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다 버릴 것 하나 없는 단어와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익히 그의 명성은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의 <내가 읽은 책과 그림>에서 맨 마지막 아주 짧게 그를 다룬 글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막연하게나마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던 나는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 성격이 거의 비슷할 것이라는. 라니츠키는 베른하르트의 작품에 대해 "그의 산문이 보여주는 비상한 통일성이란 바로 여기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 통일성을 갑갑한 획일성으로 느끼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달라피콜라가 남긴 명언이 있다. 비발디는 344개의 독주협주곡을 썼다기보다는, 단 하나의 협주곡을  344번에 걸쳐 작곡하였다고 말이다. 이 말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그의 산문의 근본요소는 탄원이요 애가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해도 좋지 않을까. 그는 해학적인 탄원과 유쾌한 애가를 지었다고."  삐리링~~~결말은 좋게 말해도 핵심은 비발디까지 예를 들어가면서 들먹이던, 그 작품이 그 작품라는 말 아니더냐. 별 관심 없이 있다가 파란여우님의 리뷰 읽고 베른하르트의 <옛 거장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이거야 말로 또 한번 삐리링~~~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론,예술론을 레게의 입을 빌려 집대성한 작품이었다. 베른하르트에게 삘 완전히 꽂혔다. 이거 도서관에 갖다주어야 하는데..... 갖다주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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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투 더 문 -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우주과학 에세이
마이클 콜린스 지음, 최상구 옮김 / 뜨인돌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과학적 토막 상식 가운데 하나인 지구 밖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중국의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작가도 출처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 이런 오류가 어떻게 상식으로 굳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사실 진실은 이렇다.  

1960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지구 궤도로 발사하는데 성공하자, 미국은 이에 충격을 받고 부랴부랴 나사를 설립하고 우주선에 사람을 태워 우주로 내보내는 머큐리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치열한 미소간의 우주전쟁은 소련이 유리 가가린을 우주에 쏘아보내 그가 "하늘은 어두웠지만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라는 소감을 인류에 전하면서 짐짓, 미소간의 우주전쟁 초기에는 소련이 패권을 쥐는 듯 보였다. 게다가 가가린의 우주비행의 성공보다 23일 뒤진 1961년 5월에 미국도 앨런 세퍼드를 미국 최초 우주인으로 쏘아올렸지만, 지상 160킬로미터 상공에서 탄도곡선을 그리며 지구를 돌아 바다로 다시 떨어지는 고공비행일뿐이었다. 여러차례의 우주 비행이 시도됬고 어느 정도의 머큐리 계획은 최종 목표를 완수했다. 하지만, 미국이 인류역사에 커다란 성공의 발자국을 찍은 것은 1969년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가 달착륙의 위협을 달성하면였고, 60년대 미소간의 우주전쟁 최종 승리는 미국임이 판명되었다. 

1969년 7월 20일,  우주인이 되기 위해 닐 암스토롱, 버즈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는 수 년간의 훈련을 쌓은 후,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을 향해 날아갔다. 마이클 콜린즈의 경우, 비행기 조정사였다가 우주인 채용공고에 지원해 합격함으로써, 고된 훈련(예를 들어 무중력 상태에서 견딜 수 있는 훈련이라든가 별자리 연구, 우주선 시뮬레이션 조정같은) 과정을 거쳐 아폴로 11호에 탑승하게 되었다. 이 트리오가 지구를 떠난 첫날, 콜린스는 암흑의 우주 공간에서 본 지구에 대해 " 아주 밝은 색을 띄었다. 녹빛이 나는 사막은 희미하게나마 보였지만 녹색의 정글 지역은 전혀 부각되지 않았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바다는 맑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반짝거리면 밝게 빛난다(p186-187)"라는 아름다운 푸른 빛의 구의 지구만 보인다고 할 뿐, 중국의 만리장성같은 건축물이 육안으로 보인다고 기록은 쓰여있지 않는다.

하지만 오류는 지구밖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이 보인다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우주과학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플라이 투 더 문>이라는 이 책에도 오류는 있다. 이 책은 얼핏보면 저자인 마이클 콜린스 또한 닐과 버즈와 함께 인류 최초로 달착륙의 위업을 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이클 콜린스는 닐과 함께 달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그는 달의 궤도에 남아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사령탑을 지키고 있었다. 아폴로 11호가 달의 궤도에 무사히 진입한 후, 닐과 버즈는 아폴로 11호에 부착된 거미모양의 비행물체 이글호를 타고 달의 표면으로 하강한 후, 인류 최초로 달표면을 밟은 것이다. 우주선에 혼자 남겨진 마이클은 "우주선에 혼자 남겨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이나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나느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며 내가 없다면 닐과 버즈가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닐과 버즈의 귀환을 기다리며 달궤도를 비행 중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외로움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을만큼 강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달이라는 산에 도전할 수 하는 두명의 등반가는 컬럼비아라는 베이스켐프가 있기에 안심하고 등정할 수 있는 것이다(p200)" 라고 적고 있는데, 비록 달의 땅을 밟을 수는 없지만 사령탑에 남아 자신의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 각오와 동시에 씁쓸함을 읽을 수 있었다.   

닐과 함께 달을 밟을 수 없었던 탓에 그의 업적은 사실 거의 묻힌 것이나 다름 없다. 그 누구도 닐과 버즈의 달을 밟고 성조기를 꽂는 모습은 기억해도 아폴로11호에 남아 닐과 버즈의 무사귀환을 염원했던 마이클이 노고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우주선 사령탑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어쩜 닐과 버즈는 데이빗 보위의 <Space oddity>라는 노랫말처럼 무한 우주를 떠돌아 다니는 우주미아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우주를 떠돌아 다닌다고 상상해보라.  깜깜한 우주속에서 떠돌아 다니며 죽음을 홀로 맞이한다면, 인류 최최로 달을 밟았다는 것이 뭐 그리 커다란 업적으로 남았겠는가. 마이클 콜린스가 주어진 업무를 소홀히 하고, 만약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겨 닐과 버즈를 구조하지 못하고 혼자 지구로 귀환했다고 한다면, 지금과같이 인류 최초의 달의 착륙이라는 수식어는 역사의 오점으로 빛이 바랬을 것이다. 

달과 지구의 거리는 약 38만킬로미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킬로미터이므로, 만약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달세계를 여행한다고 가정한다면, 1,2초안에 도착 가능하다는 이론은 성립이 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가 말한 대로 우리는 빛의 속도를 영원히 따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토끼가 산다고 믿었던 달에 가기 위하여 수 많은 기술이론과 연구, 실수와 착오를 거듭해가며 인공 위성을 쏘아올리고 우주선을 만들고 우주선을 진수할 수 있는 로켓을 만들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이론들을, 우주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나사의 역사와 무엇을, 어떻게 그들이 진행했었는지에 대해 에세이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다.

우주에 대한 탐사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미국은 무인 탐사선을 화성에 보내고 생명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적인 이론은 지금의 물질 문명을 가능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구 밖 우주의 확장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어떤 별은 공룡이 탄생하기 시작되기 휠씬 전에, 출발한 빛을 이제 보고 있을 정도로 먼 거리에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지금 돌이켜보면, 1969년에 달표면의 도착은, 드 넓은 우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우주의 신비의  매듭을 풀기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 시작이었던 셈이었던 것이다.  

70년대 중반에 출간된 책이 지금에서야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달을 향해 가기 위한 과정과 과학적 지식이 충분히 담겨져 있다. 닐과 버즈와 함께 마이클 콜린스라는 이름을 기억해야하는 이유가 여기 담겨져 있고 닐과 버즈가 달표면을 밟은 것만큼이나 가치있는 책임에는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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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대부분의 연구를 혼자의 힘으로 플어나가야 했지만, 자신의 천재성으로 스쳐지나가는 빛의 파동이 의미하는 바를 밝혀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해낼 자신도 있었다. 아우라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은 그에게 더할 나위없이 소중했다. 거기서 그는 언제라도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법을 배웠다. 그가 학생이었던 1890년경에 맥스웰의 공식은 공인된 진리였다. 하지만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교수는 물리학에 별 관심이 없었고 학부학생에게는 아예 맥스웰에 대해 가르치지도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을 그렇게 취급하는 교수에게 화가 나서 그를 베버 교수님이 아니라 베버씨라고 불렀다.베버는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아이슈타인에게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이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몇 년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특허국 사무실을 지켜면서 학계에서 고립되었다).  p76 

  

 

캐번디시 연구소 초대소장을 지내고, 수학에 약한 마이클 페더웨이의 전기증명을 완벽하게 수학적으로 증명함과 동시에 전기와 자기의 신비를 풀어냄으로써,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제임스 맥스웰이었다. 제임스 맥스웰에 대한  전기는 나같이 머리에 물리학 자료가 전무후무 입력되어 있지 않는 일반인이 읽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사실 그의 비범했던 어린시절이나 학창시절, 결혼생활등은 무리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지만 전기와 자기 그리고 통계학에 대한 맥스웰의 연구를 소개한 글은 적어도 전공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대목은 슬쩍슬쩍 거의 다 스킵했다. 맥스웰이란 이름도 재혁님의 리뷰 아니었으면 생전 구경하기도 힘들 책이었는데..... 끝까지 물로 늘어질 수 있었던 것은 지식책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다. 소설만 읽어내는 편식성 독서에서 벗어나고픈, 이제 나이가 들면서, 아이가 커가면서 소설만큼이나 다른 지식과학책이나 인문서적도 읽어보고 싶은 갈망이 컸다. 하지만 머리속에 과학적 데이타가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읽는 다는 것은 바위에 계란깨기나 다름 없었다. 내 머리만 아플뿐이었다는 말이다 .   

이 때 구원 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프레시안에 고전물리학이야기란 제목으로 연재한 최무영교수였다. 최무영 교수의 필력은 솔직히 보더니스 입담만큼 재밌지는 않지만, 처음 물리학을 접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물리학 역사와 이론에 대한 설명은 한마디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진보적이고 좌파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물리학자는 정해진 연재 날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프레시안에 글을 올리면서 자신의 물리학에 대한, 학문에 대한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매일매일 프레시안에 들어가 최무영교수의 글이 떳나 확인해볼 정도로. 그의 글은 진지하면서도 이해하기도 쉬운, 폭 넑은(심지어 미술까지도) 그의 학문적 소양을 어김 없이 보여주었다. 연재가 종료된 후에도, 아쉬워도 틈틈히 읽곤 했는데, 어느 날 최무영교수의 물리학이야기 컬럼 박스가 사라져 적잖이 후회스러웠다. 미리미리 인쇄하거나 스크랩해놓을 것을 하고 말이다. 후회와 아쉬움으로 괜찮은 물리학 입문서 없나 하고 수소문하고 있던 차에 바로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최무영교수의 그 물리학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아쉬움은 기쁨으로 바뀌고....결론적으로 이번 달에 이 책 구입할 것이지만 애 있는 집에는장담하건데, 이 책 필수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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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미래그림책 33
데이비드 위스너 글 그림, 이지유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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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매이션 <빨강머리 앤>에서 내가 가장 탐낸 것은 앤의 다락방이었다.  다락방의 창문에 걸터 앉아 ,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 바람에 날리던 벚꽃눈, 비오는 날의 우울, 하얗게 눈 내리는 풍경, 밤하늘의 무수히 찍혀 있는 별, 다이안과의 통신등 앤이 나에게 보여준 이 모든 것들은  다락방이 주는 환상 체험이었다. 그때, 언니와 남동생 그리고 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았던, 방 세칸짜리 좁은 단독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 앤의 다락방은 부러움의 공간이자 상상의 세계에 머무는, 현실 불가능한 공간이기에 더욱더 간절하게 탐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다락방에 대한 미련은 아직도 남아있다. 현실적으로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추울 것이 분명한, 그 곳에 대한 갈망이 주책스럽기는 하지만, 다락방을 꿈꾸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어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곳이 아닐까. 누군가는 현실에서 탈피하고 싶은 피난처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험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장소로 말이다.

며칠 전에 아이에게 데이빗 위즈너의 <허리케인>을 읽어주면서, 큰 애는 시큰둥하게 넘어간 대목이었지만 어른인 내가 더 깊이 와 닿는 글귀가 있었다.  허리케인으로 자신들의 집 앞에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자 두 형제는 그 곳을 무대로 온갖 상상력(아프리카 탐험놀이, 우주에서의 항해, 드 넓은 바다에서의 역경)을 동원하여 자신들만의 아지트로 삼는다.  결국 그 커다란 쓰러진 나무는 조각조각 장작처럼 토막내  다른 곳으로 보내졌지만, 형과 함께 한 자신의 어린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한 그 그림책에서 데이빗 위즈너는 그 장소에 대해,  이제는 사라져 버린, 하지만 영원히 기억에 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공간적 노스탤지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둘은 가끔 가만히 앉아서 경치를 구경했습니다. 나무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둘만의 장소였지요. 그 곳은 비밀스러운 꿈을 펼칠 수 있을 만큼 컸고, 또 모험이 두렵지 않을 만큼 작기도 했어요."(Sometimes they just sat and enjoyed the view. The tree a private place, big enough for secret dreams, small enough for shared adventure.) 라고.

내가 꿈꾸는 다락방이 타인을 배제하고 공유보다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자폐기능이 강했던 것에 비해, 위즈너의 공간은 추억이고 상상력을 나누었던 공간이라는 것이 다를 뿐, 비밀스러운 꿈을 펼치고 모험과 공상의 세계가 두렵지 않았던 작은 왕국이었던 점은 나와 그, 아니 적어도 다락방이나 아지트를 꿈꾼 사람들에게 그 장소가 가져다 주는 세계는 동일하다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 깊이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회색의 도시 생활에 익숙한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도 다락방을 실제로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단지  이미지나 공상 속 또는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직도 나만의 벚꽃 날리는 다락방을 꿈꾸는 것처럼,  누구든지  당신이 체험했던 어린시절의 아지트였던 비밀 장소든, 지금 현재가 힘들어 공상속의 피난처든 난 누구든지 이런 작은 모험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 마음 한 켠에 언제나 간직하길 바란다.


ps- 번역판은 형에게 헌사한다는 글이 없는데, 원서는 캐롤,바바라,조지에게라고 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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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책읽기의 목표는 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전문적으로 읽어보자는 주의여서 되도록이면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하고 있는 소설쪽은 구입을 자제하자는....뭐 지키지도 못할 작심삼일류의 결심을 하고 있는데, 민음사에서 이번에 신간으로 나온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에 자꾸 눈길이 간다. 하루에도 몇번이나 살까말까로 클릭질을......  한편으론 지금 읽고 있는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 내려놓고, 설연휴동안 읽어볼까하는 맘도 좀 생기고, 며칠 전에 우연히 아주 우연히 테레비에서 본<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나온 늙은 된장녀 편집장 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을 보고, <소피의 선택>에 불 붙었다고 해야하나.  젊고 이쁜 앤 헤더웨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늙어서도 한떨기 꽃못지 않았다. 난 내가 늙어서 그런가. 재수없는 악녀역을 너무나 멋지게 소화한 메릴 보는 그 재미에 그냥  그 자리에서 죽치고 앉아서 다 봤다.(아이들이 다른 거 보자는 것을 꿋꿋히 이겨내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메릴 스트립의 정점은 윌리엄 스타이런의 이 소설 <소피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나 빨간 원피스를 입고 네이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흥분한 채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그 때의 이쁘진 않지만 젊은 시절의 메릴 말이다. 음음음, 그래도 메릴은 늙어도 멋져!  

윌리엄 스타이런은 헌책방에서 종종 보이는 <어둠에 누워>라는 작품으로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읽어보지는 않아서 그의 필력은 어떤지는 모르겠다. 내 취향에 맞는 작가인지 아닌지... 미국작가들은 글쓰는 스펙트럼의 폭이 넓어서, 아무리 평론쪽에서 칭찬이 자자한 작가라고 해도 나랑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조이스 오츠 캐롤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쓴 쟝르문학쪽, 예를 들어 <좀비>나 매년 그해 우수 미스터리로 뽑히다시피하는 쟝르쪽 단편 추리 소설은 재밌게 읽었는데(그래봤자 두편),지난 번에 읽는 <사토장이 딸>은 이 뭐꼬! 웬 재클린 스미스판 미니시리즈더냐 싶었다. 1부는 그녀의 평소 작품 성격, 평론가들의 말대로  격렬하고 절박하며 때로는 폭력과 증오의 형태로 나타나 암울하고 어둡기 했지만 이민자들의 차별, 생활상, 절망감같은 게 호소력 있었는데, 2부는 아까도 말했듯이, 재크린 스미스판 미니드라마였다. 물론 작품 곳곳에 드러낸 그녀의 신랄한 사회적, 정치적, 사회적 비판의 글은 높보였지만, 이야기의 구성은 미국식 미니드라마 판박이였다. 아니 근데 왜 스타이런 이야기하다가...오츠로 흘러들어간 것인지. 여하튼 뭐 미국작가들은 폭이 넓어서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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