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럴렐 월드 러브 스토리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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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의 내용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흔하디 흔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삼각관계,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영화와 드라마화 되고, 노래 가사로 쓰여진- 친구의 연인을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꽤 통속적이고 진부한 소재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이런 뻔한 소재로 대체 히가시노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무척 궁금증이 일더군요.

초반 인트로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특정한 시간대에 나란히 정차하게 되는 지하철 두 대. 주인공인 다카시는 건너편 지하철에서 항상 자신과 마주해 있는 미모의 여인을 보고 호감을 느낍니다. 대학원을 졸업하는 날 용기를 내어 그녀가 타던 지하철에 오른 다카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 합니다. 대신에 자신이 타던 지하철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죠. 그 후 예상치 못 한 순간에 그녀를 대면하게 됩니다. 가장 친한 친구 도모히코의 애인인 마유코로써 말이죠.

사실 저는 이 때 동시간대에 정차하는 지하철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두 남녀의 상황과 책의 제목을 통해 평행 우주에 대한 이야기인가 상상했었어요. 미드 프린지를 보면 두 개의 평행 우주가 서로 마주보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과 비슷하게 그려지거든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기억 상실과 재편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 되더군요.

이야기는 두 개의 축으로 전개 됩니다. 도모히코의 애인인 마유코를 보며 질투와 죄책감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다카시의 이야기, 그리고 전자의 이야기를 꿈으로 혹은 문득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으로 느끼는 다카시의 이야기 이렇게 두 개가 교차 형식으로 서술됩니다. 후자의 이야기 속에선 마유코가 다카시의 애인이자 함께 동거하는 상태로 등장합니다. 행복만 느끼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자꾸만 마유코가 도모히코의 애인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마유코와의 추억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지고요. 게다가 미국 본사에 가 있다는 도모히코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어떻게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까요? 절친인 도모히코가 연락도 없이 미국으로 가버릴 일도 없거니와 그에 대한 기억조차 명확치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죠.

과연 어떠한 이야기 속의 '다카시' 가 진짜 '나' 로서의 다카시인걸까요.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이 세계가 거짓처럼 느껴지고, 진정 '나' 는 누구인가, 어떠한 기억이 진실인가를 놓고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다카시의 이야기는 갑갑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특히 이 소설 속 가설처럼 임의로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이러한 기술을 이용한 실험이 자행되고 있다면? 과 같은 상상을 하다 보면 어떤 호러물보다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본인의 기억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결국 '나' 라는 존재에 대한 근거를 주변인들에 의지해 찾아야내야 한다면 그것만큼 혼란스럽고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자신 따위는 없어. 있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는 기억뿐. 모두들 거기에 얽매여 사는 거야. 나나 다카시씨나." - p. 468


이러한 버추얼 리얼리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외에도 삼각관계에 빠진 도모히코, 다카시, 마유코 세 사람의 심리 변화와 그 내부에 자리한 팽팽한 긴장감과 갈등이 섬세하게 그려져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누구에게나 직간접적으로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그들이 처한 상황에 쉽게 몰입하게 됩니다. 친구, 연인과 삼각관계에 빠진 지인, 혹은 본인의 이야기처럼요. 그래서 더욱 공감하게 되고 애틋하고 안타까운 이들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을 졸이며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처음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에다가 기억의 재편과 같은 꿈의 기술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었는데요. 막상 읽고 나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재다능함에 놀라게 됩니다. 추리 소설 속 트릭이나 반전만 봐도 기발한데 인간 본연의 감정들에 대해서 이렇게 섬세한 묘사를 해낼 수 있다는 것에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단하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겠네요. 정말 지겹고 뻔한 말이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이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지나치게(?) 책이 빈번하게 출간되는 분이라 완성도나 작품성 면에서 논란을 피할 수가 없는데요. 편차가 있긴 하지만 언제나 굉장한 몰입도로 책을 읽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민감한 사회 문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소재를 흥미롭게 글 속에 녹여낸다는 점에서 실로 대단한 작가란 생각이 듭니다. 최근 그의 초기작인 세 작품이 잇달아 출간되었는데요, 그 책들도 어서 만나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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