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오항녕 저 <조선의 힘 : 조선, 500년문명의 역동성을 찾다>를 읽고/ 2010. 02, 327쪽, 역사비평사

2015년 가을부터 한국사, 특히 조선사와 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역사책 몇 권을 읽고 페이스북에도 여러 차례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역사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흥미가 더해져 올 한해 꾸준히 읽겠다고 마음 먹은 분야가 되었다.
여러 학자들의 책을 읽고 있는데, 공공기관이나 대학의 주류사학자의 천편일률적인 내용보다는 재야사학자의 책이 훨씬 설득력이 있고 호감이 가는 편이며 재미있게 읽게 된다.

그런데, 간혹 “재야사학자들은 사이비 학자이고 근거가 취약하며, 식민사관에 경도되어 과거 선조들의 역사를 폄하한다”는 의견을 접하게 된다. 그런 의견 중에는 이덕일 등 재약사학자를 비방하거나 ‘식민사학자’로 낙인찍는 문장도 포함되어 불편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주관이 너무 강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필자가 한국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잘 모르는 시기나 분야에 대해서는 제대로 제 의견을 밝히지 않았지만, 재야사학자를 ‘사이비학자’나 ‘식민사학자’라고 비난하는 대목에 대해서는 반박하기도 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 중 일부가 ‘과거 선조들의 자랑찬 역사’를 공부하라면서 추천하는 책이 오항녕의 <조선의 힘>이다.

책 한 권으로 학자 한 명의 주장과 이론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재야사학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조선의 자랑찬 역사’를 배울 수 있다고 강력하게 추천받은 책이니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출판사의 소개글은 나름 의미심장하고 긍정적이었다.(대부분의 출판사들이 그렇지만...)
"500년 이상 역사를 지속한 조선의 힘을 재발견하고 기존의 오해와 왜곡, 부정적 시각에 반론을 제기하는 책. '당파싸움'이나 '사대주의',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한 역사로 조선을 바라보는 편견을 깨고, 문치주의, 대동법, 실록, 강상 등에서 나타나는 500년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조선문명의 삶의 양식과 생각, 제도 등의 긍정적인 측면을 다룬다.”

오 교수는 <조선의 힘>의 프롤로그에서 한국사회에서 ‘근대’가 그다지 논리적, 합리적이지 않은 ‘역사의 법칙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 ‘전근대’가 무조건 ‘나쁜 것’ 또는 ‘잘못된 것’ ‘부족한 것’으로 인식되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는 ‘폭력성’이 전제되어 있음에도 그러한 ‘폭력성’을 한국인들이 내면화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근대는 보편적이지 않은 목표를 보편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에는 당연히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폭력성이 포함된다. 이 폭력성을 내면화하면서 사람들은 성립할 수 없는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6쪽)
“나는 진보라는 근대역사학의 담론, 즉 자유와 해방의 기치 아래 가야 할 목표로 규범화된 근대의 담론과 거리를 두고 있다.”(6쪽)
“근대로의 길은 당연히 전혀 법칙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적어도 그들 대부분에게는 결코 해방도 아니었다.”(7쪽)
“근대주의에는 목적론과 진보주의가 깔려 있다. 인류사회는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진보해왔다는 관점이다.”(8쪽)

오 교수의 문제의식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한국사회의 정치인, 관료, 지식인들이 한국현대사를 거치면서 부지불식간에 다윈의 ‘진화론’과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과 같은 ‘서구식 근대 담론’을 내면화했고, 거기에 일제와 미제의 식민사관과 ‘우리 안의 사대주의’가 더해져 일제 강점기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폄훼하거나 부정하고 현재까지도 그런 부정적인 인식이 전반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근대 서구사회는 ‘진화론’의 정확한 개념은 ‘약육강식’과 다름에도 ‘진화론’을 ‘강자의 폭력’과 ‘식민지 침탈’의 논리로 이용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은 당초 긍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후배 학자나 정치인들로 인해 서구사회 일부에만 적용되는 원시공산제 ->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를 마치 인류사회의 공통적인 역사적 법칙성처럼 지구 전체에 인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마르크스는 비록 ‘사적유물론’을 이론화시켰지만, 자본주의라는 근대가 결코 평민, 인민, 약자에게 ‘바람직한 사회체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급기야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해체된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라는 억지까지 등장했죠.

그와 동시에 오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식민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식민주의는 근대주의와 결합해 ‘범식민주의’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데 이 식민사관을 가볍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식민사관은 극복되었다고 착각하는 분들도 많은 듯하다. 내가 보기에는 결코 ‘아니다’. 여전히 그 담론에 포섭되어 있다.”(8쪽)

그는 식민주의에 찌든 사람들이 식민자들이 세뇌한 ‘너희들의 유전자에는 원래 사대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담론에 포섭되어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시대를 피해, 고대시대로 올라갔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해서는 사대주의가 극복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사대는 사실이므로,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사대? 그게 왜 문제지?’라고 되물어보아야 한다”(8쪽)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에 한국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근대주의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위의 식민주의와 근대주의를 합쳐 ‘범식민주의’라고 부른다.”(9쪽)

그러면서 자신은 역사의 표상으로 진보보다 ‘변화와 적응’이라는 말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앞에서 적시한 오 교수의 문제의식은 전체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아주 쉽고 편하게 기재한 문장 중에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을 뛰어 넘는 비합리적인 비약도 존재한다. 그것은 두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첫째는, 위에서 표현된 “사대(事大)가 왜 문제지?”라는 문장이다.
오 교수는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단어와 개념을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사대’와 ‘사대주의’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사대’는 말 그대로 ‘큰 것, 큰 나라, 대국을 존중하고 협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대’라는 개념에는 어떤 가치판단이나 호불호가 개입되이 않은 상태에서 대국과 소국, 강국과 약국 사이의 기본적인 외교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대’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다. 반면 ‘사대주의’는 '자율적이지 못하고 자국보다 강한 국가, 세력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주의’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나 집단, 국가나 사회라는 공동체에서는 ‘사대주의’가 많은 문제를 양산시킬 수 있다.

오 교수 역시 “사대주의가 왜 문제지?”라는 질문을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의 출간 취지를 보면, ‘조선은 사대주의가 아니었는데?”라고 질문을 던져야했다.
식민주의자들, 제국주의자들이 던져 놓은 ‘사대주의’ 프레임을 깨기 위해 다른 질문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비켜서 엉뚱한 지점을 공략하면 ‘성동격서’가 아니라 ‘뚱딴지’가 되어버릴 수 있다.

‘비합리적인 비약’의 두 번째 사례는 프롤로그 5쪽에 나온다.

오 교수는 근대와 근대주의의 불합리함에 대한 예를 들면서 “길 가다 강도를 만나 상해를 당하면 그 사람에게 운이 없다고 하지, 그 사람이 실패했다고는 하지 않는다”라면서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당하고, 일제와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은 것에 대해 외국이 나쁜 강도일 뿐이지 강도를 당한 조선은 잘못이 없다"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그럴싸한 주장이다. 특히 피해자가 개인일 경우에.
그러나 문제는 조선이라는 공동체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라는 데 있으며, 더군다나 그 조선이라는 국가는 오 교수가 <조선의 힘> 본문에서 여러 차례 ‘조선의 힘’이라고 강조하는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토론했던 국가였다는 점이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것은 고려가 너무 원나라에 사대주의로 일관했기 때문(거의 식민지 속국이라고 부를 정도로)이고 왕실과 기득권층이 부패할대로 부패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국가라는 공동체가 백척간두에 서게 되고 대다수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정신과 성리학의 담론이 고려의 전복과 조선의 개국에 백성들이 동참하고 동의해준 것이다.
따라서 굳이 근대국가의 개념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조선이라는 국가는 자신의 영토와 백성을 안전하게 돌보고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유지된다. 그리고 소위 그런 ‘안보’와 ‘안민’은 조선사 500년 동안 왕실과 사대부들이 ‘경연’과 ‘공문’과 ‘저서’와 ‘법규’에 늘 강조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은 국가가 존재하고 유지되는 동안 인접국인 명나라와 청나라, 여진과 거란, 왜와 일제, 러시아 등과 외교관계를 맺었고, 항상 사신을 교환하고 학문을 나누고 교역을 했다. 즉 조선에 대한 외국의 침략은 ‘아무 것도 모르는 선량한 시민이 그냥 길을 걸어다가 생각지도 않은 강도의 급습’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진화론이나 사적유물론을 적용하지 않아도, 인류의 역사는 침략과 갈등이 이어져 왔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와 사기(사마천), 자치통감 등에는 법칙성이나 논리성과 관계 없이 무수히 많은 전쟁과 침탈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내내 여진족이나 거란족, 왜 등 주변국과 종족의 침략과 약탈이 있었고, 심지어 조선은 두 번의 왜란고 호란을 경험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정상적인 국가라면 항상 외국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주변 국가가 아예 침략과 도발을 할 생각이 없도록 국방을 튼튼하게 하던지, 초기의 침략이나 도발을 초전에 박살내어 안보와 안민을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안보와 안민의 문제는 사대나 사대주의의 문제가 아니고 강도의 문제도 아니며 제국주의나 근대의 문제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권력과 부를 거의 독차지했던 왕실과 사대부들은 국가 지도부와 권력체계의 책임자로서 그런 기본을 준수하지 못해 두 번의 양란과 호란을 당했고, 급기야 일제에게 국가를 강탈당했다.
그런 과거사를 제대로 연구하여 현재와 미래에 대비하지 못하면 또다시 제2의 침략과 강탈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과거사의 긍정성을 찾자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거사에서 잘못하고 부족한 부분을 찾지 않고 긍정적인 면만 찾아서는 “왜 침략을 당했냐?” “왜 나라를 빼앗겼냐?”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우리도 좋은 점이 있었는데...”라는 자조와 자위 밖에 남지 않는 것일 뿐...

그런데, 국가의 기본도 제대로 못한 기득권층을 잘못과 부족함을 연구하고 공부하자는 것을 식민주의와 범식민주의 프레임으로 규정해 가두려는 것은 역사학이나 역사학자로서 오 교수의 기본 자질이 의심 된다.
잘한 부분은 물려받고 잘못한 부분은 비판하여 반면교사로 삼는 것은 역사학과 인간사회의 기본입니다. 외세의 침략에 대해 “침략한 놈들이 잘못이지 당한 놈들은 잘못이 없다”라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오 교수가 ‘조선의 힘’이라고 강조하는 ‘문치주의’나 ‘경연제도’ 그리고 ‘인사제도’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긍정하면서도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고 논리적이지 못한 주장이 많다고 생각한다.(자세한 비판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3331 참조)

오 교수가 <조선왕조실록>의 객관성과 실체를 너무 강조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가 사학자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들먹이지 않아도, 후세에 전해지는 과거 시기의 당대 기록은 ‘승리자의 기록’임은 두 번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조선왕조실록>은 사료의 하나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절대적인 ‘성경’이나 ‘도그마’가 아님은 사학자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적인 수준의 시민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런 <조선왕조실록>이 남긴 기록만을 절대시하면서 다른 사료나 역사기록을 무시하고, 맥락을 분석하지 않고 <조선의 힘>으로 ‘실록’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와 “광해군은 이렇다”, “정조는 저랬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이지 답답할 지경이었다.

오 교수가 <조선의 힘>을 통해 주장하려는 것은 “한국사회에게 조선은 '오래된 미래’”라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필자는 오 교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식민주의와 근대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이나 ‘긍정’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과 시사점을 찾아 내부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찬양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현재 한국사회 주류의 구태와 일맥상통한 모습이다.

‘실록’과 관련하여 주류사학계 내부에서나 재야사학계에서 지적하고 비판하는 내용은 무수히 많다. 다른 학설과 분석과 이론을 여러 사료와 검토를 통해 충분히 검토하고 논쟁하는 것이 한국사학계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아래는 오 교수가 <조선의 힘>에서 인용하고 주장하는 내용 중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통해 충분히 비판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김집, 송시열, 송준길이 대동법에 찬성하고 추진하려 했다?" 141쪽
"광해군 집권 초기 김집파가 ?i겨난 이유가 '청의 견제 및 김집의 낙향’이라고?" 142쪽
"광해군 때 대동법 확대가 가능했던 이유가 ‘관료사회의 이해가 깊어지고 양전이 실시되고 경험이 축적되어서’라고?" 142쪽
"효종의 영장제도와 노비추쇄가 ‘효과도 없이 민심만 어지럽혔던 정책’이다?" 144쪽
"광해군 때 토호가 ‘왕실과 결탁’하여 대동법 실시를 반대했다?" 145,146,148쪽
"대동법으로 ‘안민’과 ‘재정 확보’가 달성되었다" 149

"윤후의 성리학, 탈주자학이 성학의 주체를 군주로 삼았나? 존비귀천 예법?" 191
"송시열은 성(리)학을 인간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학문으로 생각했다?" 192
"효종 국상 자의대비 기년복" 192
"송시열이 양반 군역 주장" 192
"윤후가 귀양가고 사사당한 이유" 193

"광해군 때 사건들의 실체 여부"
"광해군이 조선시대 내내 복권되지 못한 이유"
"조선 최초로 명 사긴에 뇌물을?" 204
"광해군 9~12년 강홍립 패전시 수만명이 죽었다" 209
"광해군이 왕권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궁궐공사를 진행하며 막대한 추가 세금까지 추징했다" 
"6~7천명이 공사, 쌀 4~8천석/월, 1인당 18kg/월 x 6천명 = 10.8만kg/월 / 140kg = 700석/월 231,214"
(http://www.koreartnet.com/wOOrII/initial/list0111/011110_01.html)
"강홍립 심하전투에서 항복 후 9천명 전사" 222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광해군의 군사/외교의 차이점"

"광해군이 후금과의 '화친’을 부정했다" 223
"후금과 화친이 곧바로 명에 대한 배신이다" 224
"광해군 당시 후금이 변방의 골치거리에 불과했다" 224
"후금은 동아시아에 새로운 비전은 커녕 명을 대신한 동아시아의 전통질서를 연장시켰다" 225

"시오노 나나미의 예를 들거라면 '융성'과 '쇠망'을 각각 비교해야 할텐데, 오항녕은 왜 '쇠망'의 원인을 찾으려는 학자들을 식민사학지라고 매도하나?"
"고구려는 어떻게 수,당의 침략을 막았고, 고려와 조선은 왜 당했을까?"
"광해군의 군사/외교와 인조의 군사/외교를 비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 2016년 5월 29일 ]

오항녕, 조선의힘, 문치주의, 근대주의, 식민주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