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만 읽고 2부 조금 더 읽다가, 이런 작품이 부커상을 수상하다니...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접었다.
이 책에서 가장 찜찜했던 대목,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교사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 라그랑주를 인용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한 장면일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이것이 줄리안 반즈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생각인지 아니면 에이드리언의 젊은 치기로 강의중에 주목받으려고 내밭은 말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금도.
저 문장은 20세기의 역사 중 일부인 나치가 행한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위안부할머니들이 전장에 끌려가 군인들의 성적 노예가 되어야만 했던, 현재 이 시간에도 항거하는 역사의 기록을 부정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는 짤막하지만 인상적인 글이다.
지금도 유럽 일부에선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유태인들의 조작과 날조라고 가르치고 있으며(도킨스가 이러한 역사 날조를 얼마나 개탄하는지), 현재 우리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문화원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아마 그 시위도 몇 년안으로 끝날 것이다. 생존해 있는 분들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역사가 한낱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문한 문서에 의한 것이라면,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시위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무엇을 위해 유태인들은 아우슈비츠를 주장하고 위안부로서의 처절했던 기억을 서로 공유하며 일본 정부의 반성과 보상을 요구하는가. 그 모든 것들이 역사의 헛발질인가!
유태인 학살에 대한 자료와 사진 문서 기록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일부 우익들은 그런 일은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처참했던 기억과 고통은 아직도 살아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종군에 참여한 것일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는 두 주장의 첨예한 대립에서 시작해야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불학실하고 부정확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는 무엇인가?
난 20세기의 처첨했던 대학살과 전쟁 기록을 믿는다. 자신이 체험했던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록을 한 인간의 왜곡된 기록이라며 부정할 수는 없다.
줄리안 반즈의 소설처럼, 한 인간의 기억 왜곡이 역사적 사건의 흐름까지 왜곡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역사가는 역사를 정확하고 확실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여러 관점에서 사건을 본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관점이 있을 수 있고 왜곡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사실로 남는다. 숨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역사적 사건의 왜곡에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사실적 기록과 증언 그리고 문서 자료를 끊임없이 수집하여 왜곡하는 자들앞에 수집한 증거로 반박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정직함과 부지런함을 믿는 편이다.
나는 줄리안 반즈가 말한 역사의 정의를 부정한다. 그리고 역사라고 쓰기 보다 소설이라고 정의내린다. '소설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