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정해놓은 것은 없었다.
다만 2년여의 스페인 생활이 내게 가르쳐준 것
-혹은 저절로 몸에 밴 것에 의해
조금 천천히, 느긋하게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깐 선잠을 자다 깨어버린 후 몸을 비비 꼬다가 겨우 도착한
인천공항의 활주로와 공항 건물의 기다란 통로
그리고 입국 심사대를 거치는 순간
불과 12시간 전의 기대는 삽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리웠던 이 대한민국 땅의 대기에는
단순히 질소와 산소와 이산화탄소와 스모그와 황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에너지의 덩어리가
미처 공항 건물을 빠져나오지도 못했던 나를 짓눌렀다.
"너는 지금 부담을 느껴야 해."
막 장마가 시작된 6월의 서울 하늘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