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은 왜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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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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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우리의 책을 바탕으로 새로운 아랑의 이야기를 쓰게 되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책 안에서 이야기의 종결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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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책의 제목에서 'why'에 해당하는 '왜'라는 질문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책이다. 읽기 어렵다는 게 아니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다층적이라서 쉽지 않다는 말이다. 다층적?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김영하는 이야기를 전복하고, 전복한다. 결국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기도 한 이 작품을 나는 매력적이라고 부르겠다. 김영하는 초기작이다. 그의 책을 어느덧 에세이를 제외한 소설만 8권째 읽었데, 맞나, 어쨌든 초기작들이 대체로 좋았다. 살인청부업자 이야기를 담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이야기꾼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호출』이 그러하다 -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두 책 모두 내 서재에 없다. 전자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 후자는 김영하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로 줬기 때문이다. 처음 접한 김영하 작품이 『오직 두 사람』이었던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었던가? 이 두 작품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특히 후자는 정말로 작가 자신이 글을 자유롭게 스케치한 인상이라서 유쾌하게 읽은 기억이 난다. 이제 여기에 『아랑은 왜』도 추가하려 한다.

『아랑은 왜』는 잘 알려진 아랑 전설을 기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랑 전설이 어떤 경유로 발생했는지, 그러니까 '왜'를 파고든다. 처음에는 소설가로 추정되는 인물이 간접적으로 나와 나비에 관한 설명과 아랑 전설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길래 소설가가 각색하는 아랑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소설 자체가 아랑 이야기를 각색하는 과정을 그린 시놉시스였다. 그러니까 『아랑은 왜』는 여타의 역사 소설처럼 각색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가로 추정되는 작중 화자가 독자들에게 이렇게 각색할까 저렇게 각색할까 제안하는 제작 과정이다. 묘한 퀴즈 게임에 걸려든 듯한 착각에 빠진 건 나뿐일까? 이야기를 꾸미는 이야기, 이를 나는 전복된 이야기라 부르겠다. 친절하게도 나처럼 아랑 전설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화자는 도입부에서 아랑 전설을 소개한다. 아랑 전설: 경상도 밀양 군수의 딸 아랑이 통인(通人) 혹은 관노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욕 당하려 하여 항거하자 통인 혹은 관노는 아랑을 죽이고 대숲에 버렸다. 아랑의 아버지는 이에 충격받아 벼슬을 버리고 사라졌고, 그 후로 새로 부임하는 군수들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이후 군수가 된 이상사(李上舍)라는 인물이 그날 밤 찾아온 아랑의 혼령에게 억울한 죽음을 전해 듣고 원한을 갚아주기로 한다(소설에 실린 『한국문학대사전』 축약 인용)

그러나 화자는 아랑 전설이 실린 여러 판본을 비교해보고 이야기의 '틈새'를 파고든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틈이 있다. 이 틈이야말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어떤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이미 있던 이야기의 요소가 사라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작은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p.16)" 그도 그럴 게 어느 이야기에서는 아랑이 나비가 되어 자신을 죽인 통인(혹은 관노) 머리를 맴돌았다고 하고 혼령이 된 아랑이 붉은 깃발을 가리켰다고 하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마다 내용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 가장 소설로써 매력적인 이야기를 차용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중에서 가장 아랑 전설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차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오랜 탐사 끝에 한강의 수원지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 샘물과 한남대교 아래를 흐르는 한강과는 어떤 천연성도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오히려 한남대교 아래를 흐르는 강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팔당호와 충주호의 수질과 부유물, 플랑크톤의 종류, 당국의 수질정책 따위 들이다.(p. 37)"

그렇게 화자는 아랑 전설이 시작됐다고 예측되는 시기, 전해지는 인물 관계 그리고 그들의 이후 행적 - 알려진 행적과 알려지지 않은(달리 말해 감춰진) 행적 - 등을 종합하여 그럴싸한 '이야기'를 꾸린다. 과연 이렇지 않을까, 식의 매력적인 결말.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들을 확실시할 실증은 없기에 화자가 탐정 역할로 내세운 김억균과 호장은 어사 조윤에 의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그래서 무엇이 진실이라고? 어쩌면 진실은 중요치 않아 보인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결말부에서 이상사가 김억균에게 한 말을 비춰보면 알 수 있다. "어제 객사에서 김부위께서는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제게도 나름의 이야기가 있겠구요. 어사또께서도 그림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관야의 담장을 넘어가면 또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질 겝니다. 수산제가 무너진 것도 사실이고 사또들이 돌아가신 것도 사실이고 아랑이가 죽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장과 그의 딸 아랑과 안국이, 그리고 윤관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선 아무도 모릅니다. 그중 셋은 죽었고 전임 사또는 행적이 묘연합니다. 후세는 아마도 이 일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전혀 다르게 기록될 수도 있을 겝니다.(p.276)"

여기서 나는 이야기가 다시 한번 전복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전복하고, 전복한다. 그러나 두 번 전복된 글이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다시 다른 방식으로 전복된 거라고 하면 몰라도. 『아랑은 왜』를 나는 이런 식으로 정리하겠다. 이 소설은 이야기가 발생하는 과정을 역추적해, 결국 이야기가 탄생하는 진상을 발견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한강의 발원지일 거라고 추측했을 뿐인 장소로 도착한 것이니까. 설령 그곳이 한강의 발원지가 확실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도 있다. 그곳에서 바라본 한강의 모습은 그 모습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한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것. 거기서는 그 사실만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한강은 흐른다. 이야기처럼. 그럼으로 『아랑은 왜』는 소설가의 상상력, 그 추상적인 개념을 스케치한 도화지이자 그 도화지가 사실 손에 닿지 않는 곳까지 이어져있다는 걸 형상화한, 소설가의 고차원적인 장난질, 쉽지 않은 작품이다. 그걸 읽는 과정은 썩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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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랑은 왜』는 개정판으로 새로 출간됐다. 듣기로는 김영하 씨가 결말부를 수정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일부러 구판을 읽은 이유는 과연 어떻게 결말부가 바뀌었는지 궁금해서다. 지금의 결말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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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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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엄마를 살아 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라고 말했을 때, 그건 내가 했던 다른 수많은 말처럼 빈말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산송장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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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죽음을 다룬 소설을 여럿 읽어봤다. 특별히 찾아보려 했던 건 아니고, 소설을 읽다 보면 죽음이 어디선가 툭하고 튀어나왔다. 마치 그 정도의 그늘은 필요하다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작품 속 죽음은 어딘가 소모적이거나 인위적이거나 지나치게 감성적이었다. 물론 나는 죽음을 모른다. 가까운 친족이 세상을 떠난 일은 내가 아주 어릴 적 친가 쪽과 외가 쪽의 할아버지 두 분이 돌아가신 경험뿐인데, 엄마 말로는 내가 외할아버지가 태워주신 목마를 타고 시골 바닷길을 한 바퀴 돌았다고 하지만,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로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고 죽을 뻔한 경험도 크게 없었다. 그러나 이 근래, 내가 아직 군대에 있었을 때,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친구의 통화로 듣게 됐다.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했는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정확히 기억나질 않지만(나도 적잖이 충격받았으니까) 괜찮지 않겠지만 힘내라고 내가 곁에 있어주질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소식 전해줘고 고맙다고 말했을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렇게 가까운 사람에게서 듣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맽어야 했을 친구의 심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였으면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새 달력이 펼쳐졌고 전역한 뒤로 만난 친구의 모습도 걱정한 것보다 괜찮아 보였다. 그것으로 친구의 입장에선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제 죽음과 가까워졌는가. 안타깝게도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소설 속 보부아르가 죽어가는 어머니의 침상을 지키며 "엄마는 완전히 혼자였다! 엄마를 어루만지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줄 수는 있었지만, 지금 엄마가 느끼는 고통을 함께 나누기란 불가능했다(p.115)"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편안한 죽음』은 보부아르의 자전적 소설이자 그녀가 일평생 천착했던 실존 윤리를 탐구한 소설이라고 소개된다. 실제 이 소설은 보부아르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쓰였으며 문장 곳곳에서 어머니의 흔적이 묻어난다. 시작은 단순한 사고였다. 엄마가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골 경부가 부러졌다는 전화를 받은 보부아르는 엄마가 계신 병원을 찾아간다. 이후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엄마의 몸에서 암이 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부아르와 동생 푸페트는 절망한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무엇일까. 엄마를 간호하는 것. 그리고 "우리는 엄마가 깨어났을 때 무슨 말을 할지 의논했다. 간단했다. 방사선 검사 결과 복막염으로 밝혀졌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고 하면 됐다.(p.40)"

죽음에 한에선 우리는 한없이 솔직해지거나 그 반대다. 시간이 갈수록 쇠약해지고 무너져가는 엄마의 육체와 그 속에 담긴 비밀을 감추려 드는 가족들이 그 예시다. 보부아르는 과거 활발하고 많은 것을 욕망했던 늙은 여인의 낡은 육체를 바라보며 어머니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여인을 읽어낸다. 남편에게 헌신했던 아내, 그러면서 뜨거운 육체를 품었던 여인, 지나치게 자식을 옭아매면서도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던 한없이 여린 사람. 동시에 그녀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이 자신의 생활 속 일부까지 덮는 모습을 본다. 한 번도 '엄마'라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보부아르는 비로소 그녀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서야 그녀의 의미를 깨닫는다. 왜 엄마와 자주 갈등을 빚었는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빠가 엄마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그녀에게 삶은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보부아르가 바라본 죽음은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죽음이 자연스러운 줄 알았다. 하지만 서서히 죽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간호했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도, 살 만큼 살았기 때문도, 또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p.152)" 그랬다. 이 문장, 소설이 끝나가는 마지막 대목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이 대목은 한 여인의 삶과 병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봐온 보부아르 그리고 독자들에게 더 큰 의미로 와닿는다. 이 작품은 죽음을 감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슬픔의 비애에 휩쓸려 무너지지 않고 어머니를 치켜세우거나 신격화하지 않는다. 다만 어미니의, 한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애도한다. 그리고 유대한다. 소설에 들어가며 쓰인 헌사 "나의 동생에게"는 그래서 더 뜻깊다. 어머니를 함께 간호하고 떠나보내는 과정이 어쩌면 두 사람의 유대를 더 단단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니 살아 있는 우리는 죽기 전에 서로 유대해야 할 것이다. 나도, 나의 친구도. 이 책에서 보부아르가 알려주는 것은 죽음뿐만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편안한 죽음』은 더욱 가치 있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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