 앞으로 언젠가 안네에게 진실을 말하리라. 미래를 위해 그는 약속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아무 문제도 없어, 안네. 약속할게. 울 필요 없어. 진실을 말해 주겠다고 약속할게."

p.79


  이런 거짓말은 당장의 평화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시다시피 허술한 거짓말은, 그리고 끈임없이 의심하는 사람 앞에서 한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나게 마련이다. 실제로 그날의 진실을 안네가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둘은 대판 싸웠다. 사실 일방적으로 남자가 욕을 먹긴 했지만. 남자가 잘 했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안네가 그의 잘못을 심하게 부풀리고 있다는 것도 얼마간 사실이다. 그는 테레제와 함께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안네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남녀가 호텔에서 며칠 밤을 함께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이성을 잃은 안네는 그의 면전에 침을 뱉고 손찌검을 했다. 그가 손 쓸 새 없이 안네는 등을 돌리고 떠나버렸다.

  이 순간에 그는 안네의 이해를 바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도 과거 여자친구의 외도에 좌절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느끼는 이 착잡함은, 안네를 어떤 말로도 설득시킬 수 없을 거라는 실상에 있었다. 아무리 그가 테레제와 아무 일도 없었음을 설명해도 그녀는 듣지도, 들을 생각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남자의 말을 믿지 않기로 작정했으며 안네가 듣게 될, 들어야 할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사건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는 게 의미 없었다.



  - 그 역시 안네가 주도하는 비판과 자아비판의 의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저 즐겨야 하나? 마음속으로 웃으면서 그녀가 시인을 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다 시인해야 하나?

  그러나 시인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면 전부 규명될 때까지 그녀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이렇게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명을 요구할 것이고, 또 그에 따른 비판이 이어질 것이다.

p.96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의미 없는 진실을 붙잡으며 그녀와 맞서야 하나, 또 다른 비난을 부를 줄 알면서도 더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을 시인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그가 테레제와 잤다고 거짓말하는 편이 (적어도 그녀와 둘의 관계에 있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다면,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해야 맞을 테다. 그런데 왜 그는 주저하나?

  앞선 상황,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고할지 말지의 문제는 새 얼굴로 찾아 든다. 이제 상황은 그가 바덴바덴에서 테레제와 잤는지 안 잤는지의 문제로 넘어 왔다. 두 문제는 같은 듯 다르다. 아무래도 후자의 상황에서 문제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분명해졌기도 하나...... 내 생각에 그가 주저하는 진짜 이유는, 전자가 도덕적 결함을 회피하는 거짓이라면 후자는 인정하는 거짓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이런 얘기다. 위 상황처럼 자기 잘못이지만 거짓으로 감출 수 있는 일에 우리는 주저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는 평화라는 꼬리표가 붙고 너와 나(즉 개인이 아닌 다수)를 위한 선의의 거짓으로 위장된다. 한편 자기 잘못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인정하는 일에 우리는 열불을 낸다. 아무리 공리를 위한 일이래도 내가 처한 억울함은 지워낼 수 없다. 이 둘의 차이는 당사자성에 있어 보인다. 그 거짓을 통해 다수가 이익을 보는 한이 있어도 내게 득이 못되거나 해가 되면 쓸모없다. 내 이익을 먼저 챙긴 다음, 이를 합리화할 명분으로 다수의 이익을 돌아보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거짓이 정말 안네에게 이익이 될지 소설 속 남자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진실보다 합리적인 거짓의 쓸모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지 않을까? 내 이익보다 앞서는 공리는 말 뿐인 허상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당사자성을 지적하는 또 다른 단편이 『마지막 여름』이다. 여기서 주인공 할아버지는 앓고 있는 지병을 숨긴 채 가족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아내도, 자식도, 손주도 모르게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방법이야 간단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방안에서 약을 투약한 다음 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거실로 돌아간다. 그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위안 삼아 눈을 감을 것이다. 그가 피곤해 잠든 줄 아는 가족들은 다음날이 돼서야 사실을 알아차리겠지. 하지만 계획을 실천하기도 전에 아내에게 약을 들킨 그는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아내는 그에게 크나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며, 그의 거짓이 만든 세상에서 자신은 "단역배우(본문, p.262)"일 뿐이냐고 지적했다.

  그밖의 다른 단편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야기마다 제각기 다른 거짓말을 품고 있고, 그 거짓을 바라보는 입장 차이도 생각해볼 문제를 던진다. 여담이지만 소설 속에 물음표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슐링크 소설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번역가 분은 "작중인물들은 자신이 설정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 자신이 행복이라고 느꼈던 것이 나중에 가서 보면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중략) 자신이 생각했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주인공은 인생의 다른 가정을 해본다. 슐링크의 작품에 수많은 의문문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이런 의문문들은 독자에게 생각의 갈림길에서 나름의 결정을 해야 하는 여운을 남긴다.(365)"라고 말한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소설 속 주인공들도 스스로를 향해 물음표를 남발하듯, 우리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를 명쾌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정답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 물음표 속을 헤짚다보면 말이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지금 끄집어냈다. 다시 읽게 되는 날에 또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지 않을까? '여름'과 '거짓말'이라는 두 키워드의 간극 속에서, 이토록 매혹적이고도 거짓된 이야기들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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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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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예고한 대로 박솔뫼의 초기 장편을 찾아볼까 했다. 그런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 읽지 못한 박솔뫼의 책이 한 권 더 있더라. 마침 그 책은 내가 직전에 읽은 단편이 발표된 직후 나온 장편이기도 해서 어떤 연결 고리랄 게 생겼달까. 여기까지가 내가 『도시의 시간』을 펼치게 된 사연이다. 이런 연결된 느낌은 독서를 즐기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데, 지금 내가 이런 얘기를 떠드는 이유도 박솔뫼의 소설을 즐기는 방식에 있어 이 '연결감'이 중요해 보여서다. 그러니까 박솔뫼 식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물과 공간, 공간과 사건, 사건과 인물을 연결 짓는 "아름다운 삼각형"을 그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는 뜻이다. 내 말이 소설의 각 요소들을 떼어다가 유형화하고 공식화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낼 의도는 아니다. 여기서 삼각형 구도는 수학적 도식이라기보다 작품 해설을 쓴 서평가 금정연 씨의 말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찍히는 점들을 이은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내가 추정상의 의미로 '(알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밝힌 것이다.

  요사스럽게 뒤로 빼는 문장들이 두루 보이는 바, 이번 글에서 내가 뭔가 제대로 된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미리 말하건대 참 감상평을 남기기 뭣한 소설을 읽었다. 박솔뫼의 소설을 몇 차례 접한 경험이 있어서 망정이지 생판 모르고 이 책부터 펼쳐 들었다면 당최 작가가 무얼 말하려는 걸까 난감했을 거다 - 아, 또 뒤로 빼는 소리지만, 이제는 박솔뫼의 소설을 잘 알겠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단편집에서 내가 '가히 충격적'이라고 밝힌 「안 해」를 잠시 상기해 볼까? 이 단편은 도심의 노래방에 들린 여학생이 노래방 사장에게 무력으로 제압 및 감금당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전개가 펼쳐진다. 여기서 노래방 사장은 여학생에게 다른 건 하나도 안 시키고 노래, 오로지 노래를 부르도록 시킨다.

  왜? 노래방 사장의 말에 따르면, 여학생이 노래를 열심히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열심히. 이어지는 내용에서 소설은 '열심히'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누구도, 심지어 노래방 사장도 규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장편 소설에서도 비슷한 논제가 펼쳐지고 있다. 소설의 도입부터 나는 이런 문장을 만났다.​​


  - 넌 참 못한다, 못해. 그게 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때 우나는 마늘을 까고 있었고 나와 배정은 맞은편에 앉아서 시트콤을 보고 있었다. 우나는 화장실에 가려다 미끄러져 마늘 껍질을 담아 놓은 통을 엎질렀다. 정신 없이 마늘 껍질을 주워 담으려다가 이미 깐 마늘들을 엎었다. 우나는 양손에 마늘 껍질을 쥔 채로 멍하게 까진 마늘들이 상 위를 구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우나의 엄마가 그랬다. 넌 참 못한다, 못해. 우나의 엄나는 싱크대에서 불고기 간을 보고 있다가 뒤돌아서서 그 말을 내뱉었다.​​

p.7-8


  열심히, 에 이어 못한다구나그래. 이 둘의 관계는 어느 정도 상호적인 면이 있다.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고 열심히 안 하면 못하게 된다는 식으로. 물론 이 말은 우나의 엄마 생각이고 실제로 우나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두고 봐야 한다. 요컨대 우나의 집에 놀러 온, 우나의 친구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정말로 우나는 잘하는 게 없었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참 못한다 못해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나는 우나가 좋았다. 우나를 사랑했다. 지금도 우나를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나를 생각하다 보면 우나가 뭘 잘했는지 기억이 난다. 우나는 기다리는 것을 잘했다. 가만히 있는 것을 잘했다. 정말 잘했다. 그때 나는 혼자 오래 걷는 것을 잘했는데 혼자 오래 걷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잘하는 우나와 어울리는 특기였다. 모두 미련하고 목가적이고 종교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쓸모가 없네, 그런 생각이 든다.​​

p.8


  우나도 잘하는 게 있지만 태반은 못한다. 그나마 잘하는 것조차 미련하고 목가적이고, 뭐랄까 쓸모가 없다. 이런 현대인(특히 10대 청소년)의 우울한 자화상은 이미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단편 「안 해」의 주인공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없이 '열심히'를 부정하며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단정적이게 말하는 데 반해 여기 세 친구 - 나, 우나, 배정은 좀 다르다. 이들은 그보다 할 일을 하되 잘 하는 일에 더 집중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전 소설보다 한층 밝고 긍정적인 인간형이라 봐도 좋지 않을 성싶다.


  - 우나는 설거지도 서툴렀고 방 청소라고 나을 게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잘하니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걸 했다. 나는 한없이 산만했고 학원 수업에는 집중을 하지 못했지만 걷는 것을 잘하니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해야 하니까 못하는 걸 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것을 했다.​​

p.9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게 됐다고 말이다. 이 삼각형은 양 끝으로 '나'-'잘하는 것'-'못하는 것(그러나 해야 하는)'을 배치시키며 완성된다. 다시 지난 소설집 얘기로 돌아가서, 단편 「차가운 혀」 속 주인공의 생활은 두 가지 축을 두며 이뤄짐을 확인했다. "나와 사과와 오렌지는 삼각형을 이룬다. 사람들에게는 기둥이 필요한데 내게는 그것이 사과와 오렌지인 것이다. (중략) 이것이 없다면 저것을 가져와야 했다. 하나의 세계가 흔들리면 그 흔들리는 세계와 상관없이 자신을 지켜줄 또 다른 세계가 있어야 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 같은 삼각형 대열은 박솔뫼 식 세계의 존재 방식에서 중요해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또 다른 삼각형을 알고 있지 않는가? 묘하게도 소설 속 등장인물도 알맞게 세 명이다.​​


/


  또 알아둘 필요가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미국의 포크 가수 제니 준 스미스. 그녀는 "1976년 '돌핀(dolphin)'이라는 제목의 음반을 발표, 몇 차례의 공연을 가졌다. 이후 아무런 음악을 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그의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소설의 처음부터 언급되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 가수는 우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그녀의 아버지가 우나에게 남긴 거의 유일한 추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송주영, 그러니까 우나의 아버지는 레코드 마니아로 각종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어릴 적 우나가 아빠와 함께 들었던 음반 중 하나가 예의 그 '돌핀'이었는데, 그 뒤로 송주영은 길거리에서 객사했고 제니 준 스미스는 음악사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우나가 계속해서, 여전히 그녀의 음악을 듣고 그 뒤를 캐내는 일은 기억 속 아버지를 새로 복원시키는 과정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또 다른 삼각형이 추가된다. 우나-송주영-제니 준 스미스.

  이 삼각형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게, 물론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 이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나 두 축인 '송주영-제니 준 스미스'가 상상 속 인물에 가까워서도 그렇다(이 말의 의미는 나중 가서 차차 살펴보도록 하자).

  물론 송주영과 제니 준 스미스가 허깨비 같은 존재라는 게 아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당장은 부재할지언정 한때 존재했거나 지금 잊힌 채로 존재하고 그 존재감이 우나(그리고 나)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다. "우나는 기다리는 것을 잘했다. (중략) 그때 나는 혼자 오래 걷는 것을 잘했는데 혼자 오래 걷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잘하는 우나와 어울리는 특기였다." 그렇게 우나와 내가 도시를 걸으면서 기다리는 동안, 둘이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눈 주제는 제니 준 스미스였다. 언젠가 준을 만나러 미국에 가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해야 하니까 못하는 걸 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것을 했다."​​



/


  지나치게 우나와 나의 관계만 부각한 것 같다. 그렇지만 배정도 분명 삼각형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는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로서, 대학 시험을 세 번 떨어지고 입시 학원에 다니고 있다(나와 우나와 배정은 같은 입시 학원을 다니며 서로 친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배정이 시무룩하거나 조급해 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열중하는 것도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배정은 밝다. 배정은 내게 매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사주기도 하고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말주변이 좋은 배정은 우나의 엄마하고도 곧잘 대화를 나눈다.


  - "야, 너는 이름이 뭐니?"

  "배정인데요."

  "배정이?"

  "아니요. 배정이요."

  "배정희?"

  "아니요. 성이 배고요 이름이 정인데요. 정이요. 정."

  "오, 정이야? 이름이 외자야?"

  "네."

  "그럼, 배 군이니 정 군이니?"

  "배 군으로 부르고 싶을 때는 배 군으로 불러 주시고요."

  "정 군으로 부르고 싶을 때는 정 군으로 불러도 되니?"​​

p.9-10



  그런 배정에게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다. 싫어하는 것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온 환타("악, 환타! 나 환타 제일 싫은데! 배정은 자판기를 주먹 꽉 쥐고 쳤다. 발로 차면서 막 쳤다."), 말이 없는 우미, 갑자기 사라진 우미.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 그는 우나의 여동생 우미를 좋아했다. 나는 배정을 좋아하지만 그가 누굴 좋아해도 상관없는 양 굴었다. 이렇게 삼각형 구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우나는 실제하지만 상상 속 존재에 가까운 준을 쫓고, 배정은 실제하면서 당장 곁에 있는 우미를 쫓았다.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있고. 여기서부터 우리의 "아름다운 삼각형"이 조금씩 엇나간 게 아닐까.

  서로 쫓는 바가 다르니 우미와 배정은 점차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각형의 또 다른 한 축인 나도 점점 우나 쪽으로 쏠리게 된다. 나 또한 우미를 따라다니며 제니 준 스미스의 행방을 찾아다녔으니까 - 내가 앞서 상상 속 인물에 강조를 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우미의 삼각형 안에는 준 말고도 아버지 송주영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우미가 설정한 삼각형에서 배제된 제3자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제3자인 배정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배정은 간간이 등장할 뿐 우미와 나 사이에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


  기울어진 삼각형 구도는 종국에 해체되고 말 테다. 그런데 세 개의 축 중에서 먼저 이탈하는 존재는 우나였던 게 (독자인) 나로서는 의외였다. 외따로 떨어져 있던 배정이 아니라 나와 도시를 함께 걷던 친구 우나가 말이다. 우나는 말했다시피 송주영과 제니 준 스미스를 상상했는데, 이를 반복하자 우연찮게 우나의 엄마도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결정해 버렸다. 이걸 우연이라 해야 할지 운명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우나의 미국행 소식을 축하했지만 우나는 떨떠름해했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워했다. 상상 속 존재인 준이 현실로 튀어나오려 하자 우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 "그렇게 되는 거면, 이제 너는 만나게 되는 거잖아. 무서워도 그렇게 되면 결국엔 좋을 거야. 아냐?"

  "아닌 거 같아."

  "왜?"

  "만나길 바란 적은 없거든."​​

p.132


  - 그런 가정을 수십 번 했어. 그러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뉴욕에 가게 된 거 아닐까. 정말 가게 된다면 내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가게 된 거니까, 내가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렇게 되어 버린 거니까 나는 그게 무섭다. 내가 계속 뭔가를 해 버릴까 봐. 그래서 아주 기쁘지는 않다. 오히려 슬픈 거 같아.​​

p.131-132



  이 뒤로 소설은 더 미묘해진다. 어떻게? 그것까지 내가 이 글에서 밝히지는 않겠다. 살짝 귀띔하자면 나 또한 우나 못지않게 어떤 상상을 했고, 그 상상이 다시 한번 현실로 펼쳐지며 삼각형도 소설도 끝을 맞는다고만 말하겠다. 그런데 이대로 끝내도 괜찮은가? 지금까지 내가 강조해서 소개한 내용들은, 인용문들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벌어진 일만 조명한 거다. 나는 『도시의 시간』에서 박솔뫼 씨가 쓴 일부분만 포착했을 뿐 그 밖의 이야기, 가령 소설 속 배경이 되는 대구라는 도시에 관해, 배정과 우미의 관계에 관해, 아이러니에 관해 말하지 못했다. 내가 해독할 수 있는 것을 해독했고 그것으로 충분할 리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명쾌하지 못한 감상평을 어쩌면 좋나 싶지만 여기서 나는 말을 줄일까 한다. 대신......

  잘 알고 있는 것 말고는 잘 모르는 만큼, 앞으로 - 당장은 아니더라도 - 박솔뫼 씨의 글을 다시 읽고 곰곰이 생각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나와 박솔뫼와 소설. 이렇게 셋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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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이야기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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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소개하기에 앞서 지극히 내 취향에 관한 이야기로 운을 떼볼까 한다. 내가 매료되는 소설들에는 비슷비슷한 특징이랄 게 있다. 그중 하나가 어떤 장소를 제시한 다음, 그곳을 응시하거나 머무는 감각을 전달할 줄 아는 거다. 이유야 나도 깊이 생각해본 적 없고 막연히 좋은 채로 놔둬도 괜찮다는 생각. 이런 말도 있지 않는가. 좋아하는 것은 그냥 좋은 것이지 그걸 설명하려 들면 피곤해진다고. 최근에 임경선 작가가 신작을 냈다. 어김없이 사랑 이야기를 담은, 짧은 토막글 구성의 연작 소설 같더라. 서점에서 일부분만 훑어봤기에 자세하게 말할 순 없지만, 나름 그녀의 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래서 싫다는 소리는 아니다. 때때로 쏟아지는 새로움보다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익숙함이 주는 확신이 더 큰 행복을 준다. 익숙한 행복감을 주는 이의 작품 또한 내가 매료되는 특징 중 하나다.

  취향 얘기를 하다가 신간 얘기로 빠지면서 글이 좀 셌다. 어쨌든 임경선 작가가 신작을 냈지만 오늘 내가 소개할 책은 그게 아니라 출간된지 일년 조금 지난 단편집 『호텔 이야기』다. 영어로 쓰인 부제는 HOTEL GRAF - AND FIVE SHORT STORIES. 말하자면 호텔 그라프에 관한 다섯 가지 짧은 이야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신작도 좋지만 일단 집에 들인 책들부터 하나씩 읽는 게 상책일 거 같아서 이 책부터 펼쳐들게 됐다. 그나저나 시작부터 궁금했다. 내 관심은 일단 호텔이라는 공간에 꽂혀 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런 서문이 등장한다.


  - 서울 남산 둘레길에 위치한 그라프 호텔은 1989년 고미술상 이유한 씨에 의해 세워진 호텔이다. 5성급 클래식 호텔로서 한때 눈부신 영광을 누리던 이 호텔은 2022년 12월 31일부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라프 호텔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다.


  아직 호텔에 체크-인하기 전, 그러니까 소설이 펼쳐지기 전에 쓰인 이 구절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창을 확인해 봤는데 얼핏 보아 누구 하나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내가 스포일러를 파하려고 대충 읽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라프 호텔이라는 이름은, 소설에서도 말하다시피 "지은 지 30년쯤 넘은 호텔들은 대개 이름에 '로얄', '그랜드', '센트럴', '임페리얼' 같은 영어 단어가 들어갔으니 독일어인 그라프(GRAF) 호텔의 이름은 당시로선 상당히 독특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여전히 국내에서 썩 흔한 이름 같지는 않다 - 독일어로 'Graf'의 뜻은 (남성형 명사) 백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검색을 해도 어느 예식장 정보가 뜨거나 이 소설의 독후감 정도가 뜨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생각만큼 길게 늘여잡지 않아도 됐다. 소설을 읽다 보니 역시 정면에 내세운 서문도 허구의 일부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편 「호텔에서 한 달 살기」는 동료 감독이 쓴 각본을 각색하고자 이곳 그라프 호텔에 머물게 된 영화 감독 두리의 이야기다. 여기서 감독이 홀로 작업을 하는 도중에 지금은 유명해진, 그러나 무명 시절에 두리의 영화로 제 얼굴을 세상에 알린 수호가 뜬금없이 연락해 왔다. 호텔 방을 찾아온 수호는 두리와 같이 작업했던 시간을 즐겁게 회상하며 귀여운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린다. 음, 그쪽 업계를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순 있다더라도 이런 식은 아닐 거 같았다.

  그래서 이상의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허구로 받아들였다. 「프랑스 소설처럼」은 다소 관계가 식어가는 듯한 두 남녀가 오전마다 그라프 호텔에 머물며 사랑 혹은 이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이야기다. 「하우스키핑」은 호텔 메이드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정현이 다가올 그라프 호텔의 폐점을 안타까워하며 지난 날을 회고하는 이야기, 「야간 근무」는 어떤 작가가 우연히 그라프 호텔에서 도어맨 일을 하는 지인을 마주친 다음 그의 짧고도 긴 사랑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이야기다. 마지막에 실린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유명인을 상대하는 개그맨 일행 중 한 명이 그라프 호텔에서 만난 수상한 신사와 친해지는 이야기다.

  내가 기대한 호텔에서 보낸 한 철, 공간이 주는 유유자적한 삶, 곧 시간의 더께에 묻힐 낡은 호텔을 향한 연민의 정서는 특별히 도드라지지 않았다. 대신 같은 공간을 매개하여 각기 다른 직업군의, 나이의, 성별의 사람들을 조명하는 이야기들에 더 가깝달까. 한 공간에 모인 만큼 여러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 살짝씩 포개졌으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건 그거대로 아쉬운 채 남겨 두고. 또 저자가 직접 하루키스트임을 자처했듯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러 장면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느낌도 살짜쿵 든다. 요컨대 이른 시간에 요리하는 파스타라든지, 남녀 사이 정사 씬이라든지, 외래어 표현이 빈번히 사용된다든지 같은 것들.

  아무튼 이 모든 이야기가 소설임은 틀림없다. 아무리 "이것은 그라프 호텔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다"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해도. 게다가 작가의 말에서도 진실은 밝혀지는 걸.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진위여부를 따지는 것을 하등 중요치 않지만, 내가 이 문제를 길게 늘여잡고 있는 이유는 저자 분이 소설가이기 이전에 에시이스트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에세이라는 게 뭘까? 순간의 감상들을 포착해서 글로 옮기는 것. 사실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글로 풀어 쓴 것. 그런데 이런 식이면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세이에도 서사가 있고 고찰이 있고 기교가 있다. 작문의 경계가 바스라지는 오늘날에 에세이스트라는 정체성으로 소설 쓰는 작가의 색다른 개성을 느끼고 싶다면 이런 책도 나쁘지 않다. 아, 나는 그래도 임경선 작가를 소설로 처음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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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서점이 모두 사라진다면
화수분제작소 지음 / 화수분제작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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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수분제작소에서 펴낸 인천 소재의 동네서점 탐방기. 여기서 화수분제작소는 흔히 우리가 알 만한 출판사는 아니고, 마음 맞는 청년들끼리 뭉쳐 문화컨텐츠를 창작하는 크루 개념에 가깝다. 그래서 인천을 테마로 한 보드게임을 만들거나 문화 공간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더라. 이들의 작업실은 본래 서구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에 위치해 있다는데, 해당 정보는 2년 정도가 지난지라 현재도 이들이 컨텐츠 창작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네이버 지도에 검색해도 화수분제작소 정보가 뜨질 않고 이들에 관한 최신 기사도 제작년 11월 이후로 끊겼다. 이 글에 소개된 서점들은 어떠할까? 갈수록 독서율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시대에, 과연 독립서점 사장님들은 안녕하실까?


  이런 걱정을 하는 이유는 서점업의 어려움 때문이다. 해마다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나마 독서를 즐기는 소수 인원들조차 대체로 전자책을 선호한단다. 여기서 종이책을 사는 독자가 일부 있더라도 이들 또한 대형 서점을 이용하지 독립서점을 굳이 찾지 않는다. 독립서점에 비해 대형 서점은 훨씬 많은 재고, 편리한 유통망, 보다 싸고 빠르고 간편한 배송 서비스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도서정가제라는 법이 제정됐지만, 이미 독서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데 무슨 수로 독립서점이 살아남는담?


  그럼에도 서점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 일에 돈을 보고 뛰어들지 않았다 - 하긴 돈 되는 일을 하려고 서점을 차리는 사람은 없을 테다. 이들은 물론 스스로를 책 파는 사람, 즉 장사꾼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서점을 하는 이유는 '그 이상의 무언가'에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게 뭐길래. 이 책은 저자가 인천의 독립 서점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을 직접 만나가며 나눈 대담을 모은 인터뷰집이다. 여기서 사장님들은 개업 배경, 운영 방침과 더불어 주요 고객층, 추천 도서, 심지어 재정 상황까지 소상히 밝혀뒀다. 더하여 도서정가제 같은 요새도 민감한 사안에 관한 진솔한 의견도 엿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어떤 사람이 서점을 차릴까? 서점 사장님이라면 일단 책 읽기를 좋아할 거다. 마찬가지로 여기 인터뷰에 소개된 여덟 개의 서점, 여덟 명의 서점 사장님도 소싯적부터 소위 글밥을 먹고 자랐거나 도서 관련 업종을 가지셨던 분들이다. 그렇다고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점을 차리지 않는 법. 독서라는 취미가 동기가 되기야 했으나 서점 사장님들은 그보다 더 큰 꿈을 가지고 창업에 임했다.


  그건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가치에 있다. 내가 좋아서 읽고 끝내는 것도 독서라지만, 그걸로는 뭔가 아쉬운 마음도 든다. 그보다는 내가 좋아서 읽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좋았던 점을 공유하고픈 마음이 솟지 않는가. 서점 사장님의 마음은 그저 책을 팔겠다는 게 아니라 그처럼 독서 행위가 가진 부가 기능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큰 듯하다. 이 책의 머릿말에서 인터뷰어는 모든 서점 사장님을 만난 다음 이렇게 독립서점을 정의했다.


  - 그때 우리는 '동네책방' 또는 '독립서점'이라 불리는 곳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좋은 책을 소개할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열어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그러한 서점을 운영하는 책방지기를 일종의 '문화기획자'라고 정의했다. 동네 카페는 커피를 팔고, 동네 떡집은 떡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네 서점은 책을 판다. 카페, 떡집, 술집, 슈퍼와 다를 것 없이 서점도 무언가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자영업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점을 '그저 돈 벌려고 차린 가게'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밥과 술과 커피를 파는 다른 가게들도 서점처럼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맛있는 밥집이나 운치 있는 카페 한 곳만 있어도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그 동네에 애정을 갖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삶을 일궈주는 모든 가게가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그중에서도 서점은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소중한 가게다.

p.4-5


  그전까지 나는 독립서점에 관해 잘 몰랐다. 내가 독서를 취미로 붙인 시기는 이미 도서정가제라는 게 시행된 무렵이었으며, 그전까지 도서 판매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엄연히 말해 나는 대형 서점에 익숙한 세대고, 여기 인터뷰에서도 말하듯 독립서점의 존재 여부조차 몰랐을만큼 동네에 자그마한 책방 하나 못 만나봤(었)다. 아, 고등학교 옆에 서점이 있긴 했지만 온통 문제집 뿐이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면 소설 책을 읽는 행위란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처럼 인천 출신인데다 조금은 아랫세대로서, 그리고 독서를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나도 서점 사장님들의 고민들에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지역이 가지는 특성, 좋게 말해 개성이고 나쁘게 말해 허점이라 할 만한 면을.


  - 여기서 책방을 하는 큰 동기 중의 하나가 좋은 건 다서울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책방부터 시작해서 공연장, 미술관 이런 공간은 다 서울에 있다. (중략)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전국 투어 공연을 하면, 서울에서도 하고 부산에서도 하는데, 인천에서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천과 가까운 서울에서 하기 때문이다. 이게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딜레마처럼 느껴졌다. 서울과 가까우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p.192


  - 인천에는 아직 확실하게 아티스트 로드 또는 아트로드 이미지를 가진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동인천 쪽도 사실 그런 이미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거기는 재미있는 옛 가게들이 모여 있는 좀 울퉁불퉁한 곳 정도일 뿐이지, 홍대나 문래예술창작촌처럼 아티스트들이 뭔가를 해나가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는 않다. 인천의 그 어느 곳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그렇다고 그걸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은 시도는 해보고 싶다.

p.174-175


  - 처음에는 주안역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오면서 본 것은 대체로 술집들이었다. 이른 오후에도 문을 열지 않는 가게들이 많다.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다. 전에 중국 여행을 갔을 때, 어느 동네에 갔는데 쉴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들어가서 다리도 풀면서 차 한 잔 마실 곳이 없는 것이다. 결국 무더운 날씨에도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주안동은 그런 동네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 사람들이 '이 동네 정말 재미있다. 또 오고 싶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p.75


  내가 사는 집 주변을 봐도 문화 시설이랄 게 손에 꼽는 것 같다. 어디에도 녹지는 보이질 않고 온통 건물만 빼곡히 자리잡은 데다 당장 창밖을 내다 봐도 타워 크레인만 하나 둘 셋...... 그렇다고 독립서점의 활성화가 문화 사업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말했다시피 계속해서 독서 인구는 줄어드는 추세니까.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서점이 그런 역할을 해줄 거라고 기대하고, (이들을 살리려는 명목 하에) 도서라는 재화가 가진 특수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 도서정가제는 그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도서정가제는 정말 독립서점을 살리는 역할을 해냈을까? 서점 사장님들은 이렇게 말한다.


  - 세 번째로 많이 들었던 질문이 바로 '왜 10퍼센트 할인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선 10퍼센트 할인을 할 수가 없다. 대형마트에 들어가는 과자 값은 동네 가게에 들어가는 과자 값과 다르다. 책값도 마찬가지다. 출판사에서 책정한 도매가가 있지만 유통 단계를 잘 살펴봐야 한다. 온라인 서점은 출판사에서 책을 바로 받지만, 동네책방은 도매처를 거쳐서 책을 받는다.

p.24-25


  - 도서정가제를 하더라도 인터넷 서점이나 대형 서점에서 할인도 해주고 배송도 무료고 심지어 굿즈도 주니까 크게 의미가 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떻게 혜택을 줘도 어려운 건 똑같이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관공서나 학교, 도서관, 학습기관에서 동네책방을 통해 책을 구매하는 방안을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p.67



  결국 유통의 관점에서 대형 서점이 메리트를, 독립서점이 패널티를 갖고 출발하기 때문에 할인률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 이 말은 나도 참 동감하면서도 어쩔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똑같은 상품을 더 싼 값에 파는 대형 서점에 소비자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솔직히 나도 값싸고 마일리지 혜택까지 얹어주는 대형 서점을 여전히 더 선호하니까. 이것이 도서정가제가 가진 빈틈이자 한계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이제나 저제나 대형 서점은 분명히 독립서점보다 유리한 세일즈 포인트를 차지할 테니까(하다 못해 당장의 무료 배송이나 굿즈 판매에 있어서도 대형 서점이 훨씬 소비자 친화적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내가 가장 동감한 서점 사장님의 말은 이러하다.

  

  - 독자들은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면 당장 15퍼센트는 할인을 받는다. 10퍼센트는 할인하고 5퍼센트는 적립금을 받는 형태다. 그런데 같은 책을 동네책방에서 정가를 내고 살 때는 본인이 얻을 수 있는 사회적 후생을 그만큼 포기하는 거다. 따라서 그만큼 반대급부를 동네책방에서 제공해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동네책방들이 그런 고민을 많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동네책방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사업은 이 지원이 단순히 서점 몫으로 고이는 게 아니라 지역 사회의 사회적 후생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게 잘 이뤄져야 동네책방이 정말 지역 사회의 문화거점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니 서점의 가치와 그 존재 당위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바로 서점의 철학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현실은 문화라는 말로 소비하는 데 그칠 뿐인 일회성 행사가 반복되고 있다.

p.116-117


  반대급부. 대형 서점에 비해 가질 수 있는 독립서점의 최대 강점은 무엇인지, 그 반대급부를 충분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사각공간 사장님의 말씀처럼. 이에 정부는 지역 서점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추진한다고야 하지만 사장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다지 효력은 없는 듯싶다. 보여주기 식 행정에 불과하거나 성과 책정에만 급급하다는 느낌이라서.

아무튼 여러모로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럼에도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나도 생각해 봤다. 여기 실린 인터뷰 일지도 어느덧 4년 가까이 지났고, 그 사이 몇 개의 서점은 위치를 옮겼거나 사라진 듯하다. 여덟 분의 사장님 모두 서점 일에 진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독립서점은 도태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이들의 가치를 지지하고 가꿔 나가는 게 맞는지 충분히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그 고민의 주체는 누구일까? 서점 사장님? 독자들 혹은 동네 주민? 정부? 단순히 독자와 서점 사장님들께 맡길 수 없는 문제임은 확실해 보인다. 나는 이런 가게들이 던지는 풍경이 알게 모르게 값지고 소중하다고 믿는 편이다, 서점으로부터 우리가 혜택을 받든 안 받든.


나는 이 책을 위해서 소개된 여덟 개의 독립 서점 중 한 곳에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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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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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설고도, 어쩌면 도발적이기까지 한 박솔뫼 작가의 단편 데뷔작이다. 나는 박솔뫼 작가를 장편 『미래 산책 연습』으로 처음 만났고, 제대로 완독하기론 단편집 『그럼 무얼 부르지』가 처음이었다. 이후 그녀의 또 다른 단편집 『우리의 사람들』을, 그리고 중간에 덮은 『미래 산책 연습』을 마저 다 읽으며 도합 세 권을 접해봤다. 찾아보니까 내가 후술한 두 소설은 비교적 근래작이었다. 이런 얘기를 내가 왜 하는 걸까. 그건 내가 초기작이라고 소개하기가 이질감이 들 정도로 『그럼 무얼 부르지』가 놀랍고도 실험적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이게 긍정적인 의미인지는 유보하겠다. 어쨌거나 놀랍고도 실험적인 소설. 이건 몸소 읽어봐야지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긴 말 하지 말고 한 번 읽어보자.


  - 해나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인데 그사이 나는 일본의 교토로 여행을 갔다 온다.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그 사이 여행은 그것이 전부였고 또 다른 하나는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곳에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은 교토 시조 가와라마치 근처에 있던 바였다. 버클리 대학 근처 카페와 교토 시조역 근처 바, 둘 중 어느 곳이 더 의외이려나. 30여년 전에, 내가 태어난 도시에서 있던 일에 대해 불현듯 듣는 것으로 말이다. 역시나 바에서 만난 이 사람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커다란 덩치에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안경을 썼고 짙은 청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p.132-133


  주절주절 이어쓰는 이 말들은 이야기라기보다 차라리 푸념에 가깝게 들린다. 인용한 구절에서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지만, 글이 또한 상당히 말하듯이 읽힌다. 여러 문장이 구두점 없이 죽 늘어지거나 지금 내가 쓰는 문장처럼 종결어미를 '-다'로 끝맺지 않고. 그래서 나는 일전에 박솔뫼의 글을 일기 같다고 말했는데, 이 단어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가벼이 읽힌다는 뜻으로 와전되겠거니 싶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아마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테지만 여기 실린 글들은 일상적이지도, 썩 편안하게 읽히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둡고 비현실적인 일들이 펼쳐진다면 모를까. 그러니까 그녀의 글은 일과를 늘여놓는 일기의 성격과 거리가 멀다. 문체는 그래 보일지 몰라도 실제 내용은 딴판이다.


  여기 실린 단편 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단연 『안 해』일 것이다. 처음에 이 단편을 읽어 보고 어찌나 깜짝 놀라고 당혹스러웠는지. 하지만 『안 해』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직전에 실린 단편 『차가운 혀』부터 먼저 봐야 할 것 같다. 이 단편도 썩 편하게 읽히진 않는다. 여기서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시작부터 관계의 삼각형 구도에 대해 설파한다. 나와 사과와 오렌지. 그렇게 세 가지 축이 생겨야지 관계는 유지되는데, 설령 내게서 사과가 떨어져 나가도 나와 오렌지가 남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게 요지다. 나는 어느 바에서 일하며 사과와 오렌지를 깎고 서빙을 하고 재떨이를 비우고 닭을 튀긴다. 그 무렵 나는 사귀는 누나와 동거하고 있는데, 그 누나는 직원도 아니면서 바에 놀러와 나와 같이 일했다. 사장은 그런 누나더러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장이 나와 누나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처음에 사장은 우리더러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묻다가, 나중 가서  오늘은 무얼 했느냐고 묻는 식으로 자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사장이 묻는 말에 대체로 답하질 못했고, 그런 껄끄러운 질문을 듣기 싫었다. 사장도 보기 싫었다. 나와 달리 누나는 사장의 질문에 곧잘 대답하며 대화다운 대화를 이어갈 줄 안다. 나는 사장과 말이 잘 통하는 누나를 보기가 힘들다. 시간이 지나 누나는 가게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술만 계속 마셨고 사장은 나를 잘랐다. 나는 우리의 아름다운 삼각형이 깨져버렸음을 깨닫고 방안에 홀로 지낸다. 그 뒤로 다시 시간이 지나, 누나는 내 집에 돌아오고 오랜만에 둘이서 사랑을 나눈다. 그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몇 가지 내용을 중간중간 생략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가 이러하다. 여기서 내가 느낀 소설의 인상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착 가라앉았구나 싶었다. 여기 단편 속 주인공은 특별한 욕구랄 게 없이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여러 차례 누나와 사랑을 나누기야 하지만, 그 같은 애정 행각은 욕구에 기반한다기보다 늘상 있는 일 정도로 처리된다. 결정적으로 바에서 잘려 누나와 멀어지게 된 뒤에도 나는 방안에 폐인처럼 틀어박혀 관계의 삼각형이나 운운하며 본드에 취한다. 혼자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관계를 회복시킬 의지나 노력 없이 체념하듯 구는 포즈. 이런 게 뭐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이란 건가. 이런 비슷한 정서가 다음 소설에서도 이어지겠거니 나는 넘겨 짚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단편이 『안 해』였다.


  이 소설도 한번 보자. 노래방에 찾아온 청소년 남녀가 노래를 부른다. 남자애는 물을 사러 나가고 여자애는 남아서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지나도 남자애가 돌아오지 않길래 여자애는 문쪽을 돌아본다. 그런데 문 밖에서 노래방 사장이 여자애를 쳐다보고 있다. 순간 오싹한 느낌에 사로잡힌 여자애는 다시 노래방 기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노래방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방 안을 급습한다.

  노래방 사장에게 붙잡히자 겁에 질린 여자애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 남자는 범죄자인가. 그런데 사장은 여자애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노래를 이어 부르라고 시킨다. 벌벌 떠는 여자애가 옴짝달싹 못하자 사장은 그애를 세게 친다. 그제서야 여자애는 정신을 차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장은 만족하지 못한 듯 노래를 더 시킨다.

  무슨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있나. 솔직히 말해 이 단편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 두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도심의 노래방에서 벌어지는 납치극이라니. 아니, 남자애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므로 정황상 폭행 내지 살인극까지 추가해야 하나. 너무 섬뜩한 이 이야기는 그러나 의외의 순간 전환점을 맞이한다. 사장이 여자애, 그리고 이미 갇혀 있던 또 한 명의 여자애까지 불러다가 노래를 부르도록 시키니 말이다. 유혈이 낭자할 법한 극도로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대뜸 노래라니? 노래방 사장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들을 가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노래를 열심히 안 불렀기 때문이란다.


  - 남자는 30분 후 노래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 전까지는 내 이야기를 들어.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30분간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에 대해 생각해. 열심히.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열심히. 열심히에 도달하면 이제 너희의 소리와 너희의 노래가 완성되고 완성이 되면 너희는 이제. 이제 노래가 되어 세상으로 날아가는 거다, 그게 노래다.

p.46-47


  노래. 노래가 뭐라고. 그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며칠째 가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면 이제 두 여학생이 노래를 열심히 부르게 될지도 궁금해진다. 그래야지 이들이 노래방 사장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그가 말한 '열심히'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거다. 통상적으로 노래를 열심히 부른다는 게 뭔가? 음계를 기계처럼 딱딱 맞추는 건가 음정이 조금 틀려도 감정을 담아 부르는 건가.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간절히 붙잡아야 하나. 땀이 날 정도로 몸을 흔들면서 부르거나 발음을 또박또박 정직하게 부르는 건가. 남자가 추구하는 열심히란 정확히 무엇인가.

  이에 응하여 먼저 갇혀 있던 여자애는 '열심히'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 남자는 열심히에 대해 말하지? 하지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있다면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지? 하는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지? 하는 피곤한 자학 이 둘뿐이었다. 뭐 열심히 해서 뭔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게 필요하긴 하지. 나는 게임은 꽤 잘하는데 그건 열심해 해서 잘하게 된 것도 있으니까. 연습이라든가 능숙해지기 위한 시간 같은 게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건 내가 게임을 잘할 만한 필요조건을 충족했기 때문 아닌가. 그 필요조건이라는 건 냉정하게 생각하고 고집 피우지 않는 거 고집부려야 할 순간도 있겠지만 매일 주장할 수는 없는 거라는 거지 그 외에도 많지만 그 필요조건이 뭔지를 일일이 이야기하는 건 복잡하니까 놔두고 여하튼 그렇다.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p.52-53


  이에 한술 더 떠서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하고 지적하는 구절은 정말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내가 오해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직전 단편에서 넘겨짚은 현대인의 무기력함과 우울함은, "(열심히의 세계) 그게 튼튼해?"라는 한 마디로 박살났다. 오히려 이것이 무기력함이고 우울함이라면 그 반대편이 무엇이 있는지 한 번 내놓아 보라는 식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후로 등장하는 단편들을 오해나 편견 없이 순순히 읽기로 했다. 이후에 읽은 단편들도 꽤 모호하다. 어딘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오르는 단편 「해만」은 해만이라는 외딴 섬에서 숙박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이어지는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은, 세상에, 「안 해」의 배경이었던 노래방이 재등장하는데 두 단편의 명확한 접점은 그뿐이다. 표제작 「그럼 무얼 부르지」는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해만의 지도」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앞에서 본 단편 속 해만의 지도를 그려보는 이야기다(이 또한 「해만」과 세계관을 공유할 뿐 이야기 상 명확한 접점은 없다). 「안나의 테이블」은 조카에게 들려줄 수수께끼의 내용으로 상당히 어지럽다. 여기서 줄거리를 소상히 밝히는 건 딱히 의미가 없다. 큰 틀에서 보면 두세 줄로 요약 가능할지 몰라도 자세히 보면 도무지 설명할 방도가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라.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박솔뫼 씨가 참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운 글들을 썼구나 싶다. 하나의 프리즘을 거친 빛이 여러 갈래로 굴절되듯이, 그녀가 쓴 이야기들도 독자를 거쳐 여러 차례 해석되고 감상될지 모르겠다. 소설이 끝난 다음에는 문학평론가 손정수 씨가 길고도 상세하게 작품 해설을 써뒀는데, 그 글은 적당한 만큼만 읽고 덜어냈다. 아무래도 박솔뫼 씨의 여러 글들을 종합하여 이런저런 해석을 시도한 내용인지라 내가 읽기엔 맞지 않더라. 이번 기회에 나는 『그럼 무얼 부르지』를 두 번째로 읽는데, 향후 재독할지는 두고 봐야겠다. 그보다는 『을』이나 『백행을 쓰고 싶다』 같은 장편 소설도 궁금하다. 그럼 무얼 먼저 읽지. 이제부터 그게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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