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해야 건강하다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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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처드 윌킨슨(Richard G. Wilkinson) 저, 김홍수영 역 < 평등해야 건강하다 The Impact of Inequality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를 읽고 / 2008. 03., 392쪽, 후마니타스

저자의 논지는 책의 부제처럼 '불평등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출판사가 책의 제목을 잘못 정한 듯하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라는 제목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책이 '육체적인 건강'을 다루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고, 문제해결의 방향을 '불평등 축소'가 아니라 '평등 지향'으로 왜곡(?)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얻을(배울) 수 있는 점은 네 가지다. 첫째는 사회적 집단(예 : 국가) 내에서 빈곤의 구조나 수준보다 (상대적인) 소득 불평등이 더 치명적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스트레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며, 셋째는 불평등이 빈자나 약자 뿐 아니라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고, 넷째는 불평등을 축소하기가 쉽지 않지만 불평등 수준의 개선은 생각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일인당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소위 선진국들에서 외형적, 물질적인 부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범죄 등 사회적 실패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여기에서 사회적 실패의 지표는 범죄율과 강력범죄,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사망율, 자살율, 사회적 관계 또는 사회적 자본지수, 건강지수, 행복지수 등의 악화를 말한다. 사회적 실패의 주요 사례는 주요 국가들, 특히 미국, 영국, 이태리, 구공산권 국가에서 나타나며 국가 내에서도 주별, 도시별로 큰 편차가 있다.
한국의 경우 OECD에 진입한 만큼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에도 소득 불평등과 빈부 격차가 OECD 평균보다 심한 데다가 점점 더 그 격차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연구 초기에 저자가 고민한 지점은 "사회적 실패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요인이 빈곤인가, 불평등인가"였다. 저자는 주요 국가들간 그리고 국가 내의 주와 도시들간 통계수치를 조사한 후 결정적인 요인이 '불평등'이라 결론을 내렸다. '불평등'의 출발점과 토대는 소득 불평등이다. 국민소득이 아주 작은 국가라 하더라도 소득 불평등이 작을 경우에는 미국 각 도시들보다 사회적 실패가 적다.
그는 책 속에서 20세기 초의 통계와 연구결과 뿐 아니라 1960년대 이후의 장기적인 통계와 연구조사 결과랄 토대로 자신의 분석과 주장의 근거를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 그가 70~80년내 소득 불평등 격차가 줄어드는 통계수치를 반영한 덕분에 소득 불평등이 양호한 국가로 분류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하게 심각해진 불평등 통계가 반영되지 않은 셈이다.

저자는 소득불평등이 어떻게 사회적 실패로 이어지는지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소득 불평등이 클수록 사회적 관계의 질과 사회적 자본이 악화됨을 보여준다. 물리적인 소득 불평등이 사람들에게 사회적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생물학적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는 보건 연구성과를 적용하여 만성 스트레스의 뿌리가 되는 심리사회적 위험 요소는 '낮은 사회적 지위'와 '빈약한 사회적 관계', 그리고 '초기 아동기의 경험'임을 밝힌다.
'낮은 사회적 지위'는 물질적 생활수준 뿐 아니라 멸시당하는 느낌, 사회적 위계서열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느낌, 종속감과 낮은 통제력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감정을 포함한다. 이는 한국의 경우 봉건적인 문화와 군사독재 문화의 잔재로 인하여 일반적인 직장과 사회조직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며 물질적 지위가 비정규직, 일용직, 단순노무직, 재하청구조, 교육 및 자산 수준에 따라 더욱 심한 것이 현실이다.
'빈약한 사회적 관계'는 친구가 없고, 독신생활을 하며, 사회적 연결망이 허술하고, 참여하는 공동체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가족 붕괴 현상이 심해지고, 1인 가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며, 개인주의적 문화가 확신되는 한국의 상황에도 시사점이 큰 부분이다.
'초기 아동기의 경험'은 전체 생애에 걸쳐서 스트레스와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출생 전후의 스트레스 경험을 말한다. 이런 초기 아동기의 경험이 어떠했는지에 따라서 각 인간이 비슷한 사회적 환경에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는 소득 불평등에 따른 스트레스가 부모와 아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과 '사회적 전략'에 대한 저자의 주장도 크게 유익하다. 그는 서열이 확실한 관계에서 사람들 사이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전략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전략이 크게 다르다고 설명한다. 전자는 당연히 권위적, 위계적이고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이며 억압적,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은 상위계층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동시에 상위계층에게서 당한 피해나 상처를 자신보다 아래계층에게 전가하는 것이다.('자전거 타기 반응'이라는 사회학의 용어가 있음) 문제는 소득 불평등이 심한 사회와 서열사회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강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학교 폭력이나 가정 폭력, 어린이나 여성에 대한 성폭력 증가, 묻지마 폭력 등은 이런 관점에서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처럼 무한경쟁을 유도하는 사회구조와 방식, 문화라면 하층, 약자층 뿐 아니라 이들에게 억압을 가하는 중간계층, 중간계층을 억압하는 상위계층까지도 온갖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최상위 계층으로 올라갈수록 스트레스나 억압은 줄어들테지만... 따라서 한국 내에서 최상위 1%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99%는 억압이나 스트레스의 강도나 수준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스트레스와 사회적 관계, 사회적 지위 등으로 인하여 악영향을 받는 취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여러가지 통계와 실험 결과들을 통해 소득 불평등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당사자들의 스트레스 완화에 크게 기여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경제 구조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데 있어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시각이 실질적인 문제해결보다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내에서 논의되는 경제 민주화나 복지국가 담론의 근거는 헌법 상의 기본권이나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공정함이나 공평함이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처럼 구체적인 사회적 병폐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소득 불평등 완화'라는 관점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사람들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자신의 문제와 소득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 연관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소득 불평등 문제를 여론화시키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 과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연방공화국인 미국이나 유럽 등과 제도나 문화, 역사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광역 시도별 소득불평등과 건강이나 사회적 자본, 범죄율 등의 데이터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 내 관련 통계들이 객관적으로 조사된다면 저자의 연구성과를 한국의 사정에 맞게 적용하여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평등한 세상'만을 꿈꾸며 힘들게 끝없이 추구하는 것보다 현재의 소득 불평등 격차를 더 이상 늘리지 않도록 하고 조금씩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 단기적, 실질적으로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분석 결과는 정치적인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소득 불평등과 위계적인 사회문화는 스트레스와 불안은 사람들에게 개인 또는 가족 이외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협력을 멀리하고 상위계층의 가치관에 복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작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결과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저소득층의 보수정당 후보 투표 성향 관련하여...) 다시 말하자면, 일부 사람들이 빈부 격차가 더 커지고 빈곤층이 늘어나면 보수정당에게 불리하고 좌파 정당이나 진보세력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는데, 저자의 분석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도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빈곤은 단지 재화의 양이 작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빈곤은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빈곤은 사회적 지위다" (마샬 샬린스)
"사회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치열한 서열체계 속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동일시하며, 자신의 지위를 잃거나 거부당하는 위험을 최소화하기위해 복종이나 다른 퇴행적 회피행동을 보인다" (길버트 P)

[ '자전거 타기 반응' ]

 개코원숭이는 서열 따지기에 매우 민감하다. 위계질서와 자존심에 죽고 산다고 할까. 그렇다 보니 그 사회에선 폭력이 일상화할 수밖에 없다. 서열은 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다. 이놈들은 강자에게 얻어터지면 약자에게 반드시 화풀이를 한다. 특히 수컷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두머리에게 된통 당한 중간 서열의 수컷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이제 막 성장기가 끝나가는 수컷을 못살게 군다. 공격받은 이 젊은 수컷은 어른 암컷에게 소리를 내지르고, 이 암컷은 다시 어린원숭이를 물어뜯는다. 그리고 어린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를 찾아가 작신작신 두들겨 팬다.
이것이 어찌 원숭이 사회만의 일일까. 불평등이 심하고 서열의식이 강해지면 인간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크든 작든, 사회에서 가정까지 두루 나타나는 게 약자 학대와 화풀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전위된 공격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억압한 사람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다른 대상에게 분노를 전가해 표현하는 행동이다.

상위서열에게서 얻은 상처를 하위서열 학대로 치유하는 건 교도소에서도 일어난다. 이곳은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했거나 업신여김 받았던 사람들의 집합소다. 이들 역시 상처 입은 우월감과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 대상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출구는 어디에나 있는 법. 격렬한 지배 경쟁과 폭력에 내몰린 이들은 만만한 상대로 성범죄자를 곧잘 선택한다. “적어도 나는 저 개자식보다 낫다”는 심리가 그들에게 열등감을 털고 우월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의 저자 리처드 윌킨슨은 이런 현상을 ‘자전거 타기 반응’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물론 이 용어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저서 ‘권위주의적 인성’에서 빌려왔다. 이 용어는 사회 위계적 관계를 경주용 자전거 타기에 빗댄 것이다. 아래(하급자)로는 마구 발길질을 해대면서도 위(상급자)로는 허리를 굽실거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경주자의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다.
이는 개인과 집단 심리에 그대로 적용된다.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업신여길 개인이나 집단을 찾아 폭력을 휘두르거나 차별적 언행을 퍼붓는다. 자신의 우월성을 제삼자에게서 보상받아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랄까.

최근 어린이와 여성을 상대로 한 강력범죄가 잇따라 발생해 충격을 던진다. 안양 초등생 납치·살해 사건, 군포 부녀자 실종 사건, 이호성의 네 모녀 피살 사건,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 사건 등이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일선에 나섰고, 아동대상 성범죄자를 사회와 격리시키는 ‘혜진·예슬법(法)’도 만든다고 한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사회 하층부로 밀려 소외된 사람들이 자기보다 약한 어린이나 여성들을 희생양 삼아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희생자는 가해자와 직접 관계가 없거나 그에게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면서도 비극의 주인공이 돼버렸다. 여론은 이들 사건에 대해 거의 한결같이 개인적 폭력과 그 잔인성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을 텐데, 결과만 주목할 뿐 그 원인은 외면하는 셈이다. 패자 또는 낙오자를 양산해내는 사회적 폭력과 그 구조에 눈을 감는다면 유사 사건은 재발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때그때 증상만 완화하는 대증요법으론 근본치유가 어렵다는 얘기다.
그럼 점에서 윌킨슨의 진단과 처방은 귀 기울일 만하다. 소득격차는 불평등을 가져오고 심화한 불평등은 반드시 극단적 서열 사회를 초래하며 이는 폭력의 일상화로 이어진다. 빈곤지역일수록 폭력이 만연하고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관계는 형편없이 나빠져 각종 범죄가 빈발한다는 것이다.

늘어가는 각종 강력범죄는 점점 뚜렷해지는 사회 양극화의 우려스러운 단면이기도 하다. 불평등이 심해지고 서열화가 강고해지면서 사회는 수평적 협력보다 수직적 경쟁으로 치닫게 마련이며 이런 환경에서 ‘위’에 짓눌리고 ‘아래’를 짓밟는 ‘자전거 타기’는 더 험해질 수밖에 없다. 서열사회는 높든 낮든 모두를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시킨다.
범죄 예방과 단속도 철저히 해야겠지만 좀 더 근원적인 발생 원인과 치유책을 찾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 하굣길 책임은 아예 사설경비 업체가 맡고, 여성들이 어둡거나 한적한 길을 마음 놓고 걷기도 더 힘들어질지 모른다. 인간이 개코원숭이가 아님을 입증할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http://blog.daum.net/david872/15099394)

[ 2013년 01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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