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어른이 된다는 것

실제 <기억의 빈자리>라는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원제인 <Jumping the scratch>와 비교할 때 고개를 꺄우뚱거리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기억의 빈자리>라는 제목은 치매를 연상시키며 청소년의 알츠하이머질환에 관한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년의 끔직한 체험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동화작가와 친구의 도움으로 치유해 나간다는 이야기인데, 소년이 당한 그 끔찍한 기억이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극복되어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빈자리로 남을 수 있다는 함축적인 의미의 제목인 것 같다.    

과연 한 개인의 고통스럽고 끔찍한 기억이 극복된다 한들 텅비어 버린 공간으로 남겨질 수 있을까.

영어를 그렇게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뭐라 왈가왈부할 형편은 아니지만, 번역자가 아무래도 제목을 뽑을 때 스크래치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 멋 모르고 당한 끔찍한 기억에서 해방된다 하더라도 실제 일어난 일은 분명 과거의 한 시점에 분명 존재했던 일이며, 그 사건이 한 아이의 삶을 흔들 정도로 무기력하게 변화시켰다면 그 사건은 결코 기억의 빈자리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잊고 싶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박박 긁어(스크래치)낸다하더라도 긁힌 자국만 있을 뿐이지 오리지널 기억은 남아있으며, 오히려 오리지널 기억 위에 긁힌 자국만 너덜너덜하게 남아있기 마련이다. 스크래치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극복과 상처라는 두 단어의 모순의 의미가 상충하면서도 한 소년의 고통스러운 체험의 기억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스크래치된 기억을 뛰어넘는다(극복된) 하더라도 아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런 박박 긁어내고 싶은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2학년 요맘때 쯤 가을소풍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어찌하다가 난 담임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뒤쳐져 다른 반 선생님과 아이들의 뒤따라가게 되었다. 다른 반 아이들의 뒤를 따라 가다가 집으로 갈 수 있는 아는 길이 나와, 나는 곧장 집으로 갔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선생님이 걱정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여느 때처럼 등교를 했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기 전인지 아니면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일어난 일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고, 불려나가 교단 앞에서 아이들을 등 지고 서 있는데, 선생님이 소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옆으로 샜다고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다그쳐 물었던 거 같다. 담임은 화를 내면서도 어제의 노여움이 안 풀렸는지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얼굴에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 두대가 아니고 수 차례나.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그 때 얼굴이 심하게 붓고 한쪽은 멍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 선생이 얼굴에 따귀를 때릴 때의 아픔보다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따귀를 맞았다는 것에 더 굴욕적이었고 수치스러웠다. 아픔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 맞고 나서 내 자리로  돌아갈 때 내 얼굴을 쳐다 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픔따윈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한채 자리로 돌아와 앉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시절엔 왕따라는 것은 없었지만, 선생인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데 아이들이 전처럼 나랑 놀아줄까, 하는 걱정을 제일 먼저 했었다.

더 이상 앞뒤의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이들 앞에서 수 차례의 따귀를 맞고 있는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 땐 유치원같은 아이를 맡을만한 기관이 흔하지 않았던 시대여서 10월생인 7살 밖에 되지 않은 나를 우격다짐으로 언니와 함께 학교 들여보내,  2학년이라고 해봤자 겨우 8살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그 시절에 나는 아주 어리버리하고 맹한 아이였다. 뭐하나 똑바로 해내지 못했고 교과과목도 제대로 인지 하지 못했었던 아주 맹한 아이. 선생의 입장에서도 나는 그리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자존심은 있었다. 담임한테 수 차례의 따귀를 맞아 얼굴이 부었음에도 엄마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 같은 학년의 언니도 내가 따귀 맞았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았을텐데, 언니도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냥 어디 부딪혔다고 둘러대었던 것 같다. 일이 커질까봐 엄마한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어린 나에게 뭐가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의 츠노하즈에서라는 단편중에 나온, 자신의 아버지가 젊은 여자를 선택하고 자식을 버리는 대목에서 그 소년이 한 말, 어린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다라는 문구에서 어린 시절 따귀 받은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선생님이라면 절대 복종했던 8살 밖에 안된 어린 나에게도 쓸데없는 자존심은 있었다.  

위의 책의 번역제목처럼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빈 자리로 남아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을, 하지만 수치스러운 그 기억은 다른 학창시절의 기억들이 다 휘발되어 사라져도 고통스럽게 남아 순간순간 떠 올릴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거 아는가.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은 성인이 되어 객관적으로 분석한다고 해도 제대로 잘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을. 몸과 정신이 성인이 되었다하더라도 그 기억의 고통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나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어린 나에겐 아무 잘못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 십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선생님 허락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 잘 못 해서 따귀를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어린 나는 잘 못 한 것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찮게 남편에게 용기를 내서 나도 따귀를 많이 많은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 남편이 보인 반응때문이었다. 선생에 대한 분노와 경멸 섞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숨기기에 급급했던 그 응어리가 풀린 것은 그저 맞고 아무 대응조차 하지 못했던 나에게 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차례 따귀를 때려가면서 감정의 분풀이를 한 그 선생이야말로 빌어먹을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껴안고 보듬어준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괜찮은, 썩 괜찮은 어른이라면 아니 빌어먹을 어른이라도 세상의 시야도 좁고, 삶의 폭도 좁고, 사고의 깊이도 웅덩이밖에 안되는 순진한 아이들에게 스크래치를 낼 권리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스크래치 가득한 세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기껏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인연을 맺으며 만나는 어른이 몇이나 된다고, 어린 가슴에 스크래치를 박박 내는지. 그리고 설사 순간적인 스크래치를 되었다 하더라도 긁힌 자국을 문질러 주기만 하더라도 그 상처는 좀 더 얕아질 것이다.  

그 가늘고 이쁜 손으로 어린 나를  때리고도 한번도 따스한 눈빛을 준 적도 없었고 보듬어 준 적이 없이 2학년을 끝냈던 것 같다. 내가 더 그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선생이 지금도 원망스러운 것은 내가 애를 키우면서 폭력이 사랑의 매가 아닌 얼마나 감정의 분풀이인지를 알았기 때문이고 그 일이 있고 나서 투명인간으로 보냈던 내 학창시절의 무기력한 나날때문이다.

긍정적인 변화는 금세 오지 않지만 부정적인 변환는 억센 말 한마디에도, 한 대의 폭력에도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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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새책이 나왔다. <지상최대의쇼> 2년 동안 그의 작품들을 읽고 또 읽고 있지만 그의 진화론을 완전히 이해하기엔 내 사고 시스템이 많이 모자라다. 단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 학문 이론이라는게 아이디어 게임이다라는 것을 그의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의 진화론이 정설인지 아닌지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기사 빅뱅이론도 완전히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던가. 그의 유전자 이론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소름끼친다. 그리고 인생 뭐 별거 아니네, 하는 자조를 일게 만든다.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그는 우리의  유전자야말로 영원불면한 존재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잠깐 빌리고 있는 것일뿐, 껍데기인 우리들은 헛것에 불과하다고.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그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으면서 영화<에이리언>의 속성이 떠올랐다. 인간을 숙주로 끊임없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우리의 유전자란 바로 그런 존재란 말인가,하고 말이다. 그의 거대하면서 번뜩이는 이런 학문적 아이디어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존재는 신이 아니고 우리의 유전자란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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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앤오더의 프로듀서 딕울프를 주목하게 된 것은 그가 프로듀서하고 있는 로앤 오더라는 성범죄드라마 특유의 자극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연히도 테레비에서 처음 로앤오더 성범죄전담반을 봤을때만해도, 소재의 선정성과 자극성때문에 적잖은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뭐 사람들의 성적 호기심이나 만족시킬만한 저질 소재를 다루면서까지 시청률을 올리며 돈 벌고 싶을까하는, 소재의 한계를 모르는 미드라마의 소재 자유에 대해 한탄과 함께 다소 경멸감을 드러냈었다.  

솔직히 로앤오더 성범죄전담반의 성격을 깊히 파악하지 못하고 그 드라마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 드라마는 단순히 눈요기, 일반 시청자들의 몰래 들여다보기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얄팍한 상술의 드라마일지도 모른다는 선입관을 깨기가 쉽지 않다. 나 또한 그랬다. 어째든 자극적인 범죄에 대한 호기심이 선정적인 소재를 재미로 선택했다는 도덕적인 반발심을 누르고 시청하게 되었으니깐.  

하지만 이 드라마는 결코 호기심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유희의 드라마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난 성범죄 사건을 재구성하여 형사드라마답게 사건을 해결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그 사건이 법정에서 어떻게 다루어 지는가를 심도있게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의 성격상 시청자들에게 순간적이며 자극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시작된 범죄는 그 범죄가 미국의 사법 체계에게 어떤 형벌을 받을지까지 보여주고 있지만, 이 드라마의 핵심은 바로 지금부터이다. 미국의 주마다 다른 사법체계에서 그 법이 어떻게 다루어 지는지, 그리고 범인이 어떻게 그 법망을 피해 자신의 형벌을 줄이고 교묘히 피해 나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친할아버지에게 지속적인 성폭력을 당하고 있음데도 불구하고 뉴욕법에 따라 성폭행을 당한 소녀는 친할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주법이나 연쇄 살인을 저질러 사형이나 무기징역이냐의 기로에서 변호사들의 농간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날지도 모르는 개떡같은 사법체계를 드라마하고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을 분노케 만든다. 

이 드라마가 일사천리로 사건발생, 해결 그리고 범인에 대한 응징이라는 도식 속에 묶여 있다면 이 드라마는 보통의 범죄 드라마나 소설과 다를바가 없었을 것이며, 내가 프로듀서가 딕 울프인지 늑대인지조차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시즌 1기부터 9기까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즌 10기 초반 에피소드까지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과 사건 해결 그리고 해결을 위한 미국의 사법 체계를 지켜 보면서, 뒷끝이 개운치 않는 엔딩때문에 후유증에 시달리면서까지 이 드라마를 9시즌까지 본 이유가 드라마 중독이라기 보다는 바로 딕 울프가 범죄를 이야기로 형상화하면서 보여준 미 사법체계에 대한 모순, 부조리함 그리고 대응방식 때문이었고 한없이 천박할만한 소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그의 법체계에 대한 집요한 집념때문이다. 그는 강력 범죄에 대한 솜방망이처벌은 분명 잘 못 되었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심지어 그는 연쇄 살인범에 대한 사형 판결이 뭐 어때서 ? 라는 판결을 시청자들에게 유도해내기까지 한다. 연쇄 살인법이라는 혹은 미성년자 강간범이라는 캐릭터의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잔인한 범행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사형제도에 대한 찬성까지도 이끌어 내고 있는 그의 드라마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보면 잔혹한 범행때문이라도 사법과 형벌에 대해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하지만 딕 울프의 행보는 무시하고 싶지 않다. 딕 울프가 강력범죄에 대해 미국의 부조리한 사법과 형벌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을 각인시킨 것이 십년이 넘는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과 환기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는 것이다. 난 오히려 급작스런 여론몰이의 사법개혁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딕 울프같은 사람들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의 성범죄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폭행,미성년자 강간과 같은 민감한 성범죄에 대해 타협이란 없다는 인식을 일반화하였으며 로만 폴란스키같은 감독이 미국내에서는 미성년자 강간범이라는 딱지가 떨어지는 않는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 

조두순사건을 보면서 우리 나라도 이런 장기간 성범죄에 대한 끊임없는 경각심과 환기를 시켜 줄 수 있는 프로듀서가 있었으면, 조두순 같은 사건은 12년이 아니고 무기징형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맨날 불륜같은 막장 드라마는 잘도 만들면서 이런 드라마 한 편 없는 우리나라 드라마 현실에 실망스럽다. 로앤오더가 미국내에서 큰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앤오더의 소재나 결말의 묵직성이 시청자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딕 울프같은 프로듀서가 성범죄라는 주제하나 가지고 10년을 넘게 로앤오더라는 드라마를 끌고 갈 수 있는 환경이 한없이 부럽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딕 울프같은 집요한 프로듀서 한명쯤은 아니 소설가 한명쯤은 나와야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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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미드 보고 집안일 하다 나영이소식을 접한 게 정오 무렵이어었다. 읽어나가면서 피가 거꾸로 솟아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뛰는 가슴을 어떻게 진정시켜야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의 신체가 얼마나 부서질 듯 작고 연약한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가방이 자기 등짝보다 크고 자기 몸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작고 말랐다.  초1인 우리 딸이 키가 115에 몸무게 20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 연약하고 작은 아이의 몸에 성인의 발기된 성기를 집어 넣었다는 것 자체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지나가다 초등학교 1학년의 여자아이를 눈여겨 보면 그 늙은이가 나영이한테 가한 성폭행이 얼마나 참혹하고 비참한지, 도저히 용서니 인권이니 하는 말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술 처먹고 그 지랄한 개새끼한테 정상참작이라는 게 말이 되냐. 누구를 위한 법인가. 미국은 범죄드라마를 보더라도 미성년자 강간범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 심지어 딕 울프같은 프로듀서는 노골적으로 그런 범죄에 대해서 사형제 찬성을 시청자들에게 부각시킨다. 범죄자의 인권이니 사형제 폐지 반대 운운하며 깝죽대는 인간들의 블로그를 보면서 멍석도 자리를 보고 깔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폭행을 당하고 고통 속에서 사는 딸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고 그저 무기력하게 분노를 가슴에 안고 지켜 보면서 살아야하는 나영이 부모에게 그 어떤 위안을 주지 못한다. 심지어 같은 부모 입장으로서 가슴이 너무 찢어질 듯 아파서..그 늙은 개잡새끼, 내가 가서 칼로 죽여버리고 싶다. 정말 국가가 술 처먹었다고 정착참작으로 12년 구형밖에 내리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야하는 나영이부모를 대신해서라도 내가 그 쌍놈의 새끼 죽여버리고 싶다. 죽여버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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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꼭 해야 하나요? - 똑똑한 아이들 참 좋은 생각
브리기테 라브 지음, 마누엘라 올텐 그림, 엄혜숙 옮김 / 계수나무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지난 여름에 코엑스에서 전시된 <일러스트레이션 거장전>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럽 일러스트레이터의 최근 경향(그래봤자 십년 전후)을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그림 그릴 때 선호하는 매체수단이 무엇인지(신세대 답게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하는지, 아니면 전통적인 매체로 표현하는지에 대한), 소재와 주제가 옛날과 얼마나,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것등, 유럽의 최신 경향을 여러가지 알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당시에 전시된 그림들을 보면서 아, 단순히 일러스트레이터라기 보다는 아티스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구나, 할 정도로 뛰어난 상상력과 표현 방법, 근접하기 어려운 소재와 주제가 시선을 확 잡아 당겼다.

2000년대 초반, 그러니깐 아이들그림책이 막 시작하던 시기에는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그림책들이 쏟아졌었다. 지금 내가 접하고 있는 유럽그림책 대부분이 바로 그 시기의 그림책들인데, 요즘들어 이상하게도 감탄사가 튀어나올만한, 뛰어난 유럽그림책 만나기가 쉽지 않다. 오프서점을 몇 달에 한 번 가서 그림책을 한번씩 점검하고 오는데, 갈 때마다 와우~ 라는 감탄사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차비만 버렸네,쩝! 미지근한 입맛을 다시며 오는 날이 더 많았다. 물론 영미그림책도 그렇고 일본그림책도 그렇기는 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그림책이라면 더 뛰어난 그림책이 나와야하는데, 오히려 요즘 출판되는 그림책을 보면 그림책 시장이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도대체 일러스트거장전에서 본 유럽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품은 다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어!

이 책도 어린이 그림책 번역가이면서 평론가인 엄혜숙 선생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림책을 접한지 어언 10년차, 그 동안 그림책을 접하면서 눈에 뜨는 몇 명의 번역가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명이 바로 엄혜숙 선생.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책에 빠져든 평범한 독자인 내가,그림책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그녀가 번역한 책과 그림책과 관련하여 쓴 글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인터넷 서점에서 때마다 검색하는 번역가들이 있는데, 그녀도 그 중의 한명. 독일문학이 전공인 그녀가 그림책에 대한 사랑이 어찌나 지극한지 영어그림책은 물론이요 일본그림책에도 손을 대고 있으니, 그녀가 발굴해내는 그림책이 어떤 것인지 어찌 궁금하지 않으리오.  

그런데 이번 그림책은 약간 실망스럽다. 독문학 전공자답게 최근의 독일에서 나온 그림책을 번역해 나온 것은 너무나 반가웠는데, 소재가 너무 진부하다고나 할까.이런 규칙적인고 규범적인 소재의 그림책은 지금까지 진절머리 날 정도로 많이 접해 보았다. 일단 그림은 아기자기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개그적인 요소가 많아서 재밌다. 딸아이는 이 그림 저 그림 보면서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특히나 자동차 위에서 쉬를 하는 여자 아이를 보면서 폭소를 터트렸으니깐. 그럴 때마다 큰 아이는 옆에서 현실적인 발언을 하며 딸아이의 웃음을 뭉개었지만.  

여하튼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추면서 그림책을 읽어주지만, 엄마인 난 정작 큰 감동을 받지 못 했다. 아이들도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아니 아이들은 부모와 같이 살면서 끊임없이 조정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에서 지켜야할, 가정에서 지켜야할 할 규범들을 어느 정도 안다. 차라리 이 책을 반대로 이야기했다면 아이들은 그림책을 읽는 재미가 배가 되지 않았을까. 이는 꼭 안 닦아도 되고 차 타기 전에 쉬는 안 누어도 되고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어도 배가 아프지 않는. 스타이그식의 카타르시스를 아이들에게 제공했더라면 아이들하고 더 많이 웃고 우리들이 지켜야할 규범에 대해 다시한번 더 생각하고 아이들하고 작게나마 토론하지 않았을까. 규범이나 규칙에 관해서 직선적인 생각을 가진, 아이들에게 처음 알려주어야 하겠다는 엄마라면 강추! 나처럼 스타이그식의 규범을 선호하는 분이라면 이 책에 나온 규칙들을 반대로 읽어주어 아이들하고 재밌는 한때를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우린 절대 이 안 닦을 거야, 나 아이스크림 많이 먹어야지. 하루에 백개도 먹을 수 있다~(울딸) 난 늦게 까지 놀이터에서 자전거 타고 놀거야!같은. 반대로 말하기 놀이하면서 엄마인 내가 너희들이 그럴 경우 얼마나 걱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직선적으로 너 그렇게 하지마!라고 하기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지만, 내일 되면 분명 잊어버릴 것이다. 아이 키우기 넘 어려워.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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