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같은 그녀
이정희 지음 / 학고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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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국회의원 총선거 준비단계에서 개인적, 집단적 기득권을 양보하고 민주통합당과 야권단일후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진보신당을 포함한 전체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애초 목표였던 교섭단체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여 통합진보당의 조직력의 한계를 보여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권단일후보 협상을 성공리에 끌어낸 정치력에 대한 내 평가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통합진보당의 어설픈 '3자 통합'과 유기적이지 못한 정당운영구조, 당원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내부 관료주의, 불안정한 내부 의사결정구조 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통합진보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달성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 책은 지난 3월 그런 정치력을 보여준 이정희 대표가 총선을 앞두고 발간했다고 하여 구입한 것이다. 이미 예비후보에 출마한 친구 등 정치인이 발간한 책 여러 권을 구입했지만 출판기념회 또는 개인적인 인연이 아닌 나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구입한 첫 번째 정치인 저서였다. 그리고 연이어 유시민, 문재인, 안철수, 박근혜, 김문수 등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에 대한 책을 읽은 후에 한꺼번에 서평을 써보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치인의 책을 구해서 읽는다는 것이 여간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았다. 세미나 교재나 내가 개인적으로 독서계획을 세운 책을 읽기도 시간이 빠듯했다. 아무래도 대통령 선거일정이 더 가까워져야 몸이 움직이려니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 5월 2일 '통합진보당 부실,부정선거 의혹 사태'가 발생했고 지금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5월 한 달은 가히 '광기'의 시기였다. 확인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부정과 부실 의혹'이 통합진보당 진상조사위원회라는 공적 조직을 통해 '사실'로 규정되어 전사회로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하루아침에 통합진보당은 '부정선거당'이 되었고 비례후보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사퇴 요구'에 직면했으며 '선 진실규명 후 사퇴여부 결정'을 내세우며 이를 거부한 4명, 특히 당선자 신분인 2명은 본인들의 구체적인 잘못도 없는 상태에서 '부정하고 비도덕적인 정치인'으로 매장되었다. 이정희 대표 또한 그 과정에서 '마녀사냥'의 희생물이 되었다. 진실은 필요 없었다. 바닥 아래 내동댕이 쳐진 통합진보당의 도덕성과 신뢰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만이 요구되었다. 나는 그 한 달 동안, 그리고 그 이후 과정에서도 우리사회 내부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광기'와 '파시즘'과 '차별의식'을 목격했다.
참담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정의와 진실, 인간존엄성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과 법치주의 등 서구 근대사회가 수 백년 동안 피를 흘리며 쌓아온 인류의 지성이 이제 겨우 60여년 밖에 안된 한반도 남단에, 그것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인류의 지성을 우리 스스로의 것으로 체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고통과 좌절과 희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정희 전대표는 진실이 드러나면서 차츰 우리들 속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활할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난 과정에서 그녀의 정의와 진실을 향한 그녀의 진정성, 이념이나 정파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과 소중함을 사랑했던 그녀의 진정성, 희생과 상처를 스스로 감수한 그녀의 진정성을 내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은 [김준식의 문학이야기 http://www.djjb.kr/html/6_2.html]를 참조하시길.. 나는 문장력이 짧아 진정성을 표현할 수가 없으니...ㅠ) 나 뿐 아니라 수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진정성과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희는 동년배의 일반적인 성장과정을 거친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피아노를 잘 쳤던 어린 시절, 두부공장을 하며 평생 일밖에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 해마다 여름이면 물이 차올라 주인집으로 피신했던 지하 단칸방 생활. 가족 여행은 물론 외식조차 쉽게 할 수 없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이를 위해 아버지 두부공장의 철제 책상에서 공부했다. 그녀가 대학입시를 준비할 당시에는 그래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기였다. 1987년 당시 학력고사 인문계 여자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다. 24년이 지난 최근에는 이정희와 같은 중하층 서민의 자식이 서울대에 가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어려워졌다.
물론 그런 그녀에게도 뜻밖의 열등감이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내내 신문 한 장 읽지 않고 사진선다형 문제만 풀며 단순하게 살아온 나에게 대학과 사회로 열린 문은 육중하고 거대했다. 열등감을 느꼈고 많이 긴장했다”(p.40)고 고백한다. 6월 항쟁을 겪으며 민주주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내면의 궁핍’이 컸다.
그 궁핍을 채우고자 이십대의 이정희는 땀 흘리는 노동 현장의 삶을 열망했다. 하지만 그 노동의 일상이 낯설고 두려웠다. “겨울에도 따뜻한 물로 매일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집을 떠나 찬물조차 쓸 수 없는 곳”(p.42)으로 가는 게 두려웠노라고 토로한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1980년대를 살았던 대다수의 '건강한 대학생'들의 두려움이자 부채의식이었다. 당시에는 적지 않은 수의 대학생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노동현장으로 투신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에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의 좌절감은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고 내면의 궁핍을 채워나간 계기는 여성운동이었다. 여성운동의 이론과 경험을 공부하고 공감하면서 비로소 알고 싶은 것이 생겼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열망이 생겼다. 그녀는 십대의 마지막 시간과 이십대의 절반을 여성운동을 하면서 보냈다.
한편, 가족은 오늘의 이정희를 있게 한 또 다른 힘이었다. 이 책에는 평생 두부공장을 하며 일만 하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 열한 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부부의 연을 맺은 남편과의 연분홍빛 연애, 공동육아와 대안 학교를 통해 키워낸 두 아이에 대한 사랑, 그리고 몇 년 전 뇌종양으로 돌아가신 시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빠짐없이 드러나 있다. 특히, 일하는 엄마로서 제때 아이들을 챙겨 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절절하다. 그래서 가족은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존재,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의 뿌리가 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고마운 존재”(p.69)다.

이정희의 삶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18대 국회의원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인권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이는 어떤 거창한 명분이나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착하게 살자’라는 삶의 신조를 ‘정말 끝까지’ 지키려는 우직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정치는 모든 것을 거는 일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지는 일이며,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편이다. 하지만, 소수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으로 살아온 지난 4년간의 뼈저린 경험을 통해 힘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진보 집권의 생각이 움텄다. 그것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겪은 쌍용자동차 파업 같은 슬픈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쌍용차 사태 이후, 힘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집권해야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생겨났다. 다시는 이런 전근대적인 인권 유린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노동자들이 노동자들과 싸우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정리해고 앞에서 무기력한 정부가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물을 수 있는 정부를 만들고 싶었다.”(p.126)
이런 슬픈 패배를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내린 정치적 선택은 통합진보당의 결성이었다. 더 이상 밥상 위에 놓인 ‘소금’처럼 제한된 역할이 아니라, 진보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밥상 자체를 새로 차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통합진보당을 통해 옳은 것이 반드시 이기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정의, 자유, 평등, 인권, 평화, 민주주의, 경제 개혁, 복지 등과 같은 공동체의 기본 가치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그 지향점을 노동 존중 평화복지국가로 제시한다.
 
안타깝게도 이 책을 발간한 지 3개월 만에 통합진보당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녀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져가는 듯이 보인다. 그녀는 지난 5월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스스로 안고 '침묵의 형벌'을 자처했다. 그녀는 지금 이 책 속에서 꾸었던 꿈의 크기와 높이보다 더 커다랗고 깊은 어둠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과정을 복기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과 책임을 외부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않고 스스로에게서 찾아내기를 바란다. 모든 과정은 상대적이과 상호작용을 통해 벌어진 일이지만 언제나 자신이 그 전개과정에서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번 기회를 스스로가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낙관적이고 강해지는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그녀 스스로가 말했듯이 정치는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권력과 돈으로 잠시 힘은 가질 수 있지만, 그 무엇으로도 끝까지 함께하는 마음은 얻지 못한다. 마음은 오직 마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그 마음들을 모아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나는 믿는다.”(p252)  
 
[ 2012년 7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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