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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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때 말야.'
그녀의 검은 눈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산부인과에 따라가달라고 처음 찾아갔을 때, 왜 하필 너였는 줄 알아?"
"왜 그랬는데."
"네가 친절한 사람 같지 않아서야,"
"……."
"거절당해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어."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를 더듬다가 나는 그녀가 잘 관찰했듯 대부분의 남자들이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담배를 넣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만약 병원에 따라가준다 해도 너한테라면 신세진 느낌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 남의 비밀을 안 뒤에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정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게 보였기 때문이야."
"……."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 너하고는 뭐가 잘못되더라도 어쩐지 내 잘못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불을 붙이려던 나는 이곳이 병실 안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고 담배를 도로 담뱃갑 안에 집어넣었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제 보니 그녀의 벌어진 눈 속은 꽤 깊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그렇게 냉정하게 살 수 있는 거지? 사실은 너도 겁이 나서 피해버리는 거 아니야?"
 
   
 

세상에는 많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중의 대부분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철저한 타인들이다. 누군가의 연구에 따르면 전세계 사람들은 여섯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라고 하지만, 여섯 다리라는 수치는 사실, 얼핏 듣기엔 별거 아니게, 무진장 가깝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신경을 쓰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무한대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엔 영원히 타인만이 가득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연이 닿고 닿아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중 몇몇은 평생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도 있고, 그중 몇몇은 몇분도 안되는 찰나 동안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쩌다가 우연히 그러한 불완전한 시공간을 함께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안다고 이러이러하다 평가한다는 것은 정말 예의 없는 짓이고, 부정확한 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사람이 타인을 아는 일이 가능하단 말이냐. 하지만 내가 신이 아닌, 부족한 인간인 까닭에 그런 잘못을 알면서도 혼자 판단을 내리고, 혼자 미루어 짐작하는 오류를 늘 범하고 그렇게 그렇게 다시 사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쿨하다, 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어떤 사람의 성격을 규정짓는 단어로 쓰이고 있는데, 사실 '쿨'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사이다 같은 청량함과 파란색으로 쓰일 것 같은 상큼함과 군더더기 없음은 조금만 더 나아가면 '콜드'가 되기 쉽다. 쿨함과 냉정함, 차가움 사이의 경계선은 모호하기 마련이고, 이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이 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여기서 중요한 판단 기준은(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지만) 역시나 상대방에 대한, 관계에 대한 신뢰에 있다고 본다.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그 따뜻한 믿음, 그 마음 없이 쿨함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못한다. 매사에 분명한 태도, 찌질하게 매달리지 않는 강력한 분별력. 그런 것들이 철저히 이기적이고 나만 좋으면 그만이란 식이라면 그건 쿨함이 아니다.

또한 나를 방어하기 위해, 거북이 등껍질에 목 집어넣듯, 알맹이를 숨긴 채 선긋기 놀이를 하며 이 선 넘어오는 거 싫어, 우리 쿨하게 만나자. 이런 소리를 하는 것 또한 쿨함이 아니다. 상처가 많은 것인가, 비밀이 많은 것인가. 아니면 겁나는 것인가.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건 다른 것이지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괜히 신경이 쓰이고, 상처를 받고, 맘을 쓰는 것은 전혀 쿨하지 못한, 내 죄다. 내 탓이다. 뭘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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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 - 비행기와 커피와 사랑에 관한 기억
오영욱 지음 / 예담 / 2008년 2월
품절


아무것도 정해놓은 것은 없었다.
다만 2년여의 스페인 생활이 내게 가르쳐준 것
-혹은 저절로 몸에 밴 것에 의해
조금 천천히, 느긋하게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깐 선잠을 자다 깨어버린 후 몸을 비비 꼬다가 겨우 도착한
인천공항의 활주로와 공항 건물의 기다란 통로
그리고 입국 심사대를 거치는 순간
불과 12시간 전의 기대는 삽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리웠던 이 대한민국 땅의 대기에는
단순히 질소와 산소와 이산화탄소와 스모그와 황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에너지의 덩어리가
미처 공항 건물을 빠져나오지도 못했던 나를 짓눌렀다.

"너는 지금 부담을 느껴야 해."
막 장마가 시작된 6월의 서울 하늘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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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주말을 정말 남들이 들으면 샘이 날 정도로 신나고 재밌고 보람차게 보낸 사람이라도 월요일에 대한 압박감으로 우울해지려고 하는 법인데, 주말을 그렇게 보내지 못한 내 마음은 더욱 우울해졌다. 나는 이대로 영영 땅으로 꺼지고 마는 것인가, 덜컥 겁이 났다.  

빵과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떼운 게 머릿속에 파노라마 되어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된 밥 한끼 먹지 않고 주말이 다 갔다고 생각하니 슬픔과 억울함과 짜증이 몰려왔다. 결국 다 내 잘못이지만, 난 도대체 왜 이러고 사는지, 정말 내 스스로가 미울 정도였다.  

안 되겠다 싶어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지갑을 챙겨 동네 마트로 갔다. 새로 생긴 롯데 마이슈퍼. 원래 구멍가게까지 대기업이 장악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가지 않겠다고 맘으로 외쳤던 곳인데 어쩔 수 없다. 제대로된 밥을 먹으려면, 동네 마트엔 고기나 생선은 안 파니까.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마트 안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쇼핑 바구니에 사과 두 개, 방울토마토 한 팩, 한우 치마살, 무순, 블루베리요거트, 호두파이 등을 챙겨넣었다. 아, 고기 구워먹는데 설중매가 빠질 수 없지. 술도 한 병. 

제법 묵직한 비닐 봉지를 들고 집까지 오르막길을 걸어오는데,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에, 어둠이 내린 골목에, 사방이 다 어득했다. 가을이 진짜 오려나, 벌써 쓸쓸하다. 나 원래 가을 타는데, 무덥다가 어느 순간 더위가 사라지는 그 순간, 한해가 또 다 저무는가 싶어서 난 얼마나 슬펐던가. 

집에 와서 고기를 굽고, 과일을 씻고, 술을 따르고, 정신없이 먹고 마셨다. 고기를 다 먹고는, 후식으로 빵을 먹고 요거트를 퍼먹으며 위안을 했다. 스스로를. 괜찮다고. 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너 원래 혼자서도 잘 살아왔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약하게 구냐고. 

혹시나 했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상가집에 간다던 사람. 일찍 마치면 연락을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미련하게도 기다렸다. 혹시나 싶어 머리도 감고, 그러고 빈방에 혼자 쳐박혀서 책을 읽고 있었으나,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올리가. 

주말을 몽땅 날려버리고도. 그럴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었으니까 이해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나. 이 원망의 화살이 결국 나를 향하는 건 분명 문제인데. 나는 왜 계속 이렇게 마음의 서늘한 기운을 견뎌내지 못하고 점점 못나고 약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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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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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민규, 라고 하면 난 제일 먼저 키득거리는 여대생이 한 명 떠오른다. 학교 도서관 제일 구석, 남들은 다 책상이 더 좋거나 새 건물인 쪽에 모여 앉아 토익이나 전공 공부를 할 때, 나는 아무도 없는, 아주 가끔 박사과정이나 석사과정 학생이 오가는 해외논문자료실 같은 곳에 앉아,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혼자 책을 읽었다. 주로 내가 읽은 책은 단편소설집이었다. 나는 장편소설을 지겨워서 잘 읽지 못했고, 빠른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는 단편소설을 좋아했다. 아마 그때 몇년도의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다가 혼자 키득거렸다. 큭큭큭.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져서, 계속 큭큭거리며 읽던 작품이 바로 <고마워, 바로 너구리야>였다. 세상에. 이런 소설이 있다니.  

그 신선함과 재치에 반한 나는 그날부터 박민규 작가의 팬이 되었고, 그후로 발표된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고상하고, 지적이고, 감성적인 한국 소설계에서 박민규만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는 없다며, 어쩐지 그의 책은 사서 봐야 할 것만 같은 책임감을 느끼며, 지금까지 세월이 흘렀다. 내 책상에는 여전히 <삼미슈퍼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나왔던 이런 문구가 붙어있다. 그 문구를 매일 보며 세월은 잘도 갔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
 
   

그리고, 그가 돌아왔다. 못생긴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사랑 소설과 함께. 지금까지 <삼미슈퍼타즈>는 내가 삼천포로 맨날 빠져서 방황할 때마다 뭔가 위안을 주던 소설이었다. 나는 계속 앞으로 잘 가지 못하고,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았고, 심지어 뒤로 가기도 했다. 반은 내 탓, 반은 네 탓이라고 생각하며 화도 내고, 욕도 하고, 그냥 잊고, 무심한 척 어쨌든 살아왔지만, 그래도 어쨌든 세상에 정답이 하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또 나를 믿게 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외모에 자신 없는 나 같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냈다. 오 마이 갓! 

세상은 바야흐로 아름다움의 시대다. 얼굴이 예쁜 게 착한 거고, 몸매가 좋은 게 착한 거인 시대, 특히나 여자들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머릿결로 좋아야 하고, 피부도 좋아야 하고, 눈, 코, 입, 귀 다 예뻐야 하고, 목선도 예뻐야 하고, 손도 예뻐야 하고, 허리라인, 가슴, 엉덩이, 다리, 발목, 발까지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예뻐야 '미인'이다. 정말 미인되기 힘든 세상이다. 미에 대한 하나의 기준만을 용납하는 사회, 그 기준으로 개개인을 채찍질하고 차별하는 사회, 그 미친 세상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이다. 

근데 무엇보다 이런 말 하면서 나도 뜨끔하다. 나도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를 보면, 와, 침 흘리며 계속 쳐다봤고, 못생긴 여자 보면 속으로 '아이고, 참 못났다'라고 외쳤으며, 예뻐지고자 한때 피부관리실에도 다녀보았고, 비싼 옷을 산 적도 있다. 결국 다 내가 못나서, 자신감이 없어서, 세상의 기준에 맞추고자 용써본 거다. 결과는 실패했다만. 

어떻게 하면, 외모에 대한 광풍이 식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개성있는 외모로 반짝 빛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단점을 먼저 지적하는 게 아니라, 예쁜 면을 먼저 찾아낼 수 있는 그런 눈을 갖게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또 얼마나 우리 사회는 행복하고 예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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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가 간다 -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한재호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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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좀 읽다가 잊고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발견해 빌려서 읽었다. 처음에 앞부분은 비가 오면, 보장슈퍼 문을 닫고 정처없이 떠나는 남자, 부코스키에 관한 호기심으로 재미있게 읽었는데 점점 읽다보니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늦어졌다. 그래도 뭔가 다 읽어야 한다는 책임감 비슷한 걸로 다 읽긴 했는데, 다 읽고나서 그래서 결론이 뭐였지? 생각해보니 모르겠다. 내가 책을 너무 대충 읽은 걸까? (응!! 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생으로 몇년째 살고 있는 주인공. 가끔 친구들의 취업 축하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결혼 축하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만 여전히 학교 근처에서 살고, 학교 도서관에 가고, 자소서를 고치고, 다시 쓰고, 잡코리아를 기웃거리고 가끔 면접도 보고, 계속 불합격하는 남자다. 하루는 과음 후 다음날 깨보니 자기 자취방에 여자후배가 자고 있다. 그후 그녀는 그와 같이 지내게 된다. 그녀가 하는 일도 그와 그닥 다르지는 않다. 

이렇게 직업이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취업준비생'으로 살아가는 그는 비오는 날만 되면, 슈퍼 문을 닫고 어디론가 떠나는 수상한 남자, 부코스키를 미행하는 이야기가 소설의 기본 줄거리다. 부코스키는 정처없이 서울시내를 쏘다닌다. 충정로, 광화문, 범계, 홍대 등등 번화가를 돌면서 밥을 먹고 차를 먹고, 계속, 걷고 암튼 그런다. 딱히 무슨 숨겨진 비밀이 있을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초월과 구원의 가능성이 봉쇄된 요지부동의 현실에 섣불리 분노하거나 쉽게 체념하지 않으면서도,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전유해내는 능력은 이 작품만의 개성적인 미덕이다.

 
   

 심사평 중에 나오고, 책 뒷표지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사실 이러한 개성적 미덕이 어디에 숨겨있는지, 적어도 나는 잘 모르겠다. 목표가 없는 삶, 지표가 없는 삶, 거리를 그저 배회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를 비롯한 사람들의 이야기. 뭐 그런 걸 다루는 거 같긴 한데, 몇년째 직장 없이 지내면서 생활비를 걱정하거나 술기운에 하룻밤 같이 보낸 여자랑 쿨하고 담백(?)하게 같이 살고,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부코스키 얘기를 하고. 이런 설정 자체는 좀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소설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필요는 없지만, 이래저래 공감도나 이해도에서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에 한겨레21에서 '88만원 세대의 사랑'이란 기획기사를 보았는데, 최소한 그 정도의 이해는 하고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은 맘뿐. 재기발랄한 젊은 작가의 탄생이 아주 반갑지만은 않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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