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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난 고지식 한 사람이구나. 한 여자를 서로 품은 클라이브와 버넌의 지속적인 친구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요즘 말로 이런 걸 쿨한 관계라고 하는 건가. 21세기에, 도덕적이라는것이 고지식하고 가식적으로 받아들여 지다고 해도 내 눈에는 클라이브, 버논 그리고 몰리의 본능에 솔직한 삶이 더 속물로 보이는 걸.
그렇다고 내가 뭐 십계명처럼 따박따박 맞춰 사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그녀의 ,그들의 사는 방식을 인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불륜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뒤에 남겨진,버림받은 자의 불행을 나몰라라하고 떠나면, 그게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위선을 벗어던지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도덕성이나 윤리성은 그렇게 비난받아야하는 위선적인 행동일까. 나는, 도덕적 행위라는 것은 결국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도덕적이다라고하면 고리타분한 도덕군자나 연상할 정도로 거북해하는 이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사는데 걸림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 편집국장인 버논은 외무장관 가머니의 여장복장 드래그 사진을 신문 1면에 실어 가머니의 정치적 야망을 꺽으려고 한다. 버넌 자신이 혼외정사와 불륜으로 얼룩진 삶을 살면서, 가머니의 은밀한 혼외정사와 혼외정사 상대인 몰리와의 유희의 산물인 드래그 사진을 갖고 가머니의 총리 진출을 좌절시키려는 의도는, 그와 친한 친구인 작곡가 클라이브와 충돌을 빚는다. 가머니의 사생활인만큼 정치적 의도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는 클라이브와 그 한장의 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더 뚜렷히 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추진하려는 버넌과의 갈등은 서로를 죽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격렬한 대결 구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클리이브 또한 버넌의 비도덕성에 제동을 건 만큼의 인물됨됨이가 안 된다는 것. 새천년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곡을 작곡하기 위하여 간 산에서 간강의 위험성에 있는 여성을 모른체 했던 것. 이래나 저래나 서로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면서 비난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
전에 읽은 선현경과 이우일의 <303일의 신혼여행>에서 " 이 곳을 왜 지구의 종말과 비교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곳에서 동심을 그리는 운하을 보고 '지옥의 바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카뮈의 전락도 이해가 갈 만 했다. 썩고 있는 도시의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고, 언제 썩을 지 모르느 도시의 건물들이 물 위에 떠서 악취를 풍기고 있는 암스테르담(266)"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곳. 현대파 소돔과 고모라. 이안 맥큐언의 암스테르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모든 금기가 해제 된 천국 같은 곳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 뭘? 클라이브와 버넌은 자신들이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안락사가 인정된 암스테르담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자신만은 살아남으려고 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암스테르담의 합리적 법체계가 자신들의 살인을 합리화해주고, 도덕성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양심은 구원받을 수도 회복될 수도 없을텐데.
도덕인 윤리니 뭐 고리타분한 사회적 규약을 지킨다고 시대에 뒤쳐지면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욕망을 다스리면 타인에게 상처나 불행은 주지 않으니깐.
이 작품이 부커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 정도의 가치를 하는지 모르겠다. 부커상보다는 부케정도 받은 것이라면 몰라도. 흡입력도 있고 문장하나하나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 같은데, 오히려 거북할 정도로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클라이브의 작곡부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