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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하고 독한자들 전성시대 - 세상을 주무른 영리한 계략
쉬후이 지음, 이기흥.신종욱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중국을 뒤흔든 부호, 황후, 환관, 무사, 재상 등 모략가 13인의 이야기를 다룬 흥미로운 책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읽었던 역아, 오기, 조고 이야기는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부분 한두 번은 읽었겠지만 이 책에서 다룬 몇 명의 주인공을 소개한다.
역아는 춘추오패 중 첫 패권을 차지했던 제나라 환공(BC716~ BC643)의 궁중요리사였다.
제나라 환공의 남총(특별한 사랑을 받는 남색을 이름)이었던 수조(竪刁)의 추천을 받아 궁궐에 들어가 환공을 모셨다. 역아는 매일 다른 요리를 올리며 환공의 입맛을 사로잡고 그의 총애를 얻었지만 아무리 세상의 모든 음식을 다 안다고 해도 언제까지 다른 요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역아의 요리 맛에 질릴 무렵 환공은 “사람고기가 맛있다던데 나는 아직 먹어보지 못했군.“하며 농담처럼 던졌다. 역아는 집에 와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당장 아들을 잡아 삶아서 정성스레 환공의 식탁에 올렸다. 환공은 그 맛에 감탄하며 재료가 무엇이냐 물었는데, 자신의 아들이라 말했다. 역아의 이 말에 환공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역아를 더욱 충신으로 두었다.
명재상 관중(BC723~BC645)은 이미 간신 역아(易牙), 수조(竪刁), 개방(開方)의 사람됨을 알고, 임종을 앞두고 환공에게 그들을 멀리하라 유언을 남겼는데, 처음에는 내쳤으나 3년 후에 무료하여 다시 불러 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환공이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셋이 공모하여 환공을 유폐시키고 음식도 주지 않아 굶어 죽게 하였다. 환공은 죽기 직전에야 역아, 수조, 개방의 본모습을 알고 탄식하기를, ”그야말로 성인이로다.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도다. 지금 이 꼴을 중부(仲父: 관중)가 안다면 내 무슨 낯으로 중부를 뵈올 수 있을까!“ 하며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기(BC440~BC381)는 오자병법의 대가로 잘 알려진 전국시대 초기 위(衛)나라 사람으로 벼슬을 얻기 위해 노(魯), 위(魏), 초(楚)나라를 전전하며 살았다. 오기가 태어난 위나라는 국력이 약해 늘 불안했고 오기 집안도 살림이 넉넉지 못해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는데 장애가 많았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몇 년을 전전하다 실패하고 돌아오자 동네 사람들은 비웃으며 놀렸다. 오기는 자신을 비웃는 자 30여명을 죽이고 재상이 되기 전에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맹세했다. 노나라로 건너 온 오기는 증자의 문하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여 인정을 받았으나 어머니 부음 소식을 듣고 집에 가지 않았고 3년상도 치르지 않았다. 이에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증자 문하에서 쫓겨난 오기는 학업을 문文에서 무武로 바꾸며 병법을 익혔다.
때마침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오기를 대장으로 삼으려던 국왕을, 신하들은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라 배반을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오기는 즉시 아내를 죽이고 대장에 임명되어 제나라 군대를 쳐부수었다. 오기는 이후 승승장구하였으나 이를 시기한 신하들이 과거 오기의 잘못을 낱낱이 왕에게 보고하여 장군의 직함에서 파면되었다. 오기는 다시 노나라를 떠나 위(魏)나라 군주 문후에게 갔다. 오기의 실력을 간파한 문후는 장군에 임명하였고, 곧 오기는 진(秦)나라 다섯 개 성을 잇달아 빼앗았다.
오기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그는 전장에서 병사들을 끔찍이 사랑하였다. “어느 날 전장에서 한 병사가 심한 종기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재빨리 달려온 오기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냈다.<오기연저(吳起吮疽)고사>, 병사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이 의아해 물었다. 장군이 부하를 얼마나 사랑하면 일개 졸병일 뿐인 당신 아들 몸에 난 종기의 고름을 제 입으로 빨아냈겠소. 그런데 울기는 왜 웁니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허튼 소리 마시오. 감동은 무슨 감동이란 말이오! 제 아비도 종창이 생겨 오기 장군이 고름을 빨아냈는데, 남편도 깊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소. 내 아들의 목숨마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네가 원통해서 우는 것이오! 라고 말했다.
위나라 문후가 죽고 무후가 왕위에 오르면서 재상 자리에 전문田文을 앉히자 낙심했고, 전문이 죽자 공숙公叔을 다시 앉혔다. 오기가 공숙을 시기했고 공숙은 오기를 모함하여 무후와의 관계가 벌어졌다. 오기는 초나라 도왕悼王(재위 BC402~BC381)에게 몸을 의탁하여 재상자리를 얻었다. 오기는 개혁을 단행하여 초나라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켰으나 종실과 부호 등 기득권의 미움을 사서 도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도 치르기 전에 무장한 채 오기를 죽이려 하였다. 오기는 그냥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계략을 꾸며 도왕의 주검 위에 엎드려 화살을 맞았다. 수많은 화살에 오기도 죽었지만 도왕의 주검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장례 후에 왕에 오른 태자는 왕의 주검을 잔인하게 상해한 귀족들의 죄를 물어 모조리 주살하였다. 오기는 왕의 주검을 훼손한 죄가 얼마나 무거운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기 앞서 이렇게 많은 이들을 자신과 함께 할 죽음의 동반자로 끌여 들였던 것이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로 유명한 환관 조고는 간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다. 조고(?~BC207)는 조나라 왕족 출신으로 진나라에 붙잡힌 뒤 시황제를 모셨다. 그가 어떻게 진나라로 왔는지 알 길은 없고, 시황제가 그를 법률전문가로서 형법에 밝자 ‘중거부령’에 임명했다. 그 뒤 출행 때 조고에게 자기가 타는 수레를 관장하게 했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BC259~BC210)가 순행 중 사구(沙丘)에 이르러 병이 위중해졌다. 시황제는 북방의 변경을 맡고 있는 맏아들 부소에게 병권을 잠시 몽염에게 넘기고 빨리 함양으로 돌아와 자신의 장례식에 참여토록 조치하라고 조고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곧 시황제는 죽었다. 시황제의 붕어소식을 아는 사람은 호해, 승상 이사, 중거부령 조고 등 대여섯 명 남짓하였다. 황제의 죽음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부소에게 보낼 조서와 황제의 옥새도 조고 손안에 있었다. 부소와 평소 비위가 맞지 않았던 조고는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를 선택했다.
조고는 호해와 승상 이사를 꼬드겨 결국 2세 황제에 호해를 앉히고, 부소를 택한 시황제의 유언과 달리, 칙서를 위조하여 부소가 평소에 ‘분서갱유’사건에 반대했고, 불효를 저질렀다 하여 자결을 명령했다. 그리고 군사동원을 두려워하여 몽염의 직위를 박탈했다. 부소는 성품이 여리어 자초지종 내막을 알아보지 않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자결하였고 몽염은 투옥되었다. 조고는 황제 곁에서 시중들면서 대권을 장악하고 통제했다. 호해는 황제가 되어 여색과 가무에 빠졌다. 이렇듯 2세 황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조고가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중 기원전 209년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났다. 조고는 그 지역의 치안을 맡고 있던 이사의 아들 이유(李由)가 그들을 진압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이사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사는 위험을 인지하고 조고의 실상을 황제께 낱낱이 고하려 하였으나 알현시켜 주지 않았다. 간혹 주연이 한창 때 이사를 불러 들여 황제를 알현케 했는데 호해의 꾸지람과 노여움만 키웠을 뿐이었다. 결국 조고의 모함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이사 부자(父子)는 함양 시장 바닥에서 허리를 잘리는 형벌에 처해졌다.
기원전 207년 조고는 환관의 신분으로 승상에 임명되어 원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항우(項羽. BC232~BC202)의 대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조고는 또 한 차례 잔혹한 숙청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어느 날 그는 사슴을 한 마리 끌고 오더니 호해에게 말했다. “제가 폐하에게 말 한 마리 바치겠습니다.” 이 말에 호해는 웃으며 대답했다. “승상께서는 눈이 침침하오? 이건 분명 사슴이 아니오?” “이건 분명 말이옵니다. 여기 대신들에게 물어 보시옵소서” 하지만 신하들은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조고에게 알랑거리며 말이라 했고, 올곧은 몇몇 신하들은 사슴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고는 가차 없이 죄명을 날조하여 사슴이라고 말한 대신들을 처형했다. 이때부터 조정의 대신들은 아무도 감히 조고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호해는 나라에 도적이 들끓자 조고에게 도적들을 소탕하라고 재촉했다. 조고는 사위 염락과 동생 조성을 불러들여 호해를 폐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황제 자리에 앉혔다.
3세 황제가 된 자영은 조고의 간계를 간파하고 목욕재계하고 종묘에 배알하라는 조고의 의견을 묵살하고 아프다는 핑계를 됐다. 결국 자영의 집을 찾아온 조고는 두 아들과 작당한 자영에게 처참히 죽었고, 삼족도 함께 멸족되었다. 그 뒤 자영은 목에 흰 띠를 두르고 흰 말이 끄는 흰 수레를 타고 화씨벽으로 만든 천자의 옥새를 받쳐 들고 길가에 서서 유방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진(秦)은 천하를 통일 한 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였다.
서진(西晉)의 부호 ‘석숭(249~300)’의 이야기도 꽤 재미있었다. 석숭은 관직을 이용해 무역 등을 독점하고 큰 부자가 되었다. 심지어 자기 부하 병사들을 강도로 변장시켜 사람들의 재물을 강탈하도록 했다. 그 재물이 나날이 쌓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대부호의 반열에 올랐다. ‘팔왕의 난(291~306)’때 정권을 잡은 손수는 석숭의 첩 녹주를 탐했는데 석숭은 그녀를 달라는 손수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손수는 석숭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웠는데 이로 인해 본인은 물론이고 삼족이 멸하는 비운을 맞았다.
측천무후 집권시(690~705) 페르시아 출신 잔인한 고문기술자로 유명했던 삭원례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는 측천무후의 공포정치 때 주동자가 되어 역모나 조정을 비판하는 무리들을 취조하는 일을 맡았는데, 철롱이라는 고문 기구를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성격이 잔인하고 흉포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삭원례의 손에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 넘어 원성이 자자하였다. 결국 무측천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그를 속죄양으로 죽여 버렸다.
진나라 법가사상 창시자로 불리는 상앙은 강력한 법을 만들면서 범법자에게 요참형(허리를 자르는 형벌)을 내렸는데 결국 자신이 만든 법의 희생양이 되어 요참형으로 죽었다. 삭원례도 철롱(鐵籠)이라는 무시무시한 고문 기구를 만들어 죄인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했지만 자신이 철롱의 희생양이 되었다. 또 프랑스 대혁명(1789)시절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낸 공포정치의 주동자인 ‘로베스 피에르(1758~1794)’도 자신이 만든 단두대에 목숨을 잃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옛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월나라 구천과 오나라 부차의 고사에서 보듯이, 구천이 오나라 부차를 죽이고 멸망시키는데는 유명한 두 신하의 공이 있었다. 대부 문종과 범려였는데, 범려는 승전 후 자신이 시기를 받아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자리에 물러나 다른 나라로 가서 큰 재물을 모으며 천수를 누렸지만 대부 문종은 끝까지 시대상을 읽지 못하고 자리에 연연하다가 범려의 예상대로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고, 특히 고위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끝까지 탐욕에 눈이 멀어 자리에 연연하다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까지 잃게 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고 나서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止可以不殆).'는 노자의 유명한 경구가 마음에 남는다.