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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
구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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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작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일은 곧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과정과 같아서. 자고로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그저 이야기만 따라가지 않는다. 그 작가가 이야기를 하는 방식, 관점, 태도…… 종합하자면 창작자의 '톤 앤 매너'를 함께 만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볼 수 없던 새로운 톤 앤 매너를 마주하는 일 ― 그게 내가 신예 작가를 만날 때마다 하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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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요즘 출판계와 작가들은 무엇에 관심 있는지. 어떤 작품에 호응하고 찬사를 보내는지. 무엇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감수성인지. 아무래도 당대 문학 작품에 '트렌디함'을 요구하거나 의식하기로는 쓰는 입장도 읽는 입장도 마찬가지일 테다. 기대에 부응하듯 구소현 씨의 소설은 젊다. 여기서 말하는 '젊다'란, 다루고 있는 소재의 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책 뒤표지에서 나오는 문구 "되살아나고 싶지 않은 유령, 세상을 파괴하려는 신, 믿음을 버리고픈 교주" 등을 봐도 짐작 가능한데, 이 말고도 게임 제작자 · 장기 최면 · 사이비 종교 · 신흥 종교까지…… 구소현 씨가 다루는 소재는 거침없이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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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실 표지만 보고 밝은 내용일 줄 알았다. 푸른 하늘에 터지는 폭죽, 혹은 탄산수 속 탄산이 터지는 모양 같기도, 아니면 잔잔한 호수 위에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 같기도 한…… 아무튼 시원한 감각이 담긴 표지니까. 게다가 제목은 또 어떻고. 내 딴에는 청량하고 상쾌한 이야기가 펼쳐지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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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이트 데이」를 보자. 소설의 도입부부터 펼쳐지는 울창한 참나무 숲…… 이 장면이 짧게 비친 다음 등장하는 두 사람은 승현과 연주다. 연주는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재원과 마주쳤는데, 재원이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 같다고 말한다. 재원은 포교 활동 중이었다. 두 사람은 만난 김에 연락처를 공유했고 그 과정에서 승현의 연락처도 전달됐다 ― "언니 번호 물어보길래 고민하다 알려줬는데, 혹시 연락 와도 그냥 받지 마." 그렇지만…… 승현은 재원의 소식이 궁금했다. 재원도 그곳 출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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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곳? 그곳이 어디길래. 그 정체는 얼마 못가 밝혀진다. 어렸을 때 승현과 재원은 함께 숲에서 뛰놀았던 친구였고, 함께 기도를 올리며 어른들께서 주신 천조유(天鳥乳)를 마셨더랬다. 여기서 '천조유'란 하늘 새의 모유. 오염된 피를 정화하고 날개를 얻기 위해 마셔야 할 양식이다 ― 무언가 수상함을 직감하셨는지. 이들이 지내는 숲 혹은 산골, 그러니까 소설 첫 장면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그곳'의 정체는 사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사이비 종교 단체 약속천인사원(約束天翼寺院)의 근거지였다. 이들 단체는 선택받은 자만이 새처럼 등에 날개가 돋아날 거라는 믿음을 이용해 신도들을 세뇌했다. 승현과 동생 연주, 재원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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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교주의 신도 착취, 살인 교사, 불법 의료 행위 등이 폭로되자 교주는 '선택받은 신도'들과 함께 절벽에서 투신했다. 그 신도 중에는, 안타깝게도, 승현과 재원의 부모도 있었다. 약속천인사원이 해체되면서 아이들은 대리 보호자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승현과 연주는 고모네 집에 살게 됐고…… 재원은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 뒤로 세 사람은 연락이 끊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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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상 가능하듯 재원은 보육원에서도 종교 활동을 끊지 못했다. 아니, 끊을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하나. 나고 자라서 보고 배운 게 전부 약속천인사원의 교리였으니까, 오히려 재원의 입장에서 볼 때 바깥세상은 더 이상하고 낯선 곳이었다. 사회와 직장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던 재원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블로그가 알음알음 유명해지면서…… 지금의 포교 활동까지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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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승현은? 승현도 실은 마찬가지다. 그녀도 종교 단체에서 못 배운 학교 교육을 따라잡으려 남들보다 부지런히 공부했고 대학에 들어가서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하지만 우울증, 강박, 불안장애 등을 달고 살았고 회사 생활도 실패적이었다(소설에서는 그녀가 '폐급'이었다는 표현까지 쓴다). 직장 내 괴롭힘이 갈수록 심해질수록 눈치만 보며 전전긍긍하는 생활. 사실 승현이 재원을 만난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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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 날 망치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어. 멀쩡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제는 지쳐서. 내가 나를 망치는 것보다 남이 나를 망쳐주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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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원도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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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빠져 있는 종교는 잘못됐으니까 거기서 나오라고, 나를 설득해주길 바랐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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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두 사람은 결국 운명 공동체처럼 같은 지점을 공유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서로를 마주하며 잠시나마 숨통이 트인 듯한 기분을 만끽하는데…… 여타의 소설들과 달리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뒤에 일어날 일들은 이번 글에서 함구하겠다. 내 감상을 조금 보태자면,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다니. 이렇게 끝낼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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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하게 된 지점이 몇 가지 있었다. 내 취향 문제와 직결되는데, 일단 나는 범죄나 불법적인 일을 다루는 이야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이 쉽게 죽어버리는 이야기도. 노파심에 말하지만, 내가 범죄나 죽음 같은 소재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썩 좋아하지 않는다'와 '싫어한다', 두 단어에는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다룰 거라면 그만큼 쓰는 이에게 책임감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에 가깝달까. 나를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일.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죽거나 죽임당했다면…… 나는 그 사건을 중대하게 바라보며 소설에서도 중대하게 다뤄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구소현 씨의 소설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거나 죽인다. 수록된 여덟 작품 거의 대부분에. 그리고 모든 작품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내 딴에는 죽음이 쉽게 다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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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것은 작가가 중요히 다루는 면과 나라는 독자가 중요히 보는 면이 다르기에 생긴 간극 ― 말하자면 입장 차이일 뿐이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하다 보면 견해가 엇갈릴 때가 있듯이 독자와 소설가 또한 마찬가지. 지난번에 최은미 씨의 『다른 사랑』 감상평에서도 말했듯, 나는 인물들의 동기에 관심이 많고 특히 자살이나 타살 같은 사건에서는 더 민감히 반응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마땅한 이유가 없더라도 그 사건이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묘사되기를 바라는 게 나라는 독자의 성정(性情)이다 ― 그런 점에서 나는 「시트론 호러」와 「요술 궁전」을 좋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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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고 등장인물. 이들은 대체로 고아거나 사회부적응자 들이다. 보육원 동기 말고는 친구가 없고, 직장에서 소외되며, 자기 바운더리(boundary) 안에서 최대한 조용히 살아가고 기타 등등. 그런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가 다 있겠지만, 연달아 여덟 작품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앞서 읽은 이야기들과 연관 짓게 되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앞의 단편들과 어떠한 연결 고리도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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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주목하고 싶은 점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소현 씨의 추진력이다. 암에 걸린 언니 도르마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려 하는 조의 의지가 무서울 정도로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완치」, 아무리 모멸에 찬 세상일지라도 사랑을 지켜야 한다는 「험악한 세상」 같은 이야기가 딱 그렇다. 두 이야기 모두 첫 장을 펼쳤을 때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인상이 확 바뀐다. 그만큼 이야기가 크게 도약하고, 폭발적으로 뻗어나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표제작 「환호성」은 확실히 이 소설집의 하이라이트다. 내일 당장 종말 할지 모르는 세상에서도 지키고픈 것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톡톡 튀는 메세지를 놓치지 않는…… 이게 오늘날 신예 작가가 보여주는 이 시대의 톤 앤 매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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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도 재미있게 읽었음을 밝혀 둔다. 책 제목에 걸맞은 작가의 말이었다. '그래도 되는 바다'에서 나 역시 즐겁게 놀다 갔음을 슬쩍 고백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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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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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을 읽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아름다운 문장과 사유를 만나고 싶어서, 혹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싶어서…… 좋다. 그 밖의 동기들도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런데 내가 던진 질문은 그게 아니다. 동기를 넘어서 그 소설을 읽게 하는…… 읽고 싶게 만드는…… 쉼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 그 힘이 무엇인지 나는 묻고 있다. 그리고 이미 답을 하나 정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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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마음 수양에 도움 돼서, 멋진 표현을 배우고 싶어서…… 그중에서도 으뜸은 재미다. 소설은 재미있어야 읽힌다. 재미있어야, 소설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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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장욱 씨의 글은 취향을 탈지언정 일단 기호에 맞으면 도저히 읽기를 관둘 수 없게 만든다. 이야기도 흥미롭고, 이야기하는 방식도 흥미롭고, 이야기를 짓는 문장마저도 흥미롭다. 내 딴에는 그렇다. 여기 실린 단편들의 첫 문장만 떼어 보아도 얼추 감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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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란 무엇일까? 입는 것일까? 먹는 것일까? 바삭바삭한가? 물렁물렁한가? 경험이 모여 추억이라는 게 되는 것일까?

(「행자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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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복화술사입니다. 여러 가지 목소리를 가졌어요. 진짜 내 목소리가 뭔지 헷갈릴 때도 나는 여러 개로 흩어진 나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의심스러우신가요? 의심스럽다고요? 야 이 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복화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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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 공무원이 드러머가 되고 싶고, 은행원이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고 싶고, 모범생이 일진처럼 존나 욕을 해대고 싶은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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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취향을 탈지언정 누군가는 이런 문장 다음에 이어질 다음 문장을 기다리며 읽는다는 소리다. 당신이 느끼기에 어떠한가? 나와 같다면, 당신도 이장욱을 좋아할 확률이 절반 이상은 되었다고 본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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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잠깐 위에서도 나왔지만, 실린 소설들의 제목들을 봐도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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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가 사라졌다!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복화술사

크리스마스 캐럴

낙천성 연습

최저임금의 결정

양구에는 돼지코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

눈먼 윌리 맥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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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듯 말 듯 한 제목들. 개중에는 익숙한 단어들(예컨대 크리스마스 캐럴, 최저임금 등)도 보이고 익숙하지만 낯설게 배치된 단어들(예컨대 양구와 돼지코, 낙천성과 연습 등)도 보인다. 여담이지만 이 중에 네 번째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은 나중에 장편 『캐럴』(문학과지성사, 2021년 6월)로 확장된다. 두 소설이 같은 지점을 공유한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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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물론 제목이 내용을 다 말하지 않으므로…… 이야기를 들여다볼 차례다. 「행자가 사라졌다!」를 보자. 사라진 행자의 정체는 뭘까? 바로 집에서 기르는 볼파이톤, 그러니까 뱀이다. 이 행자는 아마 "경험"이랄 게 없을 텐데, 왜냐하면 이 집에 들어온 이래로 리빙 박스 바깥에 나올 일이 ― 내가 잠깐 그 박스에서 꺼내 핸들링할 때를 빼면 ― 전무하니까. 그러나 할머니께서 얘기하신 바: "경험 많은 인간들이 외려 세상을 오해하는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이들은 대개 경험이 만든 틀에 갇혀 살아가니까. 육이오를 경험한 사람은 육이오에, 유신을 경험한 사람은 유신에, 가난을 경험한 사람은 가난에 갇혀 살아가는 법이다. 평생 돈 귀한 줄 모르고 살았다면? 다들 지들처럼 사는 줄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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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험 없는 지혜랄 게 있다. 그 증거가 실종된 행자다. 행자는 냉혈동물답게 조용하고 고독이니 우울이니 하는 것을 느끼지 않으며 우아한 자세로 세상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그 고요한 눈으로…… 이 집안의 분위기를 정확히 감지한다 ― 행자가 사라진 것도 그래서 아닐까? 행자의 실종 사건은 내가 대학교 기숙사에서 추리 소설을 뒤적거릴 때 일어났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할머니가 문득 행자가 사라진 걸 눈치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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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추리 소설 애독가인 나는 곧장 추리에 나선다. 가장 행자에게 적대적이었던 아빠부터, 내가 없을 동안 행자의 먹이를 책임진 엄마,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남동생, 마지막으로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시…… 최후의 용의자 할머니까지. 겉보이게 추리 장르를 차용한 듯 보이는 이 소설은 가족 구성원들을 주인공 눈으로 해체하는 과정에서 색다른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행자는 과연 사라진 것일까? 행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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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표제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도 흥미롭다. 무명 시인이 우연히 자기 시를 인용한 블로거를 알게 되면서 화면 건너편 블로거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그런데 그 블로거가 나의 시를 제멋대로 인용하기 시작하는데…… 그 시는 과연 내가 쓴 시가 맞을까? 왜 바뀐 시가 내 눈에 더 매력적이게 보이는가? 왜 그녀는 내 시를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치는 걸까?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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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제는 기반이다. 사람들이 평소 의심하지 않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그 자체로 단단한 기반을 만든다. 마치 우리가 딛고 선 땅바닥, 무너지지 않을 거라 믿는 콘크리트 건물, 주기적으로 돌아올 이 시간과 계절의 흐름처럼. 그런데 약간의 의문만 가지고 바라봐도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를 곱씹을 수 있다. 조금 망상처럼 들려도 괜찮다. 나는 나인가? 내가 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나에 관해서 잘 아는가? 내가 아는 게 맞나? 실은 의심한 적 없는 게 아닌가? 그동안 생각해 본 적 없던 게 아닌가? 왜 나는…… 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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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반을 뒤흔드는 물음표가 가장 예리하게 날선 소설로 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꼽고 싶다. 시니컬한 신흥 투자전문업체 캐피털 컨설팅 오너가 아내의 전남친이라 주장하는 젊은 치 만난다. 그것도 허름한 대학가 술집에서. 얼핏 보면 계급 담론 문제로 빠지기 쉬운 이 주제를 이장욱 씨는 보기 좋게 빗겨나간다. 예상치 못한 대화, 주점의 알바생과 노인의 개입으로 미묘해지는 상황…… 오너가 생각하는 세계상(像)는 그렇게 균열을 내며 무너진다. 무엇 하나 논리적이지 않으면서, 도래한 미래의 풍경은 섬뜩한데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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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런 이상함이야말로 이장욱을 읽는, 읽게 하는,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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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령 이런 구절. 시인으로서 이장욱 씨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문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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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밥을 먹다가 이가 하나 빠졌던 것을 김은 기억해냈다. 북어라든가 인절미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김치를 씹었을 뿐인데…… 원래부터 부실하긴 했지만…… 고춧가루가 묻은 치아 하나가 무슨 고생대의 유물처럼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뿌리 쪽으로 피가 묻어 있고 전체적으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그것이 김의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렸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때는 그저 의미 없는 몇 개의 문장을 웅얼거렸을 따름이다. 이건 피가 묻어 있구나. 치아는 동물에 속해 있나 광물에 속해 있나. 아니, 식물일 수도 있겠지. 어디다 버려두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뿌리가 벋어서 무성해질 수도 있겠지. 그 나무가 자라서 희고 단단한 이빨들이 주렁주렁 맺히고……

(「눈먼 윌리 맥텔」, pp.29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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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양구에는 돼지코」. 작가의 말에서 이장욱 씨는 이런 이야기를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나도 이해했다. 무척 잘 읽었지만, 작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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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는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를 읽고서 인디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를 알게 됐다. 소설 내용은 이상했고 그들 노래도 특이했다만, 결국 나는 ― 소설 속 인물들처럼 ―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팬이 됐다. 나는 2집 [우정모텔]의 <아침에 빛>을 좋아한다. 물론 수록곡 대부분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다. 소설 속 구남과 나의 얘기는 어쩐지 장편 소설 『캐럴』과도 이어진다. 이장욱의 세계가 그렇게 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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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빼놓으면 섭섭해서. 「낙천성 연습」과 「최저임금의 결정」도 잘 읽었다. 실은 나 또한 내색은 안 할 뿐 「낙천성 연습」 속 아버지처럼 별의별 걱정을 시뮬레이션 돌리는 부류다. 이런 생각을 되도록 긍정적인 쪽으로 돌리기야 하지만. 「최저임금의 결정」을 읽을 무렵 나는 군대를 전역하고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일하는 중에 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새벽 4시는 그런 시간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라도 그 시간에 일어나기는 쉽지 않고, 늦게 잠드는 사람이라도 그 시간까지 깨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인기척이 희박한 시간. 인간의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간. 고양이라든가 벌레라든가 나뭇잎의 시간." 그때 내 손에 글록 26은 없었고 이 책이 쥐어져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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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장욱의 소설에는 유머가 있다. 깔깔대는 유머라기보다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유머다. 거울 건너편에 비친 내가 내 모습이 아니게 되고 그자는 천연덕스럽게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는 식의 뻔뻔한 유머. 이렇듯 뜻밖의 상황을 연출하는 그의 소설은 피가 낭자하지 않을 뿐 기괴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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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러고 보면 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기묘함이기도 하다. 기묘한 이야기들은 재미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서, 그 경계를 비틀고 마구 흔들어대는 이야기. 아,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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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이장욱 씨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소설집은 『기린이 아닌 모든 것』. 기호는 물론 얼마든지 바뀌며,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책은 그의 신간이다. 얼마 전 출간된 『호러는 아니지만 어쩐지』(마음산책, 2026년 9월) ― 나는 이미 제목만 보고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아닌가. 작가 이름만 보고,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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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지막으로, 마주친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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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라고 한들 그게 잘못이겠습니까? 그 목소리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을 알려준다면 그게 바로 신의 목소리 아닙니까?

(「복화술사」,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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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세상은 모순투성이고 모순조차 없으면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는 게 인생 아닌가.

(「낙천성 연습」,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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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숙한 것을 솔직함이나 진실함으로 착각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보게, 지고지순한 과거 같은 건 자네가 가지게. 나는 현재와 미래만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해주면 이 친구, 말귀를 알아먹을까?

(「크리스마스 캐럴」, pp.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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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환기하거든. 그렇지 않은가?

(「최저임금의 결정」.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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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글을 읽고 당신도 언젠가 나의 글을 읽을 거예요.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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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랑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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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은미 씨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새삼스레 작가의 내력을 소개하는 까닭은, 그만큼 『다른 사랑』이 작가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소설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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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솔직히 말하자. 사실 첫인상이 썩 좋지 못했다. 아스팔트 도로에 자빠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라바콘. 그걸 찍은 사진은 묘하게 기울어져 있다. 어딘가 반듯하지 못한, 위태로운 인상을 주는 표지 위로 선명하게 찍힌 글자 다른 사랑. 라바콘과 동일한 색상의 서체는 마치 위아래로 길게 잡아당긴 것처럼 늘어졌다. 제목과 표지만 봐서는 알 수 없으니 책장을 넘겨 보자. 곧바로 차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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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

무장하는 날

정선

김춘영

그곳

이 모든

고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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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들이 수록된 단편들의 제목이라는 소리인데…… 어떠신가. 흥미로운가? 솔직히 말해 이 중에 내 구미를 당기는 제목은 단 하나도 없었다. '김춘영'이나 '정선' 같은 고유 명사 제목은 그렇다고 쳐도, 다른 제목들은 그 짧은 단어 몇 개만 놓고 보면 도저히 소설 제목이라 생각할 수 없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며 뚜렷한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 단어 군집이었다. 무명작가가 이런 식으로 제목을 짓고 투고했어도 읽혔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 읽었더라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을지는 미지수다. 그것도 한두 편이 아니라 태반이 그렇다니…… 만일 작가 이름을 지우고서 차례만 봤다면 나는 이 책을 고이 책꽂이에 도로 꽂아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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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물론 우리는 블라인드 면접관이 아니다. 이미 소설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가 세 번의 젊은작가상(2014년, 2015년, 2017년)과 네 번의 김승옥문학상(2019년, 2020년, 2023년, 2025년), 그리고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 또한 여럿 수상했으며 2021년에 '소설가 50인이 뽑은 2021년의 최고의 소설'로 뽑힌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의 저자임을 떠올린다. 차라리 이 같은 무색무취의 제목을 최은미 씨가 의도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정도다. 물론 나는 작가의 수상 내역을 훑고 점수를 매기는 면접관이 아니다. 나는 한낱 방구석 독자 1이기에…… 내 감상과 직관을 솔직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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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놀라운 점은 소설이 담고 있는 스케일의 크기였다. 첫 번째 단편 「상리」는 시골 마을 상리에서 벌어지는 법률 분쟁을 맡게 된 변호사가, 두 번째 단편 「무장하는 날」은 과거 군부대 터였던 곳의 지표 조사를 하는 문화재 연구원이 등장한다. 요즘 소설들이 낯선 타자보다 나 자신 ―혹은 나에 준하는 비슷한 인물상 ― 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 반해 최은미 씨가 제시한 인물상은 그와 정반대다. 다양한 직업군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뜻은, 그만큼 작가가 그 분야를 깊이 들여다보고 연구했다는 소리다. 동시에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서사와 문장의 스펙트럼도 넓다는 것을 암시한다. 띠지에서도 볼 수 있는 문구, "강렬한 독서 체험의 설계자, 최은미"라는 말은 한껏 멋부린 차린 찬사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한 편 한 편이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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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장하는 날」을 보자. 오래전 '류'는 신입 연구원 자격으로 D시의 문화재 연구 발굴 현장에 있었다. 그곳은 DMZ와 가까워서 군인들의 감독 하에 작업이 이뤄져야 했다. 류는 그 당시 군인들 중, 아마 소대장쯤 되는 직책을 맡은 걸로 보이는 '박수현'과 친하게 지냈다. 그게 12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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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뒤로 다시 D시로 오게 된 류. 이번에는 부대 통폐합에 따라 해체된 부대 터를 지표 조사하게 됐는데…… 며칠째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탓에 조사가 잠정 중단된다. 그때 류를 알아 본 식당 주인(류는 식당 주인을 기억하지 못했다)이 식당 뒤편의 컨테이너 하우스를 빌려주면서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자 몸이 아프기 시작한 류. 그 식당에서 박수현과 다시 마주친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고…… 이혼도 했다. 비가 그칠 무렵, 조사 중인 부지에서 무언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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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무언가의 정체는 문화재가 아니었다. 사람의 뼈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부지의 흙을 묵묘에서 실어다가 메웠다고들 했다. 류는 직접 묵묘 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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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가 이 자리를 빌려 「무장하는 날」을 소개한 이유는 수록된 단편 중 가장 스케일이 크기 때문이다. 가상의 공간 D, DMZ와 군인들, 문화재 발굴 현장…… 그리고 12년의 폭을 오가는 시간까지. 류와 그 주변을 둘러싼 세상을 접속하려면 독자들은 시간과 공간의 덧게비를 하나씩 풀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최은미 씨가 설계한 "강렬한 독서 체험"에 차근차근 몸을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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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런데 「무장하는 날」이 잘 읽혔나? 나는 이해가 잘되지 않아 두 번 읽었다. 그래서 이해했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 못 하겠다. 소설의 방대한 스케일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방대한 스케일이 이 소설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일으킨 감도 없잖아 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내가 위에서 옮긴 줄거리를 봐도 이해되지 않는 구석들이 있을 테다. 류가 박수현과 무슨 관계였는지, 식당 주인이 류를 왜 기꺼이 도왔는지, 뼈의 정체는 그렇다 쳐도 왜 류는 스스로 묵묘 터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물론 소설이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다(오히려 모든 걸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독자들이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왜 류가 묵묘 터로 떠났는지, 거기서 또 그런 결말로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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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결말부의 미감이다. 해설을 쓴 평론가 박혜진 씨가 밝혔듯, "최은미는 인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투시하면서도 예술이 멈춰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아는 작가다."* 류의 동기는 모르겠지만 「무장하는 날」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다. 이 결말이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려서, 그래서 나는 이 단편을 두 번 읽었다. 그럼에도 나는 류의 동기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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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라는 독자)는 소설에서 동기를 중요히 보는 입장이다. 동기가 흐릿하면 작품 속 인물들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저 사람을 왜 사랑하지? 왜 쫓아가지? 왜 도와주지? 왜 죽이고 싶지? 세세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저 귀띔이나 암시만 해줘도 되니까 일말의 근거가 있어줬으면 한다. 이를테면 「무장하는 날」 속 류와 박수현의 관계 묘사 정도면 충분하다는 소리다(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겠지, 하고 예상되니까). 내가 이번 소설집을 읽으며 가장 난감했던,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점이 바로 인물들의 '동기'였다. 왜 「정선」 속 주인공은 옛 집터를 찾아가지? 찾아가고 싶었다면 왜 굳이 '정선이를 찾습니다' 행사를 이용했지? 어릴 적 집터에서 발견한 숟가락이 귀하다는 걸 알겠다. 그렇다고 그걸 성년이 된 지금까지도 품에 쥐고 다닌다고? 왜 동창생에게 사기를 쳤지? 돈이 궁했나? 돈이 궁해서…… '정선이를 찾습니다' 행사로 고향 땅에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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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실 다른 소설의 경우도 비슷비슷하다. 「그곳」의 주인공 '나'는 예전에 야영을 하다가 폭우로 인해 불어난 계곡물과 마주하고 죽을 뻔했다. 그것이 소설 첫 장면으로 제시되고, 이후로 내가 고지대의 체육관 센터를 오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계곡 사고로 인해 체육관 센터를 오가게 됐다는 유추가 가능한데, 어디에도 정확한 이유가 나오질 않는다. 내가 놓친 걸까? 유추만 해볼 뿐 주인공이 왜 체육관에 오가는지, 그리고 아주 체육관에 눌어붙기로 작정한 건지 선명하게 짚이질 않는다. 동기를 얼추 알겠는데, 그게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으니 내 딴에는 답답하게 읽혔다. 내가 맞게 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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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래서 인물의 동기가 명확한 「김춘영」을 제일 흥미롭게 읽었다. 화운령 중턱에 위치한 '김춘영'의 집을 방문하는 구술면담자 주인공의 동기와 야심이 뚜렷했고, 탄광촌 여성 노동자라는 흔치 않는 직업군을 조명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포인트다 ― 어찌 보면 작가 최은미 씨의 야심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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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런 생각을 해본다. 소설가들은 영화로 치면 각본가이자 연출가이다. 훌륭한 이야기를 쓰는 게 각본가의 역할이요, 그걸 예술적이게 담아내는 게 연출가의 역할이다. 나는 이번에 『다른 사랑』을 읽으며 최은미 씨의 연출가로서 능력에 일말의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본가로서 능력은 모르겠다. 그냥 나와 잘 안 맞는 것인지, 내가 놓친 부분이 많았던 것인지…… 혹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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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렇지만 나는 각본가로서 소설가보다 연출가로서 소설가를 더 좋아하고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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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 책을 덮고 최은미 씨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게 있나 찾아봤다. 예전에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근린」을 읽어봤구나. 제목만 듣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했지만 첫 문장을 본 순간 기억이 났다. 맞아.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 나 역시 「근린」을 흥미롭게 읽은 사람 중 하나다. 아무래도 최은미 씨의 다른 소설집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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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작가의 말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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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인 '다른 사랑'은 이 소설들 중 한 편을 쓸 때 가제로 삼았던 것이다. 원고 폴더명과 쓰는 동안 듣던 음악의 플레이리스트 폴더명이 내내 '다른 사랑'이었는데 송고 직전 소설의 제목을 바꾸었다. 품고 있었지만 쓰지는 못했던 그 제목을 종종 생각했다. 왜였을까. 내가 써온 세계와 충돌하는 말 같아서였을까.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제목 같아서였을까. 소설집 준비를 위해 일곱 편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그 말 앞에서 주저했던 시간까지 여기에 함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이라는 말도 '사랑'이라는 말도 감당해볼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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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해 본다. 송고 직전에 제목이 바뀐 그 작품이 무엇일지를. 아마 「그곳」이 가장 유력하지 않나 싶다. '그곳'이라는 제목이 전체 내용을 아우르기에 너무 폭넓어서도 그렇지만 이야기 속 여러 사랑의 생김생김이 잘 살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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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농장
성혜령 지음 / 창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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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섯은 희한한 생명체다. 같은 종이라도 다른 생김새를 갖는데 가느다란 것도 있고 쭈글쭈글한 것도 있고, 개중에는 한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무시무시한 독이 있다. 습한 곳에서 자라며 보통 포자를 통해 번식하는 이 녀석은 생물학적으로 식물도 동물도 아닌 균류에 속한다. 배경지식 없이 이를 자연에서 맞닥뜨리면 식물인지 동물인지, 아니 애초에 식용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하기 힘들다. 함부로 식용이라 생각해서 덥석 삼켰다가 어떤 불상사를 맞이할지 모르지 않나. 우리 식생활과 밀접하지만 실은 잘 모르는, 그런 이유로 가까이 두기 껄끄러운 그것. 내게 있어 버섯의 이미지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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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번에 읽은 성혜령 씨의 단편집이 바로 그런 이미지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소설집 이름부터 '버섯'이 들어간 것도 그렇지만, 정말 버섯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느낌이 든다. 이번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단편 「원경」 얘기를 잠깐 하겠다 ― 이 단편을 읽고 나는 성혜령 씨의 소설 스타일(혹은 매력)에 감명받았으므로. 줄거리는 간단하다. 신오는 여자친구 원경에게 가족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별을 통보한다. 그러나 며칠 뒤, 공교롭게도 암 진단을 받게 된 신오.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그는 다시 원경을 찾아가지만, 원경은 최근 이모가 당한 사기 피해를 수습하느라 바빴다. 급기야 원경은 신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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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를 두고 평론가 전승민 씨는 엔트로피 개념을 차용했다. 여기서 엔트로피란 흔히 열역학 제2법칙에 소개되는 용어인데, 간단히 말해 균질한 에너지가 무균질해지면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리다. 커피와 우유를 섞어서 만든 라떼를 생각해 보자. 라떼를 다시 커피와 우유로 분리시킬 수 있는가? 마술 세계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 일단 나는 할 수 없다. 돌아가서, 전승민 씨는 이 개념과 「원경」을 이렇게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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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의 실존적 크기는 서사의 진행에 반비례하여 작아지지만(>) 불안이라는 엔트로피는 선형적으로 증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신오가 자신의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내린 선택은 오랜만에 원경을 만나러 가는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인해 신오의 눈앞에는 [원경-이모님-보살님-비구니 스님-금괴-구덩이-돼지 뼈]로 이어지는 타자들이 줄지어 출현하고 일단 나타난 그들은 순서대로 존재감을 더해가며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의 부피는 낯선 것들의 출몰 속에서 점점 더 불안하게 증가한다.


*: 전승민, 「불안에 관한 두 개의 방법론」,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p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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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다, 엔트로피. 내가 성혜령 씨의 소설에서 느낀 매력도 그렇게 설명 가능했다. 이야기 속 세계관이 계속 팽창하는데, 그래서 도저히 앞길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결말의 예측 불가함은 실은 (꼭 성혜령 씨가 아니더라도) 많은 소설가들이 강조하고 활용하는 작법이다. 다만 성혜령 씨의 소설은 중반부까지 읽어도 그 결말이 가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비유하자면 사건 A와 사건 B가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도미노' 같은 모양새가 일반 소설인데, 성혜령 씨의 소설은 그 도미노가 방향을 틀어 사건 S로 넘어간달까…… 나쁜 말로 하자면 이야기의 갈피가 안 잡히는 '산으로 가는 이야기'로 비치겠지만, 나는 이 기질 또한 소설가가 갖추면 좋을 덕목 중 하나라고 본다. 어쨌든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니까. 그리고 위의 전승민 씨의 글을 읽은 만큼, 나는 이 소설집을 엔트로피라는 관점에서 읽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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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등단작인 「윤 소 정」을 보자. 세 사람(윤, 소, 정)은 과거 입시 학원 버스에서 만났다가 직장을 갖거나 결혼을 하면서 뿔뿔이 흩어진 친구 사다. 그러나 소원해진 관계 뒤에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서른 번째 생일날 서남부 유럽을 여행할 계획으로 세 사람분의 예산을 모았던 정이 그만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이다. 죄책감에 빠진 정에게 윤과 소는 위로를 건넸지만 사라진 돈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 뒤로 정은 두 사람과 멀어졌다. 윤과 소도 딱히 정을 붙잡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 정이 선뜻 두 사람을 집에 초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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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기까지 봤으면 소설깨나 읽으신 분들께서는 다음 내용이 유추될 것이다. 세 사람이 서로 화해하든지 아니면 그 시절을 묻어두고 다시 제 갈 길로 가든지. 성혜령 씨가 택한 길은 그 무엇도 아니다. 그 결말은 나로서는 꽤 충격적이고 찜찜했는데…… 그 역시 나쁘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궁금할 것 같다. 과연 정의 남자친구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거의 몇 년 만에 정을 만난 소와 정, 그리고 적어도 두 사람보다 최근의 정을 잘 알고 있을 동거인 남자친구. 누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겠는가. 성혜령 씨가 남자친구를 수성 쩍은 존재인 채 놔둔 것이 이 소설의 서스펜스와 불온한 기운을 살리도록 한몫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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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역시 엔트로피 개념으로 접근해 보면. 처음에 세 사람의 만남이 있고 → 사기 사건으로 관계가 해체된 다음 → 재결합의 기미가 보이지만 이미 다른 관계(남자친구)가 더해졌고 → 정의 어머니를 뵈러 버스를 탄다. 「윤 소 정」에서 보이는 엔트로피 증가 양상은 낯선 인물의 확대, 그리고 (결말부에 등장하는) 공간 이동까지 확장된다. 이 도식에 더 잘 들어맞는 소설은 표제작인 「버섯 농장」이다. 이는 휴대폰 결제 사기를 당한 진화와 이를 돕는 친구 기진의 모험 이야기로, 인물 관계는 [전남친 → 전남친의 군대 후임 → 그 후임의 아버지]까지 확장되며 공간도 [요양병원 → 버섯 농장]까지 확장된다 ― 장담하건대, 이렇게 도식화된 인물과 장소만 보고 이 소설의 내용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소설의 줄거리를 종잡기는 힘들다. 특히 결말부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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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말이 나온 김에. 「버섯 농장」의 결말은 당혹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 당혹스러움, 의외의 상황이 생각보다 기억에 선명하게 찍혔다. 그들이 저지른 행동에 너무 차분하다는 것만 빼면…… 누군가 이를 영화로 만들 것 같은 예감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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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가 엔트로피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 도식에 들어가지 않는 단편들은 덜 흥미로웠다. 예컨대 「물가」의 주인공 '나'는 '유안'이 기르는 치와와 '치약이'를 임시로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커뮤니티 앱에서 만난 '크림'을 알게 되지만 딱 거기까지다. 소설은 주인공이 사는 물가 근처를 벗어나지 않고, 결말부에 맞닥뜨리는 사고에도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물가를 벗어나려 하는 그 찰나에 소설이 끝난다. 또 다른 예시로 「마구간에서 하룻밤」도 있다. 마구간이라는 공간에 자꾸만 사람이 들이닥친다는 설정은 「주말부부」와 흡사하지만 그 결은 다르다. 「주말부부」 속 손님들은 주인공 조오의 입장에서 완전히 낯선 사람들인 데 반해 「마구간에서 하룻밤」은 주인공 문진이 아는 사람, 혹은 마구간을 보러 온 노부부로 신원이 명확하다. 그래서 후자는 초반부부터 긴장감이 덜하다 ― 물론 나중 가서 손님들에게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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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렇게 갈무리하면서 보니 더 선명해진다. 여기 소설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의 패턴은 비슷비슷하다. 낯선 자의 침입이 있고, 그 자와 기묘한 공존(불화까지 가지는 않는)을 시작한다. 이때 '침입 이후'로 이어질 이야기가 성혜령표 소설의 핵심 키(key)가 아닐까 싶다. 내 삶에 갑자기 끼어든 치약이(「물가」)가, 군인(「사태」)이, 아버지의 친구(「간병인」)가 얼마나 흥미로운가? 불쾌한가? 기괴한가? 그런 그들에 주인공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들은…… 어떤 버섯인가? 그들에 관해 잘 아는가? 가까이 두어도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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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 글을 쓰는 오늘, 그러니까 26년 9월 2일에 성혜령 씨의 두 번째 소설집 『대부호』가 출간됐다. 출판사는 문학동네. 조만간 두 번째 소설집이 출간되리라 기대했지만…… 이렇게 기묘한 타이밍일 줄 몰랐다. 내가 흥미롭게 읽은 「원경」도 그 소설집에 실렸다고 한다. 출간을 축하드리며, 새 책도 조만간 만나기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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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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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사회학 연구자 겸 페미니스트인 이라영 씨가 쓴, 말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다. 내가 작가를 소개하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꺼냈는데 혹시 그 말이 당신을 불편하게 했는가? 그 말만 듣고도 이 책이 대략 어떤 논조를 취할지, 특정 성별을 지지하거나 헐뜯는 식으로 제 주장을 펼치겠거니 예측했는가?

  분명 '말에 관한 담론'이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워딩에서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신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분이야말로 이 책의 독자로 환영받을 사람이다. 저자는 『말을 부수는 말』을 통해 평소 우리가 무심결에 쓰는 말에 파고든 오해와 편견 내지 그릇된 표현을 지적하고 분석한다. 비단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아니라 노동자, 장애인, 흑인처럼 오랜 시간 사회적으로 배척된 이들까지 포괄하면서 말이다.


  예시 하나. 유모차에서 유아차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움직임에 관해 생각해 보자. 바뀐 표현이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그 말이 입에 익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자세히 뜯어보면 '유아차'가 실제에 부합하는 표현이다. 이런 언어 교정은 보다 정확한 표현을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성 갈등(sexual conflicts) 조장 활동 중 하나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나도 이들의 말이 아주 틀리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모차의 '모(母)'라는 말이 '엄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유모(nanny)'라는 직업에서 따왔기 때문에 성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내 생각은 이렇다. '유모'는 다른 아기에게 제 모유를 먹이고 키운 여성을 뜻하는 말로, 현대에는 사실상 그 의미가 거의 퇴색된 상태다(요새는 젖동냥을 다닐 필요 없이 아이에게 분유를 사 먹이면 된다). 그러므로 돌아가서, 유모라는 말을 굳이 살릴 필요 없이 유아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게 오늘날에 더 정확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유모차를 유아차라고 부른다고 해서 언어적 혼선을 야기하지 않는다. 어, 유아차가 뭐지? 하고 잘 쓰던 단어를 괜히 생뚱맞게 바꿔놨느냐는 비판이 나올 우려가 없을 만큼, '유아차'는 의미 파악에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단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있지 않았다. 이 말이 여성주의자들의 성 갈등 조장 및 언어 검열 활동인지, 그 여부가 더 크게 문제시됐다.

  결론이 어째서 그렇게 된 걸까.

  유모차에서 유아차라고 용어를 바꿨다. 아이들이 타는 차라서 유모를 유아라고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어째서 육아의 역할을 남성한테 전가하려 드는 여성주의자들의 암호로 와전된 것일까. '모'가 '아'에서 바뀐 과정에 어디에도 남성의 역할을 따지는 맥락은 없었는데. 여기에 내가 알아채지 못한 사회 · 정치적인 외압이 따라붙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여타의 사정들을 제하고 오직 단어 그대로만 보자면 '유아차'에 별다른 선동적인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두고 여성주의니 검열이니 운운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는가? 이게 내 생각이다.


  이런 언어 차원의 오해와 편견이 '유아차'뿐일 리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가장 큰 감상은, 얼마나 우리 사회에 비틀리고 어그러진 언어가 만연한지를 봤다는 거다. 어떤 말은 살아남는 반면 어떤 말은 죽고 만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외압에 의해, 특정 표현이 부름을 받고 다른 표현이 묵살당한다면 어떠한가. 대체할 만한 좋은 표현이 있는데도 부정확한 낡은 표현이 고수된다면 어떠한가. 여기서 저자는 정직한 표현을 묵살하려는 움직임이 지배 계층, 오늘날 기득권 자리를 꿰차는 세력들의 소행에 있다고 봤다 - 저자의 정치적 견해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_혐오의 언어가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것에 비하면 저항의 언어는 늘 순탄하지 못하다. 내가 말하는 '저항의 언어'는 정확한 언어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정확하게 보려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것, 권력이 정해준 언어에 의구심을 품는다는 뜻이다. 권력이 저항의 언어를 항상 진압하는 이유다. 그 대신 권력의 기준으로 왜곡된 언어를 적극적으로 유포한다.

p.8-9


  또한 그 같은 권력을 차지한 이들은 대체로 보수 정당, 가부장제의 혜택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게 될 남성들이라고 봤다. 이런 시선을 저자가 뒀기 때문에 나 같은 남성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수용할 여지와 반박할 여지를 나란히 둘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모든 말을 우리가 경전처럼, 정답처럼 따를 필요는 없다. 저자도 말했듯이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라, 화두를 던지기 위해 쓴다. 권력의 말을 부수는 저항의 말이 더 많이 울리길 원한다"니까, 나도 그녀의 말을 무작정 수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시선에 여러모로 동감했으며, 더불어 내 평소 언어 습관에 관해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에도 사회적 압력이 깔려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예시 둘.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 같은 말이 있다. 우리는 흔히 경험 없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이라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구박과 타박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을 늘여뜨리는 기성세대를 낮잡아 '꼰대'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향해 괜한 조언일랑 접어두고 그냥 '지갑'을 열라고 요청한다. 이 말이 우스갯소리인가? 이런 말은 상대적으로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노년층에게 제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오직 돈뿐임을 시사하는 사회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늙어서 지갑을 열 수 있는, 부를 축적한 사람만이 인정받는 현대 사회상을 반영하는 좋은(하지만 나쁜) 문장일지도 모르고.


  _존중받는 늙음의 보조 도구는 오직 돈이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라'고 한다. 지갑으로 대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우아함'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지갑을 여는 사람이 입도 잘 열고, 그들의 말이 세상에 더 잘 들린다. 다시 말해 지갑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입도 열지 못한다.

p.80


  치맛바람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요새 의미가 많이 퇴색되기야 했으나 이 말의 본뜻은 "여성의 드세거나 극성스러운 사회 활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사회용어"다. 쉽게 풀어 자식들의 성공과 출세 가도를 위해 손발 걷어붙인 어머니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데, 이게 비단 어머니들의 문제일 리 없다. 고도로 발달한 성공 지상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가 일으킨 사회 풍토랄 게 결국 어머니들을 악착같이 몬 것은 아닐까?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또 어떤가? 저출산 문제는 저출산 문제고 고령화 문제는 고령화 문제다. 둘은 쌍방으로 영향은 있을지언정 엄연히 다른 문제이고 해결 방안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세간에는 고령화 문제가 저출산에 달린 것처럼, 그래서 여성들이 출산만 하면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레 해소될 것처럼 바라보지 않는가?


  이러한 사소한 언어부터 정책 결정까지, 언어는 우리 생활에 상당 부분 밀접해 있다. 언어로 사고하는 우리 입장에서 언어 주위에 어른거리는 허깨비를 벗겨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이 대신 "몇 학번이세요?"라고 물으며 은연중에 학력주의를 뽐내는 습관을,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일부러 그럴싸하게 과장되고 비논리적인 비유법을 즐겨 쓰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_수사 과잉은 점점 극단적인 언어를 낳는다.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황교안은 공수처 설립을 반대하며 기자회견을 통해 "공수처는 독일 나치의 정치 경찰인 게슈타포가 될 것"이라 했다. '좌파독재'라는 언어를 사용하던 그는 '나치'와 '게슈타포'의 의미도 바꿔나갔다. 쉽지만 잘못된 말, 의미가 텅 빈 화려한 수사야말로 경계의 대상이다. 게다가 망언이 항상 상스럽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꽤 그럴 듯하게 들린다.

p.129


  그렇다면 이 같은 언어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정확한 언어 표현을 지향하면 될 일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도 곧 '정확한' 말이다 5).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과장된 비유를 걷어낸, 어쩌면 '정직한'이라는 형용사가 딱 어울릴 법한 말. 이 말은 평소 독서와 글짓기(이 같은 독후감을 포함해서)를 취미로 삼은 내게 큰 귀감이 됐다. 내가 무심결에 뱉은 말속에 알게 모르게 상대방을 두고 벽을 치는 단어가 섞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언어는 지나치게 명료해 보여서, 단순치 않은 일까지 단순하게 전시하는 게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



  2.

  한편으로 저자 또한 언어의 틀에서 사고하고 있다. 따라서 온전하지 못하고 오해를 부르는 표현을 쓰는 데 자유롭지 못하다. 나 또한 내 말이 일으킬 오해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얘기해 본다.

  페미니즘 도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남성 중심적 사고가 그토록 세상을 반쪽짜리로 만들었으니 여성주의적 사고가 등장해야 한다는 말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은 무엇일까? 오늘날 남성들은 어떻게 페미니즘에 동참할 수 있을까? 내가 접해본 페미니즘 도서들은 안타깝게도 이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었다. 마치 남성 독자는 미처 상정하지 못한 것처럼.


  애초에 '페미니즘'이라는 말부터가 (저자가 본문에서 '가족'을 설명할 때 말했듯) 배제의 언어 성향을 띤다. 여성을 뜻하는 어간 'femi-'를 쓴 이상 페미니즘은 여성을 중점에 둔, 달리 말해 남성을 후순위에 둔 이론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성주의는 평등주의가 아니다. 남성주의가 이성과 정의의 동의어가 아니듯, 여성주의도 감성과 공정의 동의어가 아니다. 개중에는 페미니즘을 진정한 선(善)으로 생각해서 과도한 찬양을 보이거나("왜 페미니즘을 안 하세요?" "페미니즘을 모르면 공부하세요") 반대로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페미 묻으셨어요?" "페미니스트시면서 왜 힘든 일을 남자에게 떠넘기세요?"), 이 또한 언어의 허깨비가 일으킨 착시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공정한가? 정의로운가? 평화주의인가? 글쎄, 내 생각에 페미니즘은 그냥 페미니즘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성 혐오 용어들은 저자의 착실한 조사와 인용문들로 분석된다. 이들을 본문에서 설명할 때 쓰인 주석들로도 모자랐는지, 뒤에 딸린 미주는 무려 105개나 된다. 그런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 대목은 남성 혐오를 설명하는 저자의 말에 있었다.


  _그렇다면 '남성혐오 용어'는 무엇인가. 오조오억, 허버허버, 웅앵웅 등이라고 한다. 이 언어들의 기원을 굳이 따져보면 처음에는 인터넷상의 신조어였으나 여성들이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할 때 사용한다면서 '남성혐오'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여성들의 언어를 모두 남성혐오로 규정하여 입을 틀어막으려는 전략이다. 여성들이 현상을 묘사하거나 반영하여 생각, 느낌, 개념을 전달하는 언어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것, 다시 말해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언어를 만들고 유통하는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문화적 입마개를 씌우는 행동이다.

p.199


  이 말을 비롯해서 다른 말도 가져와 보자.

  _우리 현실에서 보면 대체로 억울함을 대하는 방식은 이와는 반대로 움직인다. 사사로운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정작 다른 사람도 억울해질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오히려 방관한다. 예를 들어 백인이어서 잠재적 인종차별주의자로 여겨지거나, 남성이라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여겨진다면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닌데, 왜 나를 의심하느냐며 몹시 분노하고 억울해한다. 이런 억울함은 굳이 밝히려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감정은 자신의 위치가 만들어낸 권력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p.111


  저자가 남성을 어떤 위치로 이해하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오랫동안 기득권을 사수한 남성들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욕과 멸시를 당하기에 남성들은 사회적으로 높고 견고한 위치를 선점했으며, 여성이 그들에게 행한 공격은 바위 같은 권력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라 "억울"할 일도 아니라고. 위의 남성 혐오 표현이나 모 편의점 포스터의 집게손가락 모양은 여성의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언어를 만들고 유포하는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그 말들은 "여성들이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할 때 사용한다면서 '남성혐오'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여성에게 입마개를 씌"운다고.


  그런데 이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기득권자라고 해서 비기득권자들에게 모욕당할 수 없는가? 앞서 백인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를 치환해 보자. 흑인이 백인에게 행한 모욕은 모욕으로 성립되지 않는가? 백인은 흑인이 행한 혐오를 억울해하지 말고 잠자코 듣고 있어야 하는가?

  보통 우리는 법적 보호를 받는 미성년자의 범법 행위도 -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을지 몰라도 - 범죄라고 생각한다. 누가 행하든, 혐오는 혐오다. 저 말이 진짜 혐오 표현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저 말들이 사실상 인터넷에서 혐오를 목적으로 쓰인 바 있지 않는가? 왜 저자는 그토록 많은 주석과 미주를 활용했음에도 남성 혐오 표현에 관해서는 별말이 없었을까. 어휘의 기원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파악하는 저자가 이에 한해서는 "기원을 굳이 따져보면" 운운하며 소홀히 대했을까, 굳이. 이런 나도 페미니스트들의 입에 입마개를 씌우는 사람인가?


마찬가지로 저자의 비유나 고찰도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로 여성상을 포착한 그림에 관한 서술이 그러하다. 내가 저자보다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저자는 예술사회학 연구자다) 미술사에 문외한이라 그럴지 몰라도, 일단 쓰인 글만 딱 봤을 때, 독자로서 왜 이런 결론이 도출되는지 의문스러워서 인용해 봤다.


  _민족의 단결을 위해 일제시대 후반부터 모성을 강조하는 그림이 증가하여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사회가 힘들면 힘들수록 책임감 있고 희생적인 강한 어머니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쟁을 거치며 실제로 아버지가 부재하기도 했지만, 살아 있다고 해도 '가장'의 역할을 하기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때 모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주로 어린 아들을 안고 있거나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성에 대한 강조는 여성을 전통적인 성역할에 가두려는 의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하지 못한 채 '영원한 아들'의 정체성에 갇힌 가부장제 남아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숭배하는 듯 보이는 이 아들들은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상실한 남성권력을 복구하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여성을 멸시한다.

p.221


  어머니의 위대함을 표현한 그림이 남성 권력을 복구하는 수단이었다는 시선은 그럴싸하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해석이다. 미술사조를 잘 모르는 나 같은 감상자가 어머니 그림을 보고 과연 그 같은 해석을 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애초에 위대한 어머니 상을 그린 게 여성 혐오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진담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해석이면 남자들은 여자를 그려서도 안 되고 소재 삼아서도 안 된다 - 이건 나의 언어가 일으킨 비약일 테다.



/



  3.

  아무튼 언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수록 표현은 더 힘들어질 테지만, 분명 결과는 값질 테다. 저자가 이 책에서 시도한 '도전'만큼, 내 독후감도 상당히 '도전'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덧붙여 내가 후술한 아쉬운 면은 이 책의 사소한 일부에 불과하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분명 훌륭한 내용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말에 관한 논평이며, 보다 올바른 말을 향한 저자의 집념이자 "화두를 던지기 위한" 도화선과 같다. 두세 번 더 읽어볼 생각이다.



  p.s: 굳이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싶긴 하나, 내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을 테고, 나 또한 이런 저런 책을 더 읽어가며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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