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 구술로 풀어 쓴 한국전쟁과 전후 사회
이임하 지음 / 책과함께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최근 한국전쟁에 대한 단상 두 가지...
한국전쟁에 참여한 백선엽이라는 사람을 이데올로기로 미화시키고 있는 관제 언론의 작태와 아직도 남아있는 거리의 사진전...
 
일제시대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탄압,살해하고 조선민족을 억압하는데 앞장선 일찍 ’청산’해야 할 백선엽이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군의 ’위대한’ 장교로 ’미화’되는 것을 보면 한국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되고 정의롭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친일부일 반역자에 대한 국민적 규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인간들이 이 땅에서 떵떵거리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얼마나 한국현대사를 비틀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지난 주 광화문 근처를 지나는 길에 동아일보사 앞에 00단체 이름으로 625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내용과 함께 각종 사진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보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두 세대 가까이 지났음에도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전쟁의 상흔과 이데올로기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한국전쟁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여러 종류의 영화와 방송 프로그램, 소설과 연구서적도 출판되었다. 하지만 기존에 상영되거나 출간된 콘텐츠들은 한국전쟁의 기원, 발발, 전개과정, 휴전 등 전쟁의 과정과 성격을 정치사적으로 다룬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쟁 종사자나 군경, 유엔 참전군인, 피난민, 피학살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그 연구 대상은 개인적 경험이 대부분이었거나 국가 또는 남성이었다. 그동안의 연구는 ‘그들만의 한국전쟁’만을 다룬 셈이며, 한국전쟁의 전체상을 그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정부기관이나 연구소, 주류학자나 방송영상 관계자들이 다룬 대상은 고위 장교나 간부급 경찰, 반공반북 단체 간부나 어용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연구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실제 전쟁터에서 참혹한 전투를 치른 사병, 하사관들, 경찰들이고 절차도 동의도 없이 국가폭력과 우익폭력에 끌려간 국민방위군, 학도병, 민간인,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한 피학살자, 행방불명자, 납북자들이다. 한국전쟁 후 60년 넘게 국가와 사회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만 할 뿐, 밑바닥에서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낸 그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도 않았고 위로하지도 보듬지도 배려하지도 않아왔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들의 아내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전쟁 전후의 한국사회는 아직도 여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제도와 관행, 문화가 엄존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았을 것이다.

*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 2009년 자료 인용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미망인’은 연구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탄생한 전쟁미망인은 ‘국가적 차원의 전쟁’이 ‘개인의 일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전쟁 후 국가가 어떻게 개인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미망인 연구는 기존 한국전쟁사의 비어 있는 반쪽을 채워줌으로써 한국전쟁의 전체상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전쟁미망인의 전쟁 경험이나 전후의 삶을 남긴 기록은 거의 없다. 정부와 언론의 자료, 전쟁 주체들의 회고록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 발발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기본적인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인터뷰를 통해 전쟁미망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 구술 내용을 토대로 그들의 삶을 복원하고 분석했다. 그 대상은 전쟁미망인(군경미망인·피학살자미망인·상이군인미망인)과 그 자녀 45명이다(인권 보호 차원에서 책에 실린 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이들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또는 자신의 어머니)이 전쟁과 전후(戰後)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있는 그대로 증언한다. 전쟁 당시 남편을 잃게 된 경위, 피난 과정, 전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 가장이 되어 사회로 진출한 정황, 국가의 전쟁미망인 서열화 정책 등이 그들의 입을 통해 서술된다. 저자가 사용한 ‘구술사’ 방법론은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시선을 중시하고 행위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최근 역사학 연구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전쟁미망인이라는 주제가 ‘구술사 방법론’과 결합됨으로써, 그동안 문헌 사료에 갇혀 있었던 한국현대사의 폭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게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 동아일보 및 서울신문 각 1950년 10월 7일, 11월 28일 

이 책은 오늘(28일) 공부모임의 교재다. 저자인 이임하씨가 직접 세미나에 참가하여 참석자들과 이야기하는 기회도 마련되어 있다. 저자가 구술자들과 나누었지만, 책 속에 담아내지 못한 많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약속 때문에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저자 이임하는 ‘한국현대사와 여성’이라는 주제에 10년 넘게 천착해온 역사학자이다.
박사논문 [1950년대 여성의 삶과 사회적 담론](2002)을 통해 1950년대 한국전쟁과 여성, 여성의 경제활동과 지위 변화, 성 담론 등 그동안 한국현대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문제를 제기했다. 저자는 2006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연구과제로 한성대학교 [전쟁과평화연구소]에서 ‘한국에서의 전쟁경험과 생활세계 연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서 ‘전쟁미망인’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쟁미망인(과 그 가족) 45명의 구술과 5년여에 걸친 각고의 연구 끝에 이 책을 완성했다.
저자는 전쟁미망인 연구를 통해,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 들려준다.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국가) 폭력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고통에서 살아왔는지,’ ‘그 고통을 말하지 못하고 왜 침묵해야 했는지,’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등등, 이들의 이야기는 국가의 공식 기억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 뒤에도 지속된 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를 들려줄 것이다.  
 
------------------- * 저자 이임하는 누구인가? ----------------------------
965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여성의 삶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한국전쟁 연구의 변두리에 머물렀던 ‘전쟁미망인’의 존재에 주목했고, 5년여의 연구와 전쟁미망인 45명의 구술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한국 여성사 편지]가 있으며 [동아시아와 근대, 여성의 발견][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1970년대 민중운동 연구][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등의 집필에 참여했다. 그 밖에 [한국전쟁 전후 동원행정의 반민중성] [1950년대 여성교육에서의 성차별과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해방 뒤 국가건설과 여성노동] [‘전쟁미망인’의 전쟁경험과 생계활동], [상이군인들의 한국전쟁 기억] [한국전쟁기 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인구조사와 통제] 등의 논문이 있다. ------------------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전쟁미망인’을 주제로 설정한 배경을 설명하고 구술사 방법으로 이 연구를 진행했음을 강조한다. 1950년대에 정부의 통계와 언론의 보도를 통해 50만명에 달하던 ’전쟁미망인’의 수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의 조작과 정책을 통해 1963년 27,000명으로 축소되었다. 마찬가지로 상이군인 수도 축소하였다.  "이는 여성이 입은 피해와 국가의 책임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 아래 이루어졌다. 이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의 힘을 분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역사적 주체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 보건사회부 1954/1957/1959년, 육군본부 1955년, 대한군경원호회 1960년 자료

’구술사 방법’은 그동안 정부와 학계가 방치하여 자료와 정보가 전무한 경우에 적절한 연구방법이 되며 소수자와 약자층에 대한 연구로 중요한 방법이다. "구술은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시선을 중시하기, 행위자 중심의 역사 구성, 남성 중심의 역사에 대항하기, 기억 저편에 있는 민중의 기억 읽기, 경험에 내재된 권력 읽기" 등을 제기한다고 구술자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1부. [전쟁과 집 밖 세상]에서 저자는 전쟁미망인의 전쟁 경험을 군경미망인, 피학살자미망인, 상이군인미망인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고(또는 보도연맹 등에 의해 남편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남편의 전사 소식(학살 소식)을 접하면서 ‘전쟁미망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글 속에서 국민방위군에 참여했던 미망인들은 모두 남편이 스스로 자원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군대, 경찰의 폭력과 강제로 끌려간 것임을 말한다. 이를 통해 상당수의 남자들이 타의로(국민방위군 자격으로) 전쟁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처음부터 국민방위군은 동원 대상자를 적으로부터 격리시킨다는,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동원 대상자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한 상태에서 조직되었다."면서 이승만의 연설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국민방위군은 당시 무리한 징집과 지휘부의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상당수가 행방불명 또는 굶어 죽거나 얼어죽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해체되었다. 

* 여기서 저자는 전쟁의 원인을 다루지 않았듯이 정부, 군대, 경찰, 우익폭력자들의 ’국민보도연맹’이나 민간인 학살의 원인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다. 추정컨대, 당시 정부관료와 군인, 경찰력의 80% 이상을 점유하던 일제 앞잡이들(우익폭력단의 경우 99%)은 북한에서 일제 앞잡이에 대해 철저하게 처단한 것을 알고서 법절차와 제도를 무시하고 사적으로 좌익성향, 가능성이 있는 사람, 개인적인 원한을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으로 보인다.

2부. [낯선 세상에서 생존하는 길]에서 구술자들은 남편들이 전쟁터에 나간 후, 혼자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전쟁미망인에게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말한다 . 그들은 농업 노동과 가사 노동을 병행해야 했고, 행상과 좌판은 물론이고 공장노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미망인은 남성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남성은 바깥일 하고 여성은 살림과 육아를 맡는’ 기존 시스템을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깨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구술에 참여한 전쟁미망인들은 대개 한국전쟁 당시 임신한 몸이였거나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도 많았다. 그들이 전쟁에서 겪어야 했던 이중, 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3부. [가부장과 ‘아직 죽지 아니한 아내’] 남편이 부재한 집에서 젊은 전쟁미망인은 시부모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시부모는 전쟁미망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감시했고, 전쟁미망인은 가족관계 안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전쟁미망인에게 남편의 집은 억압의 장소였다. 일상의 감시와 통제는 ‘며느리 만들기’의 하나이다. ‘며느리 만들기’는 가족단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전쟁 피해를 ‘전쟁미망인’에게 책임지우는 방책의 하나였다.

4부. [여성 가장과 새로운 공간의 창출] 전쟁미망인들은 어떻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고 전략들을 세웠는가? 군경미망인에게 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피학살자미망인에게 분가는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처지에서 여성 가장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공간과 전략을 만들었을까?
전쟁미망인들은 법과 제도, 문화에 의하여 가족과 남편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이나 관리권을 친척들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그나마 쥐꼬리만큼 나오는 정부의 원호자금 역시 상당기간 동안 시부모나 시댁 식구들에게 갈취당하였다.

5부. [봉쇄된 균열]
한국전쟁으로 기존의 가치는 모두 중심을 잃어버렸다.
한국전쟁 종전 직후부터 대부분의 정권,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권에게 현충일은 전쟁 피해자에게 살길을 마련해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 아니라 ’군사주의’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전쟁의 사후처리를 담당하는 국가보훈처와 그 담당 공무원들, 관변단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해야 했고 해결책은 희생양을 찾는 일이었으며, 그 희생양은 주로 여성이었다. "국가는 전쟁미망인의 목소리를 침묵으로 가두었고, 자신의 전쟁 책임을 일상에서 감추어버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에필로그 : 전쟁과 트라우마] 전쟁미망인들은 한결 같이 "전쟁은 없어야 돼"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쟁미망인 연구를 통해, 한국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 여성들의 성 차별은 21세기인 지금도 사회 곳곳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남아있다. 가족법과 상속법 등 제도적인 평등조치는 일부 이루어져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아내 만들기’와 ’며느리 만들기’는 많은 가족에서 잔존해 있다. 여성의 가치와 여성의 가사노동은 아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가사노동과 보육 역시 국가,사회적으로 올바르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와 사회가 더 바꾸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 스스로도 깨닫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고 여성 뿐 아니라 남성, 시민단체, 정치세력 역시 생활 하나하나에서부터 변해야 하고 노력해야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치른 생존자들은 대부분 지금 7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그들은 어떤 이유와 경험을 통해서든 한국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겪었고 그 피해가 몸과 마음에 남아 있다. 그들은 90% 이상이 피해자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60년 동안 생활과 의식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고 그들에게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그들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가족에게, 아들딸에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전달되었고 따라서 우리 역시 그 영향을 그동안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그들의 상처를 위로해야 하고 보듬어야 한다. 아무리 늦었더라도 그들에게 보상해 주어야 하고 한국전쟁 동안, 그리고 그 이후 국가와 사회가 그들을 보살피지 않은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남은 여생 동안이라도 한국이라는 국가,사회 공동체에 몸 담았던 인생을 보람있게 기억할 것이고 피해의식과 죄의식에서 벗어날 것이고 후손들에게 공동체의 중요함을 이야기할 것이고 자기 세대들끼리, 후배 세대들과 화해하고 어울릴 것이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적당한 때일 수 있다’라는 말을 이제라도 떠올리면서...
 
전쟁피해자 뿐 아니라 한국현대사는 어떤 측면에서 돌아보아도 왜곡과 부정의 연속이다.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지 않았고 독립투사들은 배제, 탄압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 사법, 행정,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친일 매국노들이 수 십년 간 한국의 모든 기득권과 원력을 행사하였다. 역사는 그들을 단죄하지 못했고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도 못했다. 봉건제도는 기형적으로 미군정과 식민지식 한국사회에 잔존했다. 한국 현대사는 ’부정과 부패’의 역사가 되었고 지금도 정치, 경제, 사회, 사법, 언론, 학계 등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기득권 세력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은 그러한 왜곡된 제도와 질서를 더욱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갔고 민중들은 한동안 이에 대항하지 못했다. 그들은 군사적인 폭력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유지하였고 국가의 권력과 부를 일부가 나누어 강탈해왔다.
다행히 1987년에 민중들이 주축이 되어 기득권에 항거했고 그 과정을 통해 최소한의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냈다.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를 이루어내기 시작하면서 경제 민주화도 조금씩 확대되어 갔다.
하지만, IMF는 경제 민주화의 진전을 가로막았고 민주개혁을 표방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국내외의 자본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침탈을 방어해내지 못해다. 그 결과 어렵게 확보한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지금 위협받고 있고 경제 민주화는 후퇴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지켜야 하고 정치경제적 민주화를 진전시켜야 한다. 그와 동시에 왜곡된 한국현대사 역시 하나씩 바로 잡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보복’과 ’처단’이 목표가 아니라 ’진실’과 ’정의’와 ’사과’와 ’화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지난 현대사를 바로 잡지 않으면 여기 저기 숨어있던 ’부정과 부패’가 지금보다 더 기승을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억하고 되새기고 노력하고 바로잡지 못할 경우, 역사는 후퇴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 책 속의 문장 :
- 한국전쟁 기념사는 대개 ‘북의 침략’은 자유를 위협하는 행위이므로 세계가 ‘침략자를 분쇄’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당면한 과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한국전쟁 기념사는 매년 이러한 형식을 취했는데 ‘국군 장병’과 ‘유엔군’을 추모하는 것 이외에 어디에도 전쟁을 겪은 ‘국가’로서의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원인뿐 아니라 전쟁의 과정과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 들려준다.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국가) 폭력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전쟁 뒤에도 폭력은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 ……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 이들의 이야기는 국가의 공식 기억인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구도와 다르게,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 뒤에도 끝나지 않았던 한국전쟁의 잊힌 역사를 들려줄 것이다. (p.19~20)

- “쏙 빠져나가면 될 텐데 …… 그 바보 같은 놈이 따라갔다” 곽희숙의 남편은 “군인 끌려 나갈 적에”도 “소 끌고 가서 일하고 온 사람을” 갑자기 영장이 나왔다며 “저녁에” 데리고 나갔다. 곽희숙은 다섯 살, 세 살, 백일 지난 아이들이 있었고 매일 벌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음에도 그런 개인(가족)의 생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 국가는 동원으로 인한 생활고로 가족이 해체될 위기에 있는데도 그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우리 친정아버지가 만날 …… ‘그 바보 같은 놈이지. 여― 여이― 문전(처갓집 앞)을 지내야 하는 놈이, 우리 처갓집에 잠깐 들어다보고 올 꼬마 이카고 쏙 빠져나가면 될 텐데 …… 그 바보 같은 놈이 따라갔다’고 ……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배운 것도 없고 골짜기에서 살아놔 노니 그리 그리 …···” 되었다고 이경순은 말한다. (p. 47~48)

- 임신 3개월이었던 구영선은 남편이 소집되어 나간 뒤 집이 통영이었기 때문에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갔다. 임신 초기라 먹지도 못하고 토해냈다. 굶주리면서 임신 내내 전쟁터를 돌아다녀야 했다. 자신을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의식이 없는 몸 상태로 지냈다. 만삭인 채 통영 시댁으로 갔을 때, 본인을 향해 겨눈 총도 ‘아― 튀어나오는 건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각이 둔해지고 의식이 없었다. 이 과정을 박수영은 “아이고― 배는 불러가지고 30리를 걸어가는데 요기만 조만치만 가도 오줌이 마렵고, 어휴― ‘여기서 차라리 내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죽으면 너[희]들도 편하고 나도 편하겠다’”라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숙자도 만삭이어서 출산일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피난을 갔는데도 피난 가지 않았다. (p.62~63)

- “음흉하기가 짝이 없다” 이들의 결혼은 대개 남편의 상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정상호는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친구 사이라 “서로들 약주를 좋아하다 보니께 ‘네 딸 나 다구?’ ‘사위 삼자’”면서 결혼에 이르렀다. 그이는 시집에 와서 아랫목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고 나서 ‘속아서’ 결혼했음을 알았다. 정끝남도 형제들 가운데 막내로 올케 친정어머니의 소개로 결혼했는데 남편의 상이를 모른 채 결혼하고 나서는 1년 동안은 무서워서 말도 못 건넸다고 한다. 이성원은 자신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때 정신대에 동원시키지 않기 위해 결혼했던 것처럼 피난 때문에 결혼을 서둘렀다고 했다. 서둘러서 간 곳은 ‘경상’이라고 듣던 것과는 달리 방에 누워 있는 신세였다. 이를 두고 이성원은 “음흉하기가 짝이 없다”고 표현했고, 시댁 쪽은 상이 등급이 결혼에 지장을 줄 거라고 염려해 상이 등급도 내려놓았다고 했다. (p.121)

- 먼저, 전쟁미망인은 노동을 통해 근대의 기획, 곧 공사 영역의 분리와 사적 영역에서의 현모양처라는 틀을 깨뜨렸다. 공사 영역의 분리는 근대의 기획 가운데 성별 그리고 노동시장을 조직하는 중심 논리이다. 남성은 노동시장에 나가 노동자이자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 부양을 책임지는 존재임에 반해 여성은 가정에 남아 어머니나 주부로서 남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존재로 여겼다. …… 그런데 이 논리는 전쟁미망인에게 적용될 수 없었다. …… 전쟁미망인들은 쟁기질만 못했을 뿐 모든 농업 노동을 혼자서 해왔다. …… 이처럼 농업 노동에서 차지하는 남녀의 역할은 한국전쟁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가속화시킨 장본인은 전쟁미망인이었다.(p.172)

- 상이군인의 몸은 결혼한 여성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생계 활동을 하면서 남편의 몸을 돌보아야 했다. 육체적 고통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정신적 타격은 오랫동안 남아 있게 마련이다. 전쟁미망인은 분가를 통해 시가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누워 있을지라도 ‘가부장’인 남편이 존재했고, 남편의 의심과 언어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언어폭력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멸시를 동반했고, 그 폭력에 노출되었던 당사자는 자존감을 상실했다. (p.208)

- 성장하면서 학살당한 아버지를 기다린 시간은, 성인이 된 뒤에는 짐이 되어 앞길을 막는 작용을 했다. “우선 내가 받은 건 그런 스트레스. 그래 크게 요약을 하면 첫 번째 내 연좌제 했던 이런 것에서 오는 경제적인 어려움, 두 번째 그 산소 없을 때 자식들에 대한 저기, 또 그 아버지 없이 자란 저기 평판. 이런 거를 그냥 말로는 쉽게 표현하는데 이것을 살아오면서 피부로 느낀 사람은 엄청난 그 저기가 오는 거여. 그래 제가 우리 자식들한테는 후회 없이 할려고 노력을 했어요.”(이성모) 그는 연좌제로 인해 사회생활에서 좌절을 겪었다. (p.269~270)

- 유럽 여러 나라들이 전쟁 피해자로 군경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은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원호법은 군경, 군속과 민간인을 구별했고 전쟁 피해자인 민간인은 이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연금을 비롯한 보상을 받는 대상자 면에서도 군경미망인뿐 아니라 군경과 군속의 인원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소수의 군경미망인만 전쟁미망인으로 인정하고 그 외 다수의 전쟁미망인은 전쟁 피해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전쟁 피해자를 수적으로 줄이는 방식은 전쟁미망인뿐 아니라 상이군인에도 적용되었다. (p.368)
 
[ 2011년 6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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