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 비담 vs 선덕여왕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7
정명섭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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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신라 27대 왕이다.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선덕여왕은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되었고, 책 또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동안 백성을 위해 구휼 사업에 힘썼고,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덕여왕은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일까?

그 당시 신라는 성골출신만 왕이 될 수 있었고 선덕 여왕이 유일한 성골출신이라 가능했다. 계층간의 차별은 존재했지만

성골 내부에서는 남녀의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여왕의 즉위를 두고 신라가 남녀 평등의 사회였다고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극도로 폐쇄적인 족벌주의가 낳은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은 신라의 세 명의 여왕들은 모두 신라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당시 어려웠던 신라의 왕이 된 선덕여왕, 남존여비사상의 한반도에서 그녀는 어떻게 왕위를 이어나갔을까?

그러나 비담은 또 다른 견해를 밝힌다. 선덕여왕은 유능한 귀족과 장군을 놔두고 가야 출신의 김유신만을 중용해서 싸움을 맡겼고, 외교 문제는 김춘추에게만 매달렸다고 한다. 뒤를 이은 진덕 여왕 역시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진성 여왕은 각간 위홍과 정을 통하고 국정을 어지럽혔다고 한다.

책에서는 어떻게 판결을 하였을까?

'남녀의 성별이 통치자로서의 능력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될 수 없으며, 이는 비교적 동등한 교육과 기회를 주는 현대에 여성이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세 명의 여왕이 통치자로서 부적합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같은 실패 사레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런 근거가 없는 이상 여성이 신라를 통치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은 근본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다.' (판결문 중)

 

여성이 왕으로 존재했던 신라시대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학창시절 역사를 배우며 신라에 호감을 가지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책을 읽으며 선덕여왕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를 선덕 여왕으로 보지 말고 선덕왕으로 평가해달라...'

그 말이 계속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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