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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 여인들 - 관능으로 천하를 지배한
시앙쓰 지음, 신종욱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7월
평점 :
중국은 오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대체로 강력한 체제나 법률을 갖춘 고대국가의 등장은 주나라(BC 1046~BC 256) 때부터라 보면 타당할 것이다. 황제와 황후라는 명칭은 진(秦. BC221~206)이 춘추전국시대(BC770~BC221)를 통일하여 진왕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생겨났고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그 명칭이 굳어졌다. 구중궁궐의 여인들도 이 무렵부터 밀실정치를 꾸미고 황제의 환심을 사기위해 끝없는 투쟁이 이어졌다.
중국의 유명한 3대 악녀 혹은 여군주라 불리는 여태후(漢. ?~BC180), 측천무후(唐. 624~705), 서태후(靑.1835~1908)도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궁궐의 여인들은 황제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 황제의 심기를 살폈고 온갖 인맥이나 가문을 동원하여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였다. 권력의 정점에 등극하는 순간 부귀영화가 보장되고 황제의 권위에 준하는 권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여태후(이름은 여치)는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데, 젊었을 때의 유방은 별볼일 없는 하급 관리였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가 걸출한 인물임을 간파하고 딸 여치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여치는 남편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의 창시자가 되기까지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여자로서 가장 속을 썩인 것은 남편이 천하를 차지하고 나서 부터이다. 유방은 수많은 미녀들을 총애하여 아내를 돌보지 않았는데 말년에는 특히 척부인을 사랑하여 그녀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여태후는 척부인을 시기하면서도 고조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고조가 죽자 여태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척부인에게 보복을 자행했다. 먼저 척부인의 아들 여의(如意)를 독살하고 그것으로도 분이 덜 풀렸던지 척부인의 사지를 자르고, 눈알을 빼서 돼지우리에 가두고는 사람돼지(人彘)라 불렀는데 차마 사람으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여태후의 아들 혜제(유영)는 척부인의 모습을 보고 정신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고 한다.
여태후 못지않게 잔혹했던 측천무후는 14살 때 당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649년에 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고종의 황후 왕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 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다시 측천무후를 궁궐로 불러 들였는데 결국은 호랑이 새끼를 들여온 격이 되었다. 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에 딸을 낳았는데, 왕 황후가 딸을 보고 돌아간 뒤 이불을 덮어 자기 딸을 죽이고 왕 황후의 짓이라고 황제께 고하였다. 결국 누명을 씌워 왕 황후와 소 숙비를 죽이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나 고종(재위. 649-683)은 측천무후에게 빠져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또 황제가 되겠다는 큰 야망을 품고 두 아들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역사상 최초로 여황제(재위690~705)가 되었다.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서태후는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으로 들어와서 황제의 성은을 입어 아들을 낳았는데 후에 동치제로 옹립하였다. 그녀는 섭정을 계속하다 친정(親政)이 다가오자 동치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환락으로 돌려 홍등가에 들락거리도록 주선을 하였다. 결국 동치제는 병을 얻어 죽게 되고 황후도 그녀의 구박 속에 자살하였다. 그 후 조카인 광서제를 황제로 앉힌 다음 수렴청정을 계속하였다. 광서제가 캉유웨이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혁을 꾀하자 변법자강을 주도하던 개혁파를 검거하는 무술정변(1898)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천하를 주물렀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중국 황제들은 적게는 수백에서 수만 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합법적인 제도 아래 성애를 즐겼으며, 후궁들은 황제의 성은을 입기 위해 온갖 모략과 아양을 떨며 권력다툼에 몰두했다. 황제가 되기 전 성애의 파트너로 유모가 있는가 하면, 궁녀 중에서 경륜이 풍부한 여인들을 선정하여 훗날 황제가 된 뒤 첫날밤의 경험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권력을 쥔 여인들은 종종 황제의 총애로 황후가 되기도 하고, 악행을 일삼다가 다시 권력에서 밀려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권력은 그 부침이 더욱 심했다. 구중궁궐의 천하절색들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황제도 정치적,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들도 애완견 다루듯 싫증나면 미워하고 사약을 내려 죽이기도 했다. 구중궁궐 속의 여인들은 황제의 삶과 무관할 수 없었기에 무고나 누명으로 목숨을 잃기도 하고 총애를 받아 화려한 생을 보내는 여인도 있었다.
당나라 현종(재위712~756)은 초기 ‘개원의 치’라 불릴 정도로 정치를 잘 하였으나, 양귀비(719~756)를 후궁으로 들인 뒤 그녀의 치마폭에 빠져 국사를 게을리 하였다. 간신이 국정을 농단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려 결국 안사의 난(755~763)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나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대체로 황후와 수많은 후궁들은 평탄한 삶을 살아가기 어려웠고 평생 정쟁과 암투, 끝없는 기다림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 중국의 유교문화를 그대로 전수받은 조선왕조는 어땠을까?
황제와 왕이라는 격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구궁궁궐의 여인들의 삶은 중국의 후궁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1356~1396)도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워 대를 잇게 하려다 결국 제1차 왕자의 난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중중의 계비였던 문정왕후(1501~1565)도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정비의 소생인 인종을 핍박하여(혹은 독살) 죽게 만들었다. 성종의 계비였던 폐비윤씨(1445~1482) 사사사건으로 연산군은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왔고, 장녹수(?~1506)와 흥청망청 놀아나다 나라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1659~1701)은 인현왕후를 내치고 한 때 왕후에 올랐다가 악행이 드러나 서인으로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궁궐 속 여인들의 삶은 결국 자신이 황후가 되거나 왕후가 되지 않는 한 권력에서 쫓겨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었기에 그토록 권력투쟁에 혈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이든 조선이든 왕조체제하의 여인들은 황제나 왕의 권력에 의지하여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따르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래서 항간에 떠도는 말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천하의 역사는 황제와 남자들이 만들지만, 황제와 남자는 궁궐의 여인들이 지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