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강만원 옮김 / 창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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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붓다, 예수, 맹자, 그리고 수많은 고대 철학자를 인용하여 젊은 영혼들에게 현인들의 가르침을 일깨우지만, 결국 철학은 마음을 다스리고 내면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철학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인용해 보았다.

 

"철학은 삶의 부침浮沈과 돌발적인 상황들에 잘 대처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또한 고통스러운 순간에 절망하지 않게 도와주고,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해 준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기쁨, 슬픔과 더불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과 불행하다는 의식을 떨쳐내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지혜는 유연하고 주의 깊게 삶의 연속된 순간들과 동행할 수 있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 맺는 우호적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거나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지 않으면서 혼자 행복할 수는 없다. 지혜는 결국 행복의 여건이 선천적으로 충분하든 부족하든 그것에 상관없이 이전보다 잘 살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p. 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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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산책 - 77권의 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최종옥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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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문학, 철학, 성공학 등 다방면을 아우르는 77권의 책을 핵심만 요약하여 세상을 읽는 안목을 키워 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성공한 삶인지 균형 잡힌 시각에서 찬찬히 분석하고, 특히 경제 전문가답게 경제분야의 다양한 책을 소개하고 자본주의 시대 개인의 삶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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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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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편의 수상작품 중 예년에 보았던, 이름이 낯익은 작가의 글이 많았다. 글쓰기 역시 경력을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단편이라 가볍게 읽기 좋았고, 말미에 해설까지 곁들여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눈에 띄는 작품으로 최은미의 `근린`과 손보미의 `임시교사`를 뜻깊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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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PD의 논어오디세이 1084
오성수 지음 / 어진소리(민미디어)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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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안연 편 12-7>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양식을 넉넉히 하고, 군대를 풍족히 하면 백성들이 그것을 믿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자공이 말하길 “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한다면 이 셋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라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대를 버려야 한다.”라고 하셨다. 자공이 말하길 “어쩔 수 없이 이 둘 중에서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양식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에게는 죽음이 다 있게 마련이지만, (정치란)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원 문>

子貢이 問政한대 子曰 足食 足兵이면 民이 信之矣니라.

子貢이 曰必不得已而去인댄 於斯三者에 何先리잇고

曰 去兵이니라 子貢이 曰 必不得已而去면 於斯二者에 何先이리잇고 

曰 去食이니 自古로 皆有死어니와 民無信不立이니라.

 

<해 설>

이 장은 식(食)과 병(兵)과 신(信)을 비교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굳이 설명하려들지 않고, 불필요한 것을 하나씩 떨어뜨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족식족병(足食足兵)이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고 한다. 자고로 백성이란 먹을 것이 풍부하고, 그 어떤 침입이나 위험으로부터 잘 지켜주면 지도자를 믿게 마련이다.

 

그런데 자공이 묘한 질문을 던지고, 공자는 명쾌한 답을 한다. 어쩔 수 없이 그 가운데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이 먼저냐고 하자, 군대를 버려야 한다고 한다. 또 부득이해서 남은 둘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이 먼저냐고 자공이 묻자, 공자는 양식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하는 소리가 또 명쾌하다. 예로부터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죽음이 있게 마련이지만,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고 한다. 군대가 없으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가 없어서 죽게 마련이다. 양식이 없으면 사람은 굶어죽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은 어차피 나이가 들어 늙으면 죽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백성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위정자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려면 본인이 먼저 믿음을 주어야 한다. 정치인에게는 양식도 중요하고, 군대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작금의 난데없는 ‘메르스 파동’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초기에 적절히 대응을 잘 했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던 일을 이제 가래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커져 버렸다. 보건복지부, 국무위원, 국회의원, 심지어 대통령까지 초기 대응이 미흡하여 국민의 불신을 사고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혼연일체가 되어 국난을 극복해도 모자랄 판에 메르스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국민의 불신을 부추기고, 안이한 대응으로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 늦었지만 더 이상의 확산을 막고, 메르스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지 치밀하게 고민해 볼 때이고, 빈틈없는 대책을 세워야 할 때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도 이참에 확실히 메르스를 퇴치해서 국민의 건강을 물론 땅에 떨어진 국격이나 정치인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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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 여인들 - 관능으로 천하를 지배한
시앙쓰 지음, 신종욱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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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오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대체로 강력한 체제나 법률을 갖춘 고대국가의 등장은 주나라(BC 1046~BC 256) 때부터라 보면 타당할 것이다. 황제와 황후라는 명칭은 진(秦. BC221~206)이 춘추전국시대(BC770~BC221)를 통일하여 진왕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생겨났고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그 명칭이 굳어졌다. 구중궁궐의 여인들도 이 무렵부터 밀실정치를 꾸미고 황제의 환심을 사기위해 끝없는 투쟁이 이어졌다.

 

중국의 유명한 3대 악녀 혹은 여군주라 불리는 여태후(漢. ?~BC180), 측천무후(唐. 624~705), 서태후(靑.1835~1908)도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궁궐의 여인들은 황제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 황제의 심기를 살폈고 온갖 인맥이나 가문을 동원하여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였다. 권력의 정점에 등극하는 순간 부귀영화가 보장되고 황제의 권위에 준하는 권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여태후(이름은 여치)는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데, 젊었을 때의 유방은 별볼일 없는 하급 관리였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가 걸출한 인물임을 간파하고 딸 여치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여치는 남편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의 창시자가 되기까지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여자로서 가장 속을 썩인 것은 남편이 천하를 차지하고 나서 부터이다. 유방은 수많은 미녀들을 총애하여 아내를 돌보지 않았는데 말년에는 특히 척부인을 사랑하여 그녀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여태후는 척부인을 시기하면서도 고조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고조가 죽자 여태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척부인에게 보복을 자행했다. 먼저 척부인의 아들 여의(如意)를 독살하고 그것으로도 분이 덜 풀렸던지 척부인의 사지를 자르고, 눈알을 빼서 돼지우리에 가두고는 사람돼지(人彘)라 불렀는데 차마 사람으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여태후의 아들 혜제(유영)는 척부인의 모습을 보고 정신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고 한다.

 

여태후 못지않게 잔혹했던 측천무후는 14살 때 당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649년에 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고종의 황후 왕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 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다시 측천무후를 궁궐로 불러 들였는데 결국은 호랑이 새끼를 들여온 격이 되었다. 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에 딸을 낳았는데, 왕 황후가 딸을 보고 돌아간 뒤 이불을 덮어 자기 딸을 죽이고 왕 황후의 짓이라고 황제께 고하였다. 결국 누명을 씌워 왕 황후와 소 숙비를 죽이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나 고종(재위. 649-683)은 측천무후에게 빠져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또 황제가 되겠다는 큰 야망을 품고 두 아들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역사상 최초로 여황제(재위690~705)가 되었다.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서태후는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으로 들어와서 황제의 성은을 입어 아들을 낳았는데 후에 동치제로 옹립하였다. 그녀는 섭정을 계속하다 친정(親政)이 다가오자 동치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환락으로 돌려 홍등가에 들락거리도록 주선을 하였다. 결국 동치제는 병을 얻어 죽게 되고 황후도 그녀의 구박 속에 자살하였다. 그 후 조카인 광서제를 황제로 앉힌 다음 수렴청정을 계속하였다. 광서제가 캉유웨이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혁을 꾀하자 변법자강을 주도하던 개혁파를 검거하는 무술정변(1898)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천하를 주물렀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중국 황제들은 적게는 수백에서 수만 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합법적인 제도 아래 성애를 즐겼으며, 후궁들은 황제의 성은을 입기 위해 온갖 모략과 아양을 떨며 권력다툼에 몰두했다. 황제가 되기 전 성애의 파트너로 유모가 있는가 하면, 궁녀 중에서 경륜이 풍부한 여인들을 선정하여 훗날 황제가 된 뒤 첫날밤의 경험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권력을 쥔 여인들은 종종 황제의 총애로 황후가 되기도 하고, 악행을 일삼다가 다시 권력에서 밀려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권력은 그 부침이 더욱 심했다. 구중궁궐의 천하절색들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황제도 정치적,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들도 애완견 다루듯 싫증나면 미워하고 사약을 내려 죽이기도 했다. 구중궁궐 속의 여인들은 황제의 삶과 무관할 수 없었기에 무고나 누명으로 목숨을 잃기도 하고 총애를 받아 화려한 생을 보내는 여인도 있었다.

 

당나라 현종(재위712~756)은 초기 ‘개원의 치’라 불릴 정도로 정치를 잘 하였으나, 양귀비(719~756)를 후궁으로 들인 뒤 그녀의 치마폭에 빠져 국사를 게을리 하였다. 간신이 국정을 농단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려 결국 안사의 난(755~763)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나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대체로 황후와 수많은 후궁들은 평탄한 삶을 살아가기 어려웠고 평생 정쟁과 암투, 끝없는 기다림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 중국의 유교문화를 그대로 전수받은 조선왕조는 어땠을까?

황제와 왕이라는 격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구궁궁궐의 여인들의 삶은 중국의 후궁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1356~1396)도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워 대를 잇게 하려다 결국 제1차 왕자의 난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중중의 계비였던 문정왕후(1501~1565)도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정비의 소생인 인종을 핍박하여(혹은 독살) 죽게 만들었다. 성종의 계비였던 폐비윤씨(1445~1482) 사사사건으로 연산군은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왔고, 장녹수(?~1506)와 흥청망청 놀아나다 나라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1659~1701)은 인현왕후를 내치고 한 때 왕후에 올랐다가 악행이 드러나 서인으로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궁궐 속 여인들의 삶은 결국 자신이 황후가 되거나 왕후가 되지 않는 한 권력에서 쫓겨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었기에 그토록 권력투쟁에 혈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이든 조선이든 왕조체제하의 여인들은 황제나 왕의 권력에 의지하여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따르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래서 항간에 떠도는 말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천하의 역사는 황제와 남자들이 만들지만, 황제와 남자는 궁궐의 여인들이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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