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작년 11월 22일 국회에서 집권당이 한미FTA 조약을 기습으로 날치기 처리한 이후 한 달 넘게 전국이 항의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한미FTA 조약은 5년 전 참여정부에서 추진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했고 당시에는 이번 날치기 이후 상황보다 더 큰 국민적 저항이 있었다. 
한미FTA는 2007년 체결 전후의 상황버섯 시작하여 그 처리과정에서도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무시했고 내용도 '불평등 조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명칭인 '자유무역협정'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정부나 집권당에서 '통상협정'이라고 우기지만, 자세히 공부해보면 볼수록 실제는 통상협정 이상의 법적,제도적,문화적 변화를 가져올, 가히 '혁명적'인 조약이라는 본질이 드러난다.(통상관료나 총리가 여러번 그런 취지의 발언을 언론에 내비치 경우도 있지만...) 
 
2007년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미국과 조약 체결 당시보다 현 이명박정부의 FTA 내용이 상당히 후퇴한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전정권처럼 참여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2007년 FTA 내용은 괜찮고 2011년 FTA는 나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FTA 관련 책을 한 권 만 읽어보아 알 수 있다. 실제 누구라도 한미FTA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공부한 시간 만큼, 알아본 내용만큼 더욱 맹렬하게 한미FTA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밖에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미FTA는 우석훈씨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50~100년 이상의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약이고 그 내용과 국내 처리과정, 미국과 협상과정, 비준 후 처리과정 등이 모두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느냐, 전진시키느냐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앞으로더 크게 그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가 1%의 기득권 사회로 더 심하게 고착되고 공동체가 붕괴되느냐, 아니면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줄어들어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면서 공동체가 재건되느냐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
 
한미FTA가 가져올 여파 중 하나가 바로 '의료민영화'에 대한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료민영화'란 개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한국의 의료기관은 대부분 '민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들이 '의료민영화'라고 하면서 문제를 삼는 핵심부분은 사실 '영리병원'이다. '영리병원'이라 함은 현재 한국민 전체에 적용되는 국민건강보험 공공시스템에서 벗어나 영리만을 목적으로 영업하는 민간병원을 말한다. 정부는 송도지역 등 이미 전국 수십 곳에 지정되어 있는 경제자유구역에 이러한 민간병원을 허용하는 것을 계획 중이다(최근 정부관계자가 그 사실을 인정). 영리병원은 의료비의 폭등을 불러오고 기득권만의 전유물로만 이용되면서 사회의 의료양극화를 초래하고 그렇지 않아도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민감보험이 건강보험을 좀 먹을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된다. 그렇게 되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병원들도 경쟁이나 형평성을 이유로 점차 의료비를 증가시키고 건강보험 재정을 붕괴시키는대 기여하기 된다. 

이미 치료시설 기준으로는 우리나라 역시 '민영화'되어 있다. 공공의료시설은 전국 병의원 중 10%도 안된다. 건강보험 보장이라도 아직 60% 선에 머물고 있다. 삼성의료원 등 재벌병원은 고급화, 대형화를 선도하면서 대학병원에서 국공립병원까지 경쟁 대열에 끌어들이고 과다한 진단과 의료시설을 투입하여 건강보험 재정을 좀 먹고 환자들의 자부담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 건강복지 차원에서 앞으로 의료의 공공성을 늘려가고 함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는 오히려 공공성을 약화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미FTA와 의료만영화, 영리병원은, 의료공공성을 모두 인정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버릴 수가 없다. 
한 나라의 모든 정책과 복지가 공공성을 키우는 것으로 만사형통일까? 의료공공성에서 우리나라보다 백년 이상 앞섰던 서구에서도 궁극적으로 공공성을 달성하는데 실패했기 오히려 20세기 후반부터 의료복지가 축소되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 건강을지키기 보다 조금만 기인하고 아픈 것 같으면 의사에게 가고 약국에서 약을 사는 상황에서 정말 의료가 필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도대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고 근원적으로 해결방안이있을 것인가? 
한국의 경우 건강복지 뿐 아니라 생계복지, 아동복지, 교육, 주거복지 등 무수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경제성장 역시 이제 저성장 구조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재정운영 여력도 한정되어 있다. 현재 구조에서 전체적인 복지수준을 늘려가면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늘려간다면 아마도 보장을 90%를 달성하는데 것은 요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는 크게 병을 앓은 적이 없다. 그래도 살면서 여러차례 식중독이나 급성 근육걸림, 몸살, 감기 등 누구나 한 번쯤 앓을 만한 불편은 겪었다. 다년 간의 경험으로 생각컨대 몸살, 감기는 의사가 처방전을 내리고 약을 사 먹은 것은 병을 치유하기 보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정도였다. 즉 며칠 간 집에서 끙끙 앓으면서 내 몸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음에도 그 자연치유 시간이 아깝고 고열과 무기력을 피하기 위해 약을 사 먹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식중독의 경우에도 결국은 구토, 설사를 여러번 반복하고 난 후 병원에 실려가면 포도당 주사를 맞고 쓰린 위와 장을 진정시키는 약을 처방할 뿐인 것 같다. 구토, 설사를 반복하여 기진맥진할 때까지 내 몸속의 식중독 균을 모두 배출하고 몸이 자연치유하는 과정이 기본적인 진행과정일 뿐이고 나머지는 보조수단이라는 것... 병원은 식중독에 걸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피를 뽑아 혈액검사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소변검사를 하는 등 병원은 자신들의 진단시설의 유지비와 인건비를 뽑아내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 내 건강과 치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입원 소감이다. 급성 근육걸림의 경우에는 의사와 약사에게 의존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진단비용만 낭비될 뿐 파스와 알약을 조제해 주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움직임을 조심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 근육통은 웬만한 한의사를 찾아가면 돌리지도 못하던 목이 하루 만에 움직일 수 있고 숨쉬기도 고통스러웠던 근육통이 단 한번의 침 치료로 절반 이상 낫게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아도 나와 비슷한 사례는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병원과 의사가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이 책은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에 대해 방향을 잡아주었다. 이 책은 1973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서구와 아메리카 대륙의 건강과 현실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21세기 한국에서도 의료현실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크게 '병원병'과 '건강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다. 먼저 1장 ~ 3장에서 의사와 의료제도가 만들어 내는 '병원병(病院病)'을 다룬다.
우선 1장 <임상적 병원병>에서는 의료 기술성과의 대차대조표를 제시하고 있다. 과거 3세대에 걸친 비교 검토를 통해 질병의 변화와 소위 의료의 진보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병을 일리히는 임상적 병원병이라고 불었다. 
제 2장 <사회적 병원병>에서는 의료의 사회적 조직이 건강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효과를 다룬다. 일리히는 이것을 사회적 병원병이라고 불렀다. 
제 3장 <문화적 병원병>에서는 의료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활력에 대해 초래하는 부정적 영향을 다룬다. 일리히는 이것을 문화적 병원병이라고 불렀다.
'건강의 정치학'과 관련하여 저자는 4장 <건강의 정치학>을 통해 의료제도의 불합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일리히는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병원에서 비롯되는 질병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이지 전문가의 임무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최근 세대 동안 건강관리에 대한 의료(제도)의 독점은 한 번도 점검되지 않고 확대되어 왔으며 우리들의 몸에 관한 자유를 침해해 왔다. 이것이 일리히의 주장이다.

저자 일리히는 "의료기술의 진보와 질병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
14세기 전 유럽을 강타했던 페스트(흑사병)는 16, 17, 18세기에 걸쳐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예르생(Alexandre Yersin)이 페스트 균을 발견한 건 19세기, 그것도 한참 후반인 1894년이다. 중세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분석에 따르면 페스트가 잦아들게 된 것은 의사의 치료나 항생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유럽 전역에 걸쳐 일어났던 도시의 대화재들 때문이었다. 화재가 주택형식을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목재 주택에서 석조 주택으로 주거형식을 변형시켰고 이에 따라 실내와 사람들이 청결해지기 시작했으며, 작은 가축들이 사람들의 주거 공간과 멀리 떨어지게 됐다. 이것이 사람들과 페스트를 멀어지게 했다.
이 책에서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자료도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한다. 일리히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뉴욕에서의 결핵 사망자수는 1812년에 1만 명당 7백 명 이상의 비율이었다. 코흐가 처음으로 결핵균을 분리 배양했던 1882년에는 1만 명당 3백7십 명까지로 저하되었다. 나아가 최초로 결핵 용양소가 설치된 1910년에는 1만 명당 1백80명까지로 저하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항생물질의 사용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결핵에 의한 사망률은 1만 명당 48명이었다. 결핵은 그 병원(病原)이 이해되고 특수한 치료법이 발견되기 전에 그 독성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따라서 그 사회적 중요성도 대체로 잃고 말았다.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등도 이와 유사하게 의사나 병원의 통제와 무관하게 정점에 이르렀다가 차차 감소해왔다. 이런 질병을 잡아낸 것은 의사나 병원이 아니었다. 우선 주택의 개선과 미생물 유기체가 갖는 독성의 감퇴 등이 지적될 수도 있겠고, 역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영양의 개선으로 인간의 저항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항상 이런 문제는 뒤로하고 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 기계가 현대화 되면, 병원이 늘어나면 건강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오해에 젖어 있다. 사람들은 의료의 진보와 질병의 상관관계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의료비는 매년 치솟고 평균수명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 기계가 현대화되면, 병원이 늘어나면 건강 치료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철저한 오해다. 1970년을 기준으로 과거 20년 간 미국의 물가지수는 74% 상승되었으나, 의료 관리 경비는 330%나 급상승하였다. 1950년부터 1971년 사이 건강보험을 위한 공적 비용의 지출은 10배나 증가되었고, 사적 보험의 급여는 8배나 증가되었다. 그리고 직접 주머니에서 지불된 액수는 3배나 되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총 의료비도 미국에 병행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산업국가-대서양, 스칸디나비아, 동구-에 있어서 보건 부문의 성장률은 GNP 그 자체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건강에 대한 경비는 1969년부터 1974년 사이에 40%나 증가되었다. 이건 부유한 국가만의 특권이 아니다. 콜럼비아-부유한 자를 우대하는 곳으로 악명 높은 빈곤국이다-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10% 이상이 건강관리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료비용의 급상승이 평균 수명을 눈에 띄게 연장시키거나 결정적 질병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의사가 병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론적으로 의사는 첫 진단으로 그의 환자가 어떤 질병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안전 장치(fail-safe)의 원칙에 의해 환자에게 질병이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언제나 어떤 질병이 있다고 말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의학적 결정의 규칙이 의사를 압박하여 건강하다기 보다는 질병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으로 안전함을 추구하게 한다. 하지만 의사의 이런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 병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와 같은 왜곡의 고전적 실례로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1934년에 행해진 뉴욕 공립학교에서의 실험을 들 수 있다. 뉴욕 시의 공립학교 1천 명의 11세 아동에 대한 조사에서는 61%가 편도선을 제거하도록 요구되었다. 61%의 아동 외에 39%가 다시 다른 의사 그룹의 진단을 받았는데, 그 중 45%가 편도선 절제를 받아야 하고 나머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이 필요 없다고 했던 아동이 또 다른 의사 그룹에 의해 재진단을 받게 되자 남은 아동의 46%가 편도선 절제를 권고 받았다. 이 중에 또 다시 남은 학생을 대상으로 제 3회의 진단을 받았을 때, 거의 같은 비율의 아동이 편도선 절제를 필요로 한다고 보고가 나왔다. 그 결과 편도선 절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아동은 1천명 중 단지 65명에 불과했다. 기하급수적인 의료비 상승을 유발하는 고가의 장비에 의한 검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66년 미국에서 실시한 한 검사에 의하면 83개의 골반 수술을 권유받은 증세 중 인간과 기계 모두가 옳았던 것이 22개, 그리고 37개의 예는 컴퓨터가 옳았고 의사의 진단은 틀렸으며, 11개의 예에서는 의사가 컴퓨터가 틀렸음을 입증했고, 10개의 예에서는 의사도, 기계도 모두 틀렸다. 단순히 진단만이 문제는 아니다. 1968년을 기준으로 1968년, 영국의 경우 캐나다에서 보다 남자가 1.8배 여자가 1.6배의 외과 수술을 받았는데 대부분 편도선 절제술, 치질 절제술, 사타구니 탈장 수술과 같은 임의의 수술이 2배 이상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는 이용 가능한 침대 수, 지불 가능한 병원비, 외과의사의 수 등이었다. 현재 의료비 중 가장 급격한 상승을 보이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노인에 대한 치료비다. 그것도! 충분히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노인에 대한 치료비가 급상승하고 있다.

일리히는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건강한 세상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다.
"의료의 개입이 최저한으로 우연적으로 밖에 행해지지 않는 세계가, 건강이 가장 좋은 상태에서 너리 행해지는 세계이다. 건강한 사람들이란 출산, 성장, 노동, 치료, 죽음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적합한 환경 속에서 건강한 집에 살고 건강하게 식사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인구의 제한, 노화, 불완전한 회복, 그리고 항상 절박한 죽음의 의식적인 수용을 높이는 문화에 의해 유지된다. 건강한 사람들은 결혼, 출산, 인간조건의 공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료적 간섭을 최소한으로 요구한다.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유지되는 위약함, 개성, 관련성은 고통, 질병, 죽음의 경험을 삶의 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 이 셋과 자율적으로 싸우는 능력은 그의 건강에 기본적인 것이다.(p.296)"


저자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공생의 사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등 일련의 저작 속에서 일관되게 주장해 왔듯이 타율적 관리를 배제하고 자율적 통제가 지배하는 사회 패러다임을 꿈꾸고 있다. 의료부분의 있어서의 자율적 공생의 계획을 꿈꾸는 일리히는 보건 전문가에 의한 관리에 대해 제한을 목표로 삼는 정치적 계획 그리고 자신의 건강 관리를 위한 힘을 민중들이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계획은 산업적 생산양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근대 이후 국가의 안전은 무력(군사력)의 균형이라고 선전되었다. 사회복지 사업은 사회생활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못박아 놓았다. 경찰의 증가와 경찰의 보호는 안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호도되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생산활동인 것처럼 인식케 했다. 심지어 아동이 학교에 가는 것과 학습은 동일시되고 있다. 또 의사한테서 치료를 받기만 하면 건강치료를 받은 것처럼 누구나 오해하게 만든다. 건강, 학습, 존엄성, 독립, 창조적 노력 등의 가치가 이들 가치에 봉사하고 있는 제도의 수행보다 못한 것으로 ‘신화화’된 것이다. 때문에 이런 분야의 예산이 늘어나거나 인력이 확충되는 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오해되거나 반동으로 취급되기까지 한다.
일리히는 이런 오도된 가치관, 타율이 지배하는 사회에 메스를 들이댔다. 때로 그의 주장은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한 분석은 서구 학자들과 언론이 그에게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 한명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게 했다.
<학교 없는 사회>와 더불어 일리히의 최대 화제작으로 꼽히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일리히는 전문가의 의료 통제가 낳은 파괴적 경향에 대해 다룬다. 그는 진찰과 치료가 도리어 병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주목하고, 질병의 치료에 의해 생기는 역설적인 피해에 대해 고발한다. 그는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병원에서 비롯되는 질병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이지 전문가의 임무가 아니라고 단언한다.(우리는 이미 의사와 병원이라는 전문가에게 너무 많이 속아왔다)


저자가 이 책을 처음 발간한 1970년대 미국과 2012년 한국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크게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산업생산양식에 근거한 사회경제구조, 무한경쟁 시스템, 모든 가치의 상품화와 제도적/근원적 독점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21세기 한국이 20세기 미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새롭게 꿈꾸는 미래사회,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희망이 무엇일까? 단순히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은 답이 아니다. 전문가와 단일한 제도에 의존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얽어매는 족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와 선생에게 아이들의 학습을 의존하고 에너지와 교통시스템에 이동의 자유를 의존하고 의사와 전문가에게 우리의 건강을 의존하고 정치가와 관료에게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의존하고 기업가와 시스템에 우리의 생활을 의존하는 근본적인 독점구조에서는 다양한 가치와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실에 닥친 학교와 교육의 개선 문제, 에너지 문제, 정치와 경제, 사회복지 문제 등을 현재의 커다란 제도와 시스템 내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내어 시급한 현안을 해결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제도와 시스템에 가려 우리가 꿰뚫어보지 못하는 근원적, 근본적인 독점 문제가 숨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점은 경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 사회 각 분야의 독점과 그 독점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이야말로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우리가 풀어내야 할 숙제이지 않을까 싶다. 이 사회를 벗어나 무인도로 도망갈 계획이 아니라면...
 
[ 2012년 1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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