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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두 번 읽기를 권한다.
첫 번째는 빠른 전개와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에 몰입하게 된다. 문장들이 길지 않고 간결한데다가 글의 내용 자체도 '나' 라는 사람의 독백 위주이기 때문에 누구나 어려움없이 읽을 수 있다. 책에 빠져들어 끝을 향해 달리다 보면 급작스런 반전, 결말과 조우하게 된다. 그 순간 몰려오는 당혹감와 황망함이란. 끝내주는 가독성때문인지 마지막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는다. 뒤에 더 이야기가 있겠거니, 혹은 에필로그라도 있지 않을까 책장을 더 넘겨 보지만 에누리없이 바로, 그 지점이 끝이다.
그래서! 결국 한 번 더 읽기를 결심하게 된다.
두 번째는 '나' 의 세밀한 감정 묘사와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에 놀라게 된다. '나' 는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더 큰 쾌락을 느끼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범이다. 부실한 초동 수사와 기술 덕분에 공소시효가 지나도록 잡히지 않은 자랑스런(?) 싸이코패스이다. 살인마로서의 냉혹함과 무심함, 그가 타고난 어두운 심연 외에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최소한의- 감정들이 묘사된다. 오로지 악만이 존재하는 듯한 그의 내면에도 고독감과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살인에 있어 남다른 능력을 타고났지만 그 자체를 이해받을 수는 없기에 외로웠고 혼자만 간직해온 찬란한 살인의 기억들을 잃어가는 것이 두렵다. 그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기억할 수 있는 현재 또한 짧아지면서 생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 해진다. 시간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나의 마음 또한 무겁게 만든다. 그럼에도 삶과 타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의 시니컬하고 독특한 관점들이 유머러스하게 다가와 위트와 진지함이 잘 균형을 이룬다.
다시 책을 꼼꼼히 읽다보면 곳곳에 흐트러진 반전의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더해진다. 결말을 보기에 급급해서 미처 읽지 못 했던 진실의 조각들을 발결할 때마다 작가의 세심함과 탄탄한 구성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나' 가 말해주는 현재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두 번의 뇌수술로 살인 충동을 억제한 그는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새롭게 등장한 연쇄살인범은 어떠한 인물인지 더듬어 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무언가 작가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디게 읽히게 써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꼼꼼히 읽거나 두 번 읽지 않고 한 번에 쉽게 읽고 지나가버리면 놓치는 게 너무나 많다. 주인공 '나' 내뱉은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 p. 143
이 책은 역설의 미학이 담겨있다. '나' 가 읊어대던 반야심경의 어느 구절 또한 결국엔 인생의 진리와 깨달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공포 그 자체를 표현한 말이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을 죽이던 '나' 가 이제는 자신의 딸 -자신이 마지막으로 목졸라 죽인 여자의 딸- 을 지키기 위해 연쇄살인범과 전쟁을 치르려 한다. 그것도 알츠하이머에 걸려 많은 것이 불분명해지는 상황 속에서. 이 모든 것이 아이러니이고, 해학적이다. 문화평론가 권희철님의 서평처럼 이 책은 가벼운 소설이 아닌 인생이 던진 악마적 농담 그 자체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공포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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