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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ㅣ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또 돌아온 여름 휴가. 회사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세 번째 맞이한 여름 휴가다. 대구집에 내려가는 KTX 기차 안에서 지난 휴가를 내가 어떻게 보냈던가 기억을 살려 보았다. 처음 맞던 여름 휴가 때, 나는 Y양과 같이 도쿄로 날아갔었다. 그때는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쿨하게 카드를 긁을 때였고, 호기롭게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하고 면세점에서 뭔가를 잔뜩 지른 후에 또 도쿄에서 정말 많이 먹고, 보고, 샀다. 당시엔 그럴 체력도 충분했고, 마음의 여유는 더 충만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또 한번의 여름이 갔다.
작년 여름 휴가 때는 뭘 했던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렇게 깨끗해도 되는 것인지.
올 여름 휴가는 대구집에 가서 가족끼리 치산폭포..(맞나 모르겠다...)에 놀러 가서 계곡에 발 담그고 닭도리탕을 먹었다. 그리고 계속 한번 만나자, 만나자 말만 하던 고등학교 동창들과 만나서 놀고, 또 하루는 중학교 동창들과 만나서 놀고, 또 하루는 대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또 그들 중 몇몇과 같이 부산 광안리로 놀러를 갔다. 나는 내가 햇볕에 탄지 모르겠는데.. 내가 원래 하얀편이 아니고 또 딱히 거울을 자주 보거나 별로 의식하는 편이 아니라 그런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싸구려 썬탠을 했다고 놀린다. 허걱. 게다가 튜브를 끼고, 파도를 타서 그런가, 어깨와 팔이 너무 아프다. 이젠 해수욕도 체력이 안 따라주는 나이가 된 거 같아서, 모래사장 파고 들어가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간만에 느긋하게 별다방에 앉아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카페 모카를 연거푸 마시고, 다시 친구들과 인천에 놀러갔다. 차이나 타운에서 탕수육을 먹고 월미도에서 해 지는 걸 보고, 놀이기구 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었다.
이번 여름 방학을 맞이해 유럽에 다녀온 우리 언니의 말에 따르면, 유럽은 정말 젊었을 때 가야할 거 같단다. 워낙 좁은 지역에 볼거리가 밀도있게 옹기종기 모여있다보니, 의욕이 넘치고 체력도 충만할 때 가는 게 좋을 거 같다는데, 하지만 그 얘기도 빌 아저씨에게만은 예외가 아닐까 싶다. 혼자서도 참 잘 다니고, 잘 먹고, 잘 놀고, 잘 돌아다니는 빌 아저씨. 그의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머감각이 삶을 얼마나 윤기나게 하는지 감탄하게 된다. 분명 짜증나고 답답한 상황인데,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재치의 끈을 놓지 않는 빌 아저씨의 센스, 바로 그것이 세계에서 제일 재밌고 신나는 여행기를 쓸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 유명하다는 그림, 모나리자를 보러 갔을 때, 관람객이 너무 많이 몰려서 아주 멀리서 그림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 나라면 어떻게든 앞으로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투덜거릴 거 같은데, 모나리자 그림이 우표같이 보인다는 그 대목에서 소리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또 낯선 언어들, 불편한 외국어를 속에서 오히려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어린애 같은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빌 아저씨. 바로 그 시선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의미가 아닐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정신없이 사람을 만나면서 일주일의 휴가를 보냈고, 어쨌든 인천에서 부산까지 경인선과 경부선을 모두 주행했지만, 이번 휴가에서 제일 잘한 일은 차타고 짬짬이 이 책을 다 읽은 게 아닌가 싶다. 치산계곡에서 소나기를 만나 책이 완전히 젖어서 모양이 좀 일그러지긴 했지만 가져가길 잘 한것 같다. 꼭 직접 가서 봐야 제맛인가. 빌 아저씨와 함께 유럽을 여행한 기분으로 기쁜데.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진정한 나를 보기위해, 삶의 의미 같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라, 그냥 나를 좀더 잘 이해하고 알기위해 우리는 떠난다. 삶의 정답이 결코 하나일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각각 다르고, 그래서 더 경이로운 세상 속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힘, 그 용기, 그게 무엇보다 나를 조금 더 행복하게 하고, 나은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엔 변함이 없다. 고마워요, 빌 아저씨. 또다시 버텨낼 힘을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