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 우리 역사 바로잡기 2
이덕일.김병기.박찬규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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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천 [서평] 만주 벌판에서 찾은 고구려의 역사 

김병기, 이덕일 저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를 읽고 / 2007. 8., 511쪽, 역사의아침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역사학계에서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에 대한 이견이 많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일본측의 ‘역사왜곡’과 중국측의 ‘동북공정’에 대비하여 연구했다며 발표하는 각종 결과물들이 오히려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에 충실하다는 비판이다. 

한국사 전반에 그런 지적들이 나오지만, 일제침략과 박정희 군사독재 미화 등의 근현대사를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이 고조선사와 고구려사에 대해 왜곡에 대해 관심이 적은 편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들여다보면,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은 장기적이고 치밀하게 진행 중이다. 문제는 한국에서도 동등한 수준으로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학문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데 있다. 오히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들러리를 서주는 분위기가 국내 주류사학계의 현주소다. 

그런 현주소의 뿌리 중 한 가지는 주류사학계의 학맥에 있을 것이다. 해방 후 미군과 친일파들이 양심적인 학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고 탄압한 이후, 이병도를 비롯하여 일제시대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의 고대사와 중세사를 철저히 조작한 일제 사학자들에게서 근대사학을 배운 이들이 역사학계를 지배했고 21세기까지 그 학맥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도 사학계 내부의 전근대적인 문화 등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것이 필자가 국내 주류사학계와 국사편찬위, 국사교과서 등이 배제하고 외면했던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와 발해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뿐만 아니라 국사책에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통일신라+발해), 고려와 조선시대에 위인으로 기록된 인물과 역적으로 기록된 인물에 대해 다시금 공부해보려고 마음 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하의 역적이자 살인마라 할 수 있는 친일파와 이승만과 박정희가 사후 100년도 되지 않았는데, 건국자나 위인으로 조작되는 ‘역사왜곡’의 현장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초중고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소위 ‘삼국시대’ 이전의 한민족사에 대해서는 정부와 국내 주류사학계가 그다지 관심을 쏟지도 않고 연구도 하지 않는다. 단적인 사례가 서울대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문서들을 아직도 번역하고 있다. 그만큼 정부와 주류학계는 무관심하고 무책임하다.(한국고전번역 50년 계기로 본 한국고전번역의 성과와 과제 http://www.itkc.or.kr/itkc/post/PostServiceDetail.jsp?menuId=M0441&clonId=POST0016&nPage=1&postUuid=uui-99d14476-a99c-4c30-89c1-2577)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주류사학계는 ‘친일사학’이나 ‘식민사학’이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일제시대에 부역했던 상당수의 관료와 사학자와 관련자들이 청산되지 않은 채, 여전히 공공기관과 국공립대학과 학계를 장악하고 있고, 그들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사학계가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수수방관하고 때로는 거드는 동안 치열하게 역사왜곡과 싸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공공기관과 대학과 주류사학계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발로 뛰면서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여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바로잡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 책도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읽은 건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우리 역사 바로잡기’ 시리즈로 발간 중이라 한다.


저자들은 고구려가 “기마민족 특유의 대륙성과 진취성을 발휘하여 중원의 패자로 군림한 동아시아 최강국”의 역사였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나름 엄중한 학문적 방법을 동원하여 왜곡되고 폄하된 고구려 역사의 30가지 쟁점들을 되짚었다. 

고구려를 비롯하여 고조선의 옛 강역에 존재했던 부여, 비류국 등이 고조선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던 이유, 고구려 건국연대에 관한 여러 설들, 무려 94년이나 재위했다는 태조대왕과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차대왕(95세 즉위), 신대왕(77세 즉위)에 관한 의문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북방확장정책을 계속 수행하는 대신 수도를 남쪽의 평양으로 옮긴 이유, 당시의 세계 최강대국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용장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이 흉포하고 잔인한 독재자로 전해진 이유, 미천왕과 부인 주씨의 합장 무덤인 안악 3호분에 전연前燕에서 망명한 동수의 시신을 배장한 과정을 꼼꼼히 추적함으로써 중국 측 사료를 근거로 한 역사 기술로 그동안 왜곡되어온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밝혀냈다. 

또한‘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역사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의 시각이 반영된 <삼국사기>와 전통적인 중화 패권주의 사관에 입각해 쓴 중국 사서들의 잘못된 표기방식,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모순된 논리 때문에 진정한 실체가 왜곡, 폄하된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분석한다. 


저자들은 식민사관과 중화사관이라는 구각(舊殼)을 깨고 고구려를 바라본다. 

이 책을 통해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복속과 연합을 적절히 활용한 자주적인 외교술을 펼쳐 한·신·후한·삼국시대·위진 남북조시대·수·당 등 중국의 수많은 나라와 대적해 우위를 점하는 과정,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독자적인 천하관, 고분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인의 사상과 풍속,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도 150여 년이나 이어진 유민들의 발자취 등을 통해 살아 숨쉬는 고구려 역사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 추모왕(주몽), 동쪽으로 연해주, 서쪽으로 난하 지역, 남쪽으로 예성강에서 충주와 영일만을 잇는 지역, 북쪽으로 흥안령 산맥 북쪽 흑룡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태왕, 후한이 멸망하고 369년 만에 중국 대륙을 통일해 한껏 기세가 오른 수나라에 선제공격을 가하고 200만에 이르는 침략군을 일거에 무너뜨린 영양왕,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당나라 한복판에 치청왕국을 세워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일대의 15개 주를 다스리며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한 이정기 등 고구려인이 기마민족 특유의 진취성을 발휘하여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기상을 떨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는 고조선과는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고조선의 옛 고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국가라는 사실,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명명한 <삼국유사>의 기록,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단군사화의 내용 등을 통해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라는 역사 의식을 갖고 성장한 나라임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하여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기록들, 고구려인들이 직접 기록한 건국기원에 대한 일차 자료인 광개토태왕릉비문과 모두루묘지문 등을 종합, 분석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세력과 시조 추모왕에 대한 의문점들을 명쾌하게 정리해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두 번째 국가인 부여와 또 한 명의 건국영웅인 부여 시조 동명왕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고구려가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며 국가 발전을 이루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두 편의 답사기가 실려 있어 고구려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고구려 첫 도읍지인 오녀산성(중국 길림성 환인 소재), 우리 민족의 전통 공법인 그랭이 공법을 사용해 축조한 장수왕릉, 지금은 많이 무너져 내려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잔존 형태를 보아 7층 이상으로 조성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광개토태왕릉, 고구려의 건국기원이 기록된 광개토태왕릉비와 모두루묘지, 고구려와 공동 군사작전을 펼쳐 후한後漢에 맞선 선비족의 발상지 알선동굴, 고구려 여인으로 북위의 황후가 된 문소황후의 영릉을 구석구석 찾아간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고구려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중원의 여러 나라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축조한 고구려의 산성 중 중국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의 주요 산성 여섯 곳을 찾은 답사기를 함께 실었다. 고구려는 당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산성을 가장 많이 쌓고 제일 잘 이용한 나라였기 때문에 산성은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며, 동북공정 이전과 이후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중국과 맞서 싸운 고구려의 산성이 중국의 문화유산이 된 아이러니한 현장, 1950년대에는 20미터가량 남아 있던 고구려 성의 벽돌을 동네 사람들이 가져가 담으로 사용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황, 중국의 동북공정이 심화되면서 일부 고구려 산성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중국식으로 복원한 모습은 올바른 역사 인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고구려는 기원전 107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으나 이는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는 아니었을 것이다. 『위략'고구려 조의 "본래 연노 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쇠약해져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하고 있다”는 기록이 이런 사실을 시사해준다. 계루부는 추모왕 계열을 뜻한다. 따라서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는 700년을 존속했는데, 그 이전에 존재했던 고구려까지 합치면 900년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 다 추모왕이 건국하기 이전의 고구려를 고구려 역사에 포함시킬지 말지를고민해야할시점이다.”(63쪽)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은) 왕위에 낙이 없자 (하늘로) 사신을 보내시니,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셨다. 세자로서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단단히 하셨다.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 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광개토대왕릉비문)


[ 2016년 6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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