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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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 하루키지만 정작 나는 그의 작품 중에서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 밖에 읽어보지 못 했다. 두 작품 모두 나에게는 난해하게만 느껴졌고, 이 작가 정말 나랑 안 맞는구나 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대체 무엇인지 좀체 와닿지 않았고, 그저 야한 글을 쓰는 작가라는 인상만 강렬하게 남았다. 아무래도 10대와 20대 때 읽었기 때문에 더욱 느끼는 바가 편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엄청 망설이다 생일 선물로 받아 읽게 된 여자 없는 남자들. 표지 디자인부터 뜬금없는 것이 괜히 칙칙하고 요상한 이야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첫 작품인 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모두 설정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보편적, 도덕적으로 생각하는 남녀 관계애 대한 관념을 비틀어 놓는다. 참 독특한 스토리이기도 하고, 무언가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은 느낌을 가득 담고 있다. 그리고 고독과 질투, 불안, 근심 등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을 글 속에 자연스레 녹여내 이 독특한 상황 속 주인공들에게 감정적으로 동조되고 만다.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 '내가 쓰는 이야기라면 어떻게 결말을 냈을까' , '과연 주인공들은 행복해졌을까' 등등 엄청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똑같진 않았지만 비슷한 심리 상태나 현실에 직면해 봤던 과거의 기억도 떠올려 보게 되고. 나와 전혀 상관없는 독특한 소재인 듯 느껴졌지만 읽다보면 유사한 기억 또는 일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한 좀에서 작가가 독특한 이야기 속에 보편성을 담아내는 능력에 놀라게 된다!

모든 이야기가 경이롭게 느껴졌지만 그 중에 가장 와닿는 작품은 가노였다. 현실과 이계를 넘나드는 느낌, 음습한 것들이 주인공에게 숨죽여 다가오는 듯한 느낌은 읽는 내내 오싹함을 느끼게 했다. 한 여름밤에 기담을 읽는 느낌- 기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혀!- 이라 하마터면 그대로 책장 속으로 들어갈 뻔 했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두 번, 세 번 읽다보니 무서워할 것은 음습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가노가 만들어낸 마음 속 허상들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정 상처 받고 아파해야할 때 그러한 감정들을 억울러 버리고 진실을 외면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척 자신을 가장한 채 살아온 것이다. 가장 원해왔던 것이면서도 가장 두려웠던 일은 그가 만든 마음의 공백 속으로 그간 억눌러온 감정과 자아들이 뒤섞여 흘러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노크 소리로 형상화 되어 들려오고 그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집요하게, 강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약해지고 싶지 않아, 쿨한 인간이 되고 싶어 솔직한 감정과 본능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양의적이라는 건 결국 양극단 중간의 공동을 떠안는 일인 것이다.
"상처받았지, 조금은?"
아내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인간이니까 상처받을 일에는 상처받아."
기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 p. 265

기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작고어두운 방 한 칸에서 누군가의 따스한 손이 그의 손을 향해 다가와 포개지려 했다. 기노는 눈을 꼭 감은 채 그 살갗의 온기를 생각하고 부드럽고 도도록한 살집을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에게서 멀어져 있던 것이었다. 그래, 나는 상처받았다, 그것도 몹시 깊이. 기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어둡고 조용한 방 안에서. - p. 271


단편집은 뭔가 중간에 이야기가 끊길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었고, 짧은 이야기 속에 작가의 메시지를 담아야 하니 독자 스스로 파헤치고 생각해야하는 장치들이 많아 힘들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접해 보니 탄탄한 스토리,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느껴져 나름 매력적인 장르란 생각이 든다. 특히 셰헤라자드나 그레고리 잠자-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해버린 잠자가 다시 인간으로 변한 이야기를 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하루키가 위트있게 느껴졌다.- 를 읽다 보면 단편집에 푹 빠져들게 된다.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지는 것이다. 셰해라자드가 학생 때 좋아하던 남학생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다음 단편집에 연결해서 실어주면 좋겠다 라는 열망이 생겨날 정도로 하루키는 참 대단한 이야기꾼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열린 결말이라는게 늘 무책임한 작가의 농간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단편집은 되려 그러한 맛으로 읽은 것 같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다는 점! 긴 이야기 끝의 열린 결말이면 울화통이 터지지만 짧은 이야기 끝의 그것은 유쾌한 상상의 여지로 느껴진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몽환적 느낌의 긴 장편 소설은 아직 읽을 자신이 없다. 하루키의 단편집부터 차례로 공략하다 보면 그만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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