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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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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사회학 연구자 겸 페미니스트인 이라영 씨가 쓴, 말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다. 내가 작가를 소개하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꺼냈는데 혹시 그 말이 당신을 불편하게 했는가? 그 말만 듣고도 이 책이 대략 어떤 논조를 취할지, 특정 성별을 지지하거나 헐뜯는 식으로 제 주장을 펼치겠거니 예측했는가?

  분명 '말에 관한 담론'이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워딩에서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신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분이야말로 이 책의 독자로 환영받을 사람이다. 저자는 『말을 부수는 말』을 통해 평소 우리가 무심결에 쓰는 말에 파고든 오해와 편견 내지 그릇된 표현을 지적하고 분석한다. 비단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아니라 노동자, 장애인, 흑인처럼 오랜 시간 사회적으로 배척된 이들까지 포괄하면서 말이다.


  예시 하나. 유모차에서 유아차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움직임에 관해 생각해 보자. 바뀐 표현이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그 말이 입에 익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자세히 뜯어보면 '유아차'가 실제에 부합하는 표현이다. 이런 언어 교정은 보다 정확한 표현을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성 갈등(sexual conflicts) 조장 활동 중 하나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나도 이들의 말이 아주 틀리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모차의 '모(母)'라는 말이 '엄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유모(nanny)'라는 직업에서 따왔기 때문에 성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내 생각은 이렇다. '유모'는 다른 아기에게 제 모유를 먹이고 키운 여성을 뜻하는 말로, 현대에는 사실상 그 의미가 거의 퇴색된 상태다(요새는 젖동냥을 다닐 필요 없이 아이에게 분유를 사 먹이면 된다). 그러므로 돌아가서, 유모라는 말을 굳이 살릴 필요 없이 유아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게 오늘날에 더 정확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유모차를 유아차라고 부른다고 해서 언어적 혼선을 야기하지 않는다. 어, 유아차가 뭐지? 하고 잘 쓰던 단어를 괜히 생뚱맞게 바꿔놨느냐는 비판이 나올 우려가 없을 만큼, '유아차'는 의미 파악에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단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있지 않았다. 이 말이 여성주의자들의 성 갈등 조장 및 언어 검열 활동인지, 그 여부가 더 크게 문제시됐다.

  결론이 어째서 그렇게 된 걸까.

  유모차에서 유아차라고 용어를 바꿨다. 아이들이 타는 차라서 유모를 유아라고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어째서 육아의 역할을 남성한테 전가하려 드는 여성주의자들의 암호로 와전된 것일까. '모'가 '아'에서 바뀐 과정에 어디에도 남성의 역할을 따지는 맥락은 없었는데. 여기에 내가 알아채지 못한 사회 · 정치적인 외압이 따라붙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여타의 사정들을 제하고 오직 단어 그대로만 보자면 '유아차'에 별다른 선동적인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두고 여성주의니 검열이니 운운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는가? 이게 내 생각이다.


  이런 언어 차원의 오해와 편견이 '유아차'뿐일 리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가장 큰 감상은, 얼마나 우리 사회에 비틀리고 어그러진 언어가 만연한지를 봤다는 거다. 어떤 말은 살아남는 반면 어떤 말은 죽고 만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외압에 의해, 특정 표현이 부름을 받고 다른 표현이 묵살당한다면 어떠한가. 대체할 만한 좋은 표현이 있는데도 부정확한 낡은 표현이 고수된다면 어떠한가. 여기서 저자는 정직한 표현을 묵살하려는 움직임이 지배 계층, 오늘날 기득권 자리를 꿰차는 세력들의 소행에 있다고 봤다 - 저자의 정치적 견해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_혐오의 언어가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것에 비하면 저항의 언어는 늘 순탄하지 못하다. 내가 말하는 '저항의 언어'는 정확한 언어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정확하게 보려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것, 권력이 정해준 언어에 의구심을 품는다는 뜻이다. 권력이 저항의 언어를 항상 진압하는 이유다. 그 대신 권력의 기준으로 왜곡된 언어를 적극적으로 유포한다.

p.8-9


  또한 그 같은 권력을 차지한 이들은 대체로 보수 정당, 가부장제의 혜택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게 될 남성들이라고 봤다. 이런 시선을 저자가 뒀기 때문에 나 같은 남성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수용할 여지와 반박할 여지를 나란히 둘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모든 말을 우리가 경전처럼, 정답처럼 따를 필요는 없다. 저자도 말했듯이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라, 화두를 던지기 위해 쓴다. 권력의 말을 부수는 저항의 말이 더 많이 울리길 원한다"니까, 나도 그녀의 말을 무작정 수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시선에 여러모로 동감했으며, 더불어 내 평소 언어 습관에 관해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에도 사회적 압력이 깔려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예시 둘.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 같은 말이 있다. 우리는 흔히 경험 없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이라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구박과 타박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을 늘여뜨리는 기성세대를 낮잡아 '꼰대'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향해 괜한 조언일랑 접어두고 그냥 '지갑'을 열라고 요청한다. 이 말이 우스갯소리인가? 이런 말은 상대적으로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노년층에게 제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오직 돈뿐임을 시사하는 사회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늙어서 지갑을 열 수 있는, 부를 축적한 사람만이 인정받는 현대 사회상을 반영하는 좋은(하지만 나쁜) 문장일지도 모르고.


  _존중받는 늙음의 보조 도구는 오직 돈이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라'고 한다. 지갑으로 대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우아함'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지갑을 여는 사람이 입도 잘 열고, 그들의 말이 세상에 더 잘 들린다. 다시 말해 지갑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입도 열지 못한다.

p.80


  치맛바람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요새 의미가 많이 퇴색되기야 했으나 이 말의 본뜻은 "여성의 드세거나 극성스러운 사회 활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사회용어"다. 쉽게 풀어 자식들의 성공과 출세 가도를 위해 손발 걷어붙인 어머니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데, 이게 비단 어머니들의 문제일 리 없다. 고도로 발달한 성공 지상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가 일으킨 사회 풍토랄 게 결국 어머니들을 악착같이 몬 것은 아닐까?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또 어떤가? 저출산 문제는 저출산 문제고 고령화 문제는 고령화 문제다. 둘은 쌍방으로 영향은 있을지언정 엄연히 다른 문제이고 해결 방안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세간에는 고령화 문제가 저출산에 달린 것처럼, 그래서 여성들이 출산만 하면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레 해소될 것처럼 바라보지 않는가?


  이러한 사소한 언어부터 정책 결정까지, 언어는 우리 생활에 상당 부분 밀접해 있다. 언어로 사고하는 우리 입장에서 언어 주위에 어른거리는 허깨비를 벗겨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이 대신 "몇 학번이세요?"라고 물으며 은연중에 학력주의를 뽐내는 습관을,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일부러 그럴싸하게 과장되고 비논리적인 비유법을 즐겨 쓰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_수사 과잉은 점점 극단적인 언어를 낳는다.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황교안은 공수처 설립을 반대하며 기자회견을 통해 "공수처는 독일 나치의 정치 경찰인 게슈타포가 될 것"이라 했다. '좌파독재'라는 언어를 사용하던 그는 '나치'와 '게슈타포'의 의미도 바꿔나갔다. 쉽지만 잘못된 말, 의미가 텅 빈 화려한 수사야말로 경계의 대상이다. 게다가 망언이 항상 상스럽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꽤 그럴 듯하게 들린다.

p.129


  그렇다면 이 같은 언어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정확한 언어 표현을 지향하면 될 일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도 곧 '정확한' 말이다 5).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과장된 비유를 걷어낸, 어쩌면 '정직한'이라는 형용사가 딱 어울릴 법한 말. 이 말은 평소 독서와 글짓기(이 같은 독후감을 포함해서)를 취미로 삼은 내게 큰 귀감이 됐다. 내가 무심결에 뱉은 말속에 알게 모르게 상대방을 두고 벽을 치는 단어가 섞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언어는 지나치게 명료해 보여서, 단순치 않은 일까지 단순하게 전시하는 게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



  2.

  한편으로 저자 또한 언어의 틀에서 사고하고 있다. 따라서 온전하지 못하고 오해를 부르는 표현을 쓰는 데 자유롭지 못하다. 나 또한 내 말이 일으킬 오해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얘기해 본다.

  페미니즘 도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남성 중심적 사고가 그토록 세상을 반쪽짜리로 만들었으니 여성주의적 사고가 등장해야 한다는 말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은 무엇일까? 오늘날 남성들은 어떻게 페미니즘에 동참할 수 있을까? 내가 접해본 페미니즘 도서들은 안타깝게도 이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었다. 마치 남성 독자는 미처 상정하지 못한 것처럼.


  애초에 '페미니즘'이라는 말부터가 (저자가 본문에서 '가족'을 설명할 때 말했듯) 배제의 언어 성향을 띤다. 여성을 뜻하는 어간 'femi-'를 쓴 이상 페미니즘은 여성을 중점에 둔, 달리 말해 남성을 후순위에 둔 이론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성주의는 평등주의가 아니다. 남성주의가 이성과 정의의 동의어가 아니듯, 여성주의도 감성과 공정의 동의어가 아니다. 개중에는 페미니즘을 진정한 선(善)으로 생각해서 과도한 찬양을 보이거나("왜 페미니즘을 안 하세요?" "페미니즘을 모르면 공부하세요") 반대로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페미 묻으셨어요?" "페미니스트시면서 왜 힘든 일을 남자에게 떠넘기세요?"), 이 또한 언어의 허깨비가 일으킨 착시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공정한가? 정의로운가? 평화주의인가? 글쎄, 내 생각에 페미니즘은 그냥 페미니즘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성 혐오 용어들은 저자의 착실한 조사와 인용문들로 분석된다. 이들을 본문에서 설명할 때 쓰인 주석들로도 모자랐는지, 뒤에 딸린 미주는 무려 105개나 된다. 그런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 대목은 남성 혐오를 설명하는 저자의 말에 있었다.


  _그렇다면 '남성혐오 용어'는 무엇인가. 오조오억, 허버허버, 웅앵웅 등이라고 한다. 이 언어들의 기원을 굳이 따져보면 처음에는 인터넷상의 신조어였으나 여성들이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할 때 사용한다면서 '남성혐오'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여성들의 언어를 모두 남성혐오로 규정하여 입을 틀어막으려는 전략이다. 여성들이 현상을 묘사하거나 반영하여 생각, 느낌, 개념을 전달하는 언어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것, 다시 말해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언어를 만들고 유통하는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문화적 입마개를 씌우는 행동이다.

p.199


  이 말을 비롯해서 다른 말도 가져와 보자.

  _우리 현실에서 보면 대체로 억울함을 대하는 방식은 이와는 반대로 움직인다. 사사로운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정작 다른 사람도 억울해질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오히려 방관한다. 예를 들어 백인이어서 잠재적 인종차별주의자로 여겨지거나, 남성이라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여겨진다면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닌데, 왜 나를 의심하느냐며 몹시 분노하고 억울해한다. 이런 억울함은 굳이 밝히려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감정은 자신의 위치가 만들어낸 권력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p.111


  저자가 남성을 어떤 위치로 이해하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오랫동안 기득권을 사수한 남성들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욕과 멸시를 당하기에 남성들은 사회적으로 높고 견고한 위치를 선점했으며, 여성이 그들에게 행한 공격은 바위 같은 권력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라 "억울"할 일도 아니라고. 위의 남성 혐오 표현이나 모 편의점 포스터의 집게손가락 모양은 여성의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언어를 만들고 유포하는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그 말들은 "여성들이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할 때 사용한다면서 '남성혐오'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여성에게 입마개를 씌"운다고.


  그런데 이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기득권자라고 해서 비기득권자들에게 모욕당할 수 없는가? 앞서 백인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를 치환해 보자. 흑인이 백인에게 행한 모욕은 모욕으로 성립되지 않는가? 백인은 흑인이 행한 혐오를 억울해하지 말고 잠자코 듣고 있어야 하는가?

  보통 우리는 법적 보호를 받는 미성년자의 범법 행위도 -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을지 몰라도 - 범죄라고 생각한다. 누가 행하든, 혐오는 혐오다. 저 말이 진짜 혐오 표현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저 말들이 사실상 인터넷에서 혐오를 목적으로 쓰인 바 있지 않는가? 왜 저자는 그토록 많은 주석과 미주를 활용했음에도 남성 혐오 표현에 관해서는 별말이 없었을까. 어휘의 기원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파악하는 저자가 이에 한해서는 "기원을 굳이 따져보면" 운운하며 소홀히 대했을까, 굳이. 이런 나도 페미니스트들의 입에 입마개를 씌우는 사람인가?


마찬가지로 저자의 비유나 고찰도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로 여성상을 포착한 그림에 관한 서술이 그러하다. 내가 저자보다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저자는 예술사회학 연구자다) 미술사에 문외한이라 그럴지 몰라도, 일단 쓰인 글만 딱 봤을 때, 독자로서 왜 이런 결론이 도출되는지 의문스러워서 인용해 봤다.


  _민족의 단결을 위해 일제시대 후반부터 모성을 강조하는 그림이 증가하여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사회가 힘들면 힘들수록 책임감 있고 희생적인 강한 어머니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쟁을 거치며 실제로 아버지가 부재하기도 했지만, 살아 있다고 해도 '가장'의 역할을 하기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때 모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주로 어린 아들을 안고 있거나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성에 대한 강조는 여성을 전통적인 성역할에 가두려는 의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하지 못한 채 '영원한 아들'의 정체성에 갇힌 가부장제 남아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숭배하는 듯 보이는 이 아들들은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상실한 남성권력을 복구하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여성을 멸시한다.

p.221


  어머니의 위대함을 표현한 그림이 남성 권력을 복구하는 수단이었다는 시선은 그럴싸하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해석이다. 미술사조를 잘 모르는 나 같은 감상자가 어머니 그림을 보고 과연 그 같은 해석을 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애초에 위대한 어머니 상을 그린 게 여성 혐오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진담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해석이면 남자들은 여자를 그려서도 안 되고 소재 삼아서도 안 된다 - 이건 나의 언어가 일으킨 비약일 테다.



/



  3.

  아무튼 언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수록 표현은 더 힘들어질 테지만, 분명 결과는 값질 테다. 저자가 이 책에서 시도한 '도전'만큼, 내 독후감도 상당히 '도전'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덧붙여 내가 후술한 아쉬운 면은 이 책의 사소한 일부에 불과하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분명 훌륭한 내용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말에 관한 논평이며, 보다 올바른 말을 향한 저자의 집념이자 "화두를 던지기 위한" 도화선과 같다. 두세 번 더 읽어볼 생각이다.



  p.s: 굳이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싶긴 하나, 내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을 테고, 나 또한 이런 저런 책을 더 읽어가며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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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 감정의 연대기 1929~1939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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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중요한 몇몇 장면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세계대전이다. 이 전쟁은 전인류에게 어느 정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결코 그 같은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줬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세계는 다시 평화를 지루하게 느꼈는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장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그렇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렇다. 이들만큼 과격한 형태는 아니지만, 현재 북한에서 삼팔선 너머로 삐라를 날리고 있다. 예전 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날의 얘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 얘기를 지겹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내가 꼭 전쟁 얘기에 항상 관심을 갖자는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당장 나조차도 세계 각지의 전쟁 소식에 그리 귀 기울이는 편이 아니니까. 아마 당장의 우리가 평화에 익숙해진 것도 있고, 많은 경우 전쟁과 같은 역사담이 '이미 지난' 일처럼 비춰져서 그런 것 같다. 요컨대 우리는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해 배웠고, 거기서 배울만큼 배웠다. 거기서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을까.




플로리안 일리스가 쓴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도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상을 제시한다. 제목에 딸린 부제 '감정의 연대기 1929 ~1939'는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터진 대공황, 나치즘, 그리고 제2차 세걔대전 발발의 위험이 도사리는 시기를 짚어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20세기 초반은 여타의 역서 서적들과 사뭇 다르다. 시작은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폴 사르트르의 눈맞춤이다. 이들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결혼을, 자세히 말해 계약 결혼을 맺게 될 테지만 당장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날, 그는 퇴짜를 맞았다. 시몬의 여동생 엘렌 드 보부아르의 말에 따르면, "키가 작고, 안경을 썼고, 아주 못생" 긴 그였기에.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자. 비슷한 시기로 추정되는 어느 늦은 오후. 시인 마샤 칼레코는 베를린 서부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녀는 집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곳 카페에서 다른 이들과 수다를 떨고 활력을 느끼는 게 즐겁다. 이들 중에 물론 남자도 섞여 있다. 남편은 그런 아내더러 뭐라 말하지 않으나 점차 과묵해질 따름이다.




유명 할리우드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토마스 만의 아들이자 동성애에 관한 소설을 쓴 클라우스 만, 복잡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 파블로 피카소, 자신이 벌써 구세대가 되어간다고 느낀 시인 겸 의사 고트프리트 벤, 여행지마다 새 애인을 만든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자기만의 미를 탐구한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 배우 역할로서 여성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고팠던 배우 브리기테 헬름, 망가져 버릴 대로 망가진 아내와의 관계를 문학에서라도 구제하고 싶었던 스콧 피츠제럴드...... 이 책에서 잠깐이든 여러 차례든 등장하는 인문의 이름만 나열해도 상당하다. 저자는 시인이나 소설가, 영화 감독, 배우, 사상가와 정치인 등 직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그 시절에 활동한 유명 인사들의 삶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펼친다. 이들의 생활을 한 권의 책으로 모으기 위해 저자는 무려 394권의 책과 각종 자료를 참고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옆에 작지 않은 메모지를 준비해야 했다.




실로 이 책은 단순히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수많은 이름들이, 그것도 한국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은 시인 마샤 칼레코나 소설가 에리히 뮈잠, 언론인 겸 소설가 요제프 로트같은 인물들이 틈틈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게 오늘날 독자들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오히려 우리는 수많은 이름들 속에서 삶의, 사랑의, 연애와 결혼관의 다양한 표본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직업도 성별도 달랐지만 사랑을 대하는 태도도 너무나 달랐다. 자유 연애와 기존의 결혼관이 충돌하면서 누구는 정말 자유로운 연애를 실현했다. 누구는 젊은 이들을 시샘하면서 멀찍이 바라만 봤고, 다른 누구는 복잡한 애인 관계로 곤혹을 치렀다. 누구는 사상 운동에 매진한 나머지 곁에 있던 사랑을 몰라봤고, 또 다른 누구는 자유 연애와 결혼 제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오늘날 사랑은 지극히 자유로운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비혼주의를 외치던 친구가 사르트르처럼 어떤 이에게 첫눈에 반할 수 있고, 내 연인이 알고 보니 마를레네 디트리히처럼 다른 이성들과 히히덕덕 어울리는 걸 보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동성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관한 한, 시대를 타지 않고 변치 않는 가치가 있을 거라 우리는 기대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이 책을 읽은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사실 ― 이들의 사랑은 세계사에서 가장 굵직하다고 볼 수 있는 세계대전 사이에 끼어 있었다.



/



내가 받은 티저북은 책의 일부 내용만 담겨 있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마주할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사랑은 시대에 휩쓸리는가, 아니면 시대와 상관없이 제자리를 지키는가. 다가올 정식 출간 도서에서 이를 확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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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거짓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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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이의 이름이 여러 사람에게 친숙히 들릴 것 같진 않다. 대신 그가 쓴 대표작 『책 읽어주는 남자』를 영화화한,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더 리더> 얘기를 꺼내면 '아하' 소리가 절로 나올지도. 영화에 문외한인 나도 <더 리더>는 본 적 있고, 이후 원작 소설까지 찾아 읽으며 저자의 탁월한 문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의 책에 내가 제대로 관심 갖기 시작한 계기는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2014년 제4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부터다.

  정작 잘 알려지지 못해 아쉬운 감도 드는데, 이 박경리문학상은 한국판 노벨문학상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빼어난 작가들을 소개한다. 국내 최초의 세계문학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희소하고 매력적인 해외 작가들을 폭넓게 조망하기 때문에 더 가치있다(이를 역대 수상작가 목록이 증명한다). 나도 훌륭한 외국 작가를 만날 목적으로 해당 목록을 참고하는 편이다. 베른하트트 슐링크는 네 번째로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로, 소설을 쓰기 전에 법대 교수를 재직한 특이한 약력의 소유자다.

  법대 교수 출신 소설가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답게, 그는 초창기 범죄 추리 소설을 몇 편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 이후 슐링크는 다양한 소재를 아우르며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로 발돋움했다. 이번에 내가 소개할 단편집 『여름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제목의 어감이 다소 낯설다.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명사를 나란히 배치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물음은 소설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될 텐데, 여기 실린 일곱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저자가 뜨거우면서도(여름) 서늘한(거짓말) 우리네 삶의 폐부를 들춰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람이 한 번쯤 겪기 마련인 사랑의 유혹, 질투심, 호기심...... 그 모든 걸 충족시키려 저지른 거짓말들.


  이렇게 보니 『여름 거짓말』은 심리 소설로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을 하는 행위 자체가 어떤 저의를 감추고 남을 속이는 거니까. 왜 그런 거짓을 고하게 됐는지를 (속인 사람이) 밝히거나 (속은 사람이) 밝혀내는 것도 이 소설집을 읽는 묘미겠다. 이중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단편 「바덴바덴에서 보낸 밤」은 바람 피우는 남자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대변한다 - 옹호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희곡작가로서 자신이 쓴 각본의 초연을 보러 바덴바덴으로 향했다. 테레제와 함께. 그녀는 훌륭한 동행자였고, 그를 즐겁게 해줬다. 하지만 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다음 약혼녀 안네를 마주하자 남자는 양심에 찔렸다. 그녀는 자세한 사정이야 몰랐으나 그가 여행 중에 혼자 있지 않았음을 의심하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외도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안네. 그녀에게 지난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고해야 할까?

  그는 말하지 않기를 택한다. 그녀를 배신하려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고, 다만 그러는 편이 그녀를 충분히 안심시킬 수 있고 둘 사이 관계에 있어도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 잠시 그는 안네에게 브렌너스 파크 호텔에서 보냈던 밤의 진실을 말해줄까 생각해보았다. 그래봤자 괜한 야단법석만 빚어낼 것이다! 그깟 진실이 한 시간 내내, 아니, 두 시간 동안이나 안네에게 둘러댔던 말들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뒤늦게 테레제와 보냈던 밤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괜히 그 일을 원래보다 더 부풀리는 것 아닌가? 앞으로 언젠가, 그래, 앞으로 언젠가 안네에게 진실을 말하리라. 미래를 위해 그는 약속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아무 문제도 없어, 안네. 약속할게. 울 필요 없어. 진실을 말해 주겠다고 약속할게."

p.79


  이런 거짓말은 당장의 평화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시다시피 허술한 거짓말은, 그리고 끈임없이 의심하는 사람 앞에서 한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나게 마련이다. 실제로 그날의 진실을 안네가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둘은 대판 싸웠다. 사실 일방적으로 남자가 욕을 먹긴 했지만. 남자가 잘 했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안네가 그의 잘못을 심하게 부풀리고 있다는 것도 얼마간 사실이다. 그는 테레제와 함께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안네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남녀가 호텔에서 며칠 밤을 함께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이성을 잃은 안네는 그의 면전에 침을 뱉고 손찌검을 했다. 그가 손 쓸 새 없이 안네는 등을 돌리고 떠나버렸다.

  이 순간에 그는 안네의 이해를 바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도 과거 여자친구의 외도에 좌절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느끼는 이 착잡함은, 안네를 어떤 말로도 설득시킬 수 없을 거라는 실상에 있었다. 아무리 그가 테레제와 아무 일도 없었음을 설명해도 그녀는 듣지도, 들을 생각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남자의 말을 믿지 않기로 작정했으며 안네가 듣게 될, 들어야 할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사건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는 게 의미 없었다.



  - 그 역시 안네가 주도하는 비판과 자아비판의 의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저 즐겨야 하나? 마음속으로 웃으면서 그녀가 시인을 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다 시인해야 하나?

  그러나 시인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면 전부 규명될 때까지 그녀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이렇게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명을 요구할 것이고, 또 그에 따른 비판이 이어질 것이다.

p.96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의미 없는 진실을 붙잡으며 그녀와 맞서야 하나, 또 다른 비난을 부를 줄 알면서도 더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을 시인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그가 테레제와 잤다고 거짓말하는 편이 (적어도 그녀와 둘의 관계에 있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다면,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해야 맞을 테다. 그런데 왜 그는 주저하나?

  앞선 상황,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고할지 말지의 문제는 새 얼굴로 찾아 든다. 이제 상황은 그가 바덴바덴에서 테레제와 잤는지 안 잤는지의 문제로 넘어 왔다. 두 문제는 같은 듯 다르다. 아무래도 후자의 상황에서 문제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분명해졌기도 하나...... 내 생각에 그가 주저하는 진짜 이유는, 전자가 도덕적 결함을 회피하는 거짓이라면 후자는 인정하는 거짓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이런 얘기다. 위 상황처럼 자기 잘못이지만 거짓으로 감출 수 있는 일에 우리는 주저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는 평화라는 꼬리표가 붙고 너와 나(즉 개인이 아닌 다수)를 위한 선의의 거짓으로 위장된다. 한편 자기 잘못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인정하는 일에 우리는 열불을 낸다. 아무리 공리를 위한 일이래도 내가 처한 억울함은 지워낼 수 없다. 이 둘의 차이는 당사자성에 있어 보인다. 그 거짓을 통해 다수가 이익을 보는 한이 있어도 내게 득이 못되거나 해가 되면 쓸모없다. 내 이익을 먼저 챙긴 다음, 이를 합리화할 명분으로 다수의 이익을 돌아보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거짓이 정말 안네에게 이익이 될지 소설 속 남자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진실보다 합리적인 거짓의 쓸모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지 않을까? 내 이익보다 앞서는 공리는 말 뿐인 허상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당사자성을 지적하는 또 다른 단편이 『마지막 여름』이다. 여기서 주인공 할아버지는 앓고 있는 지병을 숨긴 채 가족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아내도, 자식도, 손주도 모르게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방법이야 간단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방안에서 약을 투약한 다음 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거실로 돌아간다. 그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위안 삼아 눈을 감을 것이다. 그가 피곤해 잠든 줄 아는 가족들은 다음날이 돼서야 사실을 알아차리겠지. 하지만 계획을 실천하기도 전에 아내에게 약을 들킨 그는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아내는 그에게 크나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며, 그의 거짓이 만든 세상에서 자신은 "단역배우(본문, p.262)"일 뿐이냐고 지적했다.

  그밖의 다른 단편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야기마다 제각기 다른 거짓말을 품고 있고, 그 거짓을 바라보는 입장 차이도 생각해볼 문제를 던진다. 여담이지만 소설 속에 물음표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슐링크 소설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번역가 분은 "작중인물들은 자신이 설정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 자신이 행복이라고 느꼈던 것이 나중에 가서 보면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중략) 자신이 생각했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주인공은 인생의 다른 가정을 해본다. 슐링크의 작품에 수많은 의문문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이런 의문문들은 독자에게 생각의 갈림길에서 나름의 결정을 해야 하는 여운을 남긴다.(365)"라고 말한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소설 속 주인공들도 스스로를 향해 물음표를 남발하듯, 우리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를 명쾌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정답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 물음표 속을 헤짚다보면 말이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지금 끄집어냈다. 다시 읽게 되는 날에 또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지 않을까? '여름'과 '거짓말'이라는 두 키워드의 간극 속에서, 이토록 매혹적이고도 거짓된 이야기들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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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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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예고한 대로 박솔뫼의 초기 장편을 찾아볼까 했다. 그런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 읽지 못한 박솔뫼의 책이 한 권 더 있더라. 마침 그 책은 내가 직전에 읽은 단편이 발표된 직후 나온 장편이기도 해서 어떤 연결 고리랄 게 생겼달까. 여기까지가 내가 『도시의 시간』을 펼치게 된 사연이다. 이런 연결된 느낌은 독서를 즐기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데, 지금 내가 이런 얘기를 떠드는 이유도 박솔뫼의 소설을 즐기는 방식에 있어 이 '연결감'이 중요해 보여서다. 그러니까 박솔뫼 식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물과 공간, 공간과 사건, 사건과 인물을 연결 짓는 "아름다운 삼각형"을 그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는 뜻이다. 내 말이 소설의 각 요소들을 떼어다가 유형화하고 공식화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낼 의도는 아니다. 여기서 삼각형 구도는 수학적 도식이라기보다 작품 해설을 쓴 서평가 금정연 씨의 말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찍히는 점들을 이은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내가 추정상의 의미로 '(알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밝힌 것이다.

  요사스럽게 뒤로 빼는 문장들이 두루 보이는 바, 이번 글에서 내가 뭔가 제대로 된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미리 말하건대 참 감상평을 남기기 뭣한 소설을 읽었다. 박솔뫼의 소설을 몇 차례 접한 경험이 있어서 망정이지 생판 모르고 이 책부터 펼쳐 들었다면 당최 작가가 무얼 말하려는 걸까 난감했을 거다 - 아, 또 뒤로 빼는 소리지만, 이제는 박솔뫼의 소설을 잘 알겠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단편집에서 내가 '가히 충격적'이라고 밝힌 「안 해」를 잠시 상기해 볼까? 이 단편은 도심의 노래방에 들린 여학생이 노래방 사장에게 무력으로 제압 및 감금당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전개가 펼쳐진다. 여기서 노래방 사장은 여학생에게 다른 건 하나도 안 시키고 노래, 오로지 노래를 부르도록 시킨다.

  왜? 노래방 사장의 말에 따르면, 여학생이 노래를 열심히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열심히. 이어지는 내용에서 소설은 '열심히'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누구도, 심지어 노래방 사장도 규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장편 소설에서도 비슷한 논제가 펼쳐지고 있다. 소설의 도입부터 나는 이런 문장을 만났다.​​


  - 넌 참 못한다, 못해. 그게 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때 우나는 마늘을 까고 있었고 나와 배정은 맞은편에 앉아서 시트콤을 보고 있었다. 우나는 화장실에 가려다 미끄러져 마늘 껍질을 담아 놓은 통을 엎질렀다. 정신 없이 마늘 껍질을 주워 담으려다가 이미 깐 마늘들을 엎었다. 우나는 양손에 마늘 껍질을 쥔 채로 멍하게 까진 마늘들이 상 위를 구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우나의 엄마가 그랬다. 넌 참 못한다, 못해. 우나의 엄나는 싱크대에서 불고기 간을 보고 있다가 뒤돌아서서 그 말을 내뱉었다.​​

p.7-8


  열심히, 에 이어 못한다구나그래. 이 둘의 관계는 어느 정도 상호적인 면이 있다.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고 열심히 안 하면 못하게 된다는 식으로. 물론 이 말은 우나의 엄마 생각이고 실제로 우나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두고 봐야 한다. 요컨대 우나의 집에 놀러 온, 우나의 친구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정말로 우나는 잘하는 게 없었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참 못한다 못해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나는 우나가 좋았다. 우나를 사랑했다. 지금도 우나를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나를 생각하다 보면 우나가 뭘 잘했는지 기억이 난다. 우나는 기다리는 것을 잘했다. 가만히 있는 것을 잘했다. 정말 잘했다. 그때 나는 혼자 오래 걷는 것을 잘했는데 혼자 오래 걷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잘하는 우나와 어울리는 특기였다. 모두 미련하고 목가적이고 종교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쓸모가 없네, 그런 생각이 든다.​​

p.8


  우나도 잘하는 게 있지만 태반은 못한다. 그나마 잘하는 것조차 미련하고 목가적이고, 뭐랄까 쓸모가 없다. 이런 현대인(특히 10대 청소년)의 우울한 자화상은 이미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단편 「안 해」의 주인공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없이 '열심히'를 부정하며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단정적이게 말하는 데 반해 여기 세 친구 - 나, 우나, 배정은 좀 다르다. 이들은 그보다 할 일을 하되 잘 하는 일에 더 집중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전 소설보다 한층 밝고 긍정적인 인간형이라 봐도 좋지 않을 성싶다.


  - 우나는 설거지도 서툴렀고 방 청소라고 나을 게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잘하니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걸 했다. 나는 한없이 산만했고 학원 수업에는 집중을 하지 못했지만 걷는 것을 잘하니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해야 하니까 못하는 걸 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것을 했다.​​

p.9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게 됐다고 말이다. 이 삼각형은 양 끝으로 '나'-'잘하는 것'-'못하는 것(그러나 해야 하는)'을 배치시키며 완성된다. 다시 지난 소설집 얘기로 돌아가서, 단편 「차가운 혀」 속 주인공의 생활은 두 가지 축을 두며 이뤄짐을 확인했다. "나와 사과와 오렌지는 삼각형을 이룬다. 사람들에게는 기둥이 필요한데 내게는 그것이 사과와 오렌지인 것이다. (중략) 이것이 없다면 저것을 가져와야 했다. 하나의 세계가 흔들리면 그 흔들리는 세계와 상관없이 자신을 지켜줄 또 다른 세계가 있어야 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 같은 삼각형 대열은 박솔뫼 식 세계의 존재 방식에서 중요해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또 다른 삼각형을 알고 있지 않는가? 묘하게도 소설 속 등장인물도 알맞게 세 명이다.​​


/


  또 알아둘 필요가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미국의 포크 가수 제니 준 스미스. 그녀는 "1976년 '돌핀(dolphin)'이라는 제목의 음반을 발표, 몇 차례의 공연을 가졌다. 이후 아무런 음악을 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그의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소설의 처음부터 언급되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 가수는 우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그녀의 아버지가 우나에게 남긴 거의 유일한 추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송주영, 그러니까 우나의 아버지는 레코드 마니아로 각종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어릴 적 우나가 아빠와 함께 들었던 음반 중 하나가 예의 그 '돌핀'이었는데, 그 뒤로 송주영은 길거리에서 객사했고 제니 준 스미스는 음악사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우나가 계속해서, 여전히 그녀의 음악을 듣고 그 뒤를 캐내는 일은 기억 속 아버지를 새로 복원시키는 과정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또 다른 삼각형이 추가된다. 우나-송주영-제니 준 스미스.

  이 삼각형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게, 물론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 이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나 두 축인 '송주영-제니 준 스미스'가 상상 속 인물에 가까워서도 그렇다(이 말의 의미는 나중 가서 차차 살펴보도록 하자).

  물론 송주영과 제니 준 스미스가 허깨비 같은 존재라는 게 아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당장은 부재할지언정 한때 존재했거나 지금 잊힌 채로 존재하고 그 존재감이 우나(그리고 나)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다. "우나는 기다리는 것을 잘했다. (중략) 그때 나는 혼자 오래 걷는 것을 잘했는데 혼자 오래 걷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잘하는 우나와 어울리는 특기였다." 그렇게 우나와 내가 도시를 걸으면서 기다리는 동안, 둘이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눈 주제는 제니 준 스미스였다. 언젠가 준을 만나러 미국에 가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해야 하니까 못하는 걸 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잘하는 것을 했다."​​



/


  지나치게 우나와 나의 관계만 부각한 것 같다. 그렇지만 배정도 분명 삼각형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는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로서, 대학 시험을 세 번 떨어지고 입시 학원에 다니고 있다(나와 우나와 배정은 같은 입시 학원을 다니며 서로 친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배정이 시무룩하거나 조급해 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열중하는 것도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배정은 밝다. 배정은 내게 매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사주기도 하고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말주변이 좋은 배정은 우나의 엄마하고도 곧잘 대화를 나눈다.


  - "야, 너는 이름이 뭐니?"

  "배정인데요."

  "배정이?"

  "아니요. 배정이요."

  "배정희?"

  "아니요. 성이 배고요 이름이 정인데요. 정이요. 정."

  "오, 정이야? 이름이 외자야?"

  "네."

  "그럼, 배 군이니 정 군이니?"

  "배 군으로 부르고 싶을 때는 배 군으로 불러 주시고요."

  "정 군으로 부르고 싶을 때는 정 군으로 불러도 되니?"​​

p.9-10



  그런 배정에게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다. 싫어하는 것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온 환타("악, 환타! 나 환타 제일 싫은데! 배정은 자판기를 주먹 꽉 쥐고 쳤다. 발로 차면서 막 쳤다."), 말이 없는 우미, 갑자기 사라진 우미.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 그는 우나의 여동생 우미를 좋아했다. 나는 배정을 좋아하지만 그가 누굴 좋아해도 상관없는 양 굴었다. 이렇게 삼각형 구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우나는 실제하지만 상상 속 존재에 가까운 준을 쫓고, 배정은 실제하면서 당장 곁에 있는 우미를 쫓았다.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있고. 여기서부터 우리의 "아름다운 삼각형"이 조금씩 엇나간 게 아닐까.

  서로 쫓는 바가 다르니 우미와 배정은 점차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각형의 또 다른 한 축인 나도 점점 우나 쪽으로 쏠리게 된다. 나 또한 우미를 따라다니며 제니 준 스미스의 행방을 찾아다녔으니까 - 내가 앞서 상상 속 인물에 강조를 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우미의 삼각형 안에는 준 말고도 아버지 송주영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우미가 설정한 삼각형에서 배제된 제3자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제3자인 배정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배정은 간간이 등장할 뿐 우미와 나 사이에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


  기울어진 삼각형 구도는 종국에 해체되고 말 테다. 그런데 세 개의 축 중에서 먼저 이탈하는 존재는 우나였던 게 (독자인) 나로서는 의외였다. 외따로 떨어져 있던 배정이 아니라 나와 도시를 함께 걷던 친구 우나가 말이다. 우나는 말했다시피 송주영과 제니 준 스미스를 상상했는데, 이를 반복하자 우연찮게 우나의 엄마도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결정해 버렸다. 이걸 우연이라 해야 할지 운명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우나의 미국행 소식을 축하했지만 우나는 떨떠름해했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워했다. 상상 속 존재인 준이 현실로 튀어나오려 하자 우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 "그렇게 되는 거면, 이제 너는 만나게 되는 거잖아. 무서워도 그렇게 되면 결국엔 좋을 거야. 아냐?"

  "아닌 거 같아."

  "왜?"

  "만나길 바란 적은 없거든."​​

p.132


  - 그런 가정을 수십 번 했어. 그러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뉴욕에 가게 된 거 아닐까. 정말 가게 된다면 내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가게 된 거니까, 내가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렇게 되어 버린 거니까 나는 그게 무섭다. 내가 계속 뭔가를 해 버릴까 봐. 그래서 아주 기쁘지는 않다. 오히려 슬픈 거 같아.​​

p.131-132



  이 뒤로 소설은 더 미묘해진다. 어떻게? 그것까지 내가 이 글에서 밝히지는 않겠다. 살짝 귀띔하자면 나 또한 우나 못지않게 어떤 상상을 했고, 그 상상이 다시 한번 현실로 펼쳐지며 삼각형도 소설도 끝을 맞는다고만 말하겠다. 그런데 이대로 끝내도 괜찮은가? 지금까지 내가 강조해서 소개한 내용들은, 인용문들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벌어진 일만 조명한 거다. 나는 『도시의 시간』에서 박솔뫼 씨가 쓴 일부분만 포착했을 뿐 그 밖의 이야기, 가령 소설 속 배경이 되는 대구라는 도시에 관해, 배정과 우미의 관계에 관해, 아이러니에 관해 말하지 못했다. 내가 해독할 수 있는 것을 해독했고 그것으로 충분할 리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명쾌하지 못한 감상평을 어쩌면 좋나 싶지만 여기서 나는 말을 줄일까 한다. 대신......

  잘 알고 있는 것 말고는 잘 모르는 만큼, 앞으로 - 당장은 아니더라도 - 박솔뫼 씨의 글을 다시 읽고 곰곰이 생각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나와 박솔뫼와 소설. 이렇게 셋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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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이야기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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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소개하기에 앞서 지극히 내 취향에 관한 이야기로 운을 떼볼까 한다. 내가 매료되는 소설들에는 비슷비슷한 특징이랄 게 있다. 그중 하나가 어떤 장소를 제시한 다음, 그곳을 응시하거나 머무는 감각을 전달할 줄 아는 거다. 이유야 나도 깊이 생각해본 적 없고 막연히 좋은 채로 놔둬도 괜찮다는 생각. 이런 말도 있지 않는가. 좋아하는 것은 그냥 좋은 것이지 그걸 설명하려 들면 피곤해진다고. 최근에 임경선 작가가 신작을 냈다. 어김없이 사랑 이야기를 담은, 짧은 토막글 구성의 연작 소설 같더라. 서점에서 일부분만 훑어봤기에 자세하게 말할 순 없지만, 나름 그녀의 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래서 싫다는 소리는 아니다. 때때로 쏟아지는 새로움보다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익숙함이 주는 확신이 더 큰 행복을 준다. 익숙한 행복감을 주는 이의 작품 또한 내가 매료되는 특징 중 하나다.

  취향 얘기를 하다가 신간 얘기로 빠지면서 글이 좀 셌다. 어쨌든 임경선 작가가 신작을 냈지만 오늘 내가 소개할 책은 그게 아니라 출간된지 일년 조금 지난 단편집 『호텔 이야기』다. 영어로 쓰인 부제는 HOTEL GRAF - AND FIVE SHORT STORIES. 말하자면 호텔 그라프에 관한 다섯 가지 짧은 이야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신작도 좋지만 일단 집에 들인 책들부터 하나씩 읽는 게 상책일 거 같아서 이 책부터 펼쳐들게 됐다. 그나저나 시작부터 궁금했다. 내 관심은 일단 호텔이라는 공간에 꽂혀 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런 서문이 등장한다.


  - 서울 남산 둘레길에 위치한 그라프 호텔은 1989년 고미술상 이유한 씨에 의해 세워진 호텔이다. 5성급 클래식 호텔로서 한때 눈부신 영광을 누리던 이 호텔은 2022년 12월 31일부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라프 호텔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다.


  아직 호텔에 체크-인하기 전, 그러니까 소설이 펼쳐지기 전에 쓰인 이 구절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창을 확인해 봤는데 얼핏 보아 누구 하나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내가 스포일러를 파하려고 대충 읽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라프 호텔이라는 이름은, 소설에서도 말하다시피 "지은 지 30년쯤 넘은 호텔들은 대개 이름에 '로얄', '그랜드', '센트럴', '임페리얼' 같은 영어 단어가 들어갔으니 독일어인 그라프(GRAF) 호텔의 이름은 당시로선 상당히 독특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여전히 국내에서 썩 흔한 이름 같지는 않다 - 독일어로 'Graf'의 뜻은 (남성형 명사) 백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검색을 해도 어느 예식장 정보가 뜨거나 이 소설의 독후감 정도가 뜨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생각만큼 길게 늘여잡지 않아도 됐다. 소설을 읽다 보니 역시 정면에 내세운 서문도 허구의 일부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편 「호텔에서 한 달 살기」는 동료 감독이 쓴 각본을 각색하고자 이곳 그라프 호텔에 머물게 된 영화 감독 두리의 이야기다. 여기서 감독이 홀로 작업을 하는 도중에 지금은 유명해진, 그러나 무명 시절에 두리의 영화로 제 얼굴을 세상에 알린 수호가 뜬금없이 연락해 왔다. 호텔 방을 찾아온 수호는 두리와 같이 작업했던 시간을 즐겁게 회상하며 귀여운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린다. 음, 그쪽 업계를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순 있다더라도 이런 식은 아닐 거 같았다.

  그래서 이상의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허구로 받아들였다. 「프랑스 소설처럼」은 다소 관계가 식어가는 듯한 두 남녀가 오전마다 그라프 호텔에 머물며 사랑 혹은 이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이야기다. 「하우스키핑」은 호텔 메이드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정현이 다가올 그라프 호텔의 폐점을 안타까워하며 지난 날을 회고하는 이야기, 「야간 근무」는 어떤 작가가 우연히 그라프 호텔에서 도어맨 일을 하는 지인을 마주친 다음 그의 짧고도 긴 사랑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이야기다. 마지막에 실린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유명인을 상대하는 개그맨 일행 중 한 명이 그라프 호텔에서 만난 수상한 신사와 친해지는 이야기다.

  내가 기대한 호텔에서 보낸 한 철, 공간이 주는 유유자적한 삶, 곧 시간의 더께에 묻힐 낡은 호텔을 향한 연민의 정서는 특별히 도드라지지 않았다. 대신 같은 공간을 매개하여 각기 다른 직업군의, 나이의, 성별의 사람들을 조명하는 이야기들에 더 가깝달까. 한 공간에 모인 만큼 여러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 살짝씩 포개졌으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건 그거대로 아쉬운 채 남겨 두고. 또 저자가 직접 하루키스트임을 자처했듯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러 장면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느낌도 살짜쿵 든다. 요컨대 이른 시간에 요리하는 파스타라든지, 남녀 사이 정사 씬이라든지, 외래어 표현이 빈번히 사용된다든지 같은 것들.

  아무튼 이 모든 이야기가 소설임은 틀림없다. 아무리 "이것은 그라프 호텔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다"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해도. 게다가 작가의 말에서도 진실은 밝혀지는 걸.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진위여부를 따지는 것을 하등 중요치 않지만, 내가 이 문제를 길게 늘여잡고 있는 이유는 저자 분이 소설가이기 이전에 에시이스트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에세이라는 게 뭘까? 순간의 감상들을 포착해서 글로 옮기는 것. 사실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글로 풀어 쓴 것. 그런데 이런 식이면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세이에도 서사가 있고 고찰이 있고 기교가 있다. 작문의 경계가 바스라지는 오늘날에 에세이스트라는 정체성으로 소설 쓰는 작가의 색다른 개성을 느끼고 싶다면 이런 책도 나쁘지 않다. 아, 나는 그래도 임경선 작가를 소설로 처음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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