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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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인가,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가 막 극장 개봉을 앞 둘 무렵에, 신랑이 읽을거리가 뭐 없나 싶어 책장을 쭈욱 훑어보더니,

신랑, "어라, 이거 윌 스미스 영화제목 아니야."

나,    시큰둥하게 "맞아"

신랑, "이게 원작이냐?"

나,    또 시큰둥하게 "응"

신랑, "읽었니, 재밌어?"

나,    좀 겸연쩍어서 "아니, 아직!"

신랑, (사다 놓기만 하고 왜 안 읽는데,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번 흘낏 보더니)

      "이 책이나 읽어볼까나"

나,   "웬일로!"

그날 저녁, 신랑 소파에 기대어 이 책 다 읽고 나서는, 나한테 휙 집어던지며 하는말. "뭐야, 재미 없잖아." 

평소에도 공포물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이 재밌을 리가 없다. 게다가 1954년 작품이니 반세기도 더 지난 책이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50년동안 글쓰기의 트랜드도 변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는 더욱더 영상적으로 변했고 영악해졌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정서가 담겨져 있지 않는 한, 반세기전에 출가된 작품을 재밌게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이 스티븐 킹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그리고 윌 스미스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이 책에 어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에 재미를 못 본  신랑의 말 한마디가 아무래도 내 머리속에 눌러 붙어 있었나보다. 한동안 이 책 잊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얼마나 재미없길래 신랑 입에서 그렇게 볼멘 소리가 나오나 싶어 읽었다. 하.지.만. 난 이 책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누구나 있을 법한 감상적인 신세타령도 없다. 조잡스럽지 않는 심리묘사나 건조함이 로버트 네빌의 고립된 상황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다.   

서른 여섯살, 평범한 인상의 영국계 독일인. 단호해 보이는 입과 밝은 청색의 눈동자를 가진 로버트 네빌. 네빌은 자신의 집을 견고한 무기로 삼아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는 왜 살아서 자신을 좀비로부터 지켜야 했을까. 그의 고립은 무인도에 갇혀 있는 그런 고립하고는 다르다. 무인도의 고립은 적어도 자신이 언젠가는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라는 끈이라도 있지만, 네빌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의 집 주변에는 실존적 존재인 좀비가 밤마다 그의 피를 갈구하며 맴 돌고 있고, 그는 밤하늘의 별조차 볼 수 없다.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고립. 그는 왜 살아남아, 좀비와 대응해야 했을까. 어차피 좀비를 없앴다고 해도, 이 지구상에 생존자는 네빌뿐인데.  같은 뜻을 가진 반란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인류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한 때 푸른 지구 위에서 존재했던, 먼 옛날의 이야기일뿐텐데. 그의 생존은 부질없고 희망없는 존재의 의의를 전혀 느낄 수 없는데 말이다. 내가 만약 네빌과 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면, 나의 최후의 선택은 아마 좀비라는 유형의 공포로 인해 미쳐버리거나 자살할지도 모르겠다. 산들 뭐해.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아둥바둥 살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길거리에 뒹구는 시체들이나 치우고 기껏해야 도서관에서 좀비관련 서적을 가져와 책을 읽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 말이다. 자신의 삶을 엿가락처럼 길게 들여봐야 죽을 때까지 혼자 인걸. 자연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의 외로움이나 고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데, 네빌은 왜 끝까지 살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 고통스러운 외로움(개를 친구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네빌을 떠올릴 때면 그의 외로움이 얼마나 크 것인지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과 공포속에서 그가 사는 이유는.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네빌이 정말로 두려워 한것은 죽음도 공포도 아닌, 좀비가 되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신인류 좀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네빌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221p).  

이 땅위에서 그가 원하는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좀비의 형태가 아닌. 그는 강하게 다수가 되길 거부하면서까지 자신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칠 수 없고 자살을 할 수 없었으리라.  마지막 장면은 나의 하나의 사고와 하나의 감정이 교차하여 일치점을 만들어 냈다. 그래, 네빌 당신의 죽음은 이제 전설이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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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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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 고지식 한 사람이구나. 한 여자를 서로 품은 클라이브와 버넌의 지속적인 친구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요즘 말로 이런 걸 쿨한 관계라고 하는 건가. 21세기에, 도덕적이라는것이 고지식하고 가식적으로 받아들여 지다고 해도 내 눈에는 클라이브, 버논 그리고 몰리의 본능에 솔직한 삶이 더 속물로 보이는 걸.

그렇다고 내가 뭐 십계명처럼 따박따박 맞춰 사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그녀의 ,그들의 사는 방식을 인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불륜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뒤에 남겨진,버림받은 자의 불행을 나몰라라하고 떠나면, 그게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위선을 벗어던지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도덕성이나 윤리성은 그렇게 비난받아야하는 위선적인 행동일까. 나는, 도덕적 행위라는 것은 결국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도덕적이다라고하면 고리타분한 도덕군자나 연상할 정도로 거북해하는 이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사는데 걸림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 편집국장인 버논은  외무장관 가머니의 여장복장 드래그 사진을 신문 1면에 실어 가머니의 정치적 야망을 꺽으려고 한다. 버넌 자신이 혼외정사와 불륜으로 얼룩진 삶을 살면서, 가머니의 은밀한 혼외정사와  혼외정사 상대인 몰리와의 유희의 산물인 드래그 사진을 갖고 가머니의 총리 진출을 좌절시키려는 의도는, 그와 친한 친구인 작곡가 클라이브와 충돌을 빚는다. 가머니의 사생활인만큼 정치적 의도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는 클라이브와 그 한장의 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더 뚜렷히 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추진하려는 버넌과의 갈등은 서로를 죽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격렬한  대결 구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클리이브 또한 버넌의 비도덕성에 제동을 건 만큼의 인물됨됨이가 안 된다는 것. 새천년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곡을 작곡하기 위하여 간 산에서 간강의 위험성에 있는 여성을 모른체 했던 것. 이래나 저래나 서로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면서 비난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

전에 읽은  선현경과 이우일의 <303일의 신혼여행>에서 " 이 곳을 왜 지구의 종말과 비교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곳에서 동심을 그리는 운하을 보고 '지옥의 바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카뮈의 전락도 이해가 갈 만 했다. 썩고 있는 도시의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고, 언제 썩을 지 모르느 도시의 건물들이 물 위에 떠서 악취를 풍기고 있는 암스테르담(266)"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곳. 현대파 소돔과 고모라. 이안 맥큐언의 암스테르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모든 금기가 해제 된 천국 같은 곳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 뭘? 클라이브와 버넌은 자신들이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안락사가 인정된 암스테르담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자신만은 살아남으려고 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암스테르담의 합리적 법체계가 자신들의 살인을 합리화해주고, 도덕성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양심은 구원받을 수도 회복될 수도 없을텐데.

도덕인 윤리니 뭐 고리타분한 사회적 규약을 지킨다고 시대에 뒤쳐지면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욕망을 다스리면 타인에게 상처나 불행은 주지 않으니깐.

이 작품이 부커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 정도의 가치를 하는지 모르겠다. 부커상보다는 부케정도 받은 것이라면 몰라도. 흡입력도 있고 문장하나하나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 같은데, 오히려 거북할 정도로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클라이브의 작곡부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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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망가 대왕 3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이은주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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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에 투니버스에서 <아즈망가 대왕> 애니를 방영했을 때, 하필이면 그 때 변태선생이 나오는 장면부터 보는 바람에 <아즈망가 대왕>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구김 또는 아주아주 흐림이었다. 애들 보는 만화에 뭐, 저런 변태가 나와서 주접거리냐.. 싶은게 나의,  <아즈망가 대왕>에 대한 첫인상이었다고나 할까나.  그 이후로 아즈망가 애니에 별로 정이 안갔고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몰랐다. 진짜 그 이유를 그 때는 정말이지 몰랐다. 끽해야 풋풋한  여고생들이 나와 설쳐대는 것이 그냥 좋아서겠지하는 성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러다가 며칠 전에, 이 작가의 요츠바랑을 읽었는데, 오우, 재밌는 거라. <아즈망가 대왕>처럼 뒤집어질 정도로 웃기는 것은 아니었는데, 요츠바의 유쾌, 경쾌, 명랑의 허무맹랑함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 작가의 출세작이라는 <아즈망가 대왕>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설마설마하는 마음을 접고 구입해서 읽다가 웃느냐고 뒤집어져 버렸다. 그것도 애들 앞에서.

읽고 있던 책이 좀 버거워서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아즈망가 대왕> 집어들고 애들 앞에서 읽다가 치요와 토모 그리고 오사카때문에 자지러지게 웃으니깐, 옆에 있던 우리 아들 신기한 표정으로" 엄마, 이 책이 그렇게 재밌어. 어디,어디가 그렇게 웃기는데."  아들의 질문에 거실 바닥에서 배깔고 웃느냐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다 웃고 상황을 수습하려니깐 아이들 앞에서 민망하더라.  아닌게 아니라, 아들애가 나이가 어려서 이렇게 슬쩍 지나갔지, 초고학년만 이었다면, 만화책 보고 웃는 어미보고 가만 두겠어.치요, 토모 다 너희들 때문이야! 치요, 토모 다 너희들 때문이야! 

좀 맹한 모자란 구석이 있는 네컷의 만화지만, 작가의 건강하고 엉뚱한 유머을 느낄 수 있었다. 여태껏 일본 소설속의 여고생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온다 리쿠의 여고생은 신비하고 야마다 에이미의 여고생은 요부같은. 그래서 거리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 그런데 그러면 그렇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똑같아. 여고시절에는 동성끼리의 집단 어울림은 따분한 학교 생활에 활력소 같은 거 아니겠는가. 재잘거림과 별 것 아닌 것에 대한 감정적인 호들갑과 유치함등. <아따맘마>의 아리나 <아즈망가 대왕>의 치요, 토모, 오사카등과 접하면서, 역시 우리와 똑같은 여고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고생들의 천진난만한 낙천성, 집단과의 어울림, 그 속에 갖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쌓아가는, 사회에 나가기 전의 편안함속의 갈등 같은 것.

잠시마나 여고생들의 건강한 세계를 엿 볼 수 있는 것에 묘한 희열을 느꼈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한때 내가 경험했던 시절이었고 아직까지는 그 세계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단순한 네컷의 만화의 때늦은 발견에 열광과 기쁨을 느끼고 무한한 애정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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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 1
존 케네디 툴르 지음 / 사람과책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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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었던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가 그가 언급한 작가들과 그들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의 재미난 글빨이 한 몫 단단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언급한 작가들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더라면, 그 책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 여하튼 낯익은 이름의 작가들에게 끌려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도서관 사서가 아닌 이상, 그 많은 작가들을 아는 것은 무리. 릭 게코스크가 언급한 작가들중에서 존 케네디 툴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지만 그의 책<바보들의 연합>이라는 책의 발간 비화는 흥미를 끌 만 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롱1,2>이라는 제목하에, 번역되었다는 친절한 주가 달려 있어 검색해 보니, 이 책 아직도 팔고 있다. 혹시나 해서 주문해 봤더니, 이틀만에 집으로 배달되었다. <조롱>이 처음 발간한 시기가 1995년인데, 현재 내가 받은 <조롱>의 출판일자도 1995년이더라. 12년전 책.초판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책 상태는 깨끗하다.

이 책의 저자 존 케네디 툴은 1937년 뉴올리언즈에 태어났다. 툴레인 대학을 졸업한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진학한 뒤 헌터 칼리지에서 잠시 강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4년 16살에 <네온 바이블>이라는 장편을 썼을 정도로 글쓰기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편집자에게 보낸 수 많은 글들은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가 <바보들의 연합>이라는 책을 쓴 후, 사이먼 앤 슈스터 출판사의 편집자 로버트 고트리브에게 보냈지만, 결국 출간이 흐지무지 되자, 1969년 3월 26일 그는 황무지에 차를 세워 놓고 배기가스를 들이마시고 자살하고 만다.  

이 책을 처음 읽은 편집자 고트리브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몇 몇 등장인물의 형상화가 완벽하며, 배를 쥐도록 즐거운 에피소드가 몇 꼭지 있다. 그렇지만 결정적 약점이 하나 있다. 재미는 있지만,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달리 말하면 작품속에 어떤 핵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라는 말에 릭 게코스키는 "<바보들의 연합>은 미국 남부지방과 현대인의 삶을 뼈저리게 풍자하고 지독히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분명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빠진 것은 없을까?도덕?  절대 그렇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 작품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견지에서 좀 더 일관성을 갖도록 고트리브가 요구하지 않았을까한다. 즉 하나의 사건에 뒤이어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두 사건이 연속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보들의 연합>은 사건에서 사건으로 이동해 나간다. 그렇지만 사건이 발생하는 방식은 하나에사 하나가 유발되는 방식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은 부조리하다. 이는 이그나티우스의 삶이 자유를 향한 내리막길을 구르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고트리브는 이런 방식이 마땅치 않았겠지만, 작품이 출간된 이래 바로 여기에서 매료된 독자가 수백만명이 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강조한데다가 작가 툴의 어머니인 셀마가 이 책을 발간하기 위한 집착은 이 책을 강렬하게 읽고 싶다라고 만든 동기였다. 툴의 어머니인 셀마는 아들의 유작을 들고, 
`워커 퍼시를 찾아가다.` 셀마의 첫 행보는 이것이었다. 워커 퍼시는 당시 로율라대학의 교수이자 연작 장편 베스트 셀러의 저자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영화광>이었다. 셀마가 왜 이 사람을 지목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어쨌든 셀마는 끈덕졌다. 계속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넣고 끝없이 졸랐다. 자신의 죽은 아들이 대단한 장편소설, 미작의 걸작을 썼다고. 그러니 퍼시 선생이 꼭 읽어야한다고. 1976년 어느 날, 셀마는 로욜라 대학에 직접 찾아가 퍼시의 연구실 문 앞에 기대고 앉아, 땟국에 절어 꼬깃꼬깃해진 두툼한 먹지 타자 원고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당장 읽어야 한다고 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다?" 퍼시는 냉담히 물었다. 그때 그는 속으로 "내키지 않은 일을 솜씨 좋게 피해온 역사가 몇 년인데"하고 으쓱해 했다. 그렇지만, 셀마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승강이를 하느니 차라리 원고를 읽어주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일이겠다 싶었다. 퍼시는 원고를 받아들고, 이 전염병균 같은 부인네를 돌려보낸 뒤, 원고를 넘기기 시작했다. .....중략......... 첫 대목을 읽은 후, 불행하게도,그는 계속 원고를 넘겨야 했다. 흥미를 느끼고 글에 빠져들고, 점점 웃음을 터뜨렸다.(131~ 132 p) 

결국 <바보들의 연합>은 툴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끈덕진 구애에 넘어간 퍼시에 위해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서,  출간되었고 이듬해 <바보들의 연합>은 풀리처상을 수상하였다.  

흐흐흐, 정말이지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었다. 작가의 창작활동에 대한 대답없는 절망감과 자살이라는 마침표,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끈질긴 집념이런 것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읽어죠. 제발 읽어죠하면서 말이다. 그래 결국 사서 읽기는 했지만, 쩝.이 책의 주인공 이그니티우스 레일리라는 인물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밥맛없는 캐릭터였다. 물론 재미 없었다는, 비평가들의 구라가 풍선처럼 부풀려진 소설은 아니었다. 단지 이그니티우스의 사회적 고립, 자기식의 해석과 제멋대로인 행동. 이런 것들이 구역질나게 했다. 내가 청춘의 나이도 아니고, 멋진 잘난 캐릭터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나이에 무슨 남자에 대한 아니 캐릭터에 대한 로망이 있겠나. 한마디로 이런 새끼낳고 미역국 먹은 레일리 부인이 불쌍하다고나 할까나. 답답하고 꽉 막힌 인물은 아닌데, 그의 행동과 사고 하나하나가 독자를 미치게 만든다. 너 왜 그렇게 사니? 툴의 이그니티우스라는 캐릭터에 대한 환멸은 지식인이라는 소위 말하는 책만 읽고 떠들어 대는 행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과장된 인물로 비추어졌다. 뭐 그래도 이런 재수없는 캐릭터 요즘 포스트 모던 이니 해서 환영받겠지만. 난 딱 질색이다. 

소설의 형식이 좀 특이한데, 묘사가 거의 없이 대화체이다. 그래서 흡입력도 있고 빨리 읽힌다. 연극무대를 보는 것처럼 배경은 한정적인데, 장편치고 작품속에 나오는 장소가 몇 안된다. 커다란 사건이 작품에서 절대적인 역활을 하기 보다는 이그니티우스의 우발적인 행동에 따른 이야기의 흐름이 결을 따라 간다고 해야하나. 뭐 그렇다. 책 내용은 나름 재미있었지만 캐릭터는 도저히 매력을 못 느끼겠다 정도. 영화로 왜 안만들어 졌는지 읽어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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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 카브레 2 - 영화와 마술의 세계로!, 2008년 칼데콧 수상작
브라이언 셀즈닉 글.그림, 이은정 옮김 / 꿈소담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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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조르쥬 멜리에스의 흑백무성영화에 대한 오마쥬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언 셀즈닉의 그림책은 아마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묘한 흥분으로 전율감을 느꼈을 법한 실험적이고 프로그레시브한 그림책이다. (오히려 아이들은 시큰둥^^*)

지금까지 나온 그림책 중에서 가장 두꺼운, 총 550여 페이지에 걸쳐서 그린 그림은 30년대 파리와 인물들을 그리기 위하여 총천연색의 색을 선택하기보다는 흑백무성영화시대에 걸맞게 흑백의 톤으로 처리했고, 롱 숏과 클로즈 업이라는 영화기법을 사용하여, 아주 혁식적이고 실험적으로 그려졌다. 그림은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보조적인 일러스트라기보다는 그림자체만으로 독립적으로 글과 이야기가 대등하게 맞물려 진행된다. 

소설이라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그림책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아마도 21세기의 새로운 형식의 선구적인 그림책의 탄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이언 셀즈닉은 <공룡을 사랑한 할아버지>라는 책을 통해 알았는데, 그렇게 매력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그냥 여느 작가들처럼 그림 잘 그리는 작가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큰 일을 낼 줄이야. 솔직히 칼데콧 상타기 전에는 이 책 관심조차 없었다가, 칼데콧상이 브라이언 셀즈닉의 <위고 카브레>에 돌아갔다는 글을 읽고 부랴부랴 검색해서 구입했던 것이다. 오호라, 책을 받고 보니 그의 멜리에즈에 대한 오마쥬에 흥분했고, 칼데콧상 위원들의 작품의 진면목을 볼 줄 아는 안목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브라이언 셀즈닉은 어렸을 때, 레미 찰립의 Fortunately와 Thirteen이라는 그림책을 좋아했다고 . 이 두 권의 그림책은 브라이언 셀즈닉의 작품 활동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쓰고 있는데, 레미 찰립의 그림책은 그림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가 다음 이야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 매 페이지를 넘길때, 비로소 그 전 페이지의 이미지들을 만드는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전 페이지의 이미지와 연결하여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와 이야기가 연결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러므로 페이지를 넘긴다는 행위가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지.) 


그는 위고 카브레에서 (브라이언은 이 그림책을 소설(novel)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른 소설들과 달리, 이미지가 이야기를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스토리를 말하는 것을 돕는다라고 쓰고 있다. 나는 정확하게 소설도 아니고, 완전한 그림책도 아니고, 사실 그래픽 노블이나 플랩북 혹은 영화도 아닌 여러가지가 뒤섞인 책을 만들기 위하여 레미 찰립이나 다른 그림책의 대가들이 사용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몇년 전에 레미 찰립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 이후로 쭉 친구로 지내고 있는데, 지난 12월(2007년) 레미가 브라이언이 진행중인 작품을 물어왔고 브라이언은 그에게 위고 카브레를 설명하다가 작품속의 멜리에즈와 레미가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레미에게 작품속 캐릭터의 포즈를 부탁했다고 한다. 레미는 예스라고 승낙하고 우리가 보는 <위고 카브레>의 멜리에즈는 레미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Deleted Scene" from The Invention of Hugo Cabret

This is a finished drawing that I had to cut from The Invention of Hugo Cabret. I was still rewriting the book when I had to begin the final art. There was originally a scene in the story where this character, Etienne, is working in a camera shop. On one of my research trips to Paris I spent an entire day visiting old camera shops and photographing cameras from the 1930's and earlier, as well as the facades of the shops themselves. I researched original French camera posters and made sure that the counter and the shelves were accurate to the time period. I did all the drawings in the book at 1/4 scale, so they were very small and I often had to use a magnifying glass to help me see what I was drawing. After I finished this drawing I continued to rewrite, and for various reasons I realized that I needed to move this scene from the camera shop to the French Film Academy, which meant that I had to cut this picture. I tried really hard to find ANOTHER moment when I could have Etienne in a camera shop, but, as painful as it was, I knew the picture had to go. I'm glad to see it up on the Amazon website because otherwise no one would have ever seen all those tiny cameras I researched and drew so carefully!
--Brian Selznick

이 장면은 내가 <위고 카브레>에서 삭제해야했던 완성된 드로잉이다. 나는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 해야할 때도 여전히 작품을 다시 쓰고 있었다. 원래는 에티엔이라는 캐릭터가 카메라 상점에서 일하는 장면이 있었다. 파리에 자료조사차 들리면서 나는 하루종일 구식 카메라 상점을 방문하거나 30년대 사진기나 상점의 정면을 찍으면서 보냈다. 나는 오리지널 프랑스 카메라 포스터를 조사했고 그래서 이 드로잉에서 카운터나 선반은 그 시대를 정확하게 재현했다고 확신한다. 나는 책속의 모든 드로잉들을 1/1 크기로 그렸으며, 그것들은 매우 작았는데 그래서 내가 그린 것을 보기 위하여 종종 확대경을 사용해야만 했다. 내가 수정을 계속하면서 이 드로잉을 완성한 후,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카메라 상점 장면이 프랑스 영화 아카데미로 이야기의 흐름이 이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결국 이 장면은 삭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 카메라 상점앞에 있는 에티엔의 이 그림을 실기 위하여 다른 가능성도 생각하며 애썼지만 고통스럽게도 이 장면을 떠내보내야했다. 내가 조사하고 애써 그린 작은 카메라를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마존을 통해  이 장면을 볼 수 있어서 기쁘기 그지 없다.

조르쥬 멜리에스에 대한, 흑백무성영화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거리를 쏘다니고, 상상하고, 수 많은 드로잉 작업을 거치면서 창작에 대한 환희와 낙담과 좌절을 느꼈을 것이다. 셀즈닉은 마지막으로 작품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그의 머리 속에는 이야기가 맴돌고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자신이 가장 공들여 그린 드로잉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잘라내야 했을 때, 욕심도 함께 버렸다. 그는 창작하는 동안  작품의 요소속의 더하기와 빼기가 책의 완결성을 한층 끌어올린다는 사실을 알았으리라. 만용을 부려 무엇을 하겠는가. 하지만  바로 위의 장면을 커트시켜야할 때, 그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떠나야보내야했다는 글을 읽는 순간, 작가의 씁쓸함과 옳은 결단성을 읽을 수 있었다.

위고 카브레를 만들기 위한 작업 기간이 2년 정도였다는 것을 작가후기로 알 수 있었는데, 그의 영화와 그림책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다. 아이들과 함께 흑백무성영화 한 편 보고 나서, 이 작품 읽으면 브라이언의 작품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아들 이 작품의 두께에 허걱 놀랬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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