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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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 하루키지만 정작 나는 그의 작품 중에서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 밖에 읽어보지 못 했다. 두 작품 모두 나에게는 난해하게만 느껴졌고, 이 작가 정말 나랑 안 맞는구나 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대체 무엇인지 좀체 와닿지 않았고, 그저 야한 글을 쓰는 작가라는 인상만 강렬하게 남았다. 아무래도 10대와 20대 때 읽었기 때문에 더욱 느끼는 바가 편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엄청 망설이다 생일 선물로 받아 읽게 된 여자 없는 남자들. 표지 디자인부터 뜬금없는 것이 괜히 칙칙하고 요상한 이야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첫 작품인 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모두 설정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보편적, 도덕적으로 생각하는 남녀 관계애 대한 관념을 비틀어 놓는다. 참 독특한 스토리이기도 하고, 무언가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은 느낌을 가득 담고 있다. 그리고 고독과 질투, 불안, 근심 등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을 글 속에 자연스레 녹여내 이 독특한 상황 속 주인공들에게 감정적으로 동조되고 만다.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 '내가 쓰는 이야기라면 어떻게 결말을 냈을까' , '과연 주인공들은 행복해졌을까' 등등 엄청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똑같진 않았지만 비슷한 심리 상태나 현실에 직면해 봤던 과거의 기억도 떠올려 보게 되고. 나와 전혀 상관없는 독특한 소재인 듯 느껴졌지만 읽다보면 유사한 기억 또는 일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한 좀에서 작가가 독특한 이야기 속에 보편성을 담아내는 능력에 놀라게 된다!

모든 이야기가 경이롭게 느껴졌지만 그 중에 가장 와닿는 작품은 가노였다. 현실과 이계를 넘나드는 느낌, 음습한 것들이 주인공에게 숨죽여 다가오는 듯한 느낌은 읽는 내내 오싹함을 느끼게 했다. 한 여름밤에 기담을 읽는 느낌- 기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혀!- 이라 하마터면 그대로 책장 속으로 들어갈 뻔 했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두 번, 세 번 읽다보니 무서워할 것은 음습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가노가 만들어낸 마음 속 허상들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정 상처 받고 아파해야할 때 그러한 감정들을 억울러 버리고 진실을 외면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척 자신을 가장한 채 살아온 것이다. 가장 원해왔던 것이면서도 가장 두려웠던 일은 그가 만든 마음의 공백 속으로 그간 억눌러온 감정과 자아들이 뒤섞여 흘러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노크 소리로 형상화 되어 들려오고 그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집요하게, 강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약해지고 싶지 않아, 쿨한 인간이 되고 싶어 솔직한 감정과 본능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양의적이라는 건 결국 양극단 중간의 공동을 떠안는 일인 것이다.
"상처받았지, 조금은?"
아내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인간이니까 상처받을 일에는 상처받아."
기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 p. 265

기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작고어두운 방 한 칸에서 누군가의 따스한 손이 그의 손을 향해 다가와 포개지려 했다. 기노는 눈을 꼭 감은 채 그 살갗의 온기를 생각하고 부드럽고 도도록한 살집을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에게서 멀어져 있던 것이었다. 그래, 나는 상처받았다, 그것도 몹시 깊이. 기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어둡고 조용한 방 안에서. - p. 271


단편집은 뭔가 중간에 이야기가 끊길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었고, 짧은 이야기 속에 작가의 메시지를 담아야 하니 독자 스스로 파헤치고 생각해야하는 장치들이 많아 힘들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접해 보니 탄탄한 스토리,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느껴져 나름 매력적인 장르란 생각이 든다. 특히 셰헤라자드나 그레고리 잠자-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해버린 잠자가 다시 인간으로 변한 이야기를 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하루키가 위트있게 느껴졌다.- 를 읽다 보면 단편집에 푹 빠져들게 된다.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지는 것이다. 셰해라자드가 학생 때 좋아하던 남학생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다음 단편집에 연결해서 실어주면 좋겠다 라는 열망이 생겨날 정도로 하루키는 참 대단한 이야기꾼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열린 결말이라는게 늘 무책임한 작가의 농간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단편집은 되려 그러한 맛으로 읽은 것 같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다는 점! 긴 이야기 끝의 열린 결말이면 울화통이 터지지만 짧은 이야기 끝의 그것은 유쾌한 상상의 여지로 느껴진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몽환적 느낌의 긴 장편 소설은 아직 읽을 자신이 없다. 하루키의 단편집부터 차례로 공략하다 보면 그만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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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 Novel Engine POP
보르자 지음, 이태웅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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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이혼으로 고향을 떠났다가 6년 만에 돌아온 김영재. 6명의 아이들을 이끌며 골목 대장 노릇을 했던 그는 이제 없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선생님, 같은 반 친구들 모두에게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며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적당히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반장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쓰여진 노트를 건네 받게 되고 기묘한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 어떤 일, 사람에게도 연루될 생각이 없는 소년이었지만 노트의 주인은 집요하게 연락을 해오며 감상평을 들려줄 것을 종용한다. 마지 못해 읽은 노트 속에는 단순한 작가 지망생의 습작 노트가 아닌 실제 김영재 본인 주변의 괴담을 다루고 있었다.

주인공 김영재가 과거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당시 어울리던 친구들이 학교와 종합병원 구 병동에 퍼져있는 괴담의 피해자라는 것, 그리고 그 괴담의 주인은 김영재를 제외한 남은 네 학생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허유경이라는 것이다. 유령을 믿지 않는 김영재는 무언가 음모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사라진 친구들과 허유경에 대한 진실을 찾아 괴담을 추적한다.

학창시절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괴담들, 그 괴담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실명까지 담고 있다면 몹시 공포스러울 것이다. 그래서책을 읽다 보면 김영재의 등 뒤를 따라 나 역시 살금살금 살펴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공포가 세밀하게 잘 그려져 등 뒤가 서늘해지는 느끼이랄까. 여름밤에 읽기에 딱 좋은 소설인 것 같다. 후반부에서 괴담과 관련한 진실이 드러나기 전까진 이 책이 호러 소설인지 추리 소설인지 자꾸만 의심이 들었을 정도니까. 극 중 편집장인 김미영 팀장의 말대로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와 플롯이 탄탄한 스토리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도 참신하고 흥미롭다. 또한 김영재를 비롯한 주변의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나 어른도 아이도 아닌 그 애매모호함이 지닌 불확실한 면들을 잘 드러내고 있어 과거청소년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비정한 어른들의 논리, 그 어른들의 논리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아이들. 무지함과 순수함때문에 되려 잔혹해질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잘 그렸다.

다만 극 중에 좀 과하다 싶은 멘트들이 많은 것이 좀 흠이다. 소위 오글거린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담임 프락치, 세미프로 등 김영재가 사용하는 단어들도 좀 오버스럽게 느껴지는데, 김미영 팀장의 대사는 더 대단하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긴 하지만 일반적은 느낌의 대화는 아니다. 약간은 긱 같은 느낌의 똘기충만한 덕후의 모습이랄까. 그러한 부분 역시 그녀를 표현하는 캐릭터로써의 장치였다면 대단하지만.. 약간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때문에 어른들을 위한 소설보다는 청소년층을 타깃으로 한 호러 추리물 같은 느낌이 강하다. 조금 더 일상적인 대화톤과 단어들이 선택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벗뜨!! 소재도, 캐릭터들도 굿굿!! 흥미진진 재밌는 소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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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영멘 1
나카무라 히카루 지음 / 시리얼(학산문화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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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명시 된 지구 종말은 일어나지 않고 인류는 무사히 밀레니엄을 맞습니다. 그래서 천계의 두 별, 붓다와 예수는 하계의 일본으로 휴가를 옵니다. 신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여느 인간들의 모습처럼 현대 문명을 체험하고 일본 곳곳을 관광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려옵니다. 두 분(?)은 사람들의 감사한 마음과 웃음이 엔화로 환산되어 매달 월급처럼 휴가비를 지급 받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도쿄에서 좌충우돌 동거가 시작됩니다. 알뜰살뜰 저금도 하고, 충동 구매를 해서 잔고가 바닥나기도 하고.. 우리들의 삶의 모습과 똑같이요.

예수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다소 즉흥적인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소위 말하는 기분파에다가 실수 투성이예요. 기쁨으로 충만하면 그릇을 빵으로, 물을 와인으로 바꾸는 기적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행하고 늘 아가페적인 따스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모든 드라마를 섭렵한 파워 블로거이고 코스프레 매니아 입니다. 붓다는 이런 예수를 돌봐주는 형 같은 느낌입니다. 게임 위와 만화책에 빠져있고 밥 짓는 일을 좋아합니다. 천계에 네 컷 만화도 연재하고 예수가 즐겨입는 티셔츠에 실크 스크린으로 글자를 새겨주는 취미를 가지고 있고요. 고행 매니아이고 체중 변화에 민감하여 살이 찌면 굶습니다. 하하...

위의 설명처럼 예수와 붓다는 정말 유쾌하고 호기심 가득한 청년들의 모습입니다. 인류와 세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선한 마음을 간직한 채로 말이죠. 전기 자전거를 처음 만난 날, 인간이던 시절 이게 있었다면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자전거 바구니에 실어서 골고다 언덕을 룰루랄라 올라갔을 거라고 말하는 예수님,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한 것은 모든 인간은 부처처럼 존귀하다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라 중2병 같이 세상물정 모르고 한 말이었다고 고백하는 부처님. 보다 보면 참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다정다감한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석가탄신일과 크리스마스에 깜짝 생일 파티를 해주려고 특급 작전을 펼칠 정도로 진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막상 이 분들을 사랑하고 따르는 인간들은 그렇지 못 하잖아요. 종교라는 명분을 앞세워 서로 전쟁하고, 탄압하고.. 결국 모든 것은 신의 뜻과 상관없이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만들어낸 일들인 것 같아 씁쓸하더군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본색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입니다. 역시 일본이 최고라는 둥, 일본 민족주의가 깊게 담겨 있어 마음이 불편하긴 합니다. 억울하면 우리도 이런 거 그려야죠 뭐 하하.. 일본 광고 만화 같은 느낌이 가득하지만 이런 건 그냥 가뿐하게 제껴 읽으면 되니까요. 불경과 성경에 등재된 모든 종교적 배경과 일화들이 개그 소재로 쓰여 웃음 폭탄으로 작용하는데요 여기에 집중하면 되더라고요.

일부 기독교 신자 분들에게는 신성모독이라는 느낌이 드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만화일뿐이고, 어찌 보면 신문과 뉴스에서 보여지는 각 종교 단체들의 몹쓸 행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진정성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 종교의 근간인 선함과 구원, 인간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지하게 담아 내고 있거든요. 거기에 재미를 더해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종교에 대한 믿음과 관심이 무럭무럭 자라게 되네요. 종교의 참뜻을 어지럽힌 인간이 잘못이지, 그 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지향점은 훌륭하다는 것도 새삼 깨닫고 있고요. 무엇보다 종교간 화합에 대 찬성인 저로서는 두 분의 우정이 아름답게만 느껴집니다.

정말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될 것 같아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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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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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쿠이 도쿠로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이 책이 중견 작가의 농익은 작품이 아니라는 것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책의 구성 자체가 독특하고 마지막 결말이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정체도 놀랍지만 두 개의 장이 하나로 연결되는 구조적인 병합이 진.짜. 반전으로 작용합니다.

책은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는 딸을 잃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마쓰모토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이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쓰모토의 시각에서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감정적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딸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그의 범죄에 대해 일면 수긍하게 됩니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버렸다는 마쓰모토의 말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장 같거든요. 모든 것이 그 구멍으로 통과해 버려 고통과 상실감 이외에는 무엇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거죠.

딸 문제라면 돌변하게 된다.

특히 자식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메울 수 없는 허무감을 이용하여 돈을 취하려는 무자비한 종교 단체들이 등장하면서 그의 파멸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의식이나 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시켜 그에게 헛된 바람과 상상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누쿠이는 신흥 종교에 대해 심도 있는 비판을 제기합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자들의 빈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어떻게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맹목적인 믿음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비지니스로서의 신흥 종교의 면면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정신적인 안식처를 상실한 현대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신흥 종교 단체들이 판을 치는지 이해가 갑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자, 소외된 자들 일수록 더욱 깊게 빠져들 수 밖에 없다는 것도요. 사이비 종교 단체들은 그들이 듣고 싶고,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그것을 정확하게 제시하기 때문이겠죠. 참 씁쓸하고 화가 납니다.

두 번째는 연속되는 유아 유괴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수사1과장 사에키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는 수사의 진행 상황, 사에키 개인의 고뇌와 가정사, 사에키를 둘러싼 조직의 풍토와 갈등들을 세밀하게 보여줍니다. 때로는 사에키 본인의 독백으로, 혹은 직속 부하인 오카모토의 시선으로 말이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힘겨운 시절을 보냈고, 종국에는 그의 결혼마저 정치권과 경찰 간 담합의 도구로 이용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서투를 뿐만 아니라 그의 결혼 생활 역시 순탄하질 못 하죠. 또한 수사가 장기화 되고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사에키의 출생과 배경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채 무책임한 비판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언론은 그의 사적인 영역까지 침투하여 조롱과 비판의 희생양으로 삼고요. 언론, 여론, 조직의 무자비함과 비정함, 조직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권 다툼이 극명하게 드러나 사회파 소설로서의 면모도 보여줍니다. 특히 캐리어와 논캐리어 간의 불화와 차별은 일본의 경찰 조직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문제점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두 개의 거대한 이야기가 교차로 진술되면서 독자의 호기심은 증폭됩니다. 언뜻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로 합쳐질지 궁금증을 자아내지요.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지고 두 개의 장 사이의 간극이 좁혀질수록 손에 땀을 쥐게 됩니다. 마침내 구조적 반전이 드러나는 순간 정말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입니다. 이 충격적 결말을 위해 세심하게 각각의 이야기를 서술한 작가의 능력이 정말 놀랍습니다. 데뷔작만큼 차기작은 얼마나 탄탄하게 잘 쓰여졌을지 기대되는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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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럴렐 월드 러브 스토리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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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의 내용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흔하디 흔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삼각관계,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영화와 드라마화 되고, 노래 가사로 쓰여진- 친구의 연인을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꽤 통속적이고 진부한 소재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이런 뻔한 소재로 대체 히가시노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무척 궁금증이 일더군요.

초반 인트로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특정한 시간대에 나란히 정차하게 되는 지하철 두 대. 주인공인 다카시는 건너편 지하철에서 항상 자신과 마주해 있는 미모의 여인을 보고 호감을 느낍니다. 대학원을 졸업하는 날 용기를 내어 그녀가 타던 지하철에 오른 다카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 합니다. 대신에 자신이 타던 지하철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죠. 그 후 예상치 못 한 순간에 그녀를 대면하게 됩니다. 가장 친한 친구 도모히코의 애인인 마유코로써 말이죠.

사실 저는 이 때 동시간대에 정차하는 지하철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두 남녀의 상황과 책의 제목을 통해 평행 우주에 대한 이야기인가 상상했었어요. 미드 프린지를 보면 두 개의 평행 우주가 서로 마주보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과 비슷하게 그려지거든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기억 상실과 재편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 되더군요.

이야기는 두 개의 축으로 전개 됩니다. 도모히코의 애인인 마유코를 보며 질투와 죄책감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다카시의 이야기, 그리고 전자의 이야기를 꿈으로 혹은 문득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으로 느끼는 다카시의 이야기 이렇게 두 개가 교차 형식으로 서술됩니다. 후자의 이야기 속에선 마유코가 다카시의 애인이자 함께 동거하는 상태로 등장합니다. 행복만 느끼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자꾸만 마유코가 도모히코의 애인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마유코와의 추억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지고요. 게다가 미국 본사에 가 있다는 도모히코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어떻게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까요? 절친인 도모히코가 연락도 없이 미국으로 가버릴 일도 없거니와 그에 대한 기억조차 명확치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죠.

과연 어떠한 이야기 속의 '다카시' 가 진짜 '나' 로서의 다카시인걸까요.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이 세계가 거짓처럼 느껴지고, 진정 '나' 는 누구인가, 어떠한 기억이 진실인가를 놓고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다카시의 이야기는 갑갑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특히 이 소설 속 가설처럼 임의로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이러한 기술을 이용한 실험이 자행되고 있다면? 과 같은 상상을 하다 보면 어떤 호러물보다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본인의 기억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결국 '나' 라는 존재에 대한 근거를 주변인들에 의지해 찾아야내야 한다면 그것만큼 혼란스럽고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자신 따위는 없어. 있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는 기억뿐. 모두들 거기에 얽매여 사는 거야. 나나 다카시씨나." - p. 468


이러한 버추얼 리얼리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외에도 삼각관계에 빠진 도모히코, 다카시, 마유코 세 사람의 심리 변화와 그 내부에 자리한 팽팽한 긴장감과 갈등이 섬세하게 그려져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누구에게나 직간접적으로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그들이 처한 상황에 쉽게 몰입하게 됩니다. 친구, 연인과 삼각관계에 빠진 지인, 혹은 본인의 이야기처럼요. 그래서 더욱 공감하게 되고 애틋하고 안타까운 이들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을 졸이며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처음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에다가 기억의 재편과 같은 꿈의 기술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었는데요. 막상 읽고 나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재다능함에 놀라게 됩니다. 추리 소설 속 트릭이나 반전만 봐도 기발한데 인간 본연의 감정들에 대해서 이렇게 섬세한 묘사를 해낼 수 있다는 것에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단하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겠네요. 정말 지겹고 뻔한 말이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이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지나치게(?) 책이 빈번하게 출간되는 분이라 완성도나 작품성 면에서 논란을 피할 수가 없는데요. 편차가 있긴 하지만 언제나 굉장한 몰입도로 책을 읽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민감한 사회 문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소재를 흥미롭게 글 속에 녹여낸다는 점에서 실로 대단한 작가란 생각이 듭니다. 최근 그의 초기작인 세 작품이 잇달아 출간되었는데요, 그 책들도 어서 만나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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