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 한명회는 남이 장군을 제거했을까? - 남이장군 vs 한명회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6
임채영 지음, 최상훈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4월
평점 :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명회와 남이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6 [왜 한명회는 남이 장군을 제거했을까?]에서는 원고로 남이장군이, 피고로 한명회가 등장한다.
남이장군은 누구인가? 그는 조선 제 3대 임금인 태종의 넷째 딸 정선 공주의 아들이며 어려서부터 백성들의 믿음과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훈구파 조정 대신들은 역모죄를 씌워 조선 최고의 무장이 될 수 있었던 그를 스물 여덟의 나이로 죽게 만든다. 남이장군은 1467년 임금의 명을 받아 포천과 영변 지역의 도적 무리를 없애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그 반란을 잠재운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병조 판서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한다.
피고 한명회는 성종때 영의정에 병조 판서까지 겸임하며 권세를 누렸으나, 1504년 연산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꺼내져 팔다리를 절단당하는 부관참사형을 받는다. 이유는 연산군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어난 갑자사화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명회의 호는 압구정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강남의 압구정이 한명회의 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다.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6 [왜 한명회는 남이장군을 제거했을까?]에서 가장 쟁점은 한명회가 남이 장군의 역모 혐의를 사전에 알고 있었느냐 여부와 그 뒷처리 과정에서 얼마나 관여했는지를 가리는 것이었다. 한명회가 책에서 주장한 것은 모든 책임을 유자광에게 떠넘겼지만 사건의 여러가지를 유추해본 결과 당시 왕을 능가하는 핵심 권력 가관의 수장이었던 그가 피고의 역모 사건을 몰랐다는 것은 억지로 본다. 훈구파의 선봉이었던 한명회는 반대파인 남이 장군이 눈에 가시였을 것이고 세조 사후 곧바로 남이 장군에 대한 숙청이 이뤄진것을 볼때 앞 뒤 사건은 자연스레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역사는 누구에게 누구의 관점으로 배우냐에 따라 영웅에 대한 시각이 달라짐을 느낀다. 어릴 적 봤던 사극 드라마에서는 한명회가 충신으로 멋있게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 머릿속 고정관념에는 한명회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 읽은 여러가지 역사 서적 속에서 그의 여러 모습을 보건대 그는 술책과 계략에 뛰어난 자임은 분명하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능력을 펼치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남이장군이 불쌍하고 조선에게 꼭 필요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평가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