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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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판타스틱 12월호에 실린 온다 리쿠 인터뷰에서 온다 리쿠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면서 문학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로서, 즐기는 쟝르로서의 인식을 기반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고 독자의 시선에 맞추어 서비스 한다는 생각으로, 독자가 즐겁게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고 글을 읽고, 일본문학은 이제 순문학보다는 쟝르문학이 대세고 쟝르문학이 판을 친다는 것은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 삶의 성찰이나 사유가 목적이 아닌, 책을 읽는 목적이 글을 읽는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구나 싶었다.  

엔터테이너로서의 작가. 뭐 문학을 순수해야된다는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나. 그래봤자, 지루할 뿐이다. 평론가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세계문학의 탑을 차지한 책들. 제목만 유명했지 실제로 그 내용을 읽는 사람이 몇 이나 되겠나. 끽해야 다이제스트용으로 읽고 읽었다고 떠들어 댄 것이겠지. 서경식도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몇 번이나 포기했다고 하질 않나.  순문학의 거창한 문학이론들 이제 그만 떠들라고 해. 이젠 문학도 엔터테이먼트 사업이라고 하잖아. 쟝르 문학의 엔터테인먼트 기능, 그게 아무나 할 수 일이 아니다. 솔직히 글로 남을 즐겁해 해 준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재능이냐고. 한 때 순문학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한 나의 편협한 세계관이 부끄러울 뿐이지 뭐. 그래서 독자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일본작가들의 노력 가상하다고 생각한다. 돈 내고 기꺼히 읽어주마

며칠 전에 도서관에 갔다가 신간코너에 오츠이치의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가 있길래 망설임 없이 집어들고 대출했다. 오츠이치의 <zoo>는 무서웠지만 그 이후에 읽은 <쓸쓸함의 주파수>는 괜찮아서(물론 이 책도 도서관), 이 책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살까말까 좀 망설였다. 워낙 이 책 소개코너에서 천재작가의 탄생을 알린 첫 작품이니 뭐니 해서 호기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결론부터 말하면,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으면 빌려 본 후에 구입해도 늦지 않다. 아무리 일본에서 책이 엔터테이먼트의 일종이라고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독자를 무슨 바보로 아냐. CSI 수사대가 이 책 읽으면서 웃겨서 배꼽 잡을라. 

17살에 이 책을 썼다고 했는데, 17살이 쓴 티 팍팍 난다. 아마추어 글이다. 이야기의 발상은 독특하다. 그리고 재밌다. 독자를 위해 반전서비스까지. 애쓴 것은 용타. 인정하마. 하지만  전개는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일뿐. 비과학적이것도 어느정도야 말이지. 과학적인 설득력 없는 이야기만 풍부할 뿐 작가가 이야기를 가지고 무리해서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소설이 전혀 설득력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 과연 아이들이 놀다가 친구가 죽으면 친구의 죽음을 숨기기에 급급할까 게다가 켄은 시체를 가지고 숨바꼭질까지 하면서 즐기기까지. 아, 물론 소설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내가 우문이라는 것은 안다. 이러한 설정을 가정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말이다. 이건 좀 설득력이 약하지 않나. 두 남매가 사쓰키한테 무슨 치명적인 약점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뭇가지 위에 올라 앉자 있다가 켄의 여동생 야요이에게 사쓰키가 네 오빠를 좋아한다는 고백했다가 화가가 난 야오이가 사쓰키의 등을 탁 치는 바람에 나무에 떨어져 죽은 것인데, 어린 마음에 그 사실을 숨기고 싶다.......

둘. 과연 죽은 사쓰키를 아이들 둘이 옮길 수 있을까. 못해도 살아있을 때도 몸무게 30kg은 나갈텐데... 죽으면 더 빳빳해져 힘들지 않을까. 솔직히 성인인 나도 쌀 20kg 들어 쌀독에 옮겨 놓을라 치면 허리가 뻐근한데. 12살하고 아홉살짜리가 두 남매가 죽은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들고 옮겨 다닌다는 것이 설득력 no.(그냥 억세게 운 좋은 걸로 치부해!) 

셋, 마지막으로 시체 냄새인데, 그 자연적인 것을 숨길 수 있을까. 동네 양반들이 다 축농증 환자란 말이야. 내가 이 비과학성 때문에 네이버나 다음까지 다 뒤져 봤더니, 결과는 이렇더라. 

1.사체냉각:체온이 점점 떨어져 24시간 후면 주변 온도와 동일하게 됩니다.
2.사체건조:사람이 죽으면 수분 공급이 중단되므로 피부가 건조하게 됩니다.
3.각막혼탁:12시간 전후면 안개가 낀 것처럼되며 24시간이 지나면 현저히 흐려지고 48시간이 지나면 불투명하게 됩니다.
4.시반:통상 1시간 이후부터 저부위(발)에서 부터 적자색으로 나타납니다.
5.사체강직:사람이 죽으면 전신의 근육이 일시 이완되었다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근육이 점차 수축되어 다시 굳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시강이라고도 한다.이는 근육의 수축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므로 근육이 잘 발달한 사람에게서 현저하며,노인이나 유아의 경우는 약하게 나타나고 속히 이완된다. 급사체는 지속시간이 길며 대체로 2-4시간에 턱관절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경과하면 어깨-발목-손발가락순으로 진행한다.전신에 미치는 시간은 12시간 정도 걸리나 주위의 온도가 높을 수록 빠르게 진행되며 3-4일 후에는 다시 이완된다. 

이 책의 계절적 배경은 여름막바지. 겨울도 아닌 다음에야 파리가 여기저기 출몰하는 계절에 죽은 시체은 깨끗. 이게 이게 말이나 되냐. 애들이 구더기 득실거리는 시체를 눈 깜짝하지 않고 이리저리 들고 다니며  나흘이나 버틴다는 게.  난 CSI에서 구더기 나오는 장면도 비위 상하던데. 나도 어른 장례 몇 번이나 치러본 사람이라, 이런 비과학적인, 설득력없는 비약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아무리 소설이 가능성 있는 이야기의 산물이라지만, 독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장치라고 하지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켄의 나이가 12살이 아니고 중고등학생이었다면, 그리고 켄의 품성이 냉혹하거나 불량했더라면, (혹 켄이 훗날 <zoo>의 단편 seven rooms의 그 살인마 아닐까하고 엉뚱한 생각이 나더라니깐) 그래, 그 정도면 어린아이 시체 하나쯤이야 옮기기도 쉽지하는 생각이나 들지. 애들 장난에 그냥 속아넘어 간다. 하지만 오츠이치에게 천재라는 수식은  빼 줘라.  다른 작가들보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트릭이 강해 재미가 있을 뿐, 천재까지는 아니다. 자신도 이 수식어에 낯뜨겁겠다. 미국쪽에서는 이 작가 팝노블 작가로 분류하던데.  마지막으로  켄, 넌 타인의 죽음의 그렇게 즐겁다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goth는 기다려지지만, 이번에도 천재 타이틀 붙어있으면 안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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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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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현재 20대의 감성을 느꼈다면 내 감정이 넘 싼티나는 건가
어둠은 두렵지 않아
우슈 룬 지음, 신홍민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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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때문에 중국작가로 오인.
보바리의 남자 오셀로의 여자- 소설에서 찾은 연애, 질투, 간통의 생물학
데이비드 바래시.나넬 바래시 지음, 박종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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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어렵다. 잠잘무렵 꺼내 펼쳐 읽다가 신랑이 "자"라고 소리칠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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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믿지 마! 8세에서 88세까지 읽는 철학 동화 시리즈 1
데이비드 허친스 지음, 신동희 옮김, 바비 곰버트 그림, 박영욱 / 바다어린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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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섯명의 네안데르탈인인 웅가, 붕가, 우기, 트레볼 그리고 부기를 통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알려주는 어린이 철학책이다.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나온 철학책이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읽기 쉽고,  어느 정도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라면 받아들이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게다가 책 내용은 어른인 우리들에게도 유효하고 유용해서,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겁내거나 어질어질하셨던 분들은 이 한권의 책으로 아이들에게 심오한 세상의 이치를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드~듯 할 것이다. 

동굴 속에서만 살고 있는 이들 네안데르탈인들은  자신들의 동굴의 뒷벽에 비쳐진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뿐이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발자욱도 동굴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세상은 동굴 속의 그림자를 통해 이해하는 세상일 뿐이다. 어느 날, 부기는  "우리는 동굴안에 있는 것 밖에 못 본다! 우리가 진짜를 못 보고 있으면 어떡할래?" 라고 주변의 친구들에게 말하자, 그는 친구들의 비웃음과 비난을 한 몸에 받고 동굴 밖 세상으로 쫓겨 난다. 자, 이제 세상을 나온 부기. 푸른 하늘과 초목으로 울창한 대지와 그 땅 위에 있는 다양한 생물체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자신이  동굴 뒷벽에 본 그림자는 진짜 아름다운 모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동굴밖에서 나와 처음 세상의 사물들을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하고 잠시 생각해봤다. 부들부들 떨리는 가슴하며 진정되지 않는 흥분감, 흑의 세상에서 색색까지 아름다운 세상을 처음 본다면, 진실로 oh,what a wonderful world!라고 하지 않을까나.)

그래서 부기는 여기저기 어슬렁저슬렁 돌아다니다가, 한 현자를 만나고 왜 그들이 동굴 속에서 살게 된는지에 대한 연유를 듣게 된다. 아주 옛날, 막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고 45분이 흘러(44p)(흐흐흐, 작가의 유머감각) 큰 종족을 이루며 살게 된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한 부족의 장로가 망루에 올라가  "우리 주위의 지형을 잘 알게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도 알게 될걸세" 라고 제안을 하게 된다. 부족들은 망루에 올라가 자신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지만 서로 다른 지형탓으로 한 부족은 농사에 관련된 것을, 다른 부족은 사냥에 관련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싸움이 나게 된다. 그 싸움으로 부족사람들을 동굴속으로 숨어 들어가 살게 된 것이었다.

우리의 주인공이자 네안데르탈인인 부기는 그 두 부족의 망루에 올라가 왜 그들 부족들이 의견차이가 생겨난 것인지 알게 되고 "우리는 정말 조금밖에 못 보는구나" "모두 함께 큰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설득시켜 세상에 다시 나오게금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 부기는 "걷고 또 걸어 드디아 자신이 살던 동굴 입구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서로간의 이해부족이 낳은 결과였던 것이다. 편협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거울 속에 비쳐진 모습만을 봐서 생겨난 것이다. 거울 저편 너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체(아니 인정하지 않은 체) 거울 속 이미지에만 집착해서  세상을, 사물을, 주변을 이해하려고 한 탓이다. 세상의 사물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위해서는 눈을 크게 뜨고 열린 마음으로 깊게 생각한 다음에 그 상황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각 개인의 마음 속에 편견이나 편협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짥은 글(8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이지만 읽고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는 거짓의 막을 걷어내고 진실을 찾아 낼 수 있을까. 내가 읽은 책들이, 내가 들은 음악들이, 내가 본 영화들은 과연 세상의 진실을 이야기 했던가. 집단으로 무리지어 자신들만이 진실이라고 목청껏 떠들어대는 구호를 진짜 진실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이 책, 그 어떤 두껍고 현학적이고 가식적인 철학책보다도 생각의 힘이 가득 들어 있다. 아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철학전공자들에게는 우스운 책일지 몰라도, 철학의 철자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바로 보는 진리가 들어 있는 책이다.

* 난 이 책이 두께에 비하면 비싸다고 생각해 별하나 뺏는데....아마존 가서 보니 19달러가 넘는다. 허걱. 내가 알기론 일반 소설책도 이렇게 비싸게 책정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순간 입안의 혀가 삐죽 나왔다.  

** 그리고 이 책 삽화가 무척이나 괜찮다. 진짜 유머스러움. 원시인들의 표정을 잘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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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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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인가,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가 막 극장 개봉을 앞 둘 무렵에, 신랑이 읽을거리가 뭐 없나 싶어 책장을 쭈욱 훑어보더니,

신랑, "어라, 이거 윌 스미스 영화제목 아니야."

나,    시큰둥하게 "맞아"

신랑, "이게 원작이냐?"

나,    또 시큰둥하게 "응"

신랑, "읽었니, 재밌어?"

나,    좀 겸연쩍어서 "아니, 아직!"

신랑, (사다 놓기만 하고 왜 안 읽는데,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번 흘낏 보더니)

      "이 책이나 읽어볼까나"

나,   "웬일로!"

그날 저녁, 신랑 소파에 기대어 이 책 다 읽고 나서는, 나한테 휙 집어던지며 하는말. "뭐야, 재미 없잖아." 

평소에도 공포물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이 재밌을 리가 없다. 게다가 1954년 작품이니 반세기도 더 지난 책이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50년동안 글쓰기의 트랜드도 변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는 더욱더 영상적으로 변했고 영악해졌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정서가 담겨져 있지 않는 한, 반세기전에 출가된 작품을 재밌게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이 스티븐 킹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그리고 윌 스미스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이 책에 어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에 재미를 못 본  신랑의 말 한마디가 아무래도 내 머리속에 눌러 붙어 있었나보다. 한동안 이 책 잊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얼마나 재미없길래 신랑 입에서 그렇게 볼멘 소리가 나오나 싶어 읽었다. 하.지.만. 난 이 책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누구나 있을 법한 감상적인 신세타령도 없다. 조잡스럽지 않는 심리묘사나 건조함이 로버트 네빌의 고립된 상황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다.   

서른 여섯살, 평범한 인상의 영국계 독일인. 단호해 보이는 입과 밝은 청색의 눈동자를 가진 로버트 네빌. 네빌은 자신의 집을 견고한 무기로 삼아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는 왜 살아서 자신을 좀비로부터 지켜야 했을까. 그의 고립은 무인도에 갇혀 있는 그런 고립하고는 다르다. 무인도의 고립은 적어도 자신이 언젠가는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라는 끈이라도 있지만, 네빌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의 집 주변에는 실존적 존재인 좀비가 밤마다 그의 피를 갈구하며 맴 돌고 있고, 그는 밤하늘의 별조차 볼 수 없다.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고립. 그는 왜 살아남아, 좀비와 대응해야 했을까. 어차피 좀비를 없앴다고 해도, 이 지구상에 생존자는 네빌뿐인데.  같은 뜻을 가진 반란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인류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한 때 푸른 지구 위에서 존재했던, 먼 옛날의 이야기일뿐텐데. 그의 생존은 부질없고 희망없는 존재의 의의를 전혀 느낄 수 없는데 말이다. 내가 만약 네빌과 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면, 나의 최후의 선택은 아마 좀비라는 유형의 공포로 인해 미쳐버리거나 자살할지도 모르겠다. 산들 뭐해.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아둥바둥 살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길거리에 뒹구는 시체들이나 치우고 기껏해야 도서관에서 좀비관련 서적을 가져와 책을 읽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 말이다. 자신의 삶을 엿가락처럼 길게 들여봐야 죽을 때까지 혼자 인걸. 자연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의 외로움이나 고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데, 네빌은 왜 끝까지 살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 고통스러운 외로움(개를 친구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네빌을 떠올릴 때면 그의 외로움이 얼마나 크 것인지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과 공포속에서 그가 사는 이유는.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네빌이 정말로 두려워 한것은 죽음도 공포도 아닌, 좀비가 되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신인류 좀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네빌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221p).  

이 땅위에서 그가 원하는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좀비의 형태가 아닌. 그는 강하게 다수가 되길 거부하면서까지 자신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칠 수 없고 자살을 할 수 없었으리라.  마지막 장면은 나의 하나의 사고와 하나의 감정이 교차하여 일치점을 만들어 냈다. 그래, 네빌 당신의 죽음은 이제 전설이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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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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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 고지식 한 사람이구나. 한 여자를 서로 품은 클라이브와 버넌의 지속적인 친구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요즘 말로 이런 걸 쿨한 관계라고 하는 건가. 21세기에, 도덕적이라는것이 고지식하고 가식적으로 받아들여 지다고 해도 내 눈에는 클라이브, 버논 그리고 몰리의 본능에 솔직한 삶이 더 속물로 보이는 걸.

그렇다고 내가 뭐 십계명처럼 따박따박 맞춰 사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그녀의 ,그들의 사는 방식을 인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불륜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뒤에 남겨진,버림받은 자의 불행을 나몰라라하고 떠나면, 그게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위선을 벗어던지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도덕성이나 윤리성은 그렇게 비난받아야하는 위선적인 행동일까. 나는, 도덕적 행위라는 것은 결국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도덕적이다라고하면 고리타분한 도덕군자나 연상할 정도로 거북해하는 이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사는데 걸림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 편집국장인 버논은  외무장관 가머니의 여장복장 드래그 사진을 신문 1면에 실어 가머니의 정치적 야망을 꺽으려고 한다. 버넌 자신이 혼외정사와 불륜으로 얼룩진 삶을 살면서, 가머니의 은밀한 혼외정사와  혼외정사 상대인 몰리와의 유희의 산물인 드래그 사진을 갖고 가머니의 총리 진출을 좌절시키려는 의도는, 그와 친한 친구인 작곡가 클라이브와 충돌을 빚는다. 가머니의 사생활인만큼 정치적 의도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는 클라이브와 그 한장의 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더 뚜렷히 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추진하려는 버넌과의 갈등은 서로를 죽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격렬한  대결 구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클리이브 또한 버넌의 비도덕성에 제동을 건 만큼의 인물됨됨이가 안 된다는 것. 새천년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곡을 작곡하기 위하여 간 산에서 간강의 위험성에 있는 여성을 모른체 했던 것. 이래나 저래나 서로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면서 비난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

전에 읽은  선현경과 이우일의 <303일의 신혼여행>에서 " 이 곳을 왜 지구의 종말과 비교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곳에서 동심을 그리는 운하을 보고 '지옥의 바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카뮈의 전락도 이해가 갈 만 했다. 썩고 있는 도시의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고, 언제 썩을 지 모르느 도시의 건물들이 물 위에 떠서 악취를 풍기고 있는 암스테르담(266)"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곳. 현대파 소돔과 고모라. 이안 맥큐언의 암스테르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모든 금기가 해제 된 천국 같은 곳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 뭘? 클라이브와 버넌은 자신들이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안락사가 인정된 암스테르담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자신만은 살아남으려고 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암스테르담의 합리적 법체계가 자신들의 살인을 합리화해주고, 도덕성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양심은 구원받을 수도 회복될 수도 없을텐데.

도덕인 윤리니 뭐 고리타분한 사회적 규약을 지킨다고 시대에 뒤쳐지면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욕망을 다스리면 타인에게 상처나 불행은 주지 않으니깐.

이 작품이 부커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 정도의 가치를 하는지 모르겠다. 부커상보다는 부케정도 받은 것이라면 몰라도. 흡입력도 있고 문장하나하나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 같은데, 오히려 거북할 정도로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클라이브의 작곡부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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