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라딘에서 사용하는 기억의집이란 닉넴은 최승자시인의 시집제목에서 따 온 것이다. 이십대 시절 최승자 시인의 기 쎈 시 언어에 환호했고, 서정성보다는 현실적인 시어에, 조근조근한 속삭임보다는 부르짖음에 반해 최승자 시를 좋아했던, 시인의 오마쥬에서 나온 것이다. 정말 그 시절에 최승자첨 노골적으로 현실적인 시어를 쓰는 여시인도 없었다. 한껏 멋부리지 못해 안달했었으니깐.
그런 그 시인의 근황이 궁금해 구글하다가, 놀라운 기사를 읽었다. 차마 여기다 그녀의 근황을 구구절절 쓰지 않으련다. 노시인의 근황을 읽는 것만으로도 맘이 실컷 아펐으니깐.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내 아침부터 생각했다. 기사에 나온 것처럼 시집 몇 권 구매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끽해야 월급쟁이 남편을 둔 내가 무슨 경제적인 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자조도 인다. 출판 산업 혹은 지적 작업에 뛰어 든, 혹은 몸 담은 많은 출판인들, 소설가들, 번역가들, 그외의 모든 지적 산업 관련종사자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노후의 삶조차 가난에 저당 잡힙 줄이야....
어디에서부터 엉킨 것일까? 국가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지적산업체의 종사자들의 삶이 이렇게 비참해져도 되는 것일까? 지적 산업체의 기득권들은 이러한 현상에 구질구질한 변명이나 늘어놓으려나. 작가는 만원짜리 책 한권에 인세 천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원도 안 되는 시집은 뭐 말할 것도 없을 거고. 번역가들의 수입은 어떨까? 출판산업도 분배에 대해 생각해 봐야하지 않나. 기업의 분배만 강조하지 말고.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현재 내 심정은 그녀가 말하는 미친년의 계절의 목련꽃처럼 똑 부러진 느낌이다.
(잎도 피우기 전에 꽃부터 불쑥 전시하다니,
개나리, 목련, 이거 미친년들 아니야? 이거 돼먹지 못한 반칙 아니야?)
이 봄에 도로 나는 환자가 된다.
마음 밑 깊은 계곡에 또다시
서늘한 슬픈 물결이 차 오르고
흉부가 폐광처럼 깊어진다.
아. 이 자지러질 듯한 봄의 풍요 속에서
나 어릴 때 흥얼거렸던 그 노래
이젠 서러운 찬송가처럼 들리네.
"설렁탕 거룩한 탕 꿇여 가려고
오늘도 모여 있네, 이 어린 동포들."
선생님이 삼시세끼 꼭 드시며 건강 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